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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불레즈 DG, 필립스, 데카 녹음 전집 (Pierre Boulez - The Conductor: Complete Recordings on Deutsche Grammophon and Decca)

[ 84CD + 4 블루레이 / 박스 세트 / 한정반 ]
Bela Bartok, Alban Berg, Hector Berlioz, Harrison Birtwistle, Claude Debussy 작곡 외 4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Deutsche Grammophon | 2022년 01월 14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 판매지수 24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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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불레즈 DG, 필립스, 데카 녹음 전집 (Pierre Boulez - The Conductor: Complete Recordings on Deutsche Grammophon and Decca)

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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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2022년 0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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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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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소개 (54명)

작곡 : Bela Bartok (벨라 바르톡,Bartok Bela Viktor Janos / Bela Viktor Janos Bartok)
헝가리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중앙유럽의 민요를 수집해서 정리한 음악학자이다. 바르톡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大)헝가리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너지센트미클로시(Nagyszentmiklos)는 현재 루마니아의 슨니콜라우 마레(Sannicolau Mare)이다. 본명은 바르톡 벨라 빅토르 야노시(헝가리어: Bartok Bela Viktor Janos)이다. 그는 부다페스트 왕립음악학원에... 헝가리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중앙유럽의 민요를 수집해서 정리한 음악학자이다.

바르톡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大)헝가리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너지센트미클로시(Nagyszentmiklos)는 현재 루마니아의 슨니콜라우 마레(Sannicolau Mare)이다. 본명은 바르톡 벨라 빅토르 야노시(헝가리어: Bartok Bela Viktor Janos)이다.

그는 부다페스트 왕립음악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코다이 졸탄을 만나 같이 민요를 수집했다. 이는 그의 음악스타일에 크게 작용했다. 예전의 그는 헝가리 민요에 대해서 프란츠 리스트의 곡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집시 멜로디로 생각했었고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영웅 코슈트 러요시(Kossuth Lajos)를 기리기 위한 대편성 관현악곡 《코슈트》에서도 그런 선율을 사용했었다. 집시 멜로디가 아닌 마자르인 농부들의 민요를 접하고 나서 그는 이를 진짜 헝가리 민요라고 생각하고 민요적인 색채가 드러나도록 그의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902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다페스트 초연을 들었을 때 이는 바르톡의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가 1907년 왕립음악학원에서 피아노 교수직을 맡으면서 정착하게 되었고 트란실바니아 일대의 민요를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의 음악은 민요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코다이가 클로드 드뷔시를 파리에서 데려오면서 그와도 교류했다. 그는 당대의 요하네스 브람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대편성의 관현악곡들을 써왔지만 그의 피아노 소품은 민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마도 민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최초의 작품은 현악 사중주 제1번(1908)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09년 마르터 치글러(Marta Ziegler)와 결혼하여 1910년에 벨라 바르톡 주니어를 낳았다. 1911년에 바르톡은 그의 유일한 오페라 《푸른 수염의 성》을 그의 아내 마르터(Marta)에게 헌정하였다. 이를 Hungarian Fine Arts Commission 주최의 콩쿠르에 출품했지만 연주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는 이 오페라를 공연하려 했지만 헝가리 정부는 오페라의 작사자 벌라주 벨러(Balazs Bela)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프로그램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라는 압력을 주었다. 바르톡은 거부했고 결국 오페라는 1918년까지 공연될 수 없었다. 이후 그는 헝가리 정부와 기관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콩쿠르의 일이 있고 나서 2~3년 정도만 곡을 쓰고 그 후엔 중앙 유럽과 발칸 반도, 터키 일대의 민요를 수집하여 정리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민요 수집이 힘들게 되자 그는 다시 작곡을 시작했다. 발레곡 《허수아비 왕자》(1914~6)는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바르톡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영향을 받은 또다른 발레곡 《중국의 이상한 관리》와 두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썼다.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의 작품 중 화성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가장 복잡한 작품이다. 《중국의 이상한 관리》는 노골적인 주제 때문에 1926년까지 공연되지 않았다.

1923년 바르톡은 마르터(Marta)와 이혼하고 그에게 피아노를 배운 파스토리 디터(Pasztory Ditta)와 재혼하여 다음해인 1924년에 두 번째 아들 페테르(Peter)를 낳았다. 1924년은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12음기법을 완성한 해이기도 하다. 바르톡은 이후 곡을 쓰지 않다가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한 여섯 권 분량의 피아노 연습곡 《미크로코스모스》(1926~37)를 썼다. 이는 현재에도 피아노 교재로 쓰이고 있다. 이후에 쓴 현악 사중주 제6번(1939)는 그가 유럽에서 쓴 마지막 곡이 된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의 정치 상황이 악화되고 그는 헝가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나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가 독일에서 유명해졌을 때에도 독일에서의 콘서트를 거부했고 독일 출판사와도 계약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자유분방한 세계관은 헝가리의 우익 세력의 반감을 샀다. 그는 부인과 함께 마지못해 미국으로 떠났다. 페테르는 1942년 미국으로 가서 후에 미 해군에 입대한다. 벨러 주니어는 헝가리에 남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의 생활은 편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서 유명하지 않았고 그의 음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계속 유고슬라비아 민요를 정리했지만 그의 재정 상황과 건강은 나빠졌다.

그는 현악 사중주 제6번(1939)을 끝으로 작곡을 그만 두려 했지만,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위탁으로 《Concerto for Orchestra》(1943~5)를 작곡했다. 예후디 메누힌의 위탁을 받아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작곡했고 비올라 협주곡에 착수했다.

1945년 바르톡은 뉴욕 시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미완성의 비올라 협주곡은 그의 제자 Tibor Serly가 완성했다. 바르톡의 유해는 뉴욕 주 Hartsdale에 있는 Ferncliff Cemetery에 안장되었다. 후에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고 나서 1988년 7월 7일에 부다페스트의 Farkasreti Cemetery로 안장되었다.
작곡 : Alban Berg (알반 베르크)
아놀드 쇤베르크와 안톤 베베른과 함께 제2빈악파의 구성원으로, 말러적인 낭만주의와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적용하였다. 아놀드 쇤베르크와 안톤 베베른과 함께 제2빈악파의 구성원으로, 말러적인 낭만주의와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적용하였다.
작곡 : Hector Berlioz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 남프랑스 라코트생탕드레에서 의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을 의사로 키우기 위해 파리로 보냈지만, 그곳에서 글루크, 스폰티니 등의 오페라에 매료되어 결국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다. 1826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1830년 네 번째 도전 끝에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La Derniere nuit de Sardanap...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 남프랑스 라코트생탕드레에서 의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을 의사로 키우기 위해 파리로 보냈지만, 그곳에서 글루크, 스폰티니 등의 오페라에 매료되어 결국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다. 1826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1830년 네 번째 도전 끝에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La Derniere nuit de Sardanapale〉으로 ‘로마 대상’을 수상, 로마 유학의 기회를 얻지만 3년의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온다. 일찍이 베토벤을 알아보고 파리 음악원 시절 작곡가의 후기 현악 사중주를 연구한 것 외에도 당시 베토벤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던 프랑스 비평계에 반발, 직접 평론 활동에 뛰어들어 여러 매체에 이 작곡가에 대한 호평과 찬사의 기사들을 기고한다.

1830년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다가 배역을 맡은 여인에 대한 짝사랑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작인 〈환상 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을 작곡한다. 1834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이어가 〈이탈리아의 해럴드Harold en Italie〉(1834), 〈레퀴엠Requiem〉(1837),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1838) 등을 썼으나 마지막 작품이 참패하면서 한동안 침체기를 겪는다. 이후 외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 1842-1843년에는 독일 각지에서 연주를 하면서 〈로마의 사육제 서곡Le Carnaval romain: Ouverture〉을 작곡하였다. 1845-1846년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에서의 성공적인 연주 여행에 자신감을 회복, 1846년에 일시 귀국하여 오페라 〈파우스트의 겁벌La Damnation de Faust〉을 발표하지만 비평계의 극찬에도 불구, 흥행에는 실패한다. 1854년 3부작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L’Enfance du Christ〉이 비로소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고, 만년에는 2부작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Les Troyens〉 작곡에 열중하였으나, 살아생전 온전히 무대에 올리지는 못한다. 1867-1868년 많은 사랑을 받았던 러시아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연주 여행에 종지부를 찍는다. 대표 저서로 《근대 악기법과 관현악법Grand traite d’instrumentation et d’orchestration modernes》(1844), 《회상록Memoires》(1870)이 있으며, 《노래를 가로질러A travers chants》(1862)를 비롯해 매체에 발표한 글들을 묶어 만든 여러 권의 평론집이 있다.
작곡 : Harrison Birtwistle (해리슨 버트위슬)
작곡 : Claude Debussy (클로드 드뷔시)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바다, 피아노 전주곡, 영상 1, 2집, 어린이 차지,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 <베르가마스크> 중 달빛 등이 있다. 클로드 드뷔시는 1862년 일드프랑스 이블린 주 생제르맹앙레에서 다섯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자기 가게 주인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그는 7세 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체...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바다, 피아노 전주곡, 영상 1, 2집, 어린이 차지,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 <베르가마스크> 중 달빛 등이 있다.

클로드 드뷔시는 1862년 일드프랑스 이블린 주 생제르맹앙레에서 다섯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자기 가게 주인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그는 7세 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체루티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아이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드뷔시의 레슨비는 그의 아주머니(aunt)가 지불했었다. 1871년에 수줍고 겁많은 소년 드뷔시는 마리 모테 드 플레비유(Marie Maute de Fleurville) 부인에게 주목받았다.

자신의 재능을 확실하게 보여준 덕분에, 1872년 11살의 나이로 드뷔시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고, 1872년부터 1884년까지 세자르 프랑크, 에르네스트 기로(프랑스어: Ernest Guiraud)과 함께 공부하였다. 재학 중에 러시아 음악과 무소르그스키의 작품을 접한 것이 이후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1883년, 칸타타 《전투사(Le Gladiateur)》로 로마 대상(Prix de Rome) 2등상을, 이듬해인 1884년, 역시 칸타타 형식의 《탕자(L' Enfant Prodigue)》로 1등상을 수상하였다.[2] 수상 이후 1887년, 말라르메의 살롱에 출입하였다. 이때 상징파 시인 및 인상파 화가와의 접촉에 의해 차츰 인상주의 음악에의 의식이 깊어졌다. 말라르메의 시에 의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으로 그의 인상파풍의 작품 경향은 확정되었다.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서는 반 바그너적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

1899년 10월 19일 로잘리 텍시에(Rosalie Texier)와 결혼했지만 1904년 엠마 바르닥(Emma Bardec)과 사랑에 빠져 아내를 버리고 엠마 바르닥과 결혼하였다. 이후 드뷔시와 엠마 바르닥 사이에서 딸 클로드-엠마(Claude-Emma)가 태어나게 된다. 드뷔시는 1908년 딸인 클로드-엠마에게 피아노 소품인 어린이 차지를 헌정한다.

제1차 세계대전 말인 1918년 3월 25일 오후 10시, 독일군의 폭격이 한창인 시기에 드뷔시는 파리에서 10년 동안 고통 받아왔던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3월 28일에 거행되었고 페르 라셰즈 묘지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지금의 파리 묘지로 이장되었다.
작곡 : Gyorgy Ligeti (죄르지 리게티,Gyorgy Ligeti)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고전음악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며,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아이즈 와이드 셧》에 삽입된 음악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리게티 죄르지는 루마니아 왕국 시절의 트란실바니아에 태어나 그곳에서 음악을 배웠다. 1943년, 나치에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음악 공부를 금지당했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수감되었고 그...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고전음악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며,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아이즈 와이드 셧》에 삽입된 음악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리게티 죄르지는 루마니아 왕국 시절의 트란실바니아에 태어나 그곳에서 음악을 배웠다. 1943년, 나치에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음악 공부를 금지당했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수감되었고 그의 어머니만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부다페스트에서 음악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코다이 졸탄을 사사했다. 1949년에 졸업하고 나서 교수가 되었다. 그는 루마니아 민족음악에 관심이 있었지만, 공산주의 정권은 서유럽과의 교류를 막았기 때문에 연구가 어려웠다. 1956년, 공산당에 대한 헝가리 시민들의 항거 이후 리게티는 비엔나로 탈출하여 1967년에 오스트리아 국적을 얻었다. 그곳에서 그는 동유럽에서 접하지 못했던 아방가르드 음악을 접했다.

그때부터 리게티는 작곡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 중 많이 알려진 것은 시대적으로 《Apparitions》(1958~9)부터 《Lontano》(1967) 사이의 것이지만 그 시대 이후의 오페라인 《Le grand macabre》(1978)도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리게티는 함부르크에서 1973년부터 1989년까지 음악을 가르쳤다. 1980년대에는 건강이 나빠졌지만, 2006년 빈에서 사망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브누아 망델브로의 프랙털 기하학, 그리고 루이스 캐럴과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글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리게티의 아들 리게티 루카스는 작곡가이자 타악기 연주자이다.

리게티의 초기 작품은 같은 나라 사람인 벨러 버르토크의 작품을 확장시킨 것이었다. 피아노를 위한 작품인 《Musica Ricercata》(1951~53)와 같은 경우 종종 버르토크의 미크로코스모스와 비교된다. 이 작품은 11개의 곡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곡은 가 음만을 옥타브를 왔다갔다하며 연주하고 맨 마지막을 라 음으로 끝낸다. 두 번째 곡에는 첫 번째 곡에 음 하나가 더해지고, 세 번째 곡에는 다른 음 하나가 더해지고, 이런 식으로 음을 덧붙여 마지막 열한번째 곡에는 반음계에 나타나는 12음이 모두 들어가게 된다. 공산주의 정권은 이 작품의 10번째 곡을 ‘퇴폐적’이라 하여 연주를 금지시켰다. 이는 이 곡에서 나타나는 단 2도 음정의 자유로운 사용 때문으로 보인다.

헝가리를 떠나 쾰른에 살면서 리게티는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과 함께 전자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Glissandi》(1957)와 《Artikulation》(1958)을 포함한 세 곡만을 쓰고 연주 음악으로 돌아섰다. 그의 음악에서 전자 음악의 느낌이 나타나는 것은 그당시 전자 음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Apparitions》(1958~59)은 리게티를 주목받게 만든 첫 번째 곡이었다. 그 다음 작품인 《Atmospheres》(1961)는 《Lux Aeterna》와 《Requiem》과 함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삽입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작곡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인용한 것이다.

《Atmospheres》는 큰 관현악단을 위한 곡인데, 선율, 박자, 화성 어느 것도 부각되어 있지 않지만 sound mass라는 기법을 써서 음색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 곡은 음악사상 가장 큰 음괴로 시작하는데, 반음계로 5옥타브가 넘는 음역에 해당하는 음을 동시에 연주한다. 그리고 화음과 음악의 질감이 천천히 바뀐다. 그는 《Atmospheres》, 《Apparitions》를 포함한 그의 몇몇 작품에 쓰인 기법을 설명하기 위해 마이크로폴리포니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이는 화성이 급작스럽게 변하지 않고 서로 융합하면서 진행하는 다성 음악 기법이라고 리게티는 설명한다.

1970년대 이후 리게티는 선율과 박자를 가진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아프리카 음악, 특히 피그미족 음악의 박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습곡》(제1권 1985, 제2권 1988~94, 제3권 1995~2001)와 같은 작품은 인도네시아의 가멜란 음악과 아프리카의 polyrhythm, 버르토크, Conlon Nancarrow, Bill Evans 등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호른과 관현악을 위한 《Hamburg Concerto》(1998-99, 2003 개작)와 song cycle인 《Sippal, dobbal, nadihegeduvel》(파이프, 드럼, 피들과 함께, 2000)이다.

그는 70년대 이후 후진들을 양성하는 데 집중했다. 많은 유명한 작곡가가 그로부터 작곡을 배웠는데, 진은숙도 그 중 하나이다.
작곡 : Franz Liszt (프란츠 리스트)
프란츠 리스트(독일어: Franz Liszt, 1811년 10월 22일 ~ 1886년 7월 31일)은 헝가리 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헝가리식 이름은 리스트 페렌츠(헝가리어: Liszt Ferenc)이다. 교향시(symphonic poem)을 창시했고, 단악장 sonata를 최초로 작곡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었고, 파리에 가서는 훌륭한 연주가로 인정받아 "피아노의 왕"이라 불리었으며... 프란츠 리스트(독일어: Franz Liszt, 1811년 10월 22일 ~ 1886년 7월 31일)은 헝가리 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헝가리식 이름은 리스트 페렌츠(헝가리어: Liszt Ferenc)이다. 교향시(symphonic poem)을 창시했고, 단악장 sonata를 최초로 작곡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었고, 파리에 가서는 훌륭한 연주가로 인정받아 "피아노의 왕"이라 불리었으며, 이 별칭은 오늘날까지도 리스트를 의미하는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뛰어난 기교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시간은 채 10년이 안된다. 낭만시대 음악에 큰 공헌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에서는 <메피스토 왈츠(mephisto waltz)>,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y)>, <사랑의 꿈 3번 (love dream no. 3)>, <라캄파넬라 (la campanella)>, 등이 있다. 리스트만의 특별한 기교들과 표현들이 이 곡들에 들어있다. 헝가리 광시곡 2번을 예를 들어 옥타브를 치면서 다른 음을 연타하는 기교가 있다. 음악 전공생들이 거쳐야 하는 고난도 레파토리이다.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안나 리스트와 아담 리스트의 아들로 헝가리의 라이딩 근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과 기타를 연주했다. 그리고 궁정음악가여서 여러 유명한 musician들을 알고 있었다. 후에 Liszt가 훌륭한 피아니스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침 받을 수 있던 이유였다. 어머니도 여러 악기를 다룰 수 있었다고 한다.

리스트는 여섯살 때 아버지에게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금방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리스트는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열두살이 되던 1822년 12월 데뷔했다. 카를 체르니는 리스트의 첫 정식 piano 교사이자 마지막 스승이었다. 리스트는 프레데리크 쇼팽과도 친해졌지만 이는 곧 라이벌 관계로 발전했다.

1823년 파리로 옮겨간 리스트는 1824년부터 파에르와 레이하 밑에서 푸가와 대위법을 공부했다. 그러나 아버지 아담 리스트가 세상을 떠나 리스트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잠시 성직자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비쳤다. 1832년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 파가니니의 공연에 다녀온 후 리스트는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마음먹고 매일 10시간이 넘도록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가 아프셔서 피아노 교사로 일하며 동시에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음악계의 넓은 발을 가지게 되었다.

리스트는 베를리오즈, 로베르트 슈만, 장차 그의 사위가 되는 리하르트 바그너 등의 당대의 음악가들과 화가 앵그르, 시인 하이네,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등과 친분을 다졌다. 그는 연주 활동을 하면서 특히 작곡에 힘을 쏟아 많은 피아노곡을 발표하였다. <12개의 연습곡> 을 더 어렵게 편곡한 것도 15세의 일이다.

1832년 4월 20일, 니콜로 파가니니에 의해 개최된 파리 콜레라 유행 희생자들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관람한 뒤, 리스트는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에서 거장이었던 것처럼 피아노에서 거장이 되기로 결심했다.

1847년 리스트는 키예프에서 카펠마이스터로 일하였다. 이 시기 리스트는 자인-비트겐슈타인 (Sayn-Wittgenstein) 공작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져 다구 백작부인과 헤어졌다. 피아노 공연보다는 작곡에 주력할 것을 권한 사람도 공작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려 했으나, 교황청과 비오 9세는 리스트와 공작부인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이유는 전 남편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압력 때문이었다. 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아직 살아 있었으며 정작 3년전 재혼했고 아버지가 러시아 황제의 부관이었던 유력 가문의 사람이었으며 니콜라이 1세는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회에서 리스트의 연주 도중 수다를 떨다 리스트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대한 앙금이 있었다. 리스트는 1861년 로마로 옮겨갔다. 1865년 리스트는 예전의 희망대로 로마 가톨릭 성직자가 되어 교회음악 작곡에 헌신했다.

1869년부터 리스트는 로마, 바이마르, 부다페스트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같은 해 리스트의 딸 코지마가 바그너와 결혼하면서 개신교로 개종하자 리스트는 몇 년 동안이나 코지마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

1876년부터 죽기 전까지 리스트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음악을 가르쳐 바인가르트너, 실로티, 자우어 등의 명인을 배출하였다.

1886년 7월 31일 리스트는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최후 연주 여행을 가던 도중에 감기에 걸렸는데 이것이 폐렴이 되어 둘째 딸 코지마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는 별명이 많다. 최고의 기교를 가진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의 왕", "피아노의 신"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파가니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해서 "피아노의 파가니니"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교향시의 창시자"라고 불리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피아노의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자주 불리기도 한다. 이 별명들 중 가장 넓게 사용되는 별명은 "피아노의 왕"으로, 리스트가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후 16세 쯤 파리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 후 연주를 들은 사람들이 리스트에게 찬사를 보내며 붙여줬다고 한다.

그는 19세기의 대표적인 피아노 연주가로, 그의 기교는 피아노에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가미해서 생기가 넘치도록 한 데에 있다. 작곡가로서 신낭만파에 속하고 교향시를 창시하여 음악에 문학적 요소를 도입하고 자유스러운 화성을 사용하여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작곡의 수는 매우 많고, 그 평가는 오늘에 있어서 각각 다르나, symphonic poem의 형식의 완성, 또 근대적 색채의 관현악법의 일면을 개척한 것은 동일하게 인정받고 있다.
작곡 : Gustav Mahler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 (독일어: 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는 보헤미아 태생의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19세기 오스트리아-독일 전통과 20세기 초의 현대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립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나치 시대 동안 유럽에서 공연 금지를 포함한 무관심의 기간 후에야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1945년 이후 새로... 구스타프 말러 (독일어: 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는 보헤미아 태생의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19세기 오스트리아-독일 전통과 20세기 초의 현대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립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나치 시대 동안 유럽에서 공연 금지를 포함한 무관심의 기간 후에야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1945년 이후 새로운 음악 세대는 그의 음악을 재발견했다. 그 후 말러는 20세기의 작곡가들 중 가장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다. 2016년 BBC 뮤직 매거진 151명의 지휘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그의 교향곡 중 3곡은 역대 최고의 교향곡 10위 안에 올랐다.

보헤미아(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일부)에서 독일어를 구사하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말러는 어린 나이에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1878년 빈 음악원을 졸업한 뒤 유럽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직을 연이어 맡아 1897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감독으로 발탁됐다. 빈에서 10년 동안, 감독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말러는 반유대 언론의 적대와 비판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혁신적인 작품들과 공연 수준의 기준에 대한 고집은 특히 바그너,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의 지휘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다. 후반기에는 잠시 동안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감독을 맡았다.

말러의 삶의 대부분은 지휘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제한적이다. 그가 빈에서 학생이었을 때 작곡한 피아노 사중주곡과 같은 초기 작품들을 제외하고, 말러의 작품은 대부분 대형 관현악단, 교향악 합창단, 그리고 오페라의 솔로 연주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작품들은 초연 되었을 때 논란이 많았다. 예외로 그의 두 번째 교향곡 〈부활〉, 3번째 교향곡, 1910년 그의 8 번째 교향곡은 성공적이였다. 말러의 음악 후계자들 중에는 제2 비엔나 학교의 작곡가들, 특히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이 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벤저민 브리튼 또한 말러에게 영향을 받은 20세기 후반의 작곡가들이다. 국제 구스타프 말러 협회는 작곡가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5년 설립되었다.

말러는 그의 생애 동안에는 위대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알려졌으나, 그는 사후에 후기 낭만파의 중요한 작곡가로 평가되었으며, 특히 교향곡과 가곡 (특히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죽은 아이를 위한 노래〉), 교향곡과 가곡의 두 성격을 띠는 《대지의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작곡하였고, 교향곡을 길이와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야 모두에 있어서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올려놓았다. 또한 말러는 베토벤의 영향을 받아 교향곡에 성악을 주입하는 시도를 하였다. (그의 《교향곡 3번》은 일반적인 교향곡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긴 약 100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한다. 그의 《교향곡 8번》은 천 명이 넘는 연주자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교향곡 중에 가장 거대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갖고 있다.) 그는 그의 교향곡 일부에 니체와 괴테의 철학, 중세 종교 상징주의와 영성을 표현하는 가사를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이제 세계 주요 관현악단의 기본 레파토리의 일부가 되었다.

출생에 관하여 말러는 “나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대인으로서. 어디에서도 이방인이고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말러는 지휘자로서 높은 지위를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곡가로서는 빈의 비평가의 평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말러 교향곡 작품이 빈에서 호평을 받게 된 것은 만년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말러 자작 연주에 대해서 빈의 저널리즘 등에서 "자작의 선전에 열중하고만 있다"와 중상하는 것도 있었다.) 그의 교향곡은 11곡 중 7곡(1번을 현재 판에서 생각하면 8곡)이 오스트리아인에게는 이미 외국이 되고 있던 독일에서 초연되고 있다. 말러에게 "아웃사이더(부외자)"로서 의식은 평생 사라지지 못했고, 가장 만년에는 뉴욕에서 독일인 기자가 "무슨 사람" 물어 그 언론인의 기대되는 답인 "독일인"와는 전혀 다르게"나는 보헤미안입니다(Ich bin einBohme.)"이라고 답했다. 흑맥주를 좋아했으나 본인은 그렇게 술에 강하지 않았다.

성격은 불같이 화를 잘냈고 완벽주의에 괴팍했다. 무자비할 정도의 완벽주의자로서 말러는 음악에 있어서 그 누구와도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양보도 하지 않았다. 타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일쑤였고 일방적인 대화에 자주 몽상에 빠지기도 했다. 게다가 조울증, 정신강박증도 있어서 어떨 때는 기분이 업다운되기까지도 했다. 지휘자로서 양보와 타협을 모르는 완고함, 무자비한 완벽주의, 자기중심적, 고압적, 신경질적인 성격이 따랐고 지휘대의 독재자라고 불렀다.

말러는 자신과 같은 계의 음악가이자 제자인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발터는 말러에 심취하고, 음악적인 면만 아니라 친구처럼 말러를 적극적으로 보좌했다. 클렘페러는 말러의 추천에 의해 지휘자로 시작할 수 있었고 그 일에 대해서 훗날까지 말러에 감사했다. 그 외, 빌럼 멩엘베르흐와 오스카 프리트와 같은 당시의 일류 지휘자도 말러와 교류하며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멩엘베르흐는 말러로부터 "내 작품을 마음놓고 맡길 만큼 신용할 수 있는 인간은 따로 없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멩엘베르흐는 말러의 사후, 남겨진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920년 5월 6일부터 21일까지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다.

한편 말러는 완고한 성격과 완벽주의로 인해 주위의 반발을 산 적도 많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말러의 고압적인 태도(리허설에서 참다못한 때에 바닥을 발로 구르고 음정이 나쁜 단원들과 아인 자츠가 갖추어지지 않을 때 지휘봉으로 지적하는 것 등)를 싫어했다. 당시의 반유대주의의 융성과 함께 말러에 대한 태도는 점점 굳어졌고, 어느 날, 바이올린 연주자 중 한 명이 "말러가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한스 리히터도 심하지만요."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이 "그렇구나. 하지만 리히터도 한통속이다"고 말했다. 당시 빈의 음악 저널리즘에서도 반유대주의에 입각한 부당한 공격을 받았으며, 이들은 말러가 유럽에서 활동을 그만 두게 된 큰 요인이 되었다.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러의 말은 1902년 2월 알마 앞 서한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것을 언급한 때에 등장하고 있다.

“그(슈트라우스)의 시대는 끝나고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것까지 내가 그대 곁에서 살아 있었으면 좋지만! 하지만 너는 나의 빛이여! 너는 분명 살아 그날을 찾는다!”

말러는 당시 악단의 정점에 오른 최고의 지휘자였다. 음악성 이상으로 철저한 완벽주의, 완급 자재인 속도 변화, 극심한 몸짓과 소절선에 얽매이지 않은 초서적인 지휘법은 체험화할 만큼 강한 충격을 당시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캐리어쳐인 "초현대적인 지휘자"(Ein hypermoderner Dirigent)에는 1901년 빈 초기 시절 심한 운동을 동반한 말러 지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또한 그 지휘 솜씨는 점차 평온한 것이어서, 만년에 의사는 심장 질환을 선고 받고는 "거의 불길에서 조용한 그림 같았다"(발터의 증언)과 다른 것이었다.

말러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벌써부터 나오고 있으며 1890년 12월 부다페스트에서 상연된 돈 조반니를 들은 브람스는 "진짜 돈 조반니를 듣기 위해서는 부다페스트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말러는 연주되는 곡에 대해서 악보를 수정, 편곡하는 경우가 많았고 후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말러가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을 떠난 후 수정이 들어간 이들 악보를 보고 "말러 놈, 수치를 알라!(Shame on a man like Mahler!)"과 분개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무엇보다, 슈만의 교향곡 2번, 교향곡 3번의 연주에서는 토스카니니는 말러에 의한 오케스트레이션의 변경을 많이 채용하고 있다.

지휘에 대해서 말러의 말이 몇가지 남아 있다.

"모든 음의 길이가 정확히 나오면 그 템포가 바르다."
"음이 전후 서로 겹치고 프레이즈가 이해할 수 없게 된다면 그 템포가 너무 빠르다"
"식별할 수 있는 극한의 곳이 프레스토의 올바른 템포이다.그것을 넘으면 더 이상 무의미하다"
"청중이 아다지오에 따라오지 못할 때는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미루었다"
말러는 지휘자로서 많은 개혁을 실행하고, 그것은 현대에도 계승되고 있다.
작곡 : Olivier Messiaen (올리비에 메시앙)
프랑스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음악원 선배인 클로드 드뷔시와 함께 20세기 초 인상주의 사조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관현악곡인 <볼레로>로 유명하며, 무소륵스키가 작곡한 피아노곡인 <전람회의 그림>의 관현악 편곡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다채로운 음색과 악기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Ciboure에서 바스크계의 어머니와 스위스인인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 열... 프랑스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음악원 선배인 클로드 드뷔시와 함께 20세기 초 인상주의 사조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관현악곡인 <볼레로>로 유명하며, 무소륵스키가 작곡한 피아노곡인 <전람회의 그림>의 관현악 편곡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다채로운 음색과 악기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그는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Ciboure에서 바스크계의 어머니와 스위스인인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 열 네살이 되자 그의 아버지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 주기를 원하여 라벨을 파리 음악원으로 보냈다. 피아노와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재학 중 발표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현악 4중주곡 바장조>에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거기에서 그는 ‘아파치’라는 작곡가 학생들의 모임에 가입했는데, 이는 술을 마시고 여성들에게 집적대는 모임으로 유명했다.

파리 음악원에서 라벨은 가브리엘 포레에게 음악을 배웠다. 음악원에 있는 동안 로마대상을 받으려고 했지만 받지 못하였는데 그가 충분한 재능이 있었음에도 대상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음악원을 떠났다. 라벨은 클로드 드뷔시에게 영향을 주었고, 재즈와 아시아의 음악, 그리고 유럽 전역의 민요와 스페인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라벨은 종교를 가지지 않았으며 무신론자로 보인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처럼 공공연히 종교적인 색채를 부여한 음악을 싫어했으며, 대신 고대 야화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는 편이었다.

1932년에 심한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1937년에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수술을 받았지만 실패하여 사망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의 복잡하고 정교한 음악에 빗대어 그를 “스위스 시계 장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라벨은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하나이지만, 그의 음악은 환상적인 묘사만을 강조하는 드뷔시와는 달리 프랑스 고전주의의 틀을 지키며 근대적인 감각을 발전시킨 것으로, 정교하고 치밀하다는 평을 듣는다. 라벨은 자신의 피아노곡을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하는 것을 즐겨했으며, 의뢰를 받아 다른 작곡가의 곡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있다.
작곡 : Arnold Schoenberg (아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작곡가, 음악이론가이자 음악교육가이다. 쇤베르크의 가계는 빈에 기반을 둔 유대인 집안이다. 1933년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정권을 획득하자 미국으로 도피하였으며, 1941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쇤베르크는 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작곡가 중의 하나였으며, 조성음악의 해체에 기여한 중심인물 중 하나이다. 장조와 단조에 기반한 조성의 해체는 시기적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귀화한 작곡가, 음악이론가이자 음악교육가이다. 쇤베르크의 가계는 빈에 기반을 둔 유대인 집안이다. 1933년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정권을 획득하자 미국으로 도피하였으며, 1941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쇤베르크는 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작곡가 중의 하나였으며, 조성음악의 해체에 기여한 중심인물 중 하나이다. 장조와 단조에 기반한 조성의 해체는 시기적으로 1906년과 1909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쇤베르크는 12음기법을 확립한 장본인 중의 한 명이며, 12음기법은 음렬주의 음악으로 발전하여 현대음악에서 많은 작곡가들의 음악에 계승되었다.

쇤베르크는 빈에서 헝가리 출신의 구두공인 사무엘 쇤베르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작곡가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9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 폴카와 행진곡을 썼으며, 1889년 부친의 사후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하여 학교를 자퇴하고 은행의 직원연수과정에 참여한다.

쇤베르크의 기억에 의하면 그가 작곡가 또는 예술가로서 음악적 기초를 확립해준 인물이 세 명이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음악이론, 시작, 그리고 철학의 기본을 전수해준 오스카 아들러였으며, 둘째는 윤리, 도덕, 그리고 "관행 그리고 보편적 토속성에 대한 저항"을 일깨워준 다빗 요제프 바흐였으며, 셋째는 1895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인 폴리휨니아에 첼리스트로 입단하면서 알게 된 지휘자 알렉산더 젬린스키이다. 이 지휘자는 쇤베르크의 재능을 간파하고 그의 초기작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작곡수업도 몇 개월간 해주었다. 쇤베르크는 그러나 작곡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은 브람스, 바그너, 말러, 바흐, 그리고 모차르트와 같은 대가를 통한 연구를 통하여 획득하였다고 주장한다.

쇤베르크는 20대에 오페레타의 관현악 편곡으로 돈을 벌면서 현악 6중주 《정화된 밤》(1899년)과 같은 작품을 썼다. 후에 그 작품을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현재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쇤베르크의 작품 《구레의 노래》를 접했을 때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구스타프 말러는 쇤베르크를 문하생으로 두고 자신이 죽은 뒤에 그의 뒤를 봐 줄 사람이 없음을 걱정했다. 쇤베르크는 말러의 영향을 받았으며, 말러를 “성자”로 여겼다.

하지만 쇤베르크의 작품은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7년에 《실내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되었을 때 청중은 적었으며 반응도 열광적이지 않았다. 1913년에 그 곡이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알렉산더 젬린스키의 곡과 함께 다시 연주되었을 때 청중은 소리지르며 비난했다. 후에 쇤베르크의 가곡이 공연되는 동안에는 난동이 시작되어서 경찰이 출동했다고 한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그 동안 서양음악의 토대를 이루던 조성을 해체하는 것이었으므로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의 문하생들과 추종자들은 그를 음악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았지만, 평론가들은 그가 발표한 작품들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았다.

후에 쇤베르크는 12음 기법을 만들었다. 이는 후에 음렬주의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의 제자들이 그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2차 빈 음악파를 결성했다. 그들 중에는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와 한스 아이슬러가 있다. 그는 음악이론가도 명성을 쌓았는데, 그의 대표적 저서로 《화성 이론》(Harmonielehre)이나 《음악 작곡의 기초》(Fundamentals of Music Composition)가 있다. 이 저서들은 오늘날에도 출판되어 음악이론과 작곡의 교육에 있어서의 비중있는 참고자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쇤베르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1914년)까지가 '평범한' 시대였다면 우리 시대의 음악은 아주 달라야 한다."

그 해에는 추상 미술과 정신 분석 요법이 등장하였다. 그당시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생각의 흐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로 들어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01년(Gurrelieder-구레의 노래. 1911년 완성)부터 1910년(Five Pieces for Orchestra)까지 쇤베르크의 음악은 누구보다도 더 급격히 바뀌었다.

그가 현악 사중주 작품번호 7과 실내 교향곡 작품번호 9를 완성했을 때 그는 그의 작풍을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사중주 작품번호 10과 세 개의 피아노 소품 작품번호 11을 작곡했을 때, 화성에 첨가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실제로 연주되었을 때 협화음과 불협화음 사이에 별 차이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쇤베르크 자신이 음악을 반복하거나 발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당시의 음악은 함축적이고 생략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큰 고비가 되었다. 군에 복무하면서 곡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고, 그 시기에는 그의 미완성 작품만 남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음악의 질감을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12음 기법을 만들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그의 친구 Josef Rufer와 산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독일 음악의 우위를 100년 동안 지속시킬 발견을 했다네."

이 말은 오해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전을 빗대어 표현한 쇤베르크만의 조소적인 유머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모차르트와 바흐처럼 되고 싶어하는 야망을 담고 있기도 하다.

쇤베르크는 많은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기법이 과거의 음악을 답습하지 않는 음악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정점은 《모세와 아론》인데, 그는 삼분의 이 가량을 썼지만 완성하지 않았다. 결국 오페라는 모세가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소리치는 부분인데, 쇤베르크가 그 자신을 어떤 예언자로 생각하여 더이상 작품을 쓸 수 없지 않았겠냐는 설도 있다.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쓴 작품에서 그는 (전통화성은 쓰지 않았지만) 전통적인 화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의 그는 자신의 음악이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현재까지도 쇤베르크의 기법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음악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반면 어떤 사람은 이 음악에 깊게 공감하기도 한다.

쇤베르크는 화가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프란츠 마르크와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과 같이 전시되어도 좋을 정도였다고 한다. 연극과 시, 그리고 정치 문제와 유대인들에 대한 책도 썼다.

1933년 쇤베르크는 나치에 의해 유럽에서 추방되어 1941년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1951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 했다.

쇤베르크는 13 공포증이 있었다. 그의 후기작품인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제목을 옳은 철자법인 "Moses und Aaron"으로 하지 않고 "Moses und Aron"으로 한 것은 쇤베르크 자신이 알파벳 수가 13개가 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자신이 13일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불길한 징조로 생각했다. 그는 76살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자리수 두 개를 합하면 13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77번째 생일을 보내기 두 달 전에 죽었다.
작곡 : Alexander Scriabin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작곡 : Karol Szymanowski (카롤 시마노프스키)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Laszlo Polgar (라즐로 폴가르 )
성악 베이스 성악 베이스
노래 : Anna Prohaska (안나 프로하스카)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노래 : Hanno Muller-Brachmann (한노 뮐러 브라흐만)
성악가 (바리톤) 성악가 (바리톤)
노래 : Thomas Quasthoff (토마스 크바스토프)
토마스 크바스토프(Thomas Quasthoff, 1959년 11월 9일 ~)는 독일의 베이스-바리톤 성악가로서 동세대 바리톤 가운데 최고의 반열에 속한다. 처음에는 낭만파 가곡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바흐의 바로크 칸타타에서 재즈 즉흥 독창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을 넘나든다. 토마스 크바스토프(Thomas Quasthoff, 1959년 11월 9일 ~)는 독일의 베이스-바리톤 성악가로서 동세대 바리톤 가운데 최고의 반열에 속한다. 처음에는 낭만파 가곡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바흐의 바로크 칸타타에서 재즈 즉흥 독창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을 넘나든다.
노래 : Violeta Urmana (비올레타 우르마나)
소프라노 (메조 소프라노) 소프라노 (메조 소프라노)
노래 : Francoise Pollet (프랑수아즈 폴레)
성악가 (소프라노) 성악가 (소프라노)
노래 : Franz Crass (프란츠 크라스)
노래 : Donald McIntyre (도날드 맥킨타이어)
성악가 (베이스) 성악가 (베이스)
노래 : Theo Altmeyer (테오 알트마이어)
성악가 (테너) 성악가 (테너)
노래 : Heinz Zednik (하인츠 체드니크)
오페라 전문 성악가 (테너). 1981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바그너 '라인의 황금'의 Mime 역으로 데뷔한 뒤, 바그너 오페라 무대에 자주 등장하였다. 이 밖에, 마술피리, 보체크, 보리스 고두노프 등에서 활약하였다. 오페라 전문 성악가 (테너). 1981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바그너 '라인의 황금'의 Mime 역으로 데뷔한 뒤, 바그너 오페라 무대에 자주 등장하였다. 이 밖에, 마술피리, 보체크, 보리스 고두노프 등에서 활약하였다.
성악가 (메조소프라노) 성악가 (메조소프라노)
연주 : Krystian Zimerman (크리스티안 짐머만)
폴란드의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75년에는 IX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Zimerman은 폴란드 자브제에서 태어나 카토비체에서 공부했다. 그의 국제적인 경력은 1975년 바르샤바 쇼팽 피아노 콩쿠르 에서 우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76년 블롬슈테트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했다. 그는 1979년 뉴욕 필하모닉과... 폴란드의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75년에는 IX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Zimerman은 폴란드 자브제에서 태어나 카토비체에서 공부했다. 그의 국제적인 경력은 1975년 바르샤바 쇼팽 피아노 콩쿠르 에서 우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76년 블롬슈테트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했다. 그는 1979년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미국에서 데뷔했다. 그는 광범위하게 여행했으며 많은 녹음을 했다. 1996년부터 그는 스위스 바젤에 있는 음악 아카데미 에서 피아노를 가르쳤다. 1999년, 쇼팽의 서거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폴란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낭만주의 음악 에 대한 해석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다양한 클래식 작품을 연주했으며 현대 음악의 후원자이다. 루토스와프스키는 지메르만을 위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녹음 중에는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쇼팽 의 피아노 협주곡,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 4, 5번, 라흐마니노프 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 ; 오자와 세이지와의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피에르 불레즈와의 라벨 의 피아노 협주곡, 쇼팽, 리스트, 드뷔시, 슈베르트의 피아노 독주 작품 등이 있다.
연주 : Leif Ove Andsnes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프랑스의 클래식 피아니스트이자 뉴욕 사우스 세일럼에있는 Wolf Conservation Center의 설립자. 엘렌 그리모는 고향인 액상 프로방스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마르세이유 음악원에서 삐에르 발비제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12살에 파리 콩세르바트와 국립 음악원에서는 자끄 뤼비에르, 레온 플라이셔, 죄르지 산도르에게 사사했다. 1987년은 그녀의 음악 생활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엘렌은 ... 프랑스의 클래식 피아니스트이자 뉴욕 사우스 세일럼에있는 Wolf Conservation Center의 설립자.

엘렌 그리모는 고향인 액상 프로방스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마르세이유 음악원에서 삐에르 발비제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12살에 파리 콩세르바트와 국립 음악원에서는 자끄 뤼비에르, 레온 플라이셔, 죄르지 산도르에게 사사했다.

1987년은 그녀의 음악 생활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엘렌은 깐느 미뎀 (MIDEM : 국제 음반 박람회)클래식상을 수상했고 , 그 연주의 라이브 방송을 들은 다니엘 바렌보임은 즉시 그녀에게 오디션을 제의했다. 이후 파리 오케스트라의 협연 초청과 라로끄 당떼롱 피아노 페스티벌에서의 초연을 포함한 높은 수준의 공연 요청이 이어졌고, 도쿄에서도 연주 데뷔를 하게 되었다. 이후 엘렌 그리모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NHK 심포니, 그리고 뮌헨 필하모닉 등 손꼽히는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동부에서 서부에 이르기까지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워싱턴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했다.

음악 생활 초기부터 그리모는 샤이, 게르기에프, 하이팅크, 아쉬케나지, 살로넨, 테미르카노프, 진만 등 수준 높은 지휘자와 함께 했다. 2008년 10월 BBC 프롬스의 마지막 날 연주에서 그녀는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에서 함께 투어 했던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가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다니엘 하딩이 지휘하는 말러 체임버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연주했고, 필립 조단이 지휘하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와 연주했다. 2009년 봄에 그녀는 바흐의 피아노 콘체르토 D 단조와 실베스트로프의 소품으로 바이에른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유럽 투어를 했다. 열정적인 실내악 음악가이자 독주 연주자로서 엘렌은 토마스 크바스토프와 외르크 비트만, 크리스틴 쉐퍼, 르노 카푸숑 등과 함께 일류의 음악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음악의 중심지에서 연주하게 된다.

2002년 엘렌 그리모는 독일 그라모폰 레이블과 독점적인 음반 계약을 맺고, 바흐 음악과 솔로작품들, 라이브 녹음음반, 그리고 D 마이너 콘체르토를 발매했고, 브레멘 도이치 캄머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키보드 작업을 디렉팅했다. DGG 이전의 음반으로는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가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와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 콘체르토 5번이 있었다. 이후 DGG에서 발매한 음반으로 요하네스 브람스와 로베르토, 클라라 슈만의 작품을 연주한 '리플렉션' 음반과 베토벤과 페르트의 작품을 에사 페카 살로넨이 지휘하는 스웨덴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한 '크레도' 와 쇼팽과 라흐마니노프 독주 음반, 피에르 볼레즈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함께 녹음한 바르토크의 피아노 콘체르토 3번 등이 있다. 15세부터 음반을 발매한 연주자로서 그녀의 초기 작업들로는 리스트, 라벨, 라흐마니노프, 슈트라우스, 거쉬인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무수한 수상 경력도 있는 엘렌 그리모는 고향인 프랑스에서도 높이 평가 되었다. 2002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수여하는 예술문학훈장을 수상했고, 2008년에는 국가공로훈장 기사장을 수여했다. 2005년에는 에코 음악상의 ‘올해의 연주자’부문을 수상했다. 그리모는 '야생의 변주' 와 '특별 수업' 두 권의 책을 써서 로베르 라퐁에서 출판했다. '야생의 변주' 는 영어를 비롯해 각국으로 변역 출간되었다. 두 책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했고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지속적으로 늑대 보호운동을 해오던 엘렌 그리모는 1999년 늑대 보호센터를 설립하기도 했다.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 리가에서 태어났다. 조부이자 바이올린의 대가였던 카를 브뤼크너(1893-1963)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양부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일곱 살에 리가 음악 학교에 들어갔고, 열여덟 살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전설적 연주자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1908-1974)를 사사하며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길을 걷는다. 1967년, 브뤼셀에서 열린 퀸...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 리가에서 태어났다. 조부이자 바이올린의 대가였던 카를 브뤼크너(1893-1963)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양부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일곱 살에 리가 음악 학교에 들어갔고, 열여덟 살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전설적 연주자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1908-1974)를 사사하며 본격적으로 연주자의 길을 걷는다. 1967년, 브뤼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했고, 1969년 몬트리올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2위에 올랐다가 마침내 같은 해 열린 파가니니 콩쿠르와 1970년 차이콥스 키 콩쿠르에서 우승 트로피를 차지한다. 1975년 독일 안스바흐의 바흐주간 페스티벌과 베를린 필하모니를 통해 데뷔 무대를 가졌고, 1980년에는 소련을 떠나 독일에 정착했다. 다음 해, 오스트리아 로켄하우스에서 실내악 페스티벌(후에 ‘크레메라타 무지카’로 명칭 변경)을 창설해 새롭고 독특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2011년까지 장장 30년 동안 예술감독을 지냈다. 1997년에는 발트 해 지역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인 크레메라타 발티카를 만들어 지금도 전 세계로 활발히 초청 공연을 다니고 있다. 2002년에는 이 실내악단과 함께 논서치에서 발매한 음반 〈애프터 모차르트After
Mozart〉로 그래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2016년 영국 음악전문지 〈BBC 뮤직 매거진〉이 백 명의 현역 바이올리니스트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자로 첫손에 꼽히기도 했으며, 현대 음악의 저변과 바이올린 음악 레퍼토리를 넓히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이 책을 비롯하여 《유년기의
파편Kindheitssplitter》 등 네 권의 음악 관련 서적을 썼다.
연주 : Yuri Bashmet (유리 바슈메트 )
러시아의 비올라 연주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의 마지막 작품인 《비올라소나타 viola sonata》(op.147)를 빼어난 솜씨로 연주하여 아름다움의 구현자, 자유분방한 테크닉의 소유자라는 평론계의 격찬 러시아의 비올라 연주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의 마지막 작품인 《비올라소나타 viola sonata》(op.147)를 빼어난 솜씨로 연주하여 아름다움의 구현자, 자유분방한 테크닉의 소유자라는 평론계의 격찬
바이올린 연주자 바이올린 연주자
연주 : Daniel Barenboim (다니엘 바렌보임)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1942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0년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식적으로 데뷔 연주회를 가지며 신동 아티스트로 유명세를 떨쳤다. 1952년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이고르 마르케비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나디아 불랑제 등을 사사했다. 1965년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본격적인 지휘자로 데뷔했으며, 198...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1942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0년 8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식적으로 데뷔 연주회를 가지며 신동 아티스트로 유명세를 떨쳤다. 1952년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이고르 마르케비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나디아 불랑제 등을 사사했다. 1965년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본격적인 지휘자로 데뷔했으며, 1981년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파르지팔> 등을 지휘하며 대표적인 바그너 지휘자로 급부상했다. 1991년부터 15년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또한 1992년부터 도이치 슈타츠오퍼 베를린의 음악감독 겸 이 극장의 상주 악단인 슈타츠카펠레 베를린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창단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현재 UN 평화대사로 활동 중이다.
바이올린, 비올라 연주자, 지휘자 바이올린, 비올라 연주자, 지휘자
첼로 연주자 첼로 연주자
연주 : Mitsuko Uchida (미츠코 우치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
지휘 : Pierre Boulez (피에르 불레즈)
프랑스의 지휘자, 작곡가. 실험적 현대음악 작곡과 연주, 연구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현대음악과 음향을 연구하는 기구 IRCAM(국립 음악 음향 연구소, Institut de recherche et coordination acoustique/musique)와 현대음악 연주 단체인 앵테르콩텅포랭 앙상블(Ensemble intercontemporain)을 창설하였다. 불레즈가 쓴 작품은 메시앙과 당시 음악계... 프랑스의 지휘자, 작곡가.
실험적 현대음악 작곡과 연주, 연구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현대음악과 음향을 연구하는 기구 IRCAM(국립 음악 음향 연구소, Institut de recherche et coordination acoustique/musique)와 현대음악 연주 단체인 앵테르콩텅포랭 앙상블(Ensemble intercontemporain)을 창설하였다.
불레즈가 쓴 작품은 메시앙과 당시 음악계 경향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쇤베르크가 제시한 '음렬(Serie)'을 기초로 한 '음렬주의(Musique serielle)' 기법을 사용하였고, 피아노 소나타 3번부터는 우연성 음악에도 접근하였다.
지휘자로서는 자신의 작곡 활동에 영감을 불어넣는 작곡가들을 즐겨 연주했다.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제 2비엔나 학파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리게티, 루치아노 베리오와 같은 작곡가들이 이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2비엔나 학파의 안톤 베베른은 전작을 두 번이나 녹음하였다. 라벨, 바르톡, 바레즈, 말러, 브루크너의 작품 지휘가 특히 유명하다.
음악 외에도 현대 예술에 큰 관심을 가진 불레즈는 피나 바우쉬(Pina Bausch), 모리스 베자르(Maurice Bejart)와 같은 현대무용 안무가나 락 스타인 프랑크 자파(Frank Zappa)와 공동 작업을 하였다.
오케스트라 : Chicago Symphony Orchestra (시카고 교향악단,CSO)
오케스트라 : Orchestre Du Theatre National De L'Opera De Paris (파리 국립극장 오페라 관현악단)
오케스트라 : Cleveland Orchestra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Ensemble Modern Orchestra (앙상블 모던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Wiener Philharmoniker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VPO),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 Staatskapelle Berlin (슈타츠카펠레 베를린 (베를린 오페라 오케스트라),Berlin State Opera Orchestra)
오케스트라 :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BPO)
오케스트라 : Concertgebouw Orchestra (왕립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oyal Concertgebouw Orchestra Amsterdam / Concertgebouworkest Amsterdam)
암스테르담에 본거지를 둔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관현악단. 1988년에 네덜란드 여왕으로부터 왕립 칭호를 하사받기 전까지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로 (Concertgebouworkest Amsterdam)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암스테르담에 본거지를 둔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관현악단.
1988년에 네덜란드 여왕으로부터 왕립 칭호를 하사받기 전까지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로 (Concertgebouworkest Amsterdam)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오케스트라 : Bayreuth Festival Orchestra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Orchester der Bayreuther Festspiele)
실내악 : Ensemble InterContemporain (앙상블 엥테르콩탕포랭)
현대음악 앙상블 현대음악 앙상블
합창 : Rundfunkchor Berlin (베를린 방송 합창단,Berlin Radio Choir)
합창 : Chor der Bayreuther Festspiele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합창단,Bayreuth Festival Ch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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