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YES24 카테고리 리스트

YES24 유틸메뉴

Global YES24안내보기

Global YES24는?

K-POP/K-Drama 관련상품(음반,도서,DVD)을
영문/중문 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Korean wave shopping mall, sell the
K-POP/K-Drama (CD,DVD,Blu-ray,Book) We aceept PayPal/UnionPay/Alipay
and support English/Chinese Language service

English

作为出售正规 K-POP/K-Drama 相关(CD,图书,DVD) 韩流商品的网站, 支持 中文/英文 等海外结账方式

中文

검색


어깨배너

2월 혜택 모음
웨일북 소마
1/6

빠른분야찾기


윙배너

마우스를 올려주세요.
마우스를 올려주세요.

허일후 아나운서가 추천하는 인생 도서

관련상품
소마

인류의 주요 사상들이 깃든 배경 속에서 한 인간의 기막힌 여정이 시작된다.

소마

채사장 저 | 웨일북

마케팅 텍스트 배너


백만인의 가요 앵콜 Vol. 1: 아~ 님아! [LP]
공유하기 예스24 음반 판매 수량은
차트와 차트 집계에 반영됩니다. 한터차트/가온차트 집계 반영 안내
LP

백만인의 가요 앵콜 Vol. 1: 아~ 님아! [LP]

[ 180g / 일본 동양화성 프레싱 ]
신중현 작곡/펄 시스터즈, 김상희, 트윈폴리오, 박인수 노래 외 6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예전미디어 / 예전미디어 | 2020년 12월 23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74 판매지수란?
상품 가격정보
판매가 53,200원
할인가 43,100 (19% 할인)
YES포인트
추가혜택쿠폰 및 사은품(1종)
추가혜택쿠폰 쿠폰받기
  • 주문금액대별 할인쿠폰
구매 시 참고사항
구매 시 참고사항
  • 재킷 내/외부 종이를 합지하는 방식의 특성상 일부 재킷에서 모서리가 갈라지는 현상이 있습니다.
  • 제작사의 요청으로 반품이 불가합니다. 명확한 재생 불량이 확인된 경우에만 교환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 현재 새 상품은 구매 할 수 없습니다. 아래 상품으로 구매하거나 판매 해보세요.

일시품절

수량
  • 국내배송만 가능
1/4
광고 AD

백만인의 가요 앵콜 Vol. 1: 아~ 님아! [LP]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0년 12월 23일
제조국 일본

관련분류

음반소개

LP 구매시 참고 사항 안내드립니다.
※ 재킷/구성품/포장 상태
1) 명백한 재생 불량 외에 경미한 재킷 주름, 모서리 눌림, 갈라짐 등은 반품/교환 대상이 아님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2) 속지(이너 슬러브)는 디스크와의 접촉으로 인해 갈라질 수도 있는데, 이는 반품/교환 대상이 아닙니다.
3) 디스크 라벨은 공정상 매끄럽게 부착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4) 본품에 문제가 없는 겉포장 비닐의 손상은 교환/반품 대상이 아닙니다.

※ 재생 불량
1) 톤암 혹은 무게 조절 기능이 없는 턴테이블을 사용하시는 경우, (주로 올인원 형태 모델) 다이내믹 사운드의 편차가 큰 트랙을 재생할 때 튀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는 대부분 가벼운 톤암 무게가 원인입니다.
기기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재생 불량 현상에 대해서는 반품/교환이 불가하니 톤암 조절이 가능한 기기에서 재생하실 것을 권유 드립니다.
2) 디스크는 정전기와 먼지로 인해 재생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전용 제품으로 이를 제거하면 대부분 해결됩니다.
3) 바늘에 먼지가 쌓이는 경우에도 재생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디스크 이상
1) 디스크 표면이 울렁거리거나 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재생에 이상이 있는 경우에만 반품이나 교환이 가능합니다.
2) 재생 음역의 왜곡을 최소화 하고 반복 재생시에도 최대한 일관되게 유지되도록 디스크 센터 홀 구경이 작게 제작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턴테이블 스핀들에 맞지 않는 경우에는 전용 제품 등을 이용하여 센터 홀을 조정하시면 해결됩니다.
3) 간혹 디스크에 미세한 잔 흠집이 남아있거나 마감이 깨끗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재생에 이상이 있는 경우에만 반품이나 교환이 가능합니다.

※ 컬러 디스크
아래에 해당하는 경우는 불량이 아니므로 반품 및 교환은 불가하오니, 구매시 참고를 부탁드립니다.

1) 컬러 디스크는 웹 이미지와 실제 색상이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2) 컬러 디스크의 특성상 제작 공정시 앨범마다 색상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3) 컬러 디스크는 제작 과정에서 다른 색상 염료가 섞여 얼룩과 번짐, 반점 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 교환/반품 안내
1) 명백한 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 요청 시에는 불량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 및 동영상과 재생기기 모델명을 첨부하여 고객센터에 문의 바랍니다.
2) LP는 잦은 배송 과정에서 재킷에 손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재판매가 어려우므로 오구매, 변심으로 인한 반품은 어렵습니다. 신중한 구매를 부탁드립니다.

디스크

Disc
  • A1 아~ 님아 (펄시스터즈)
  • A2 어떻게 해 (김상희)
  • A3 떠나야 할 그 사람 (투윈폴리오)
  • A4 봄비 (박인수)
  • A5 빗속의 여인 (송만수)
  • A6 내일 (이정화)
  • B1 빨간 선인장 (김추자)
  • B2 멀어져 간 사랑아 (킹보이스)
  • B3 파초의 꿈 (문정선)
  • B4 불나비 사랑 (김도향)
  • B5 딜라일라 (조영남)
  • B6 금잔디 (태원)

아티스트 소개 (11명)

국내 대중 음악사에서 록의 대부라 불리는 신중현은 우리 음악의 흐름 가운데에서, 최초로 록을 주무기로 메인스트림을 집권한 인물이며 부단한 실험과 노력으로 수많은 히트곡을 제조한 시대의 작곡가이다. 어린시절부터 기타 교본을 가지고 독학하며 AFKN의 음악을 섭렵했던 신중현은, 음악 학원의 강사를 하다가 미8군 무용수의 소개로 미8군 무대에 서게 된다. 이 때부터 그는 재키, 히키, 스꼬시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폭발... 국내 대중 음악사에서 록의 대부라 불리는 신중현은 우리 음악의 흐름 가운데에서, 최초로 록을 주무기로 메인스트림을 집권한 인물이며 부단한 실험과 노력으로 수많은 히트곡을 제조한 시대의 작곡가이다. 어린시절부터 기타 교본을 가지고 독학하며 AFKN의 음악을 섭렵했던 신중현은, 음악 학원의 강사를 하다가 미8군 무용수의 소개로 미8군 무대에 서게 된다. 이 때부터 그는 재키, 히키, 스꼬시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이에 자신감을 얻어 여러 그룹을 조직하며 본격적인 록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의 기타는 미군 병사들에게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를 떠올리게 했으며 고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었다. 신기에 가까운 기타 솜씨로 미8군내의 영자신문과 잡지에 대서 특필되며 영내에서는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던 그는 쇼 무대의 선배들과 함께 < 히키-신 기타 멜로디 경음악 선곡집 >이라는 최초의 앨범을 내기도 하고, 첫 기타 독주회를 열어 절정의 인기를 과시한다. 이어 이화여대 교수 등을 지낸 이교숙에게 작곡법을 사사 받은 신중현은 1962년에 우리 나라 최초의 그룹으로 기록되는 애드포(Add4)라는 록그룹을 결성한다. 이 팀은 잦은 멤버 교체를 겪으며 별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최근에 김건모에 의해 리메이크 된 ‘빗속의 여인’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으며 이 음반에는 장미화의 노래가 실려있기도 하다. 애드포를 이끌고 음악 감상실에서 연주하던 그는 그룹 블루 리본 출신의 드러머와 결혼을 하고 팀을 해체한다. 그리고 다시 미8군으로 복귀해 조우커스(Jokers)라는 그룹을 만들었다가 와해된 뒤 브루즈 테트(Blooz Tet)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이 팀은 미8군 전속 밴드로 록은 물론이고 재즈와 관련된 음악을 연주했다. 하지만 미8군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신중현은 베트남 전쟁의 특수를 이용해 월남으로 갈 준비를 하고 향후에는 유럽으로 진출할 꿈을 키운다. 그리고 월남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을 의미하는 기념음반을 배인순, 배인숙 자매에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이 음반에서 ‘님아’와 ‘떠나야 할 그 사람’이 크게 히트하고 트로트 주도의 가요 시장에 록음악의 한 줄기 빛을 내리 쬐었다. 신중현은 우리 음악 시장에 대한 가능성을 감지하고 월남행을 포기했으며 신중현 사단이라는 스타 시스템을 온 누리에 퍼뜨리기 시작한다. 그는 이후 장미화, 박인수, 이정화, 김추자, 펄 씨스터즈, 임성훈, 장현, 바니걸스, 김정미 등의 가수를 슈퍼스타로 만들며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로 명성을 날린다. 신중현은 수 십 곡에 이르는 히트곡을 제조했으며 트로트와 포크 시장의 틈바구니에서, 뛰어난 시장성을 개척했다. 신중현은 작곡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그룹 활동도 계속했다. 1968년에는 미8군에서 쇼 단체를 이끌면서 덩키스(Donkeys)라는 그룹을 결성했고 소울과 싸이키델릭을 주로 연주하며 ‘봄비’라는 곡을 타이틀로 첫 음반을 낸다. 하지만 별 인기를 얻지 못했고 해산 후 음악학원을 설립한다. 이어 1970년에는 신중현 오케스트라를 결성한다. 역시 여의치 않았던 그는 이 단체의 해산을 선언하고 제로(Zero) 악단을 만들었으며 한편으로는 퀘션스(Questions)를 이태현, 김대환 등과 결성해 박인수, 김추자, 송만수, 임희숙 등을 배출한다. 그는 이 팀으로 많은 공연을 하며 뛰어난 가수들을 배출했지만 그룹의 인기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신중현은 1971년 정성조와 함께 신중현과 그의 캄보 밴드(Combo Band)를 결성하고 그 해 말에는 더 맨(The Man)을 이태현, 문영배, 김기표 등과 결성한다. 이 시절 그는 함중아를 키웠으며 다음 해에 ‘아름다운 강산’, ‘미련’ 등이 수록된 첫 음반을 발표한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그룹의 역사는 무명의 역사였다. 그는 연주곡집을 낸 뒤 양희은, 서유석 등과 음반 작업을 하고 이남이, 김기표, 최이철, 문영배와 엽전들이라는 새로운 그룹을 세운다. 훗날 재평가가 끊임없이 이루어져 록음악의 기념비적인 자리를 매김 하게 되는 이 그룹에서 신중현은 그의 음악 역사를 규정짓는 ‘미인’과 ‘해랑사를너는나’가 든 1집을 발표한다. 하지만 정권찬양가를 권유했던 제의를 무시한 그에게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이어졌으며 이에 못 이겨 창작 의욕을 상실한 그는 정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을 아우를 수 있는 건전 가요 스타일의 곡들을 담은 2집을 만들지만 데모곡으로 몰려 금지곡 판정을 받는다. ‘미인’은 ‘3천만의 애창곡’이라는 별칭을 달았을 정도로 반도의 반을 열광케 했으며 그는 이 음악의 인기를 소재로 한 영화 < 미인 >에 밴드 멤버인 이남이, 권용남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1975년의 가요정화운동과 대마초 파동은 그의 한창 타오르던 창작의 불씨를 잿더미로 만든다. 그는 대마초의 왕초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금지 당했으며 모든 곡은 금지곡의 멍에를 써야만 했다. 그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78년 그에게 공연 활동이 해금되었고 1979년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모든 활동 금지 조치가 풀렸다. 재기의 활화산 같은 기쁨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고 이러한 기운은 1980년 9인조 록밴드 뮤직 파워(Music Power)로 탄생되었다. 이 그룹이 연주했던 ‘아름다운 강산’은 박정희 찬가를 거부하고 국민을 위한 노래로 만들었던 그의 의지를 발현한 곡으로, 순식간에 고전이 되었다. 신중현은 계속해서 1982년에 이남이, 서일구와 세 나그네를 만들었고 ‘내’라는 곡으로 우리의 정서와 서양 음악의 화합을 시도했다. 이후 라이브 업소를 개업하는 등, 음악 사업을 하다가 1988년에는 ‘그 동안’, ‘미소’ 등이 수록된 솔로 음반을 내놓았다. 1990년대에 앨범 < 무위자연 >과 < 김삿갓 >을 내놓은 그에게, 후배들은 1997년 헌정 앨범을 기증했다. 강산에, 시나위, 윤도현, 이중산, 봄여름가을겨울, 한상원, 이은미 등이 참여한 이 앨범은, 모든 장르를 망라해 실험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히트곡을 쏟아내던 그에 대한 작은 공경의 표시였으며, 우리 대중 음악의 발전을 몇 단계 끌어올린 노고에 대한 경의의 오마쥬 였다.
분장실도 청소한 그리운 ‘세기의 듀엣’ ‘남아’ ‘커피한잔’을 부르며 흥겹게 춤을 추었던 배인순(裵仁順) 인숙(人淑)자매. ‘펄 시스터즈’는 해체되었지만 여전히 가요계 최고의 듀엣으로 역사에 길이 남는다. 얼굴도 예쁘고 , 몸매도 좋고 또 둘간의 시샘도 치열했던 두 자매의 공연시절의 회고담을 MC 최성일씨를 통해 듣는다 친자매 배인순과 인숙의 듀엣 ‘펄 시스터스’. ‘진주자매’를 뜻하는 이들은 이 지면을 통해서 ... 분장실도 청소한 그리운 ‘세기의 듀엣’ ‘남아’ ‘커피한잔’을 부르며 흥겹게 춤을 추었던 배인순(裵仁順) 인숙(人淑)자매. ‘펄 시스터즈’는 해체되었지만 여전히 가요계 최고의 듀엣으로 역사에 길이 남는다. 얼굴도 예쁘고 , 몸매도 좋고 또 둘간의 시샘도 치열했던 두 자매의 공연시절의 회고담을 MC 최성일씨를 통해 듣는다 친자매 배인순과 인숙의 듀엣 ‘펄 시스터스’. ‘진주자매’를 뜻하는 이들은 이 지면을 통해서 지금까지 소개한 여러 스타들과는 ‘출신’이 근본적으로 다른 가수였다. 일반적인 가수들처럼 미8군이나 일반 쇼 무대 또는 밤업소 출신이 아니었다. 당시 막 꽃피기 시작했던 TV방송이 발굴해서 길러낸, 소위 ‘방송가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자매를 진주로 견인한 프로그램은 바로 60년대와 70년대에 막강했던 인기의 TBC TV 쇼프로그램 ‘쇼쇼쇼’였다. “그들은 정말 한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보기 드문 재목이다!” 지금은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당시 ‘쇼쇼쇼’의 사회자 ‘후라이보이’ 곽규석(郭圭錫)씨는 나와 만난 자리에서 펄 시스터스를 가리켜서 곧잘 이렇게 표현하곤 했었다. 그는 사석에서뿐만 아니라 방송현장에서도 그러한 멘트를 즐겨 썼다. 그가 인순 인숙 자매를 이렇게 극구 칭찬한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사실 그들만큼 가수로서 필수조건인 ‘노래’와 충분조건인 ‘얼굴’ ‘몸매’ ‘율동’을 어디 한 군데 빠짐없이 완벽하게 구비한 가수는 없었다. 즉 요새 말로 ‘오디오 비디오 겸용가수’인 셈이었다. 나는 ‘쇼쇼쇼’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펄 시스터스 같은 탁월한 가수들이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들의 1969년 데뷔 곡이자 출세작인 ‘님아’와 ‘커피한잔’을 써낸 작.편곡자 신중현(申重鉉)씨도 그룹사운드의 창조자로도 평판이 자자했지만 바로 펄 시스터스를 길러낸 주역으로 더욱 이름을 날렸지 않은가 생각한다. 60년대 말 방송으로 데뷔해서 가요계를 휘몰아치며 스타덤에 오른 그들은 곧바로 쇼 무대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지방 리사이틀은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고 주로 서울 시민회관 무대에만 섰다. 1970년과 1971년에 ‘시민회관’에 1년 간 20차례 공연이 열렸다하면 그들은 18회 정도는 출연했을 만큼 당시 펄 시스터스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인순과 인숙 자매가 쇼 무대에 나왔을 때는 20세가 채 안된 미성년들로 나이가 어리기도 했지만 워낙에 순진했다. 일반 무대의 돌아가는 실정에 까막눈이었고 어른들의 농담을 모조리 진담으로 받아들이기가 일쑤였다. 처음에 둘은 누가 뭘 물어봐도 이구동성이었고, 화장실을 갈 때에도 함께 가야했을 정도의 일심동체(?)로 한시도 떨어져 있지를 않았다. 이렇게 다정한 사이의 자매를 우리 사회자들은 짓궂게 이간질(?) 시키는 장난을 걸곤 했었다. 내가 언니 인순양이 없고 인숙양만 있을 때 “야, 인숙아. 너 언니가 그러는데 무대에서 제스처 하면서 노래할 때 너무 장난이 심하다고 남들 있는데서 흉보더라. 왜 그랬니? 좀 잘하지, 언니한테!” 그랬더니 인숙양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어머머, 언니가 진짜 그랬어요?”하고는 뭐가 그토록 서러운지 손에 얼굴을 파묻고 슬피 우는 것이었다. 정말 뭘 몰라도 한참을 몰랐던 철부지였다. 또 이대성(李大成)은 언니 인순양을 붙잡고 “너 말이야, 인순아. TV ‘쇼쇼쇼’에서 봤는데 넌 화면에 안 되겠더라. 어쩌면 너 동생하고 그렇게 얼굴에 차이가 나냐. 그래? 동생보다 얼굴이 너무 크더라, 야” 하면서 노골적으로 약을 올렸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인순양은 딱하게도 끼니를 굶어가며 “어쩌지, 어쩌지” 해가면서 심각한 고민에 시달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나머지 그녀는 후에 동생과 미모에 있어서 평등을 기하려는 극단적인 의지로 “어머니와 상의해서 성형수술을 할까?” 했다는 뒷얘기까지 나왔다 (물론 성형수술은 하지 않았다.) 다정한 사이를 그만 ‘라이벌’로 만들어 버린 장난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여자마음의 속성’을 들여다보게 해준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핏줄이 같은 친자매라 할지라도 ‘샘솟는 여자의 시샘’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남들이 만약 언니의 율동이 더 좋다고 하면 동생은 토라져버렸고, 동생의 몸매가 더 낫다고 하면 언니는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연의 횟수가 더해갈수록 ‘더 잘 보이려는’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쟁심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자매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우리의 방해공작(?)은 어디까지나 효력이 잠시였고 나중 우리가 시비를 걸어도 그들은 아예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무튼 당시 공연관계자들간에는 (가요팬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자매를 상대적으로 비교해보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 즉 ‘언니와 동생 중에서 누가 더 예쁜가?’ ‘누가 더 착한가?’ ‘누가 시집을 더 잘 갈까?’ 하는 따위가 흥미로운 화제 거리였다. 일반적인 견해는 “동생이 마스크는 더 낫고, 성격은 언니 인순양이 더욱 원만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언니는 동양적이요, 동생은 서양적이라는 결론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인순양은 조금 깍정이였던 동생보다 성격에 모난 점이 없어서 간혹 인숙양이 삐치게 되면 달래주기도 하는 등 윗사람(?)다운 면모를 과시하곤 했다. 1972년3월 부산(釜山) 공연 때였다. 꽤 점잖은 30대 남자가 대기실로 나를 찾아와서는 “제발 둘 중 한 명이라도 좋으니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며 매달리면서 사정했다. 이럴 경우에 상대가 차라리 ‘건달’이라면 무력행사를 하든가 해서 오히려 물리치기가 쉬운데 신사일 때는 설득해야 했기 때문에 나의 입장은 더욱 피곤했다.(펄 시스터스의 팬들은 비교적 수준이 높았다). 그들의 공연에서는 이렇든 ‘접선’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팬들을 돌려보내는 것도 매일 되풀이되는 일과중의 하나였다. 펄 시스터스는 당시 어느 가수들보다도 무대의상이 화려했고 가지 수도 엄청나게 많았다. 노래 한 곡 한 곡 끝날 때마다 옷이 달라지곤 했는데 한번은 “도대체 의상이 몇 벌쯤 되냐?”고 물었더니 인순양은 “둘이 합쳐서 약3백 벌쯤 될걸요”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대성과 나는 언젠가 둘만 있는 자리에서 “쟤들은 돈 벌어서 옷만 해 입는 거 아냐?”하고 비아냥거렸던 적도 있었다. 둘에 대한 어머니 현정덕(玄正德)여사의 뒷바라지는 딴 가수들 보기에 부러울 만큼 정성스러웠다. 공연 중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고 식사도 손수 집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해오곤 했었다. 점심 식사 때는 매일 정확한 시간에 보자기에 먹을 것을 담아서 들고 오셨는데 반찬도 갈비찜을 비롯해서 수십 가지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전여전(母傳女傳)이라고 이렇듯 ‘모범’ 어머니를 닮아서 펄 시스터스도 늘 타의 모범이었다. 직접 빗자루를 들고 지저분한 분장실을 청소했고 꽃병과 화분을 갖다놓기도 했다. 또 누가 조금이라도 풀이 죽어있는 모습이면 마치 자기 일처럼 “어디 아파요?”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세요?”하면서 걱정을 함께 해주었다. 나는 펄 시스터스의 부친이 공무원이라고 알고 있는데 비교적 안정된 집안의 따님들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타가 되어 돈을 벌겠다해서, 또는 연예인으로서의 ‘끼’가 있어서 가요계에 뛰어든 그런 유형의 가수들이 아니었다. 배인순과 인숙은 줄곧 내게 “우리는 단지 노래부르는 게 좋아서 가수가 됐다”고 밝히곤 했었다. 이제 언니 인순은 재벌그룹회장과 결혼해서 어엿한 주부가 됐고, 동생 인숙은 솔로로 남아서 계속 가수활동을 하다가 몇 해전 재미교포출신의 의사에게 시집가서 살고 있다. 나는 워낙 듀엣활동 당시에 그들이 모범적이었기에 결혼생활도 모범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지금 내가 스타와 공연하고 있구나”하는 뿌듯한 기분을 제공해 주었던 가수였다. 곽규석씨 표현대로 ‘1세기에 한 쌍 나올까 말까한’ 불세출의 그들과 공연했던 것을 어느덧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난 대단한 개인적 영광으로 여긴다.
멤버 : 윤형주, 송창식 멤버 : 윤형주, 송창식
생년월일 : 1947년 범상치 않은 사람들의 집합소인 연예계에서 우리는 왕년의 잘 나가던 스타가 종종 좋지 못한 상태로 추락하는 경우를 본다. 스타를 사랑하던 우리들에게 이런 경험은 인생무상과 인기의 허망함, 또는 변화하는 세월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사의 보편적 가치관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과거 그를 사랑했던 애정의 깊이만큼이나 팬들에게도 그 비애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스타의 자질을 떠나 실로 안타까운 ... 생년월일 : 1947년 범상치 않은 사람들의 집합소인 연예계에서 우리는 왕년의 잘 나가던 스타가 종종 좋지 못한 상태로 추락하는 경우를 본다. 스타를 사랑하던 우리들에게 이런 경험은 인생무상과 인기의 허망함, 또는 변화하는 세월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사의 보편적 가치관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과거 그를 사랑했던 애정의 깊이만큼이나 팬들에게도 그 비애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스타의 자질을 떠나 실로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봄비’라는 곡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국내 ‘소울’ 창법의 대부 박인수는 바로 그런 동질의 슬픔을 전달하는 비운의 뮤지션이다. 이북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 중에 어머니와 함께 피난 내려와 살다, 일곱 살 때 전북 정읍역 부근에서 길을 잃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서울 돈암동의 고아원을 거쳐 춘천 부근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 생활을 전전하게 되었고 영어엔 익숙해졌지만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진 못했다. 고아처럼 지내는 그를 한 군인이 춘천의 어느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켜주었지만 나이가 많아 1, 2학년은 건너뛰고 바로 3학년으로 입학한 것이 잘못 이였다.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3학년이 된 그는 제대로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고 결국 아직까지도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영어를 괜찮게 했던 그는 12살 때 미국으로 입양돼 3년여 동안 살기도 했으며 가수가 된 이 후에도 팝송을 카피하는 데는 남다른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미국에서 놀림과 양부모의 잦은 싸움 등으로 3년만에 국내로 들어온 그는 다시 미8군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며 기약 없는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그의 콧노래를 유심히 들었던 한 미군의 소개로 미8군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를 수 있었으며 가수 이상으로 유명해지자, 직업적인 가수로 미8군 무대에 서, 5∼6개의 클럽에 불려 다니며 ‘달러박스’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자 신중현이 그를 찾아왔다. 신중현의 그룹 블루즈 테트(Blooz Tet)에서 싱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그는 1970년 5월 발표된 신중현이 이끄는 그룹 퀘션스(Questions)의 역사적인 앨범 < 퀘션스-유니버샬.KLH15 >에서 ‘봄비’를 부르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 앨범에는 현재 인기 MC로 높은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는 임성훈이 참여했으며 임희숙, 송만수 등이 싱어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박인수는 이 음반에서 ‘여보세요’, 지금 들어도 신중현의 위대함이 저절로 느껴지는 ‘기다리겠소(그 사람)’를 비롯해 ‘봄비’를 불렀다. 특히 덩키스(Donkeys)에서 노래를 불렀던 이정화의 곡을 리메이크한 ‘봄비’의 메가급 히트는 신중현 음악에 대한 일본의 높은 평가와 관심을 불러왔으며 그를 데려가기 위한 메이저 레코드사의 제의를 빗발치게 했다. 그룹과는 별개로 박인수는 과다한 밤무대 섭외를 견뎌내며 우울하면서도 다이내믹한 목소리를 만천하에 알렸다. 한때 6개월 정도 피닉스라는 그룹에 몸담아 윤항기의 키 브라더스와 경합을 벌이며 ‘하드록’ 가수로 활동했던 그는 1976년까지 가수로서 전성기를 누리다 대마초 파동을 겪으며 활동에 제약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음악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밤무대와 지방 무대를 떠도는 생활을 해야 했으며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10여 년 후 그를 좋아하던 엄인호, 김현식을 비롯한 일군의 음악적 동반자들을 만나면서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현식에게 소울 창법의 영향력을 강하게 미쳤던 그는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블루스 음악을 시도했던 신촌블루스의 1집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88년에 발매된 이 앨범에는 한영애가 불러 히트시킨 ‘그대 없는 거리’와 정서용의 ‘아쉬움’이 들어 있으며 박인수는 히트된 이후 수식어처럼 붙어 다니는 곡 ‘봄비’와 ‘나그네의 옛 이야기’를 불렀다. 그리고 다음해에 자신의 절창 실력을 유감없이 뽐낸 베스트 음반 < 뭐라고 한마디해야 할텐데 >를 프로듀서 김준의 도움으로 발표한다. 특히 초반 3곡인, 과거 자신과 인기 경쟁을 벌이던 연석원의 곡 ‘뭐라고 해야할텐데’와 ‘겨울 소나타’, 그리고 퀘션스 시절 불렀던 ‘기다리겠소’의 중후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는 우리를 경이로 몰고 간다. 하지만 앨범 발표 후 완벽한 활동에 대한 의욕은 갑자기 가사를 잊어버리는 등 올라선 무대에서 제대로 노래를 소화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그 빛을 상실했으며 ’90년 말부터는 완전히 활동을 정지한 채 서울 근교에서 떠돌이처럼 지내야 했다. 그리고 다음해엔 급기야 저혈당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게다가 ‘95년에는 대마초 사건으로 다시 ‘70년대의 악몽을 재현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그는 가수 출신인 윤항기 목사가 운영하던 선교원과 하사와 병장의 이경우가 운영하는 카페 등에서 잠시 기거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주민등록조차 말소된 채 정봉인 목사가 인도하는 일산의 ’행복의 집’에서 살고 있다. ‘그가 죽었다’라는 소문 아닌 소문을 듣고 있던 선·후배들은 뒤늦게 알려진 그의 소식에 2002년 7월 < 리멤버 박인수 사랑의 콘서트 >를 열고 과거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가수의 불행을 안타까워했다. 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위원장 김광진)의 주최로 열린 이 콘서트에는 남궁옥분, 박강성, 박미경, 박상민, 박완규, 박진영, 최성수, 유열, 유익종, 윤시내, 이기찬, 이문세, 임희숙, 한영애 등의 후배들과 최희준, 남진, 채은옥, 개그맨 이홍렬 등이 참여해 팬들의 높은 호응을 얻어냈다. 또한 그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펄 시스터즈 자매는 300만원을 내놓는 등, 인원 초과로 참여할 수 없던 많은 선·후배 동료들도 대 선배의 쾌환을 빌며 각종 봉사로 자리를 빛냈다. 주최측은 이 날을 ‘박인수 데이’, ‘소울 데이’로 지정해 그의 음악을 재조명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후배 이경우는 손쉽게 사라져버린 그의 베스트 음반을 오아시스와 협의해 CD로 발매해냈다. 서울 백병원의 후원으로 그의 몸 안에서 꿈틀대던 췌장암과 가사를 자주 잊어버리게 만든 병인 저혈당을 성공적으로 치료한 박인수는 현재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과거에 자신을 대변하던 ‘황색 소울의 귀재’, ‘영혼을 노래하는 전설적인 가수’, ‘불운의 천재 가수’란 호칭을 다시 잡기 위해 강한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이제는 역사 속에서 하늘거리는 이 표어는 1970년대 초반 남한을 강타한 한 여성가수를 일깨우는 비문이다. 김추자는 1969년 대학 진학을 위해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온다. 어릴 때부터 내리 반장을 지내면서도 춤과 노래에 일가견이 있던 이 당찬 소녀는 대학 신입생을 위한 노래자랑대회에 나가 솟구치는 가창력으로 1등을 차지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고 무조건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에, 주위의...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이제는 역사 속에서 하늘거리는 이 표어는 1970년대 초반 남한을 강타한 한 여성가수를 일깨우는 비문이다. 김추자는 1969년 대학 진학을 위해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온다. 어릴 때부터 내리 반장을 지내면서도 춤과 노래에 일가견이 있던 이 당찬 소녀는 대학 신입생을 위한 노래자랑대회에 나가 솟구치는 가창력으로 1등을 차지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고 무조건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에, 주위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무작정 신중현을 찾아간다. 이 당돌한 가수의 출현을 신중현은 “대어감이라는 느낌이 전율처럼 몸을 감쌌다. 그러나 겸손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색은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날부터 연습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한 달도 안돼 그녀는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의 악보를 받았고 1969년 가을 드디어 첫 앨범이 나왔다. < 신중현 작곡집 >이라고 이름 붙은 LP의 앞면은 김추자의 것이었지만 뒤의 면은 서유석과 김선이라는 가수가 차지했다. 그녀의 본격적인 인기는 다음 해 봄 다른 곳에서부터 왔다. 연속극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님은 먼 곳에’가 드라마와 더불어 터진 것이다. 당시로서는 훤칠한 체격, 신중현의 강렬한 기타가 뒷받침된 민감한 음악성, 풍부한 성량, 육감적인 음폭에 귀를 후벼파는 다양한 창법은 그녀를 최고의 가수에 올려놓았다. 이로 인해 여러 신인상과 TBC 방송국에서 최우수 여자 가수상을 수상한 그녀는 1971년에는 ‘꽃잎’과 ‘거짓말이야’가 영어로 수록된 국내 최초의 수출용 영어인쇄 음반 < Golden Hit Album >을 발표하며 그녀의 인기를 입증하고 군부 독재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트로트를 비롯해 무덤덤한 음악으로 세월을 보내던 가요계에 ‘거짓말이야’로 일대 회오리바람을 일으킨다. 그녀의 섹스어필하면서도 약간 허스키한 음색과 터질 것 같은 몸매는 유교사상의 암담한 이불 속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를 뒤흔들었으며 사이키델릭한 악마적 감성의 곡으로 혼란과도 같은 문화적 충격을 가했다. 그러나 쾌활하고 세상에 아랑곳하지 않던 이 소녀를 아직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 나라는 가만 두지 않았다. 그녀의 육감적인 손동작이 남파간첩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등 레드컴플렉스에 나라가 몸살을 앓던 그때, 그녀는 매니저를 보고있던 폭력배의 일원에게 폭행을 당한다. 얼굴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심했던 얼굴은 3회에 걸친 안면부 복원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그녀는 앞두었던 콘서트를 치뤄 내는 투혼을 발휘했지만 그 후 1년 여 동안 대인공포증에 시달린다. 이후 그녀는 ‘왜 아니 올까’, ‘그럴 수가 있나요’, ‘무인도’ 등의 곡을 발표하며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고 1974년 리사이틀 공연으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다. 하지만 1975년 4월 긴급조치 9호인 가요 규제조치가 발표되면서 그녀의 모든 노래는 금지곡으로 묶이고 신중현, 이장희, 윤형주 등과 함께 가수활동 전면 금지의 선고를 받는다. 당시 가수들에겐 유행과도 같았던 대마초를 소지한 혐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재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그녀는 1981년 결혼과 함께 잠수했다가 1986년 TV 프로그램의 단독쇼에 한 차례 모습을 드러낸 뒤 다시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2001년, 그녀는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비록 계약 위반으로 계약사와 잡음이 생겼지만, 가정생활의 안정으로 운동을 다시 하고 춤을 추며 발성 연습을 다시 하고 있다. 기획자의 청을 받아들여 새 음반을 내기로 했으며 신중현과 하광훈, 김희갑 등으로부터 곡을 받기로 약정이 됐다. 1~2곡의 리메이크곡이 수록될 새 앨범으로 과거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 멋지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작정이다.
1944년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남. 1951년 1·4후퇴 때 충남 예산군, 흔히 ‘삽다리’로 알려진 삽교면으로 영구 이주.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해 한양대 음대에 진학했으나 자퇴하고, 다시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 1968년 미8군 부대 주한미8군 쇼단에서 노래를 부르다 1969년 <딜라일라>라는 번안가요를 불러 대중음악계 스타로 등극. 이 와중에 학교 중퇴.(훗날 명예 졸업장을 받아 가까스로 졸업.) 197... 1944년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남. 1951년 1·4후퇴 때 충남 예산군, 흔히 ‘삽다리’로 알려진 삽교면으로 영구 이주.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해 한양대 음대에 진학했으나 자퇴하고, 다시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 1968년 미8군 부대 주한미8군 쇼단에서 노래를 부르다 1969년 <딜라일라>라는 번안가요를 불러 대중음악계 스타로 등극. 이 와중에 학교 중퇴.(훗날 명예 졸업장을 받아 가까스로 졸업.) 1970년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란 풍자가요를 부른 다음날 곧장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 1973년 군복무 중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흥 집회에서 성가를 부른 것이 인연이 되어 제대 후 미국 유학길에 오름. 유학 가기 전 서울 안국동 소재 ‘한국 화랑’에서 첫 미술전시회를 열기도 함.

1979년 미국 플로리다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신학학사(B. A) 학위 취득. 1982년 한국으로 돌아와 가수로 복귀. 1990년 카네기홀에서 개인 콘서트를 열기도 함. 한편으로 1992년 <자니윤쇼>와 <열린음악회> 등을 통해 TV매체에 등장. 이후 <조영남쇼>, <투맨쇼>, <체험 삶의 현장>, <조영남이 만난 사람>,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등을 진행하는 등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방송 활동을 이
어옴.

가수로서 발표한 주요 앨범으로는 『제비』, 『딜라일라』, 『보리밭』, 『지금』, 『화개장터』, 『모란 동백』, 『불 꺼진 창』 등이 있음. 화가로서는 1973년 ‘한국 화랑’ 전시 이후 서울·부산·베이징·뉴욕·LA 등 세계 각지에서 약 40회 남짓 전시회를 열며 스스로 화수(?手)라 칭해옴.

그는 펴낸 책이 여럿인데 그 중 『조영남 양심학』, 『놀멘놀멘』, 『예수의 샅바를 잡다』, 『조영남 길에서 미술을 만나다』,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어느날 사랑이』, 『천하제일 잡놈 조영남의 수다』,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등을 주요 저서로 꼽고 있음.

회원리뷰 (0건)

매주 10건의 우수리뷰를 선정하여 YES포인트 3만원을 드립니다.
3,000원 이상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일반회원 300원, 마니아회원 6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리뷰/한줄평 정책 자세히 보기
리뷰쓰기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1,000원 이상 구매 후 한줄평 작성 시 일반회원 50원, 마니아회원 1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 리뷰/한줄평 정책 자세히 보기
0/50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배송 안내
배송 구분 YES24 배송
  •  택배사 : YES24 (상황에 따라 배송 업체는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배송비 : 2,000원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  마이페이지 > 반품/교환 신청 및 조회, 1:1 문의,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맨위로
예스이십사(주)
서울시 영등포구 은행로 11, 5층~6층(여의도동,일신빌딩) 대표 : 김석환   개인정보보호책임자 : 권민석 yes24help@yes24.com 사업자등록번호 : 229-81-37000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05-02682호 사업자 정보확인 호스팅 서비스사업자 : 예스이십사(주)
고객만족센터 T.1544-3800
상담 전화번호
  • 중고샵 문의 1566-4295
  • 영화예매 문의 1:1 문의
  • 공연예매 문의 1544-6399
1:1 문의하기 자주 묻는 질문 상담시간 안내
YES24 수상내역 정보보호 관리체계 ISMS인증획득 개인정보보호 우수사이트
소비자피해보상보험 서울보증보험
고객님은 안전거래를 위해 현금 등으로 결제 시 저희 쇼핑몰에서 가입한 구매안전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서비스가입사실 확인
EQUUS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