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끼리
네팔인 아버지와 조선족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열세 살 ‘나’는 문서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소년이다. 아버지는 한국에 와 십수 년을 일했지만 몸만 버렸고, 어머니는 가난을 지긋지긋해하다 딴 남자에게로 도망쳤다. 축사를 개조해 만든 쪽방, 이웃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 역시 비슷한 처지다. 누구는 손가락을 잃었고, 누구는 화재에 목숨을 잃었다.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이룬 것은 인도에서 온 ‘노랭이’가 유일한데, 그는 혼자 비정하게 돈을 모아 따돌림을 당하는 형편이다. ‘나’는 아버지의 생일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귀국 선물을 사들고 귀가하던 ‘노랭이’가 누군가로부터 습격을 받는 장면을 목격한다.
2. 아홉 개의 푸른 쏘냐
러시아 여인 쏘냐의 이야기가 달팽이 ‘나’와 한국인 남자 ‘그’의 시점에서 교차서술된다. ‘나’는 사랑하는 이를 두고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실려왔다. 무용수로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쏘냐의 짐에 우연히 휩쓸려 들어온 것. 한국에서 러시아 전통춤을 공연할 줄 알았던 쏘냐를 기다리는 것은 퇴폐업소의 무대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는 그녀를 바라보는 한국 남자들의 음탕한 시선과 지배인의 폭력, 아무리 갚아도 줄지 않는 빚과, 몸을 파는 신세로 전락하게 할 운명이다.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옛사랑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향하는데, 병원에는 여권을 빼앗고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한국인 브로커를 흉기로 찌르고 나오던 중 차에 치인 쏘냐가 정신을 잃고 있다.
3. 국향(菊香)
아버지가 죽자 자식들을 남겨두고 홀로 돈 벌러 서울로 떠나가는 어머니는 자꾸 뒤를 돌아다보며 눈시울을 적시던 여자였으나, 사기를 당해 아버지의 유산을 다 날린 뒤로 집장사에 손을 대더니 돈만 밝히는 복부인이 되었다. 행방불명되었던 언니가 어느 날 추레한 모습으로 돌아온 뒤로 ‘나’의 가족은 지긋지긋한 가난과 식모애의 죽음 등, 단절하려 했던 과거의 일을 하나둘씩 떠올리게 되고, 어머니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언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언니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자, 꽃을 좋아하는 천박한 어머니는 마당 가득 가을국화를 심는다.
4. 치어들의 꿈
전업 주부인 ‘나’는 이웃집 선영 엄마와 함께 남의 이야기 따위나 하며 소일하는 현실이 못내 불만족스럽다. 이들은 힘겹기만 할 뿐 누구하나 인정해주지 않는 주부로서의 삶에 갑갑함과 절망감을 느끼고 직장을 가진 여성들을 질시한다. 어릴 적 이웃에 살던 까무 언니와 해후, 그녀의 고단하고 곡절 많은 인생 이야기를 듣고 오는 길에 ‘나’는 드넓은 바다로 떠나는 물고기는 절박한 조건에 있는 치어들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5. 사라져버린 날들
오리 떼가 겨울을 지내고 가는 마을에서 고대 농경유적 발굴을 지휘하고 있는 ‘그’는 10년 전 연인을 잃은 상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벤처단지 조성을 추진하는 세력은 발굴 종료를 재촉하며 그와 대립하고, 서서히 지쳐가는 그의 눈앞에 한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외딴집에 홀로 살다 얼마 전 사망한 사내의 누이인데,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를 공유하며 하룻밤을 보낸다.
6. 자정의 불빛
‘나’는 그냥저냥 별 의식 없이 살아가는 공인회계사다. 어느 날 대학 동아리 동기의 전화를 받고 연극반 후배들의 공연을 보러 간 자리에서 그는 옛사랑 진임을 만난다. 학생운동을 하던 그녀는, 고시 공부에만 힘쓰던 자신을 버려두고 어느 날 노동 현장에 투신, 그의 앞에서 사라졌던 것. 나는 진임에게 다시 욕망을 느끼나, 그녀 앞에서 부르주아의 속물성만을 여지없이 드러낼 뿐이다.
7. 물밑에 숨은 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 곁을 지키는 간병인 ‘여자’는 유부남을 사랑했고, 버림받은 상태. 설 연휴를 꼼짝없이 병원에서 보내야 할 그녀가 일하는 병실에 한 사내가 입원한다. 그녀는 거친 말투의 사내를 처음에는 멀리했으나 사내의 사연을 들으며 차츰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사내는 한동안 관계가 소원했던 부인이 찾아오기로 했다는 말을 꺼내며 기대를 감추지 못하나 그의 부인은 이별을 고하고 사내를 떠나간다. 여자는 사내를 위로하며, 옛날 사람들이 생각했다던 철새들의 겨울나기를 생각한다. 물밑에서 겨울을 보냈다던 새들은 따뜻한 봄을 맞이했을까?
8. 또 다른 계절
부면장이었던 아버지가 위암으로 죽자 집안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큰언니는 돈을 벌러 도회지로 나가고, 중학생인 작은 언니는 책 속으로 숨어들었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변한 엄마의 누에농사를 도와 ‘나’는 형제들과 뽕잎을 따다 누에를 먹이며 쓸쓸하면서도 설레는 사춘기를 보낸다. 그런데 누에가 고치를 지을 무렵 물난리가 나고 둑이 터져 마을 전체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인심은 흉흉해지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제방 붕괴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모함을 당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관청을 찾아가려 하며, ‘나’의 남매는 아버지 첫 제사를 준비한다.
9. 미조(迷鳥)
‘나’는 이혼과 실직 후 도시생활에 대한 환멸을 안고서 이제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고향마을로 돌아온다. ‘나’는 하는 일 없이 무기력하게 폐인처럼 나날을 보내는데, 이웃의 가겟방 노파는 돈만 밝히고, 읍내에서 여관 종업원으로 일하는 여자는 아들을 잃고 만다. 폭풍우에 날리는 길 잃은 새처럼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의 과거 회상과 현재의 상황 서술을 통해 그려진다.
10. 국화야, 국화야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힘쓰다 제적당한 미숙은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지만, 소시민적 삶이 주는 만족만을 구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실망한다. 한편, 미숙이 세 들어 사는 주인집에서 파출부로 일하던 송 할머니는 국화에게도 말을 건넬 만큼 인정 많은 분인데, 아들이 쓰러지자 몸져눕게 된다. 송 할머니의 아들은 플라스틱 회사에서 일하다 납중독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되었으나 다니던 회사도 끝내 문을 닫아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말게 된 것이다. ‘좋아진 세상’이라는 말과 실제로 보고 겪는 모습과의 엄청난 괴리 앞에서 미숙은 고민에 휩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