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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 2004년 10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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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무게, 크기 | 177분 | 113g |
연령제한 | 18세 이용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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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치명적인 페이드아웃
- 37.2 Le Matin, Betty Blue
정치적 몽상가들
자유를 상징하는 도시의 거리를 온종일 걸은 적이 있다. 거리 곳곳에서 대혁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스티유 광장에 이르렀을 때, 현재는 과거와 이어져 있다는 당연한 진리가 새삼스러울 정도로 낯설게 다가왔다. 내가 죽음을 건 투쟁을 보고 자란 세대가 아니기 때문일까. 현재는 그때로부터 얼마나 멀어진 걸까. 혹은 얼마나 가까워진 걸까. 새삼 프랑스의 역사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대혁명으로부터 약 200년 뒤인 1981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사회당의 미테랑이 승리한다. 프랑스 제5공화국 역사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선출된 것이다. 이후 미테랑은 ‘역동적 개혁주의’를 선택한 만큼 광범위한 개혁을 확산시킨다. 노동총연맹은 파업과 노동쟁의를 극히 억제하였고 미테랑은 노동쟁의의 공세를 받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좌파연립정부는 공화당과 사회당의 정치적 위상의 격차로 인하여 극도로 불균형한 연립정부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혁명이 없음을 알게 된 젊은 예술가들은 몽상가들을 통해서 미끄러진 목소리들을 내게 된다. 뤽 베송Luc Besson, 레오 카락스Leos Carax와 더불어 1980년대 프랑스 누벨 이마주의 대표 감독이라고 불리는 장-자크 베넥스Jean-Jacques Beineix(이들을 총칭해 BBC라 한다)의 세 번째 작품인 <베티 블루>(원제 37°2 Le Matin, 1986)는 세상에 대한 환멸을 두 청춘의 사랑을 통해 보여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발작하는 청춘
베티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집 안의 모든 것을 창밖으로 내던질 정도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철부지 소녀다. '철부지'라는 단어가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어떤 철부지도 히스테리만으론 집에 불을 지르진 않는다. 그 집은 자신이 사랑하는 조르그가 소설을 창작해야할 장소이지, 불공평한 억압을 받으며 집주인의 시중이나 들어야 하는 못마땅한 장소가 아닌 것이다. 그녀는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집을 불태운다. 이러한 돌발적인 행동은 베티의 삶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녀에게 타협이란 곧 '죽음'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이미지 출처 : 예스24 영화 스틸컷
철부지는 발작하는 청춘으로 이어진다. 식당의 종업원이 된 그녀는 손님의 팔을 포크로 찔러버린다. ‘손님이 곧 왕’이라는 단순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곧 왕을 찌른 하인이 된 것이다. 굳이 헤겔의 변증법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베티의 행위는 인정 투쟁의 역사로 환유된다. 자신의 전부인 조르그와 그의 소설을 무시한 편집자의 얼굴을 빗으로 도려내 버릴 정도로 히스테리는 극에 다다른다. 하지만 이는 베티가 가진 세계를 지켜내려는 본능적인 자세로 보인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을 지키려 할수록 발작의 강도는 점점 거세진다.
조르그와 베티는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걸며, 집의 벽을 허물어도 되겠냐고 묻는다. 친구는 허락했고, 조르그는 베티가 보는 앞에서 벽을 허문다. 그때의 장면을 살짝 옮겨본다.
열심히 망치질을 하는 조르그. 베티는 붉은 원피스를 입을 채로 조르그의 행동에 환호를 보내고 있다. 숨을 몰아쉬며 베티를 바라보는 조르그.
조르그 마치 록키 4의 실베스타 스텔론 같지?
베티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웃기만 할뿐-조금은 의미심장한 웃음이다)
조르그 왜 그래?
베티 글 쓸 때의 네 모습 같아
조르그 글을 쓰는 거랑 벽을 허무는 게 무슨 상관이야
베티 (정색하며) 내가 알게 뭐람
조르그는 한숨을 몰아쉰다. 베티는 구두를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이후 베티는 옆방에서 영화를 보며 팝콘을 먹는다. 어떤 영화인지는 모르지만 전쟁 장면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는 총포탄이 떨어지는 사운드로 묘사된다 - 이 영화는 제12회 세자르 영화제에서 음악상을 받았다) 다음 씬에서 베티는 손으로 유리를 깨버린다. 발작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베티에겐 글을 쓰는 것과 벽을 허무는 것은 일치하는 행위다. (베를린의 장벽을 비약적으로 환기시킬 필요까지야 없겠지만)세상 모든 벽, 기득권에 대한 저항, 혹은 소설(소설가 이기호가 광화문 교보문고의 벽을 곡괭이로 내려치는 주인공을 등장시켰듯-「수인(囚人)」)이라는 예술의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베티는 자신의 전부인 조르그에게서 도망치려고 한다.
37°2
조르그의 말처럼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구한다. 어느 순간 베티는 아이를 가졌다는 희망에 가득 찬다. 이 영화의 원제인 37°2는 사랑을 하기에 가장 좋은 온도, 즉 여자가 아이를 가지기에 가장 좋은 온도, 또 다른 말로는 태어날 아이의 온도라고 확장 시킬 수 있다. 베티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설을 쓰는 조르그처럼, 그녀도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임신 테스트 결과는 불행이도 음성이다.
임신이 아닌 것을 알게 된 베티는 결국 세상을 두 눈으로 바라보길 포기한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저항은 자해이다. 베티는 자신의 눈을 베어버리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베티는 거의 정신을 놓아버린다. 정신병원에 갇힌 그녀는 발작의 항우울제나 수면제로 보이는 알약을 먹어야만 한다. 자유를 상징하는 베티와 조르그에게 그 약은 의사(일종의 기득권자)들이 만들어 놓은 “길들이기”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비극 외엔 무엇이 있겠는가.
비극에 앞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본다. 감독은 두 인물에게 하나의 침대와 벌거벗은 몸을 주었다. 남녀(조르그와 베티)가 섹스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인물들이 겪게 될 사랑과 고통을 알 수 없다. 그저 순수하게 남녀의 정사를 롱테이크로 마주하게 된다. 3분여 동안 진행되는 섹스 이후 조르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베티를 만난 일주일 동안 우린 매일 밤새도록 섹스를 했다.” 어쩌면 이 영화는 두 남녀가 한 몸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일주일은 천지창조의 시간이다.
영화의 절정에서는 조세핀(여장을 한 조르그)이 등장한다. 조세핀은 마치 조르그와 베티가 하나가 된 형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의식의 조르그와 무의식의 베티가 한 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은 아닐까. 타협하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의 정신과 몸 전체를 형상화하려는 것은 아닐까. 소설쓰기 그 자체에 관한 영화는 아닐까.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구하는 창작, 그 순수한 노동의 이야기는 아닐까.
뜬금없이 느껴질 정도로 급작스러운 조세핀의 분장에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결국 베티를 죽이는 건 조세핀이다. 병실에 누워있는 그녀를 데려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셈이다. 다른 의미로는 베티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며, 조르그도 베티를 죽인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조르그는 베티고, 베티는 조르그였기에.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니까.
사랑이라는 치명적인 페이드아웃
블루 아웃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그리고 이후로도 한참이나 가슴이 먹먹해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지 못했기에 이제 영화 밖으로 빠져나와야 했다. 하지만 영화는 허기를 잊을 만큼 강렬했고, 어떤 수식도 구차해 질만큼 아름다웠다. 색과 구도는 단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이미지에 매혹되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이전의 것들, 이를테면 사랑과 죽음 같은 관념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결국 저녁 먹기를 포기하고, 빵 하나를 입에 물며 산책을 나왔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어슴푸레한 빛은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라이트를 켠 차들이 도로를 질주했다. ‘베티’라면 신호 따윈 무시해 버릴 텐데……. 나는 여전히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순간 등 뒤에서 달려 나온 베티가 차들이 달리는 도로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페이드아웃.
베티는 영원히 눈부신 스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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