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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7년 09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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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 크레마 /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폰 /안드로이드패드 /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 /PC(Mac) |
파일/용량 | EPUB(DRM) | 28.82MB 파일/용량 안내 |
글자 수/페이지 수 | 약 13.6만자, 약 4.4만 단어, A4 약 86쪽 글자 수/페이지 수 안내 |
ISBN13 | 9791186372135 |
2024년 03월 21일 ~ 2024년 08월 31일
2023년 02월 09일 ~ 2024년 12월 31일
상시
11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누나가 죽은 다음날 누나의 뇌가 담긴 싱그러운 사원이 사람의 검시로 아직 모독되지 않았을 때 나는 누나를 한 번 더 볼 계획을 세웠다.
(중략)
내 눈을 맞이한 것은 활짝 열린 큰 창문 뿐이었다. 한여름 정오의 눈부신 태양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날씨는 맑았고 하늘은 청명했으며 그 파란 심연은 무한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삶과 삶의 아름다움을 이보다 더 아프게 환기시키는 상징을 눈으로 보거나 마음으로 그릴 수는 없었다.
내 마음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기억, 그리고 내 죽음의 시간에도 내게 남아 있을 (지상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기억을 회상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내가 처음 쓴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에서 적어도 죽음의 영향이 풍경이나 계절 같은 부수적 요소에 따라서 조금이라도 가감이 가능한 한에서는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면 다른 계절보다 여름에 경험하는 죽음이 왜 마음을 더 깊이 흔드는지 설명하려 했던 것을 몇몇 독자들에게는 상기시키고, 다른 독자들에게는 알려야겠다.
<아편 중독자의 고백>에서 나는 열대지방처럼 왕성한 여름의 생명력과 무덤의 어두운 불모성이 서로 반복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제시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여름과 우리 생각을 맴도는 무덤. 우리를 둘러싼 찬란함과 우리 안의 어둠. 둘이 충돌하면서 서로를 더 뚜렷이 도드라지게 만든다.
48-49쪽 _ 토머스 드 퀸시가 쓴 어린 시절의 고통(1845) 중 일부
벚꽃이 언제 그렇게 활짝 피는지 보고 싶어서 지켜본 적이 있다. 팝콘이 터지듯, 어린아이가 숨김없이 웃음을 터뜨리듯 꽃잎을 시원하게 터뜨리는 순간을 발견하고 싶었다. 햇빛이 없는 동안 남몰래 꽃을 피우는가 싶어 늦은 저녁부터 어느 벚꽃 가지 아래에서 내내 꽃망울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관찰했다. 별이 뜨도록 속내를 보여줄 생각이 없는 벚꽃 아래에서 나는 밤을 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종이에 물이 스며들 듯,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꽃잎이 벌어질거고 나는 그 순간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다 불현 듯 잠이 들었다. 내가 잠을 자는 사이,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벚꽃은 피어서 다음날 아침에 바라본 꽃가지에는 활짝 핀 꽃 몇 송이가 달려 있었다. 약이 올랐다. 너의 꽃잎이 느리게 열리는 모습을 꼭 보겠노라고 다음 봄을 기약했는데, 여전히 나는 벚꽃이 웃음처럼 피는 그 순간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고, 나는 정성스럽게 이 책을 읽었다. 천천히 스미듯 흘러가버리는 시간들 사이로, 천천히 스미는 소중한 깨달음을 꿰어 담은 이 책에서, 혹시라도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나몰래 꽃잎이 활짝 피어버리는 그런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내가 보고 있지 않아도 으레 꽃잎이란 자기 때가 되면 피는 것이겠지. 그렇게 거기 있다가 또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떨어져 자기 갈길로 가버리는 것이겠지. 꽃잎도 자기 일을 하듯, 이 책에 작품을 수록한 저자들도 다 자기 일을 하고는 때가 되어 미련 없이 떨어져 자기 갈길로 가버렸다. 꽃이 피는 그 순간을 확인하고 싶은 욕심은, 저자들의 남긴 그들 삶의 순간들을 애써 발견하고 싶은 욕심과 같다. 내가 굳이 발견하려 하지 않아도 그들의 글은 거기, 이 책도 으레 있어야 할 곳에 묵묵히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굳이 꼭 읽고 확인하고 발견하고 그렇게 마침내는 내 것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서 공들여 읽었다. 꽃이 피었다 지는 것은 꽃의 기억이지만 그 꽃을 지켜본 시간은 내 기억이 되니까.
꽃처럼 연약하고 향기롭고, 짧아서 더 소중한 작품들.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성별, 전혀 다른 형태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그러니까 저자들과 나인데, 생각의 흐름은 어떤 지점에서 분명하게 만난다. 인간이기 때문일까? 우리가 다 인간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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