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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하는 여자들

한국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장영은 | 오월의봄 | 2022년 01월 28일 리뷰 총점8.0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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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1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318쪽 | 428g | 135*210*30mm
ISBN13 9791168730045
ISBN10 116873004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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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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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 소개 (1명)

문학 연구자. 여성들이 글을 쓰며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분석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자서전, 회고록, 일기, 편지, 기행문, 연설문, 소설, 대담 등 다양한 양식의 자기 서사에 주목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었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여성, 정치를 하다』, 『변신하는 여자들』을 썼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다. 성균관대학... 문학 연구자. 여성들이 글을 쓰며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분석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자서전, 회고록, 일기, 편지, 기행문, 연설문, 소설, 대담 등 다양한 양식의 자기 서사에 주목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었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여성, 정치를 하다』, 『변신하는 여자들』을 썼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여성 문학과 비교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일, 공부, 글쓰기로 세상을 바꿔 나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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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 p.270

출판사 리뷰

여성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여성은 언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되는가?
여성이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면 어떤일이 벌어지는가?

한국 근대 여성 지식인,
직접 삶을 쓰다


자신의 삶을 걸고 글을 쓴 여성들의 이야기에 주목해온 문학연구자 장영은이 한국 근대 여성 지식인의 삶과 글쓰기를 탐구하는 신작으로 돌아왔다. ‘여성들의 글쓰기’라는 화두를 이어가되, 이번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글쓰기’에 초점을 맞춘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한국의 여성 지식인들은 식민지 조선의 위태로운 현실과 맞닥뜨리며 자기 자신과 세계에 관해 적어내려갔다. 이들의 글은 ‘여성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궁리하게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여성 지식인에게 글쓰기 혹은 문학이란 사상을 매개하고 실천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하나의 사상이었다.

김일엽, 최정희, 모윤숙, 김활란, 임영신, 박인덕, 이화림, 허정숙. 이 책에 등장하는 여덟 명의 여성 지식인은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글을 쓰고, 공부하고, 사상을 벼리고, 누군가를 가르쳤으며, 때로는 권력을 획득했다. 이들은 그 치열한 공부와 여성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분투의 과정들에 대해, 즉 ‘자기 자신’에 대해 직접 썼다. 이들이 직접 쓴 이야기는 여성이 ‘언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되는지, 여성이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선명히 보여준다.

물론 이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읽어낼지는 전적으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덮어놓고 추종하거나 비난하는 방식 대신, 세간에 잘 알려진 사실과 이력을 넘어 그들이 무엇이 되기를 원했으며, 왜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해 왜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읽다보면, 읽는 사람의 삶도 분명 달라질 것이다.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하기: ‘진실한 자서전’은 가능한가

『변신하는 여자들』은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한다. 여성은 어떤 순간에 자신의 삶을 글로 쓰게 되는가?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다. 여성은 어떤 순간에 자신의 삶에 대해 침묵하게 되는가? 때로 침묵은 더욱더 강력한 발화가 되기도 한다. 자기서사의 화자는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숨기기도 한다. 자신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숨기고자 하는 이 복잡한 욕망이야말로 이 책이 주목하는 자기서사의 매우 독특한 지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덟 명의 여성들은 자기서사의 화자로서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진실을 탐구해나갔다.

무엇보다, 수필집 『젊은 날의 증언』을 비롯해 팔순이 넘는 나이까지 왕성히 글을 쓴 소설가 최정희는 자신을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는 이중의 진실이 자기서사의 본질임을 예리하게 파악한 작가였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으로도 불리는 1934년 신건설사 사건은 그녀의 삶을 뒤흔들었다. 최정희는 9개월간 수감 생활을 하며 그간 지니고 있던 종교적(기독교) 신념을 모두 버리고, 스스로를 구원할 길은 오직 문학밖에 없다는 목소리를 새롭게 내면화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부터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를 소설들을 쓰기 시작한다.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그녀는 「내 소설의 주인공들: 어머니일지도 모르고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라는 글로써 밝혔다.

“나 자신의 이야기인 것같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나는 굳이 변명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쓴 모든 소설의 주인공이 ‘나’일 수도 있고 ‘나’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최정희는 ‘굳이 변명하지 않는’ 여성들의 삶을 재현하고자 했다. 같은 맥락에서 사랑과 연애에 관한 소설을 쓰면서도 그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호한 여성 주인공의 사랑을 다룬 소설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재기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진실한 자서전’이 여성에게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던 듯하다. 사회주의자(김유영)의 아내라는 이유로, 사회주의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로 수감되어야 했던 최정희에게 “진실한 자서전”은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정희는 정작 자신의 문학과 생애가 지닌 역사적 가능성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글쓰기가 “사는 보람”이고, 삶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소설 쓰기”라고 고백했음에도, 그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글을 쓸 수 있는 자격: 언제, 어떻게

작가와 출판인으로 활동하다 승려의 길을 택했던 김일엽의 삶은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이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주어질 수 있는지/없는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김일엽은 머나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글쓰기와 사상, 여성운동에 대한 자신의 뜨거운 진심을 고백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자신에게 주어지기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렸고, 출가한 지 30여 년이 지난 후에야 회고록을 발표하며 사회에 복귀하게 된다.

김일엽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 지식인에게 글쓰기와 문학이 사상을 매개하고 실천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하나의 사상이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글을 쓰고 발표한다는 것은 곧 공적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발화하는 행위이다. 당시에는 여성으로서 이러한 권한을 부여받는 것 자체가 극히 어렵고 드문 일이었던 데다가, 그런 기회를 얻는다 할지라도 수많은 공격과 위협을 감내해야 했다. 김일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사생활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사회적 입지가 점점 좁아져만 가는 상황에서 그녀는 출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불교는 곧 계속해서 글을 쓰기 위해 마련한 가장 안전한 처소였다.

그래서였을까, 김일엽은 출가 이후에도 탈속의 글쓰기를 추구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결혼과 이혼으로 스캔들에 시달리고 이동하며 살아가야 했던 김일엽에게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역설적이게도 불교에 귀의해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고 난 이후였다. 스스로의 불심을 입증하기 위해 장장 18년간 글을 발표하는 일을 중단한 그녀였지만, 자신이 스님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어느 정도 입증받았다고 판단한 순간 주저 없이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해 생애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남편과의 이혼으로 추문의 대상이 된 박인덕 역시 뭇사람들의 비난과 질시로 오랫동안 사회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미국과 유럽을 넘나드는 종교 연설가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도 그런 사정과 맞닿아 있다. 박인덕은 파탄으로 치달은 결혼생활과 이혼으로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큰 고통을 겪었지만, 어머니의 격려에 마음을 다잡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 기간 동안 그녀의 영어 실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강연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귀국 이후 조선 사회에서 또다시 배척당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 유럽을 넘나들며 7000여 회에 이르는 대중 순회강연을 펼친 박인덕은 그 체험을 바탕으로 책을 써서 발표했다. 더 나아가 자서전 『구월 원숭이』 집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자신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친일/우익 인사로서 박인덕이 보인 면모에는 여러 한계가 있지만, 그녀의 삶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 지식인’이라는 주변적 지위의 역할을 고민해보게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현실이 그녀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당위적 질문이 아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당면 과제를 찾아 나서도록 했던 것일까? 그러나 실용교육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비롯해 자신의 현실 인식과 역사관에 대한 침묵은 그녀의 자서전에 큰 공백으로 남아 있다.

침묵의 수사학: 여성의 여성혐오

자기 자신에 대한 서술이 언제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자기서사는 자기 자신을 ‘부정’ 또는 ‘미화’하거나 모종의 진실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쓰이곤 한다. 『변신하는 여자들』은 자기서사를 통해 자신의 과거는 물론 현재의 좌표에 대해 면밀하고도 치열한 자세로 성찰을 이어간 여성들만큼이나, 자신이 한 선택들을 무비판적으로 미화하거나 변명했던 여성들에게도 주목한다. 문학, 교육, 정치 등의 분야에서 그녀들이 일궈낸 개인적인 성취는 다른 수많은 여성들의 삶에 가닿지 못했다. 이 여성들의 자기서사를 따라가며 그 이유를 탐구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언뜻 지나친 권력욕과 과오, 실언으로 얼룩져 있는 듯한 그녀들의 자기서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야기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광수를 비롯해 당대의 저명한 작가들과 교류하며 영향력 있는 문인으로 성장한 모윤숙, ‘한국 최초의 여성 박사’라는 타이틀을 획득하며 이화여전 수장 자리에 오른 김활란, 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위해 조선은 물론 미국 전역을 누비며 모금 활동을 펼쳤던 임영신이 직접 쓴 삶의 이야기는 그것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복잡한 심경을 불러일으킨다.

한때 이들은 여성으로서 문인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묵묵히 분투했으며(모윤숙), 온갖 난관을 뚫고 유학길에 오른 뒤 귀국해 농촌 계몽과 여성 교육에 온 힘을 쏟았고(김활란), 아버지의 멸시 속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고 성장하여 학교 설립에 투지를 다진(임영신) 독보적인 이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과는 더 많은 여성들의 운신의 폭을 넓히고, 다양한 권리와 삶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한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하고,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폭력을 기민하게 감지했던 이들은 종국에 이승만, 박정희 등 남성/독재권력에 영합해 살아남는 방편을 택했다. 이들이 구성해낸 자기서사는 이러한 욕망의 회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각종 스캔들에 대해 상세히 ‘해명’하는 방식, 사회적 성취와 공적 영역의 활동을 강조하며 자신을 ‘공직’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영웅담’의 방식, 자신이 인정받고자 했던 남성 권력자들의 인정과 평가에 기대 스스로를 상찬하는 방식 등 다양한 수사법을 동원해 자신의 생애와 업적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들의 글이 자서전의 기준/요건을 얼마나 잘 충족하고 있는지 여부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여성인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고,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시인하고야 말았다. 끊임없는 변명과 상찬의 말로 자신의 궤적을 정당화하고자 했지만, 정작 이들의 삶은 우리 앞에 전혀 다른 모종의 진실을 제시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녀들의 자기서사가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진정한 한계일 것이다.

살아남아 이야기한다는 것: 여성 사회주의자의 생애

한편 여성 사회주의자들의 자기서사에 다다르는 길에는 또 다른 차원의 난관이 존재한다. 이 책이 주목하는 두 명의 사회주의자 이화림과 허정숙은 무장 투쟁과 지하조직에 긴밀히 관여하는 등 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스스로의 사회주의자 정체성을 사유하는 방식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로서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벌인 이화림의 생애는 지금껏 온전히 조명되지 않았다. 여느 남성 독립운동가/사회주의들과 달리 그녀의 삶과 이력이 제대로 발견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이는 독립운동계 내부에 존재했던 지독한 여성혐오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화림은 단호한 결기와 뛰어난 임무 수행력으로 한인애국단과 조선의용대에 합류했으나,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았고 끝내 동지들의 인정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화림 스스로가 회고록에서 구성해낸 자기서사는 절망이나 패배의식과 거리가 멀다. 이화림은 남성 운동가들의 멸시와 조롱에 아랑곳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었고, 한곳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공부’를 찾아 이동을 거듭했다. 구순이 넘은 나이에 써내려간 이 자기서사에서 우리는 ‘공부’와 ‘노동’을 평생 자신의 ‘생명’으로 여기며 중국 전역을 누볐던 한 사회주의자의 비범함과 용기를 보게 된다.

그러나 모든 여성 사회주의자가 자기서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화림과 마찬가지로 항일 투사이자 강성한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허정숙은 자신이 쓴 글에서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든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초대 내각에 합류하게 된 허정숙은 김일성 우상숭배를 비판했던 연안파 숙청 사업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그중에는 그녀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전 남편이었던 최창익이 포함되어 있었고, 허정숙은 최창익을 공개 비판했다. 몇 개월 후 최창익은 처형되었다. 허정숙은 연안파 숙청에 가담함으로써 김일성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날 이후 사회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이력을 자기 스스로의 언어로 배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삶에 관해 한평생 침묵으로 일관했던 허정숙의 자기서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망 직전 그녀가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편지에는 숙청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아 체득하게 된 정치적 감각이 우회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녀의 편지는 김일성의 지시 아래 사흘에 걸쳐 『로동신문』에 공개되었다. 허정숙은 자신의 생애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하거나 입장을 설명하는 대신, (식민지 조선에서의) 과거를 삭제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고는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자기 자손들의 안위를 부탁했다. 허정숙이 죽음을 앞두고 쓴 이 편지는 그녀 자신이 살아온 삶과 추구해온 논리가 언제부터 배치되기 시작했는지 보여준다.

자기서사의 기회를 언제나 다음으로 유보했던 허정숙의 이 마지막 순간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 사회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침묵과 자기서사의 간극을 생생히 보여준다. 여성 사회주의자는 왜 자기서사를 구성할 수 없었는가? 혹은 왜 자기서사를 의도적으로 포기해야만 했는가? 아마도 그녀들이 평생 사활을 걸고 고뇌했을 그 질문을, 우리는 허정숙의 삶에서 발견한다. 또한 그 지점에서 허정숙과 이화림의 생애는 공통의 물음을 남기는지도 모른다. 살아남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 사회주의자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보호해줄 누군가(권력자)에게 기대지 않고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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