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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팝 / 록 / 포크 / 소울 음악 모음집 (The Greatest Sixties Alb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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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팝 / 록 / 포크 / 소울 음악 모음집 (The Greatest Sixties Album)

Dusty Springfield, Otis Redding, The Drifters, Aretha Franklin, Dionne Warwick 노래 외 59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Warner Music | 2018년 05월 30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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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팝 / 록 / 포크 / 소울 음악 모음집 (The Greatest Sixties Album)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18년 05월 30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1
  • 01 Son of a Preacher Man - Dusty Springfield
  • 02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 - Otis Redding
  • 03 For What It's Worth - Buffalo Springfield
  • 04 Under The Boardwalk - The Drifters
  • 05 I Say A Little Prayer - Aretha Franklin
  • 06 Walk On By - Dionne Warwick
  • 07 I Got You Babe - Sonny And Cher
  • 08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 The Animals
  • 09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 The Hollies
  • 10 Spanish Harlem - Ben E. King
  • 11 You'll Never Walk Alone - Gerry & The Pacemakers
  • 12 Where Do You Go to (My Lovely) - Peter Sarstedt
  • 13 Alone Again Or - Love
  • 14 Both Sides Now - Judy Collins
  • 15 Moon River (1993 Remastered Version) - Danny Williams
  • 16 I Got Rhythm - The Happenings
  • 17 Excerpt From A Teenage Opera - Keith West
  • 18 Sixteen Reasons - Connie Stevens
  • 19 Shakin' All Over - Johnny Kidd & The Pirates
  • 20 The Young Ones - Cliff Richard & The Shadows
Disc2
  • 01 You Can't Hurry Love - The Supremes
  • 02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 - Marvin Gaye
  • 03 I Got You (I Feel Good) - James Brown
  • 04 Respect - Aretha Franklin
  • 05 Soul Man - Sam & Dave
  • 06 My Girl - Otis Redding
  • 07 In The Midnight Hour - Wilson Pickett
  • 08 Knock On Wood - Eddie Floyd
  • 09 Everybody Needs Somebody To Love - Solomon Burke
  • 10 Walk Like A Man - Frankie Valli & The Four Seasons
  • 11 Saturday Night At The Movies - The Drifters
  • 12 Last Night - The Mar-Keys
  • 13 Mercy, Mercy - Don Covay
  • 14 Do You Want to Know a Secret? - Billy J Kramer & The Dakotas
  • 15 Poor Me - Adam Faith
  • 16 Just One Look - The Hollies
  • 17 Daydream Believer - The Monkees
  • 18 What The World Needs Now Is Love - Dionne Warwick
  • 19 You're My World - Cilla Black
  • 20 Apache - The Shadows
Disc3
  • 01 Unchained Melody (Single Version) - The Righteous Brothers
  • 02 The House Of The Rising Sun - The Animals
  • 03 Wild Thing - The Troggs
  • 04 I'm A Believer - The Monkees
  • 05 You Keep Me Hangin' On - Vanilla Fudge
  • 06 When A Man Loves A Woman - Percy Sledge
  • 07 Stand By Me - Ben E. King
  • 08 Just One Look - Doris Troy
  • 09 Land Of 1000 Dances - Wilson Pickett
  • 10 Green Onions - Booker T. & The MG's
  • 11 Bus Stop - The Hollies
  • 12 China Cat Sunflower - Grateful Dead
  • 13 A House Is Not A Motel - Love
  • 14 Hi Ho Silver Lining - Jeff Beck
  • 15 Just A Little - The Beau Brummels
  • 16 Cathy's Clown - The Everly Brothers
  • 17 No Milk Today - Herman's Hermits
  • 18 Living In the Past - Jethro Tull
  • 19 1969 - The Stooges
  • 20 Kick Out the Jams - MC5
Disc4
  • 01 Satisfaction - Otis Redding
  • 02 Sweet Soul Music - Arthur Conley
  • 03 Get Ready - Ella Fitzgerald
  • 04 Tighten Up - Archie Bell and The Drells
  • 05 Comin' Home Baby - Mel Torme
  • 06 If I Had A Hammer - Trini Lopez
  • 07 Think - Aretha Franklin
  • 08 Sherry - Frankie Valli & The Four Seasons
  • 09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 - Ben E. King
  • 10 Suspicious Minds - Dee Dee Warwick
  • 11 Alfie - Cilla Black
  • 12 Bad to Me - Billy J Kramer & The Dakotas
  • 13 Got to Get You Into My Life - Cliff Bennett & The Rebel Rousers
  • 14 Hello Little Girl - The Fourmost
  • 15 Have I the Right - The Honeycombs
  • 16 Walkin' Back To Happiness - Helen Shapiro
  • 17 Morningtown Ride - The Seekers
  • 18 Ferry Cross The Mersey - Gerry & The Pacemakers
  • 19 Crimson And Clover - Tommy James And The Shondells
  • 20 Suzanne - Judy Collins

아티스트 소개 (64명)

노래 : Dusty Springfield (더스티 스프링필드)
35년여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파퓰러 뮤직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여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는 백인이 부르는 흑인 소울 이른바 ‘블루 아이드 소울’을 1960년대부터 구사하면서 백인 소울의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여가수로, 흑인에 못지 않은 강렬한 보컬 호소력에 팝의 부드러운 느낌을 동시에 지녔으며, 재즈적 감성까지 구현해 낸 대형 싱어다. 1996년 공전의 반향을 부른 영화 < 접속... 35년여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파퓰러 뮤직의 정상에서 활동했던 여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는 백인이 부르는 흑인 소울 이른바 ‘블루 아이드 소울’을 1960년대부터 구사하면서 백인 소울의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여가수로, 흑인에 못지 않은 강렬한 보컬 호소력에 팝의 부드러운 느낌을 동시에 지녔으며, 재즈적 감성까지 구현해 낸 대형 싱어다. 1996년 공전의 반향을 부른 영화 < 접속 >에 그녀의 노래 ‘The look of love’가 삽입되어 애청되면서 국내의 신세대 팬들과도 친숙해졌다. 1939년 영국 런던에서 메리 이사벨 캐서린 버나데트 오브리엔(Mary Isabel Catherine Bernadette O’Brien)이란 본명으로 태어나 1958년 3인조 보컬 그룹 라나 시스터스(Lana Sisters)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했으며 1960년에는 오빠 디온(Dion), 그의 친구 팀 페일드(Tim Feild)와 함께 더 스프링필즈(The Springfields)를 결성,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다. 더스티 스프링필드로 개명하고 오빠 디온도 팀 스프링필드로 이름을 바꾸며 이듬해 ‘Dear John’으로 데뷔한 스프링필즈는 처음에 차트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1961년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 독자 선정 영국 최우수 보컬 그룹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1963년 발표한 싱글 ‘Island of dreams’와 ‘Say I won’t be there’가 잇따라 영국 차트 5위에 오르면서 인기 그룹으로 비상한다. 하지만 주가를 올리고 있던 시점에 더스티 스프링필드가 솔로활동을 선언하면서 그룹은 해체를 맞는다. 이미 그룹을 통해 풍부한 음색과 가창력을 대중에게 알린 터라 솔로활동은 순풍에 돛단 듯 시작부터 성공가도를 질주했다. 허스키하면서 소프트한 느낌은 로큰롤 밴드가 맹위를 떨치던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 시대에 드물게 여성 솔로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고 처음부터 그녀는 단순한 팝이 아닌 ‘미국적인 소울’의 필을 표현했다. 작곡 팀 마이크 호커와 이보르 레이먼드는 미국 흑인음악의 상징인 모타운 식으로 쓴 곡 ‘I only want to be with you’로 그녀에게 차트4위(미국 12위)라는 좋은 성적을 안겼다. 이 곡은 얼마 전 국내 칼라핸드폰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으며 1976년에는 비틀스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영국의 틴 아이돌 그룹 베이 시티 롤러즈(Bay City Rollers)가 리메이크해 친숙해지면서 명곡으로 자리잡았다. 더스티 스프링필드는 이어 역시 호커와 레이먼드 컴비가 써준 ‘Stay awhile’로 차트13위에 올랐으며 틴 팬 앨리 전통을 계승한 전설적 작곡 콤비 버트 바카라크(Burt Bacharach)와 할 데이비드(Hal David)가 만들어준 ‘I just don’t know what to do with myself’와 함께 3위로 다시 상위권을 점령했다. 디온 워릭(Dionne Warwick)을 키워낸 이들은 영국 여가수로서 드물게 스탠더드와 소울 감성을 동시에 간직한 그녀를 높이 평가해 디온 워릭이 취입했던 곡 ‘Wishin’ and hopin’’을 제공, 마침내 미국차트 6위에 올려 미국에서도 통하는 가수로 만들어 냈다. 이 때 더스티는 뉴욕에 건너와 녹음하면서 영미(英美)를 관통하는 명실상부한 대서양 스타로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Wishin’ and hopin’’에 이어 ‘All cried out’(41위)은 심지어 미국에서만 싱글로 발표되었다. 1964년이 저물어 가던 겨울 오빠 팀 스프링필드가 쓴 곡 ‘Losing you’으로 영국 차트 9위(미국91위)에 오른 그녀는 1965년과 1966년에도 쾌조를 보여 훗날 팝 보석으로 널리 애청된 ‘In the middle of nowhere’(영국8위)와 명콤비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이 쓴 발라드 ‘Some of your lovin’ (영국8위) 그리고 ‘Little by little’(영국17위) 등을 줄줄이 내놓았다. 이 시점에 꼭 기억해야 할 곡은 더스티의 것으로서는 가장 많이 팔렸으며 아직까지 라디오를 통해 오랜 사랑을 받고 있는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엘비스 프레슬리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로 이 곡은 영국차트 정상에 이어 미국에서도 4위를 차지했다. 다시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이 준 ‘Goin’ back’(영국10위)과 ‘All I see is you’(영국9위, 미국20위) 두 곡을 더 히트시킨 그녀는 이 두 곡이 담긴 베스트 앨범 < Golden Hits >를 차트에 6개월 동안 올려놓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러한 성공으로 국제적 팝 스타로 도약, 영국 BBC 텔레비전의 음악프로 MC로 뽑히기도 했다. 당시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지의 여론조사에서 최우수 영국 여가수와 최우수 국제 여가수에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다. 1967년 들어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게 된다. 그녀의 국제적인 명성이 더욱 확산된 가운데 ‘I’ll try anything’(영국13위, 미국40위)이 히트했고, 바카라크와 데이비드 콤비의 곡으로 007영화 < Casino Royale >의 삽입곡인 ‘The look of love’ 또한 미국에서 22위에 올라 변함 없는 인기를 과시했다. 이 곡은 30여 년이 지난 1996년 한국영화 < 접속 >에 삽입되어 천지를 진동시켰다. 1968년에는 팝 명반으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 Dusty in Memphis >를 발표한다. 미국의 소울의 도시 멤피스에서 녹음한 이 앨범은 ‘팝과 소울’의 절묘한 결합으로 빠짐없이 여성 팝 보컬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또한 더스티의 음악을 ‘블루 아이드 소울’로 일컫게 하는데 결정타가 됐던 작품이기도 하다. < Dusty in Memphis >에선 미국 10위를 기록한 ‘Son of a preacher man’를 비롯해 ‘Don’t forget about me/Breakfast in bed’ ‘The windmills of your mind’(스티브 매퀸이 주연한 영화 < Thomas Crown Affair >의 주제곡으로 1999년에 영화가 피어스 브로스넌 주연으로 리메이크되면서 이 곡도 스팅의 노래로 리메이크됐다)가 연속 싱글로 나왔지만 비평적 찬사만큼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1970년 발표한 앨범 < A Brand New Me > 이후 그녀의 활동과 인기는 눈에 띄게 후퇴했으며 1972년 < See All Her Faces >와 이듬해 < Cameo >는 차트에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곧 사라져 버렸다. 이후 긴 휴식기를 마치고 1978년 < It Begins Again >, 1979년 < Living Without Your Love >, 1982년 < White Heat > 앨범을 발표하는 등 다시 왕성한 활동을 펼쳤지만 자신의 앨범보다는 딴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한 곡들에서 인기를 누리는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1984년에는 스펜서 데이비스(Spencer Davis)와 ‘Private number’를 불러 인기를 얻었고, 1987년에는 카펜터스의 리처드 카펜터(Richard Capenter)의 앨범에서 ‘Something in your eyes’를 불러 건재함을 과시했다. 바로 직전 1987년 펫 샵 보이스(Pet Shop Boys)와 호흡을 고른 곡 ‘What have I done to deserve this’는 그녀의 재기를 몰고 온 기폭제가 됐다. 평소 더스티 스프링필드를 존경해 온 펫 샵 보이즈의 초청으로 참여해 고수(高手)의 멜로디 파트 가창력을 시범한 이 곡은 영국 차트2위를 기록한 데 이어 미국차트도 강타, 역시 2위를 밟았다. 이 곡의 대성공과 함께 다시금 자신의 솔로 히트곡들을 생산, 1989년 역시 펫 샵 보이스가 만들어 준 영화 < Scandal >의 삽입곡 ‘Nothing has been proved’를 영국차트 16위까지 올렸으며, 같은 해 ‘In private’도 14위에 랭크시키며 관록의 힘을 과시한다. 펫 샵 보이스가 4곡을 맡은 1990년 앨범 < Reputation >도 차트38위까지 오르는 히트를 기록했다. 50살 초로(初老)에도 활동의 가속페달을 밟으며 노익장을 과시한 그녀는 1995년에도 < A Very Fine Love >를 발표했지만 얼마 후 유방암으로 투병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병이 호전되어 가던 1999년 3월 그녀는 엘튼 존과 함께 로큰롤 명예전당에 이름을 올린 지 10일 후에 암이 재발하면서 6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소울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한때 ‘소울의 왕(King of soul)’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멤피스의 음반사 스택스 특유의 반 박자 늦은 백비트 곡이 다른 소울가수와의 차별 점이다. 흑인 소울가수 가운데 드물게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1967년 시그니처 송 ‘Respect’도 그가 써서 1965년에 발표한 곡(차트순위 35위)이다. 롤링 ... 소울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한때 ‘소울의 왕(King of soul)’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멤피스의 음반사 스택스 특유의 반 박자 늦은 백비트 곡이 다른 소울가수와의 차별 점이다. 흑인 소울가수 가운데 드물게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1967년 시그니처 송 ‘Respect’도 그가 써서 1965년에 발표한 곡(차트순위 35위)이다.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리메이크하는 등 1960년대 소울과 록이 동반자 사이임을 증명했다. 실제로 그는 출연진이 백인 뮤지션 일색이었던 1967년 몬터리 페스티벌에 출연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41년 조지아주 도손 출신으로 샘 쿡(Sam Cooke)에 영향 받아 가수활동에 입문했다. 전성기였던 1967년 12월에 비행기추돌로 27살에 요절했다. 유작으로 1968년 전미차트 정상을 밟은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는 톤을 낮춘 소울 발라드의 수작. 이외에 ‘I’ve loving you too long (To stop now)’와 ‘Try a little tenderness’도 잊을 수 없는 레퍼토리들이다.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멤버 : 로한 데라노 터니(Rohan Delano Turney, 보컬), 피터 라마(Peter Lamarr, 보컬), 빅터 비노에(Victor Bynoe, 보컬), 패트릭 알란(Patrick Alan, 보컬)
노래 : Aretha Franklin (아레사 프랭클린)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 20세기를 정리하는 작업이 러시를 이루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궁금중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가수는 누구였는가? 많은 음악팬들이 먼저 프랭크 시내트라 또는 앨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릴 것이다. 신세대 같으면 머라이어 캐리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구 대중음악계는 거의 그 주인공을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으로 낙점한 상황이다. 먼저 시사주간지 < 타임 >이 선정한 ‘20세기 문화예술인 20인’을 보자. 여기에는 대중음악인 넷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프랭크 시내트라, 비틀즈, 밥 딜런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20세기는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놀라운 사실은 로큰롤의 황제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자타가 공인하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빠졌다는 점이다. 두 대중음악사의 거인은 누가 봐도 아레사 프랭클린에 비해서는 대중적 지명도나 후대의 영향력 측면에서 앞선다. 만약 흑인 음악인 한 사람을 꼽았어야 했어도 그 주인공은 마이클 잭슨이 되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왜 아레사 프랭클린인가? 아레사 프랭클린이 명단에 오른 이유는 마이클 잭슨을 누른 ‘흑인의 대표성’ 때문으로만 볼 수 없다. 흑백을 떠나서 팝 음악계 전체를 진동시킨 ‘경이로운 가창력’ 때문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42년생 미국 멤피스에서 태어나 1960년대말 스타덤에 오른 왕년의 가수지만 지금도 노래하면 음악관계자들은 만장일치로 그녀를 거명한다. 얼마나 노래를 잘하길래 그런가.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가 1967년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의 지원 아래 어틀랜틱 음반사에서 처음 앨범을 취입했을 때 반주를 해준 사람들. 이른바 세션맨들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노래솜씨에 그만 넋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이런 환상적인 레코딩에 내가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며 어울려 춤을 췄다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의 유선방송국VH원이 주최한 ‘디바스 라이브’(음반으로도 나왔다) 공연에서는 관람객 중 한 사람이었던 여배우 사라 제시카 파커가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다. “아레사를 보기 전에 난 스타에 반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난 홀린 기분이다. 아레사가 나한테 ‘옷이 멋져요’ 하길래 난 주저없이 ‘가지세요’라고 했다. 발가벗고 여기를 나가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녀는 옷을 가질만하다!” 지난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천부적인 가창력으로 사람들의 혼을 뺐다. 그녀는 시상식장에서 노래부르기로 돼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병으로 불참하게 되자 갑작스럽게 대타로 뛰게 되었다. 뒷무대에서 불과 몇분 연습하고 나서 그녀는 거뜬하게 파바로티의 ‘네순 도르마’를 불렀다. 더욱이 72인조 오케스트라에 맞추기 위해 그 곡을 파바로티의 키로 노래했다. 주최측, 오케스트라 단원 그리고 객석 모두가 ‘경외’의 박수를 쳤다. 그녀에 대한 평자들의 찬사와 칭송은 끝이 없다. ‘형언하기 어렵다’(No other description will do)가 대부분이다. 음악평론가 벤 에드먼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난 50년간 우리를 놀라게 하고 겁에 질리게 한 또다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국의 록잡지 < 모조 >는 지난해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을 음악관계자 설문을 통해 선정한 바 있다. 여기서 1위는 말할 것도 없이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 모조 >측은 2위와 표차를 엄청나게 내고 그녀가 넘버 원 싱어가 된 것에 놀랐다. 다시금 아레사 프랭클린이 남녀, 흑백, 장르를 통틀어 ‘20세기의 최고 가수’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 그녀는 소울의 영원한 여왕 그녀의 음악은 목소리와 창법의 미학뿐 아니라 시대성이 있다. < 타임 >지가 20세기의 위대한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으로 뽑은 진정한 이유다. 1960년대 후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불러 유명한 곡 ‘존경(Respect)’, ‘체인 오브 풀스(Chain of fools)’, ‘생각해요(Think)‘ 등에는 당시 흑인들의 당당한 의식이 배어 있다. 흑인 민권운동의 불길이 솟아오르던 그 무렵 흑인들은 백인 지배사회에서 결코 흑인들이 열등한 인종이 아니며, 따라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흑인의 영혼을 의미하는 소울(Soul)이었다. 소울 음악은 때문에 목청을 돋워 질러대는 ‘샤우트’를 특징으로 했다. 국내에서도 록의 비조로 불리는 신중현이 소울을 창조적으로 도입해 김추자, 박인수, 펄 시스터즈와 같은 소울 가수가 1970년대 초반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1967년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흑인 폭동이 발발했을 때 성난 흑인 민중들은 백인들에게 존경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아레사 프랭클린의 그해 히트곡 ‘존경’을 시위대의 찬가로 불렀다. 이듬 해 디토로이트 시장 제롬 카바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사회가 이때부터 흑인의 음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인들도 흑인의 레코드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다시 말해 흑인 소울의 존재를 만천하에 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神)의 조리에 의한 거 같은 지존(至尊)의 가창력으로 그것을 전했으니 그 위력은 더할 나위가 없다. 또 지적하는 바이지만 ‘존경’을 듣고 동료가수 오티스 레딩은 혀를 내둘렀다. 이 곡은 그가 쓴 곡으로 직접 불러 발표한 바도 있는데, 아레사 프랭클린이 완전히 새롭게 그리고 완벽하게 소화한 것을 듣고 질려버린 것이었다. 오티스 레딩의 경탄. “난 내 노래를 잃어버렸어. 저 여자가 내 곡을 빼았아갔어!” 아레사는 조금도 변함없는 ‘소울의 여왕(Queen of soul)’으로 통한다. ‘여성 소울(Lady soul)’이란 별명도 있다. < 디바스 라이브 >에서 아레사 프랭클린과 호흡을 맞춘 머라이어 캐리도 그렇게 호칭하고 있지만 이 호칭들은 영원히 아무도 넘아다볼 수 없을 것 같다.
R&B, 팝 보컬 R&B, 팝 보컬
노래 : Ben E. King (벤 이 킹,Benjamin Earl King)
노래 : Gerry & The Pacemakers (게리 앤 더 페이스메이커스)
브리티시 비트 팝 그룹 브리티시 비트 팝 그룹
노래 : Peter Sarstedt (피터 사르쉬테트)
노래 : Danny Williams (대니 윌리엄스)
노래 : Connie Stevens (코니 스티븐스)
굴지의 흑인음악 전문음반사 ‘모타운의 상표’가 된 여성 트리오 보컬그룹. 1964년 ‘Where did out love go’를 필두로 발표한 다섯 곡이 내리 전미차트 1위를 차지하는 등 1969년까지 넘버원 곡만 12곡을 쏟아내는 가공할 슈퍼스타덤을 과시했다. 1944년 디트로이트 태생인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를 축으로 매리 윌슨(Mary Wilson), 플로렌스 발라드(Florence Ballar... 굴지의 흑인음악 전문음반사 ‘모타운의 상표’가 된 여성 트리오 보컬그룹. 1964년 ‘Where did out love go’를 필두로 발표한 다섯 곡이 내리 전미차트 1위를 차지하는 등 1969년까지 넘버원 곡만 12곡을 쏟아내는 가공할 슈퍼스타덤을 과시했다. 1944년 디트로이트 태생인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를 축으로 매리 윌슨(Mary Wilson), 플로렌스 발라드(Florence Ballard)와 함께 그룹이 결성되어 1959년부터 노래했다. 이듬해 1960년 모타운의 탐라 레이블과 계약해 처음에는 전문 백업보컬 팀으로 움직였다. 곧 섹시한 다이아나 로스의 투명한 음색을 전매특허로 시대를 석권했다. 그녀는 1970년부터 개시한 솔로활동을 통해서도 슈프림스 시절에 버금가는 히트퍼레이드를 전개했다. 우리에겐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와 호흡을 고른 1981년 듀엣 곡 ‘Endless love’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본고장 팝 팬들은 여전히 1960년대 슈프림스 시절의 추억을 자극하는 ‘Come see about me’, ‘Stop! In the name of love’, ‘Love child’를 좋아한다.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 ‘모타운(Motown) 가의 황태자’ 마빈 게이의 보컬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달콤한 크루닝(crooning) 창법과 샘 쿡의 호소력 짙은 가스펠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한 그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보컬로 창조해내며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그의 보컬은 ’보컬 연주의 대가’라는 영광스런 칭호에 어울린다. 그의 사후 등장한 수많은 소울 팝 가수들은 모두 그의 보컬에 영향받았음을 인정하며 그의 음악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단지 탁월한 창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록음악 역사에 있어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아티스트의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몸소 실천한 음악인이라는 점에서 그를 더욱 기억하게 한다. 70년대가 되기 전 만해도 밤낮으로 사랑과 낭만만을 얘기하며 소일하던 모타운식 소울 음악은 당시 대다수 흑인들이 공감해오던 ‘어두운 현실’엔 둔감했다. ‘팔리는 음악’을 원했던 회사측과의 마찰은 불가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을 위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이런 산고 끝에 록 역사를 대표하는 명반 < What’s going on >(1971)은 탄생했다 소울 음악은 60년대 그가 소속되어있던 모타운 레코드사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음악 문법으로 자리 잡은데 이어, 그는 같은 회사 소속의 스티비 원더와 함께 미국 대도시 후미진 곳에서 벌어지는 ‘게토 리얼리티를’ 자신의 노래에 담아냄으로써 소울이 ‘사회성’이란 화두를 본격적으로 끌어내는데 기여를 했다. 스티비 원더와 함께 그는 소위 후배 흑인 뮤지션들의 ‘대부’이다. 8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의 분수령을 일군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의 프론트 맨 척 디(Chuck D)는 1988년도 명반 <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을 발표하며 롤링스톤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나는 이번 앨범에서 힙합의 < What’s going on > 버전을 내놓고 싶었다’ 라고 얘기할 정도로 마빈 게이의 유산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했다. 마빈 펜츠 게이 주니어라는 본명으로 1939년 4월 2일 워싱턴 디씨에서 태어난 그는 목사를 아버지로 둔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다소 억압적인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음악에 몰입하게 해 아버지 때문에 억눌린 영혼을 달래줄 위안이 된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군에 입대,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락 앤 롤 스타 보 디들리(Bo Didely)를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된다. 1958년 두왑 그룹인 레인보우에 가입, 이듬해엔 시카고로 진출해 ‘문 그로우’ 라는 두왑밴드에서 활동하며 체스(Chess) 레코드에서 그의 ct첫 싱글 ‘Mama roocie’를 녹음한다. 미국 전역 투어에 나선 문 그로우는 디트로이트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고, 당시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 주니어(Berry Gordy Jr.)는 3옥타브가 넘는 그의 탁월한 테너 창법에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모타운과 전속 계약을 체결하며 베리 고디와 운명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처음엔 세션 드러머로서 모타운의 일원이 된 그는 모타운 간판스타이자 작곡가인 스모키 로빈슨과 함께 활동한다. 1961년 그는 사장인 베리 고디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다(무려 18살의 연상). 사장과 사돈관계가 된 덕에 회사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얻게 된 그는 이듬해 첫 싱글 ‘Stubborn kind of fellow’(1962)를 발표하고 흥겨운 댄스 팝 ’Hitch hike’(1962)로 빌보드 Top 40에 진입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냇 킹 콜과 프랭크 시나트라의 크루닝 창법에 영향 받았던 그는 당시 격조 있는 발라드 음악을 원했지만, 회사 측은 그에게 흥겹게 흔들기 좋은 빠른 댄스 음악만을 요구했다. 큰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닌 덕에 유난히 여성 팬들이 많이 따랐던 그였지만, 무대에 올라 몸을 흔들며 청중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은 늘 못 마땅했다. 후에 그가 회고하길 ‘나는 무대에 나가 청중들 앞에서 내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했을 정도이니, 얼마 후 있을 회사 측과 창작권을 두고 생긴 갈등은 이미 데뷔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1960년대 내내 그는 모타운 사를 통해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했다. ‘Pride & joy’(1963)로 처음 Top 10에 진출한 그는 잇달아 발표한 싱글 ’How sweet it is’(1964), ‘Aint that peculiar’(1965)을 Top 10에 진입시킨다. 솔로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져갈 무렵 그는 모타운 소속의 실력 있는 디바들과 듀엣 곡을 많이 취입했는데, 메리 웰즈(Mary Wells)과 함께 한 ’What’s the matter with you baby’(1964)을 시작으로, 킴 웨스튼(Kim Weston)과 함께 한 ’It takes two’(1966), 70년대 다이아나 로스(Diana Ross)와 함께 한 ‘My mistake is to love you’(1974)등이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인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디바는 바로 타미 테렐(Tammi Terell)이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966), ’Your precious love’(1967),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1968), ’You’re all I need to get by’(1968) 모두 Top 10에 진입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팝 역사상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콤비’는 안타깝게도 타미 테렐의 요절로 인해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에게 첫 팝 차트 넘버원의 영광을 안겨준 ‘I heard it through grapevine’(1968)로 그의 인기전선은 절정에 다다랐다. 이듬해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1969), ’That’s the way love is’(1969)를 Top 10에 진입시키며 인기는 더해갔지만, 이내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만다. 데뷔 때부터 창작권을 두고 벌어진 회사 측과의 끈질긴 줄다리기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그에게 투쟁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달콤한 사랑타령으로 점철된 지금까지의 음악과는 다른, 자신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표출해보길 갈망했던 그는 ‘자신의 음악’을 얻기 위한 힘겨운 투쟁 끝에 결국 모타운 사의 백기를 받아내며 ‘음반 제작에 관한 모든 전권을 그에게 위임할 것’이라는 전리품을 얻어낸다. 흑인의 입장에서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의 비참한 현실을 늘 생각해왔던 그는 주저 없이 이런 자신의 고민을 음악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했다. 흑인 빈곤문제, 실업, 월남전등, 70년대 초 그의 눈에 보인 흑인의 현실은 ‘참담함’이었다. 핑크빛 미래를 노래했던 발랄한 60년대의 흑인 음악은 슬라이& 페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등 기라성같은 흑인 뮤지션들에 의해 한층 진지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것이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1971)이었다. 흑인 음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놓은 컨셉 앨범 < What’s going on >은 회사 측에 우려에도 불구, 앨범 수록 곡 중 무려 4곡(What’s going on, God is love, Mercy, mercy, me Inner city blues)이 Top 10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뒀고, 앨범은 지금까지 8백만장이라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스트링을 동원한 세련된 연주 편곡, 참회록을 쓰듯 스토리 텔링(Storytelling) 방식으로 진행되는 진솔한 자기 고백은 당시 소울음악에선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범 < What’s going on >은 그의 음악 경력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음악성에도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Inner city blues’(1971)에서 목격했던 퍼커션의 가열 찬 울림은 70년대 흑인 음악의 대표 트렌드인 ‘펑키 사운드’로의 변화를 예고했고, 앨범으로는 발표 안 된 저주받은 싱글 ‘You ’re the man pt. 1, 2’(1972)에선 가성, 두성, 진성 등 한층 다채로워진 그의 보컬 연기가 압권이다. 재즈에 대한 평소의 관심은 영화 음악 작곡으로도 이어져 노래보다 연주 쪽에 관심이 반영된 영화음악 앨범 < Trouble man >(1972)으로 이어진다. < What’s going on >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그는 이전의 고뇌하는 흑인 지성임을 포기하고 이번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랑의 전령사로 변신한다. 그의 두 번째 넘버원을 안겨다 준 앨범< Let’s get it on >(1973)은 ‘성 행위’를 찬미하는 노래들로 가득 찬 앨범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어리둥절하게 했다. 빌보드 No.1 곡인 ‘Let’s get it on’은 그를 단번에 섹시 스타로 변모시켰고, 그가 앨범에서 얘기했던 ’자연스러운 성의 표현 ‘은 80년대 들어 프린스나 조지 마이클같은 팝 스타들의 음악 세계로 계승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첫 아내였던 안나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재니스라는 여인과 이미 두 집 살림을 차려 아이까지 낳았던 그의 성적 편력은 결국 아내와의 별거로 이어졌고, 한동안 그 충격에 슬럼프에 빠져 마약으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재기의 몸부림을 친 그는 베리 고디의 주선으로 만난 레온 웨어(Leon Ware)의 곡으로 채워진 앨범 < I want you >(1976)을 발표하지만, 수록곡 ‘I want you’, ’After the dance’가 약간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히트곡에 목말라하던 그는 1977년 런던 팔라디움 구장에서의 콘서트 더블 실황 앨범< Live at the Palladium >을 발표하며, 13분이 넘는 디스코 곡 ‘Got to give up’을 수록하고, 4분대의 싱글로도 커팅, 그의 세 번째 넘버 원 싱글로 등극된다. 전형적인 댄스뮤직이었던 ’Got to give up’은 팝 차트, 앨 앤 비 차트 1위를 석권하며 그에게 가수로서 회생의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Got to give up’의 기쁨도 잠시, 결국 그는 안나와 이혼을 하게 되고 ,이혼에 대한 위자료를 다음에 발표하는 앨범 인세로 한다는 합의를 보게 된다. 앨범 < Here, my dear >(1978)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고 수록 곡 ’When did you stop loving me, When did I stop loving you’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남과 해어짐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그의 뼈저린 고해성사는 아름다운 가사말과 편곡의 세련됨에도 불구, 이렇다할 히트 싱글 없이 앨범은 파묻히며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안 알려진 앨범이 되고 말았다.(엎친데 덮친격으로 안나는 앨범 내용이 사생활 침해라며 소송을 걸기에 이른다.) 첫 번째 아내와의 이혼에 이어 다시 몇 년간은 그에게 혼란의 시기였다. 두 번째 아내였던 제니스와 급기야 파경에 이르렀고, < Love Man >(1979-발매 취소)과 < In our life time >(1981)의 흥행실패는 그를 더욱 마약으로 치닫게 했다. 급기야 그는 1981년 20년간 그에게 산전수전(?) 다 겪게 했던 모타운 사를 떠나, 하와이로 이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한다. 정확히 1년 후인 1982년, CBS 레코드와 전속 계약하며 그에겐 마지막 걸작으로 남게 된 < Midnight Love >(1982)를 발표한다. ‘Let’s get it on’에 버금갈만한 농염한 보컬이 인상적인 싱글 ‘Sexual healing’이 팝 차트 3위까지 오르며 그는 화려하게 재기한다. 공백기 동안대중들과의 소원함을 해소하기 위해 TV 출연 등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그는 베리 고디와 함께 토크쇼에 출연해 둘의 악연(?)을 만회해보려고도 했고, NBA 농구 경기때 미국 국가를 소울 창법으로 불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연주했을 때 이후로 최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재기 의지는 이내 사그러들고 있었다. 이미 코케인에 찌들 때로 찌든 그의 몸은 말을 듣질 않았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았던 목사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조금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비극은 그의 아버지와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되고, 1984년 4월, 그의 45회 생일을 하루 앞둔 날, 심한 다툼 끝에 화를 가누지 못한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듬해인 1985년 모타운사와 CBS가 공동으로 그의 미 발표곡을 모은 < Dream of a life time >과 < Romantically Yours >를 내놓는다. 그에 대한 재평가도 활발히 이뤄져 < 롤링스톤 >을 비롯한 록 전문지들은 앞 다투어 그의 앨범 < What’s going on >을 팝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추대하기 시작했고, 198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다.
노래 : James Brown (제임스 브라운,James Joseph Brown Jr.)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펑크(Funk)의 선구자’, 혹은 ‘소울의 대부’ 등의 화려한 수식어로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고 있는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은 1960, 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인 소울 싱어다. 가스펠에 뿌리를 둔 음악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그는 결국 소울에서 리듬 앤 블루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장르 해석을 이끌며 ‘아메리칸 블랙 뮤직’의 혁명을 몰고 온 인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소위 ‘Mr. 다이너마이트’라고 불려질 정도로 폭발적인 보이스를 지녔던 브라운은 자신의 매력이라 할만한 흡입력 강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펑키(Funky), 소울, R&B 같은 흑인장르를 토해내며 수많은 음반을 레코딩했고, 정열적인 무대매너를 앞세워 왕성한 음악활동을 보여줬다.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 그의 재능은 개성 넘치는 플레이의 광분과 더불어 운동선수와도 흡사한 스태미나와 순간적인 타이밍에서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게다가 그가 온몸으로 절규하듯 내지르는 울분과 광기에 가까운 몸짓은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흑인들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고, 또한 백인들마저도 그 열정에 매료되어 감탄과 박수를 보낼 지경이었다. 흑인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 역시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싱어 송 라이터와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을 동시에 겸비할 정도로 뛰어난 음악성을 지녔던 그의 존재는 엇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레이 찰스(Ray Charles)나 샘 쿡(Sam Cooke)과 같은 소울 싱어들과 라이벌로 비견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장르를 일궈냈던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 the Family Stone)이나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과도 비교 대상이었지만, 그 분야에서 일찌감치 여타 아티스트보다 펑크(Funk)를 먼저 시도했던 인물로 지금까지도 널리 팝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33년 미국 남부의 시골태생으로 어린 시절 빈민가에서 성장한 제임스 브라운은 파워풀하며 깊이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주위에 알려지면서 금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브라운은 1940년대 중반 소울 싱어 바비 버드(Bobby Byrd)의 도움을 받아 그와 함께 가스펠 그룹에서 노래를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제임스 브라운은 1956년 ‘Please, please, please’(5위)를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첫 데뷔를 장식했다. 이 싱글은 미국과 영국에서 호평을 얻어냈고, 1959년에 발매된 두 번째 싱글 ‘Try me’(48위)의 성공으로 브라운은 히트퍼레이드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브라운은 자신의 끼가 묻어난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선보이며 싱글 ‘Think’(33위), ‘Night train’(35위), Prisoner of love(18위), ‘Out of sight’(24위), ‘I got you (I feel good)’(3위) 등을 히트시켰으며 공연 실황을 담아낸 < Live At The Apollo >(1963)을 통해서 브라운은 음악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 라이브 앨범과 1965년에 발매된 < Papa’s Got A Brand New Bag >의 연이은 상업적 성공으로 브라운은 백인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켜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계속해서 그는 1969년 < Say It Loud I’m Black I’m Proud >를 발표하며 일련의 기간동안 흑인 음악계 최고의 슈퍼스타덤에 올랐다. “나는 흑인이고,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이렇게 외쳐대는 이 작품에서 브라운은 연인을 떠나보내는 심경을 애절하게 표현한 ‘Goodbye my love’(9위)와 소울 필이 가득한 ‘Licking stick’(2위) 등 그만의 열정이 녹아든 곡들을 수록하며 소울 싱어로서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당시 라이브로 녹음한 더블 앨범 < Sex Machine >(1970)을 발표했고, 국내 CF에 쓰여지면서 너무나도 유명해진 ‘It’s a man’s man’s man’s world’ 같은 곡을 배출해냈다. 또한 이듬해부터 < Hot Pants >(1971), < Get on the Good Foot >(1972)등이 계속해서 히트했고, 골드를 기록한 음반 < The Payback >(1973), < Hell >(1974)을 발표하며 의욕적인 음악활동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후부터 브라운은 뮤지션으로서 퇴보의 길을 걷게된다. 그간 조금씩 쌓여갔던 개인적인 재정난과 마약문제로 결국 감옥투옥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브라운은 별다른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Living in america’(4위)를 히트시킨 < Gravity >(1986)와 2년 뒤 < I’m Real >(1988)을 발표하며 1980년대 말까지 음악활동의 명맥을 이어갔다.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은 후대에 와서 랩/힙합 뮤지션들의 앨범에 종종 샘플로 쓰여지면서 다시금 재평가 받기에 이르렀고, 현재 팝 계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뮤지션으로 남아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록음악과 흑인음악에 걸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뮤지션중의 한 명으로 손꼽을 만큼 음악을 통해서 분출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과도 같았던 메시지는 강렬했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브라운은 이런저런 가정적 불화와 개인적 사생활의 비극까지 겹치면서 음악활동 또한 저조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1990년대에는 힙합 비트를 시도한 < Universal James >(1992)를 발표했고, 새롭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려고 시도했던 < I’m Back >(1998)같은 음반을 발표해 음악계에 다시 돌아왔음을 선언했지만 대중들에게 별다른 호응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쳤던 제임스 브라운. 이제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서 그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격상되고 있다.
노래 : Sam & Dave (샘 앤 데이브)
멤버 : 샘 무어(Sam Moore), 데이브 프레이터(Dave Prater) 멤버 : 샘 무어(Sam Moore), 데이브 프레이터(Dave Prater)
노래 : Eddie Floyd (에디 플로이드)
가수, 작사가 가수, 작사가
노래 : Frankie Valli (프랭키 발리,Francis Stephen Castelluccio)
멤버 :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si:1935∼) 1961년 뉴저지주(州) 뉴어크에서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 멤버 :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si:1935∼)

1961년 뉴저지주(州) 뉴어크에서 프랭키 볼리(Frankie Valli:1937∼), 토미 드비토(Tommy DeVito:1936∼), 보브 가우디오(Bob Gaudio:1942∼), 닉 매시(Nick Massi:1935∼)가 모여 결성했다.

1962년 《셰리 Sherry》를 시작으로 5년 동안 무려 25곡이 히트했다. 버라이어톤스(Varietones)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으며, 포 러버스(Four Lovers)로도 알려졌다. 리드싱어 프랭키 볼리의 높은 가성으로 잘 알려졌으며, 이탈리아계 미국인의 두왑에 기반을 둔 화음 중심의 보컬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프로듀서 보브 크루(Bob Crewe)와 함께 베이스 연주자 가우디오가 주로 작곡을 맡아 리듬앤드블루스와 로큰롤의 히트곡을 냈다. 인기순위 톱 10에 기록된 히트곡으로는 《빅 걸스 돈트 크라이 Big Girls Don’t Cry》(1962), 《워크 라이크 어 맨 Walk Like a Man》(1963), 《돈 (고 어웨이) Dawn (Go Away)》(1964), 《레츠 행 온! Let’s Hang On!》(1965) 등이 있다. 3옥타브에 이르는 음역의 소유자였던 볼리는 솔로로도 활동하여 《캔트 테이크 마이 아이스 오프 오브 유 Can’t Take My Eyes Off of You》를 히트시키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침체기에 접어들었으나 1970년대 중반 볼리가 《마이 아이스 어도어드 유 My Eyes Adored You》 《그리스 Grease》 등의 싱글을 발표하여 인기순위 1위에 올랐고, 그룹은 《후 러브스 유 Who Loves You》와 《디셈버 1963 (오 홧 어 나이트) December 1963 (Oh What a Night)》가 히트하여 한때 인기를 회복하기도 했다. 1990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다.
노래 : Billy J Kramer (빌리 제이 크레이머,William Howard Ashton)
노래 : Adam Faith (아담 페이스)
노래 : Monkees (몽키즈 (팝/락 밴드))
1964년의 비틀스 선풍은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뒤바꿔놓을 만큼의 혁명적인 현상이었다. 비틀스의 살인적 인기와 그에 따른 엄청난 부는 홍보, 판매, 팬 관리 등 모든 부문에 전략과 전술의 개념이 도입되어 조직적으로 실행된 결과였다. 음악 관계자들은 비틀스의 성공을 통해서 이른바 ‘대중접근’의 방식에 눈이 떴다. 비틀스 선풍은 또한 영국 출신 그룹들의 미국 진출 붐을 초래했다. 미국에 상륙한 영국 그룹들은 미국가수... 1964년의 비틀스 선풍은 모든 사람들의 의식을 뒤바꿔놓을 만큼의 혁명적인 현상이었다. 비틀스의 살인적 인기와 그에 따른 엄청난 부는 홍보, 판매, 팬 관리 등 모든 부문에 전략과 전술의 개념이 도입되어 조직적으로 실행된 결과였다. 음악 관계자들은 비틀스의 성공을 통해서 이른바 ‘대중접근’의 방식에 눈이 떴다. 비틀스 선풍은 또한 영국 출신 그룹들의 미국 진출 붐을 초래했다. 미국에 상륙한 영국 그룹들은 미국가수들을 젖히고 무대를 완전 장악, 미국인들의 기를 죽였다. 언론은 그것을 ‘영국의 침공’이라고 했다. 미국은 남의 잔치에 땅을 빌려준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어떤 형태로든’ 미국의 대중음악계는 자존심 회복이 요구되었다. 이윽고 두 명의 미국인이 비틀스에 맞서는 미국 그룹을 만들어 긍지를 되찾고 그들처럼 막대한 부를 창출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프로듀서 밥 라펠슨과 버트 슈나이더였고 그들의 기획포인트는 ‘조립식 비틀스의 창조’였다. 그 기획하에 그룹 몽키즈가 탄생되었다. 당시 콜롬비아 영화사 사장 아들인 버트 슈나이더와 재능있는 제작자 밥 라펠슨은 리차드레스터가 만든 비틀스 영화(A Hard Day’s Night)의 대성공을 주시하고 거기서 ‘비틀스 같은 4인조 그룹을 만들어보자’는 뜻을 구체화했다. 그들은 65년 레이버트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먼저 주요 헐리우드 업계지에 구인광고를 냈다. “텔리비전 새 시리즈에 출연할 17~21세의 네 익살꾼을 찾습니다.” 슈나이더와 라펠슨은 한 달간 4백 37명의 응모자를 오디션했다. 응모자들 가운데는 스티븐 스틸스와 나중 희대의 연쇄살인사건을 일으킨 찰스 맨슨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스틸즈가 오디션을 통과했더라면, 록계는 수준높은 음악을 선보인 ‘버팔로 스프링필드’나 ‘크로스비 스틸스 & 내시’를 배출하지 못하게 됐으리라. 정말 스틸스에게는 불합격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사진 잘 받고 활달하며 연예계 활동 경력이 일천한 네 명의 소년이 엄선되었다. 아마추어 가수 마이크 네스미스, 그리니치 빌리지의 포크 싱어 피터 토크, 아역배우 출신의 미키 돌렌즈, 그리고 탁월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 데이비드 존스가 행운의 면면들이었다. 그들이 그룹 몽키스가 되었다. 그런데 몽키스 멤버들 중 둘은 가수, 둘은 배우였다. 온전한 뮤지션으로 평가받기에 이미 성분상 몽키스는 ‘절반의 실패’를 안고 들어갔다. 그것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두 제작자는 몽키스라는 ‘상품’을 팔리게 하기 위해 그것의 포장 및 품질관리 작업을 했다. 윌리암 프러울리라는 언더그라운드 영화 감독을 고용하여 몽키스에게 스파르타식 연기 수업을 지도케 했다. “처음에 그들은 당황했고, 몸이 굳어 있었으며, 약간은 촌스러웠다. 때때로 마룻바닥을 굴렸으며, 동물처럼 되라고 요구했다. ‘넌 개야. 기린이 하는 식으로 말하라구. 코끼리하구 놀라구. 마치 찻잔이 얘기하는 듯이 말해야 해.’ 그건 그들을 외적으로 개조해 육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용하려는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프러울리의 말이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창조되어가고 있었다. 포장은 그럴 듯해졌으나 이제 품질이 문제였다. 몽키즈가 직접 곡을 쓰고 연주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라펠슨-슈나이더팀은 그 유명한 돈 커시너에게 접근했다. 돈 커시너는 60년대 초반 ‘크리스탈즈’나 ‘로네츠’같은 여성 보컬그룹 유행을 몰고 온 음악제작업의 대부(代父)로, 그의 영향 아래 닐 세다카-하위 그린필드, 제리 고핀-캐롤 킹 등 명작곡 콤비들이 탄생했다. 커시너는 당시 ‘스크린 젬스 콜롬비아 뮤직’사 대표였는데, 그 때 막 콜젬스 레코드사를 신설했다. 그는 박력있고 흥이 넘치는 사운드를 몽키스에게 기대했지만, ‘함량 미달’이라는 것만을 확인했고, 이들을 훈련시켜 한 앨범에 22곡을 수록하고 다섯 개 TV쇼에 출연시키기엔 시간이 없었다. ‘출고 시점’을 맞춘 생산이 요구되었던 까닭이었다. 할 수 없이 돈 커시너는 그가 거느린 작곡 부대를 활용해야 했다. 그리하여 고핀-킹, 세다카-그린필드, 토큰즈, 닐 다이아먼드 등 프로 작곡가들이 몽키스 긴급 수혈을 위해 동원되었다. 연주 또한 자체로 해결할 수 없어 ‘캔디 스토어 프로페츠’라고 불린 팀이 맡았다. 몽키스는 딴 사람이 써서 연주해준 곡에 입을 벌리고 몸만 놀리면 되었다. 그들은 밴드가 아니라 서커스 원숭이들이었다. 그룹명도 몽키스이지 않았던가. 품질과 포장이 완성된 그들은 드디어 출고 시점인 1966년 6월 NBC TV의 카메라 앞에 섰다. 팬들의 반응은 라펠슨과 슈나이더의 기대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들이 출연한 < 몽키스 위클리 >프로에 대한 시청자들의 호응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버렸다. 그 해 겨울 몽키스 프로는 회당 1천만 명 이상의 시청자가 지켜보았다. 하루에 날아든 팬레터는 무려 5천통에 달했다. 비록 ‘모조된 비틀스’였지만, 몽키스는 오리지널 비틀스만큼 잘 팔렸다. 그들의 노래는 데뷔작 ‘클락스빌로 가는 마지막 열차(The Last Train to Clarksville)’가 차트 1위로 치솟은 것을 비롯, 당시 차트는 그들의 것이었다. 4장의 앨범이 연속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그 해가 가기 전에 셔츠, 코트, 카드, 인형, 도시락 등 몽키스 기획상품은 2천만 달러의 판매고를 올렸다. ‘몽키스 현상’이었다. 그룹 멤버 미키 돌렌즈는 “우리가 상품을 팔고 있다. 우린 몽키스를 팔고 있다"고 자랑스레 외치기도 했다. 그들의 인기가 절정이었을 때 영국의 데이비드 존스라는 이름의 가수가 막 데뷔했다. 그러나 몽키스의 멤버 중 데이비드 존스가 있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데이비드 보위로 바꾸었다. 70년대 대중음악에 획을 그은 슈퍼스타 보위도 몽키스로 인하여 본명을 잃어버렸던 셈이었다. 몽키스는 너무 했다 싶을 정도로 비틀스의 성공 패턴을 본떴다. 데뷔음반을 발매하기 직전 ‘몽키스가 오고 있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수천 장 개첨한 것을 포함, 광고 캠페인에 10만 달러를 썼으며 방송국의 디스크쟈키들에게 일제히 홍보판을 살포했다. 이와 같은 홍보 전략은 비틀스의 전설적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이미 활용했던 방식이었다. 그룹 이름도 비틀스처럼 고의적으로 스펠을 틀리게 했다(딱정벌레는 Beetles인데 Beatles라 한 것과 같이 Monkeys를 Monkees로 썼다.) 레이버트 프로덕션의 한 간부 스스로가 몽키스를 ‘미국판 비틀스’라고 언급할 지경이었다. < 뉴스위크 >지는 그들을 ‘외형적인 비틀스의 직계후손’이라고 표현했고, < 타임 >지는 1967년 “교활한 프로모터 한 팀이 제록스 기계로 비틀스를 복사해 몽키스를 내놓았다”고 코멘트했다. 평론가들은 애초부터 몽키스의 TV쇼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완전한 가수, 완전한 연기자 둘 가운데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비틀스처럼 진지하게 대중음악을 추구하는 밴드가 아니라는 사실은 악평과 무시를 유발시키기에 적합한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들은 예술적 역량이 부족했고 그것을 메울 수 있는 환경에 처하지도 못했다. 물론 몽키스가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몽키스 멤버 중 가장 의식있는 마이크 네스미스는 “우리 음악은 하등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불평을 토로했으며 서서히 비틀스 흉내와 ‘도구로 이용되고 있는 것’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1967년 말부터 묻혀버린 자기 존재를 찾으려는 노력에 돌입, 악기를 연주하고 곡쓰기를 시도했으며, 순회공연을 통해 새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네스미스는 몽키스가 뮤지션으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람들은 우리를 ‘제도권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우린 오늘날 ‘우상 타파적’인 청춘의 가장 진실된 표현이다”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키스의 이러한 국면전환 노력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순간을 노린 기획상품이었기에 그들의 인기는 오래 지속될 리 만무였고 1969년에 이르러서는 시청률이 크게 하락하면서 시리즈는 방영이 중단되었다. 이런저런 문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밴드는 엉망이 되어 갔고 피터 포크가 그룹을 탈퇴했으면 몇 개월 후 몽키스는 마침내 공식 해체되었다. 몽키스는 조립식 비틀스 또는 제 2의 비틀스를 표방했지만, 둘간에는 본질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내재하고 있었다. 비틀스는 영국의 노동계급 출신 젊은이들이 ‘욕구 분출’을 위해, ‘신분 상승’을 위해 음악을 한 ‘자생적’ 그룹이었다. 그들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나 제도권에 진입했지만, 주체의식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그것에 용해되거나 도구화되는 위험을 피하고 오히려 제도권을 요리하고 사회를 ‘지도’할 수 있었다. 반면 몽키스는 제도권 또는 자본계급이 ‘부의 축적’을 위해 만든 ‘인위적’ 그룹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몽키스는 자본가의 목적이 달성됐을 때 효력을 상실했고, 따라서 쉽게 ‘폐기 처분’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를테면 비틀스는 아래에서 발생하여 위로 올라간 그룹이라면 몽키스는 위에서 만들어 아래로 내려보낸 그룹이었다. 몽키스는 제도권에 의한, 제도권을 위한, 제도권의 그룹이었고 또한 제도권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록 뮤직이 기본적으로 ‘기존 사회를 향해 외치는 젊음의 의사표현’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할 때 몽키스는 정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록 평론가들이 몽키스를 진정한 록 그룹으로 규정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티스트의 주체성을 배제한 제도권의 대중음악은 단명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몽키스는 실증했다. 또 그에 의해 고정된 이미지는 쉽게 타파할 수 없음을 가르쳐주었다. 몽키스 멤버들은 그룹이 해체된 후 솔로의 길을 모색하면서 고정된 이미지로 인해 일을 찾는 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제도권이 가져다주는 명성과 부의 대가는 그처럼 잔인한 법이다! 피너 토크는 87년 주간지 < 피플 >과의 인터뷰에서 몽키스 시절을 이렇게 평했다. “60년대는 정말 분열의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희망과 갈채 그리고 우아함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함이 있었다. 몽키스는 어느 면에서 좋은 쪽의 증류액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극단적인 멋, 극단적인 갈채, 극단적인 무해(無害)의 축소판이었다.” 그 때 몽키스는 20년만에 재결합하여 < 그것은 옛날, 이것은 지금 >(That was Then, This is Now)이란 히트곡을 내어 올드팬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마이크 네스미스는 참여를 거부했다). 아마 몽키즈의 좋은 쪽은 - 어쩌면 유일할 수도 있다 - 그때의 컴백에서처럼 올드팬의 향수를 달래주고 있다는 사실이리라...
노래 : Righteous Brothers (라이처스 브라더스)
노래 : Percy Sledge (퍼시 슬레이지)
노래 : Doris Troy (도리스 트로이)
노래 : Grateful Dead (그레이트풀 데드)
음악 공동체 건설을 향해 달려간 ‘록의 지존’ 1995년 여름 미국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음악인은 아마 제리 가르시아(Jerry Garcia)와 그가 속해 있던 록 그룹 그레이트풀 데드 였을 것이다. 그가 8월 9일 53세의 일기로 사망하자 < 타임 >지와 < 뉴스 위크 >지를 비롯한 유수의 인쇄 방송 매체들이 일제히 그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이다. 록에 꽤나 관심있는 사람도... 음악 공동체 건설을 향해 달려간 ‘록의 지존’ 1995년 여름 미국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음악인은 아마 제리 가르시아(Jerry Garcia)와 그가 속해 있던 록 그룹 그레이트풀 데드 였을 것이다. 그가 8월 9일 53세의 일기로 사망하자 < 타임 >지와 < 뉴스 위크 >지를 비롯한 유수의 인쇄 방송 매체들이 일제히 그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이다. 록에 꽤나 관심있는 사람도 그의 그룹 음반이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잘 소개되지도 않았고 또 인기도 없었다. 이유가 있다. 1966년에 결성되어 29년간 정력적으로 활동했지만 그레이트풀 데드가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려놓은 것이라곤 6곡에 불과하며 그중 1987년 발표한 노래 ‘터치 오브 그레이(Touch of Grey)’ 딱 한 곡만이 10위권에 들었을 뿐이다. 때문에 히트곡 중심으로 팝송을 듣는 우리들과 친숙할 수 없었다. 더구나 포크, 컨트리, 블루스 등이 ‘건조하게’ 혼합된 그들의 음악은 너무도 ‘미국적’이어서 우리 정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설사 빌보드 히트곡이 없더라도 오래된 그룹은 한두 곡의 애청곡을 남길 법도 한데 우리의 골든 팝송 악보책을 아무리 뒤져도 그들의 레퍼토리들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미국인들은 난리 법석을 피울까? 스페셜 추모 앨범이 나오고 최후의 꼬리표를 단 뮤직 비디오가 화제를 모으고 심지어 그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 모자, 스티커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실로 존 레논 못지 않은 사후의 뜨거운 인기 열풍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음악이 미국적이란 이유도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이 자신들 입맛에 맞는 음악을 들려준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팝계에서는 그의 사망과 더불어 그레이트풀 데드의 본격적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짐으로써 미국 사회의 제도권에 대항하는 마지막 밴드가 소멸했다고 평가한다. < 뉴스 위크 >지는 그레이트풀 데드를 ‘최후의 얼터너티브 밴드’라고 했다. 그레이트풀 데드와 제리 가르시아가 록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해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등장해 충격을 던진 시점 즉 1960년대와 그들의 활동 거점인 샌프란시스코라는 ‘시공’을 동시에 전제해야 한다.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시작된 미국의 1960년대는 그 이전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 전반의 모순들이 개혁이라는 슬로건 아래 폭발적으로 분출된 시대였다. 인종차별 폐지를 내용으로 한 인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과 냉전 종식이라는 국내외의 해빙 무드를 타고 당시 젊은 세대(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들은 기성세대의 물질지향의 부르주아 가치를 거부하며 ‘이상적 공동체’로서의 새로운 미국 사회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당대 정치적 이슈의 핵심이었던 월남전에 대한 반대를 기폭제로 기성 가치와 제도를 부정하고 타파하려는 ‘히피(Hippie) 운동’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히피들은 전쟁 아닌 사랑을 요구했으며 개인주의와 출세주의 대신 공동체 생활을 지향했다. 기존 성 질서에도 도전하여 의도적으로 ‘프리 섹스’를 즐겼을 뿐 아니라(아마도 이것은 ‘콘돔’의 개발이 간접 기여했을 것이다) 의식의 확장을 위해 LSD와 같은 마약의 복용을 통한 환각 체험을 주장했다. 지배 종교 이데올로기(기독교)로부터도 이탈, 동양의 명상 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비록 보헤미안적 요소가 강했으나 확실한 반(反) 제도권 세력으로, ‘카운터 이념 집단’으로 부상했다. 이들의 등장은 또한 영화, 미술, 패션 등 대중 문화 전반에 걸쳐 일대 충격을 던졌다. 특히 대중음악은 가장 먼저 이 새로운 대안 집단의 정서를 반영, 히피는 물론 대다수 청춘들의 압도적 환영을 받았다. 이를테면 LSD와 동양 종교적 분위기가 음악에 용해되었고 기존 사회로부터의 탈출과 새로운 사회의 갈망을 담은 노래들이 만들어졌다. 연주는 기존의 선율 중심 대신 소음에 가까운 음향과 무아지경에 이르는 반복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이 이른바 사이키델릭 사운드요, 애시드 록(acid rock)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음악 기류가 강력히 돌출한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였고 이 ‘히피 등의 거점’에서 암약한 밴드들 가운데 맨 먼저 본격 활동의 팡파르를 울린 그룹이 또한 그레이트풀 데드였다. 지명도로 따지면 이들보다는 도어즈(Doors)나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이 먼저 기억될 테지만 ‘샌프란시스코-사이키델릭-히피 정신’의 대표성은 어디까지나 그레이트풀 데드가 소유한다. 그리고 그 대표성은 인기나 평자들의 미화가 아닌, 역사의 축적이 부여해 주었다. ‘그레이트풀 데드’는 1965년 기타리스트 제리 가르시아, 리듬 기타를 치는 밥 위어(Bob Weir), 건반 주자 론 맥커넌(Ron ‘Pigpen’ Mckernan)에 의해 샌프란시스코 남부에서 결성되었다. 그때까지 워락스(Warlocks)로 활동했던 이들은 곧 베이스 주자 필 레시(Phil Lesh)와 드러머 빌 크로이츠만(Bill Kreutzmann)을 영입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한 후 공식 출범했다. 이들은 처음 ‘블루그래스’ 계열의 ‘포크’ 음악을 했다. 나중 이들 음악을 특징지었던 전위적인 일렉트릭 음악과는 인연을 갖지 못했다. 노래는 포크 특유의 냉소와 풍자를 담긴 했지만 단순했고 오히려 ‘쿨 재즈’에 가까운 곡을 연주하기도 했던 것이다. 제리 가르시아는 이렇게 회상한다. “포크 열풍이 몰아닥쳤을 때(1962~1963년) 난 완전히 그것에 사로잡혔다. 존 바에즈의 첫 앨범을 듣고, 그녀가 기타를 피킹하는 것을 듣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그 소리에 빨려 들어갔다. 난 컨트리 음악과 전통 백인 음악에도 빠졌다.” 포크가 1960년대 록과 록혁명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레이트풀 데드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이키델릭 록밴드들이 포크에 음악적 뿌리를 두었다. 그러나 포크도 비틀스의 로큰롤 침공에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포크의 기린아’ 밥 딜런이 통기타를 처분하고 전기 기타를 잡은 것이 바로 이 무렵인 1965년이다. 그레이트풀 데드도 밥 딜런의 ‘전향’에 따라 일렉트릭 록으로 음악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시공간’에 보다 충실한 음악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결코 음악의 예술성에만 헌신한 그룹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현실 지향이 있었고 실천이 있었다. 비트(beat) 소설가이자 LSD의 대부였던 켄 케이시트(Ken Kesey)가 주최한 애시드 테스트(마약 실험)에 참가했으며 LSD화학자인 오슬리 스탠리(Oweley Stanley)에게 마약을 공급받아 실제 복용하기도 했다. 히피의 생활 방식을 따라 멤버 전원이 가족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 애시베리 ‘히피특구’에 거주하면서 이익 공동 분배에 따른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다. 무엇보다도 데드는 라이브 공연을 통해 대중과 직접 만나는 것을 중시했다. 제도권 방식인 음반 발매와 대형 상설 공연장 출연은 거부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대규모 거리 공연과 전국 ‘순회’ 공연을 전개해 음악 공동체를 창출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러한 방식을 ‘모든 것이 잠수해 버린’ 1989~1990년대에도 치열하게 밀고 나갔다. 데드가 록역사에서 갖는 참다운 의의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히피 이데올로기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들은 음악 공동체 확산의 장으로 라이브 공간을 꾸준하게 확대하면서 제도적 방식을 대체해 온 비(非) 스튜디오 밴드였고 거리공연 중심의 로드 밴드(road band)였다. 이 같은 성격은 그들의 대표작인 < 트러킹(Truckin’) >에서 단편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당신은 어슬렁거리는데 지쳐 여행을 하고 싶어하는군요. 여행하다가 지치면 정착하고 싶겠죠. 하지만 내 생각엔 당신의 여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막을 순 없을 것 같네요. 문밖으로 나가 불을 끄고 세상을 둘러 봐요..’ 데드는 < 라이브/데드(Live/Dead) > < 일하는 사람의 데드(Workingman’s Dead) > 그리고 ‘트러킹’이 수록된 < 미국의 아름다움(American Beauty) >을 1969년과 1970년에 연속 발표하면서 줄기차게 순회공연에 나서다가 1974년 무기한 해체되었다. 그러나 데드헤즈(Deadheads)라고 불리는 그들의 팬들은 데드의 부활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들의 기대대로 데드는 1970년대 후반 재결성되어 ‘투어’를 재개했다. 데드 연주의 생명력은 죽흥연주의 환상에 있었다. 라이브 공연에서 한 곡을 마치고 다음 곡을 연주할 때까지 30분 이상 악기를 튜닝하거나 1시간 이상 같은 곡을 반곡, 변주하는 방식을 거듭했다. 즉흥적인 호흡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애시드 트립(trip) 즉 의식의 부유 혹은 확장을 위한 ‘환각 여행’을 수반하기도 했다. 연주에 있어서도 기존 모든 스타일에 거스르는 카운터 사고를 적용, 실천한 셈이다. 그레이트풀 데드 음악 세계의 중추를 이룬 것은 밴드의 정신적 지주로서 보컬과 리드 기타를 담당했던 ‘아빠곰’ 제리 가르시아였다. 스페인계 재즈음악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에 아버지 조 가르시아가 낚시하다가 익사하는 것을 목격했다. 캔 케이시는 “그 같은 경험에서 오는 어두움과 다음 생(生)에 대한 사고가 항상 가르시아의 음악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이 듣는 사람의 우울과 슬픔에 부합하는 데드의 색깔을 형성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의 소유자는 그는 고교를 중퇴한 ‘낙오자’였고 누구나 하려는 의지만 충분하다면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즐거움과 안락함을 발산하는 (물론 미국인의 입장에서!) 기타 연주와 따뜻한 인상으로 그와 그레이트풀 데드의 음악은 서서히 하나의 신화가 되어 갔다. 비틀스나 롤링 스톤스와 달리 데드는 한번도 음악 문화 주류에서 뛰논 적이 없었다. 상업성은 구비할 수도 없었고, 구비되어서도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설과 숭앙되는 것은, 가장 오랫동안 현장 공연을 계속하면서 희망차고 사회 참여적이면서 음악이 위력을 떨친 ‘60년대 정신’을 구현해 온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미국인들이 잊지 못할 이상주의의 1960년대가 배어 있다. 미국인들은 제리 가르시아와 데드를 통해 케네디, 킹목사, 티모시 리어리박사, 월남전, 히피, 록혁명이 있었던 그 시대가 과연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되새긴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평가도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그들의 마약 실험을 의식 확대가 아닌 ‘도피주의’의 행각으로 평가절하하며 그들의 행위가 어찌됐든 히피의 보헤미안이즘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나긴 음악 여정은 히피 세대와 함께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하면서 상업적 팝 문화의 천박함 속에 자라 온 오늘의 신세대에게도 그런지 로고가 더불어 하나의 대안이 되기에 충분하다. 데드헤즈 가운데는 의외로 10대들이 많다. 비록 제리 가르시아의 죽음으로 데드는 역사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들이 고수해 온 대체의 자세는 세대와 시대를 뛰어넘어 생존할 것이다. 그들은 록의 지존이다.
어쿠스틱한 포크를 기반으로 한 산뜻한 멜로디 라인과 격조 높은 어레인지로 ‘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3인조 에시드 포크 그룹 어쿠스틱한 포크를 기반으로 한 산뜻한 멜로디 라인과 격조 높은 어레인지로 ‘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3인조 에시드 포크 그룹
노래 : Everly Brothers (에벌리 브라더스)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빌리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Don Everly)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Phil Everly)는 1939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Chet Atkins)에 초청되어 1955년에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와 계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Bye bye love’, ‘All I have to do is dream’, ‘Bird dog’, ‘Cathy’s clown’ 등 빅 히트송이 줄을 이었다. 낭만적인 멜로디를 전하는 두 형제의 하모니가 압권. 1960년대의 사이먼 & 가펑클(Simon & Garfunkel) 등 많은 듀엣 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둘 사이가 나빠서 1973년에 해산했고 10년이 흐른 1983년에 재결합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Let it be me’, ‘Crying in the rain’ 등이 널리 애청되었다.
노래 : MC5 (엠씨 파이브)
1967년 7월, 팝계에서는 이때를 흔히들 ‘사랑의 여름’이라고 칭하지만, 미국의 디트로이트시에게는 ‘악몽의 여름’이었다. 자동차 공업도시인 이곳에서는 그때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디트로이트 경찰이 영업시간 외 음주를 죄목으로 흑인 민주 집회에 참여한 74명의 흑인을 연행한 것이 발단이 된 경천동지의 이 사태는 분노가 폭발한 수천 명의 흑인을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비롯한 1만6천명의 정부군이 동원되는 등 때아... 1967년 7월, 팝계에서는 이때를 흔히들 ‘사랑의 여름’이라고 칭하지만, 미국의 디트로이트시에게는 ‘악몽의 여름’이었다. 자동차 공업도시인 이곳에서는 그때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디트로이트 경찰이 영업시간 외 음주를 죄목으로 흑인 민주 집회에 참여한 74명의 흑인을 연행한 것이 발단이 된 경천동지의 이 사태는 분노가 폭발한 수천 명의 흑인을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비롯한 1만6천명의 정부군이 동원되는 등 때아닌 전쟁을 방불케 했다. 총 2천2백92명의 사상자(42명 사망)를 냈고, 5천5백57명이 연행되어 수감됐다.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은 폭동 진압 후 “우리는 어떤 국가도 밟아서는 안되는 폭력과 비극의 일주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폭동은 진화되었지만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은 몇 개월 후인 1968년 4월 4일 터진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건과 함께 흑인의 ‘급진적’ 사회운동을 폭발시키는 뇌관의 역할을 했다. 흑인 무장 단체인 ‘블랙 팬더즈’ 등 과격한 집단이 그 후 잇따라 결성되었고 대학생을 위시한 일부 양심적인 백인들도 흑인 운동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1968년 대학가에는 소요와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은 대중음악의 새로운 물결을 조성하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흑인 폭동을 계기로 흑인 음악인 소울(Soul)이 팝계의 전면에 부각되어 일련의 소울 스타들(제임스 브라운, 오티스 레딩, 윌슨 피켓, 아레사 프랭클린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 흑인의 긍지를 외쳤다. 록 음악은 샌프란시스코의 애스드록으로부터 영미(英美) 기타 영웅들의 귀를 째는 듯한 날카로운 기타 사운드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쟈니 윈터, 듀안 올맨 등 영미의 기타 플레이어들이 선사한 록 음악은 기본적으로 흑인 블루스였고, 이들로 인해 시카고 블루스의 거목들인 B.B 킹, 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그리고 존 리 후커 등이 부활해 재평가를 받았다. 경찰봉과 최루탄에 결연히 맞선 대학생들은 ‘피압박인종’인 흑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었다. 디트로이트 폭동의 저항정신과 파워가 실린 블루스 음악을 동시에 수렴한 그룹이 MC5였다. 지금은 거의 잊혀져버렸지만(우리나라에서는 록팬들도 존재를 거의 알지 못하는 무명이다) 이 시기의 록 음악 성격을 정의하는 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밴드다. 이 그룹은 바로 그 디트로이트가 배출한 그룹이었다. MC5는 ‘Motor City 5’의 약자로, ’자동차 도시의 5인‘이라는 뜻인데 자동차 도시는 디트로이트시의 별칭. 폭동이 발발한 1967년 그 해 롭 타이너, 웨인 크래머, 프레드 스미스, 마이클 데이비스, 데니스 톰슨 등 다섯 명의 디트로이트 고교동창생들이 의기 투합해 그룹을 조직했다. 디트로이트 폭동의 격렬함을 보존하려는 듯이 이 그룹은 오로지 ‘혁명’을 제창하기 위해 무대에 섰다. 혁명과 사회 변동에의 헌신이 이 그룹의 지향점이었다. MC5는 세상을 바꾸는 데 있어서 록 뮤직의 역할과 영향력을 신뢰했다. 이 그룹을 설명할 때 꼭 함께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다. 이들의 매니저이자 정신적 지주인 존 싱클레어이다. 그는 블랙 팬더즈와 상통하는 백인의 과격 운동단체 ‘화이트 팬더 파티’를 결성한 혁명적 투사였다. 싱클레어는 ‘목적적’인 록 밴드로서 MC5를 기획했다. 그는 “혁명이 개개인의 껍질을 벗고 서로 서로의 팔에 안기도록 추진하는데 전적으로 바치는 것이듯 MC5는 전적으로 혁명에 바치는 그룹”이라고 강변했다. 그들의 무대는 잔혹하고 악의적인 언어들로 가득찼다. 그들의 록 뮤직은 증오의 음악(Hate Music) 그 자체였다. 혁명을 부르짖는 게릴라들이 따로 없었다. 데뷔 당시부터 그들은 미국 국기를 몸에 두르고 모독 일새의 혁명적 구호를 외쳐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록 전문지 < 크림 >의 평론가 레스터 뱅즈의 MC5 기술은 압권이다. “그들은 디트로이트 출신이다. 그곳에 깃든 적의를 능히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MC5는 혁명과 연계되어 말뚝을 박는, 바스티유 감옥을 강습하는 신념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앨범 모두가 원시의 바주카포들이다. 그들은 격력하게 움직였지만 사회적 양심을 소유하고 있었다.” MC5가 수면위로 부상한 계기는 1968년 8월 시카고에서 개최된 민주당 전당대회였다. 대학가 데모가 절정에 달했던 이 무렵 반전과 인권 투쟁의 슬로건을 내건 대학생들은 이 대회장을 기존 정치에 대한 반대 시위의 집결지로 삼았다(이피의 리더 제리 루빈의 말 “시카고로 가자! 우리는 미래의 정치다!”). MC5도 싱클레어와 함께 시카고로 갔다. 그들은 그곳의 시위 군중들 앞에서 혁명의 신념을 주창하고, 사기진작을 위해 블루스 기조의 강력한 록 사운드를 연주,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모으며 일대 주목을 받았다. 록 역사는 싱클레어가 MC5 콘서트에서 행한 밴드 소개 멘트를 가장 선동적인 사회(司會)로 규정한다. 싱클레어의 목소리는 쉰 듯한 흑인 설교자의 그것과 유사해 목소리로 이미 청중을 휘어잡았다. 얼마나 선동적인가를 보자. “형제 누이 여러분, 저는 저기 바다처럼 넓게 손에 손잡는 광경을 보고 싶습니다. ‘손들의 바다’를 보여주십시오. 저는 모든 사람이 굉음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저기 혁명의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작은 혁명을 듣고 싶습니다.” 박수만 치고 있던 관중들이 서서히 함성을 지르며 동요하기 시작한다. 싱클레어의 선동은 계속된다. “형제 누이 여러분! 우리 각자가, 우리 모두가 문제를 일으킬 것인가 아닌가, 해결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은 선택해야 합니다. 5초면 됩니다. 단 5초. 지구상의 이곳에 여러분이 서있는 목적을 깨닫는 데는 5초가 걸릴 겁니다. 이제 ‘행동해야 할 시간’임을, ‘그것을 무너뜨려야 할 시간’임을 깨닫는 데는 단 5초면 됩니다. 여러분! 증명할 시간입니다. 증명할 준비됐나요? 준비됐어요? 제가 여러분에게 증명서를 드립니다. MC5입니다.” 록 그룹 소개가 아니라 마치 시위 출정식의 연설에 가깝다. MC5는 혁명, 선동 이외에 ‘모독’으로도 제도권과 세차게 충돌했다. 1969년에 선보인 데뷔 앨범 < 고통을 걷어차라(Kick out the Jams) >의 타이틀 곡의 제목 뒤의 원조격인 컨츄리 조 앤 더 피시는 저리 가라였다. 이 때문에 음반을 출반한 일렉트라 레코드사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일부 레코드 소매상은 이 음반의 판매를 거부했다. 그러자 MC5는 대비책으로 지하신문을 통하여 앨범 광고를 때렸고, 음반을 거부했던 한 레코드 매장의 창문에 ‘Fuck You’라 휘갈겨 써붙이기도 했다. 그때 싱클레어는 마리화나 소지 및 복용죄로 체포돼 투옥되었다. 골치덩이 MC5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던 일렉트라사는 이를 빌미로 즉각 싱클레어와 그룹을 중도하차시켜버렸다. 매니저와 소속 레코드사를 졸지에 잃어버렸지만 ‘곤경’ 속에서도 앨범이 차트 30위권에 진출한 것에 가능성을 본 어틀랜틱 레코드사가 그들과 계약을 체결, 1970년에 두 번째 음반인 < 미국에 와서(Back in the USA) >를 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헤비메틀의 고전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판매는 지극히 저조했고 차트 순위는 137위에 머물렀다. 참고로 이 음반을 프로듀스한 인물은 훗날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매니저가 된, 당시의 록 평론가 존 랜도였다. 이듬해 발표된 < 하이 타임(High Time) > 역시 걸작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결과는 영점이었고 숫제 차트에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어틀랜틱사로부터 계약을 해제당한 이들은 새출발을 기하기 위해 영국으로 향했지만 멤버들의 탈퇴로 곧 해산되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제창은 그것으로 마감되었다. MC5는 디트로이트의 정서에 걸맞게 귀를 째는 듯한 소음의 사운드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이념적 시각에서 혁명록 또는 게릴라록이라 불렸지만 사운드적으로는 ‘에너지록’으로 통했다. 리드 싱어 롭 타이너는 MC5의 사운드를 ‘전지에 전기가 입력되듯 자신들의 전기 에너지가 감상자의 감각기관을 충전한다’는 뜻에서 ‘재감각발생기’(Resensifier)라 명명한바 있다. 평론가들은 MC5를 당시 태동되고 있던 ‘헤비메틀의 원조’로 규정하기도 한다. 디트로이트 폭동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MC5를 위시해 ‘이기 앤 스투지스’,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등 시끄러운 헤비메틀 밴드 상당사수가 디트로이트 출신이어서 디트로이트는 헤비메틀의 메카가 되었다. MC5의 양날개 ‘시끄러운 사운드’와 ‘혁명적 메시지’는 1970년대 말 지축을 흔들었던 펑크록 밴드들이 재발국하여 기본틀화했다. 특히 혁명성이 강했던 섹스 피스톨즈, 클래시 등 영국의 펑크 밴드들이 MC5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섹스 피스톨즈가 훗날 굴지의 레코드사로부터 해제를 당하는 잇단 수난은 이미 MC5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밟은 것과 다름없어 새삼 역사의 반복성을 실감하게 한다. 1970년대 말의 펑크 폭풍으로 허공에 묻힐 뻔한 이 그룹의 이름이 다시 오르내리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그들의 앨범이 재발매되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평자는 ‘시대를 앞서갔다’는 의미에서 ‘1960년대에 활동한 최초의 1970년대 밴드’라 칭하고 있다. MC5의 멤버들은 해산후 제각기 음악활동을 전개했지만(특히 펑크분야에서) 크게 주목받은 인물이 없다. 멤버 가운데 프레드 스미스는 1980년 여성펑크의 선두주자인 패티 스미스와 결혼, 패티가 언급될 경우 가끔 곁다리로 끼고 있고, 코카인소지로 옥살이를 한 바 있던 웨인 크래머가 최근 그룹 ‘워스 낫 워스’의 싱글에 연주자로 이름을 내민 정도. 록계는 혁명에 헌신한 전대미문의 그룹 MC5를 보유함으로써 역사의 한 페이지만은 ‘진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존재는 사라졌지만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 MC5가 록계에 남겨준 무형의 재산이었다.
노래 : Arthur Conley (아서 콘리,Arthur Lee Conley)
소울 싱어 소울 싱어
노래 : Ella Fitzgerald (엘라 피츠제랄드)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 엘라 핏제랄드는 재즈 보컬의 역사를 다시 쓴 디바이다. 그녀는 아무 의미 없이 재잘거리는 스캣(Scat)이라는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그 어느 악기 못지 않은 즉흥성을 표현할 줄 알았으며 스윙과 비밥 시대에 걸쳐 더욱 빛난 달콤한 목소리와 넘실대는 스윙감을 통해 엘라 핏 랄드는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재즈역사에 각인되었다. 사라 본, 빌리 홀리데이와 함께 재즈 음악사에 길이 남는 ‘여인천하’를 이뤄낸 엘라 핏제랄드는 1917년 4월 25일 버지니아주 뉴포트에서 태어났다. 비운의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처럼 엘라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데, 성장기의 대부분을 홈리스(homeless)로 보낼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엘라는 1934년 뉴욕 할렘가에 소재한 아폴로 극장에서 열린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청중의 자격으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던 밴드 리더이자 드러머인 칙 웹(Chick Web)은 이 체구 작은(?) 소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 자신의 빅 밴드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게 한다. 칙 웹의 도움으로 엘라는 그의 밴드의 리드 싱어 자격으로 대중 앞에 섰고 얼마 후 그녀가 데카(Decca) 레이블에서 처음 녹음한 ‘A-tiskete, A- Taskete’(1938), ’Undecided’(1939)가 공전의 히트를 거두며 가수로서의 순조로운 출발을 한다. 그러나 1939년, 칙 웹의 갑작스런 요절로 인해 엘라는 그 후 2년 간 그가 떠난 밴드의 빈 공간을 메워 나가야 했다. 1942년 솔로로 독립한 그녀는 예전 소녀의 상큼함과 순수함이 느껴지던 데뷔시절과 달리 좀 더 완숙한 목소리로의 변신을 필요로 했다. 잉크 스팟(Ink Spot), 루이스 조던(Louis Jordan)과 같은 R&B 싱어들과 잠시 활동을 같이 하던 엘라였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은 역시 ‘재즈’임을 깨 닳고, 1946년 노먼 그란즈(Norman Granz-훗날 버브 레코드의 사장이 됨)를 새 매니저로 맞이하며 비밥의 거성인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밴드의 리드 싱어로 일하게된다. 디지와의 연주 경험은 엘라가 비밥의 문법을 자기의 목소리로 소화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변화무쌍한 리듬과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파트별 연주에 맞춰 터져 나오는 유창한 스캣 창법은 비밥의 연주와 그녀의 보컬이 어울림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 트리오의 백업 연주로 녹음된 ‘How high the moon’(1947)같은 곡에서 그녀의 스캣 창법은 악기에 버금가는 애드립이 목격된다. 1955년 버브(Verve)와 전속 계약을 맺은 엘라는 이 때부터 음악 인생의 최고의 황금기를 맞는다. < Songs from Pete Kelly’s blues >(1955)가 앨범 차트 7위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기가도를 질주한다. 이듬해, 구수한 목소리의 트럼펫 주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듀엣 < Ella & Louis >(1956)가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쿼텟의 백업 연주로 발표 되 대중적, 비평적 찬사를 얻었으며 두 사람간의 음악적 교분은 < Ella & Louis again >(1957)과 < Porgy & Bess >(1958)로 이어진다. 이 앨범들은 재즈 팬들의 필수 컬렉션 대상들이기도 하다. 같은 해 <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이 재즈 판을 휩쓸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는 성공을 거둔다. 이를 시작으로 엘라는 조지 거쉰(George Gerswin), 제롬 컨(Jerome Kern), 해롤드 알렌(Harold Arlen), 어빙 벌린(Irving Berlin)등 1세대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의 명곡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방대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틴 팬 엘리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하트 로렌즈(Hart Lorenz)의 곡으로 꾸며진 실황 앨범 < Ella Fitzgerald Sings The Rodgers And Hart Song >(1957)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재즈의 ‘퍼스트 레이디‘로 군림하게 된다. 틴 팬 앨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1958-59년 사이에 녹음해 발표한 조지 & 이라 거쉰(George & Ira Gershwin)의 곡을 집대성한 < The George & Ira Gershwin Song Book >(1959)을 통해 정점에 다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엘라는 < Mack The Knife-Ella In Berlin >(1960)을 폴 스미스(Paul Smith) 쿼텟의 연주로 녹음된 라이브 앨범을 공개, ‘How high the moon’, ’Mack the knife’를 히트시킨다. 이후 1963년엔 명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인 퀸시 존슨(Quincy Jones)이 편곡으로 연주된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와의 협연작 < Ella & Basie! >과 1965년엔 오랫동안 음악적 교분을 쌓아온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과 다시 의기투합해 < Ella At Duke Place >를 각각 발표하는 등 스윙의 거장과의 잇단 명작을 공개한다. 캐피톨(Capitol)로 이적해 다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간 엘라는 1969년 그만 백내장으로 인해 잠시 활동을 중단한다. 1973년 연로한 나이에 불구하고 < Ella Fitzgerald At The Carnegie Hall >을 발표했고, 1977년 몬트럭스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가해 실황 앨범 < Ella Fitzgerlad With The Tommy Flanagan Trio-Montreux’77 >을 공개하며 예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손색없는 보컬 기량을 선보였다. 1980년대 이르러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예전만큼의 노련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엘라는 근근히 연주 활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러나 나빠진 건강과 시력을 인해 그녀는 1994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 6월 15일 비버리 힐즈에 있는 자신에 집에서 세상을 떠난다.
멤버 : Archie Bell, James Wise, Willie Pernell 멤버 : Archie Bell, James Wise, Willie Pernell
재즈 보컬 재즈 보컬
노래 : Trini Lopez (트리니 로페스,Trinidad Lopez III)
기타 연주자, 가수 기타 연주자, 가수
노래 : Rebel Rousers (레벨 라우저스)
락 기타 연주자, 보컬 락 기타 연주자, 보컬
밴드 : Buffalo Springfield (버팔로 스프링필드 (락 밴드))
각 멤버마다 뛰어난 기량을 소유했던 5인조 버팔로 스프링필드(Buffalo Springfield)는 1960년대의 포크록 붐을 형성했던 중심적인 그룹 중 하나였다. 이들은 뭉쳐서도 위대했지만 구성원 개개인이 세포분열 한 각개 전투(?)에서도 모두 승리할 정도로 송라이팅 실력과 가창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지를 친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여러 그룹들(포코, 로긴스 & 메시나,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 각 멤버마다 뛰어난 기량을 소유했던 5인조 버팔로 스프링필드(Buffalo Springfield)는 1960년대의 포크록 붐을 형성했던 중심적인 그룹 중 하나였다. 이들은 뭉쳐서도 위대했지만 구성원 개개인이 세포분열 한 각개 전투(?)에서도 모두 승리할 정도로 송라이팅 실력과 가창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지를 친 포크와 컨트리 성향의 여러 그룹들(포코, 로긴스 & 메시나,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 영)도 팝 계의 지형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록을 바탕으로 그 위에 포크와 컨트리를 이식한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미국 서부의 맑고 경쾌한 성격을 살린 청명한 음악으로 당대를 풍미한 밴드이다. 어쿠스틱 기타를 맛깔스럽게 연주하는 스테픈 스틸스(Stephen Stills/보컬, 기타)와 리치 퓨레이(Richie Furay/보컬, 기타), 닐 영(Neil Young/보컬, 기타), 브루스 파머(Bruce Palmer/베이스), 그리고 듀이 마틴(Dewey Martin/드럼)으로 역사를 시작한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만 2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지만 동시대 동료들이나 후배에게 미친 그 파급력은 깊고 둔중하다. 1967년에 탄생한 데뷔앨범 < Buffalo Springfield >에서는 스테픈 스틸스가 작곡해 포크 록의 범주를 넘어 전천후 팝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For what it’s worth (Stop, hey what’s that sound)’가 싱글차트 7위에 안착하며 음악성과 대중성 모두를 끌어안는 ‘윈윈 전략’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발표한 < Buffalo Springfield Again >로 다섯 명의 젊은 포크 로커들은 음악적으로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위치하며 음악 평론가들의 훌륭한 ‘지적 파트너’가 되었다. 스테픈 스틸스의 ‘Bluebird(58위)’와 물오른 작곡 솜씨가 드러난 ‘Rock n’ roll woman(44위)’, 그리고 닐 영이 만든 ‘Expecting to fly(98위)’가 순차적으로 대중들의 귀를 잡아끌며 자신들의 입지를 굳건히 했고, 비평가들은 닐 영의 또 다른 걸작 ‘Broken arrow’에 높은 별점을 주었다. 한편 브릿팝 밴드 블루톤스(Bluetones)는 1996년에 발표한 데뷔앨범 타이틀을 < Expexting To Fly >로 정해 버팔로 스프링필드에 대해 헌정을 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빛나는 음반으로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달성한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그러나 베이시스트 브루스 파머 대신 짐 메시나(Jim Messina)로 교체되었다. 팀 내 분위기를 쇄신한 이들이 1968년에 내놓은 세 번째 음반 < Last Time Around >에서는 ‘On the way home’ 만이 82위에 등장했으며, 이것은 앨범 제목처럼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스테픈 스틸스, 닐 영, 리치 퓨레이 간에 벌어진 주도권 경쟁이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해지자 결국 닐 영이 먼저 버팔로 스프링필드를 떠났다. 이후 결속력은 급격히 와해되어 결국 1968년에 포크 록의 위대한 역사를 작성했던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역사책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스테픈 스틸스와 닐 영은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 영에서 다시 한번 영광을 재현했고, 리치 퓨레이와 짐 메시나는 나중에 이글스(Eagles)의 멤버가 되는 랜디 마이스너(Randy Meisner) 등과 함께 국내에서 ‘Sea of heartbreak’와 ‘Crazy love’로 많은 사랑을 받은 컨트리 록 그룹 포코를 결성하며 미국적인 음악의 부활을 꿈꾸었다. 한편 짐 메시나는 1970년대 초반에 케니 로긴스와 함께 듀엣 로긴스 & 메시나(Loggins & Messina)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만 2년이라는 단기간 동안 단 세 장의 음반으로 팝 계에 선혈처럼 뚜렷한 여흔을 남긴 버팔로 스프링필드는 커다란 그룹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함은 시간이 흘러도 축소되지 않고 있다.
밴드 : The Animals (애니멀스,Eric Burdon And The Animals)
애니멀스(Animals)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야드버즈(Yardbirds)와 함께 영국에서 건너온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이트 블루스 밴드였다. 이들은 비틀즈(Beatles), 롤링 스톤스,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허맨스 허밋츠(Herman’s Hermits) 등과 손을 맞잡고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물꼬를 텄고, 블루스의 원산지인 미 본토에 블루스 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애니멀스(Animals)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야드버즈(Yardbirds)와 함께 영국에서 건너온 가장 영향력 있는 화이트 블루스 밴드였다. 이들은 비틀즈(Beatles), 롤링 스톤스,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허맨스 허밋츠(Herman’s Hermits) 등과 손을 맞잡고 브리티시 인베이션의 물꼬를 텄고, 블루스의 원산지인 미 본토에 블루스 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밥 딜런(Bob Dylan)으로 대표되는 포크록의 탄생에 동기를 부여함으로서 1960년대 팝 음악계를 풍성하게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한 건반 주자 알란 프라이스(Alan Price)가 흑인 음색을 소유한 에릭 버든(Eric Burdon)과 존 스틸(John Steel/드럼), 힐튼 발렌타인(Hilton Valentine/기타), 브라이언 채스 챈들러(Bryan Chas Chandler/베이스)를 만나 1964년부터 애니멀스의 웅대한 역사를 써 내려갔다. 비참한 생활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오래 동안 금지 곡의 사슬에 묶였던 ‘House of the rising sun’은 비틀즈의 해로 기억되던 1964년 5주만에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밥 딜런이 자신의 데뷔 앨범에 수록했던 이 미국의 구전 민요를 애니멀스는 전자 기타가 울부짖는 블루스 넘버로 완벽하게 재 탄생시켰다. 이 음악을 듣고 음악 쇼크를 받은 밥 딜런은 통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부여잡고 포크록을 탄생시켰다. 원래 재즈 보컬리스트 니나 시몬(Nina Simone)이 취입한 ‘Don’t let me be misunderstood(39위)’는 애니멀스의 록 버전으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특히 국내에서는 1970년대 후반 라틴계 디스코 밴드 산타 에스메랄다(Santa Esmeralda)의 댄스 버전(15위)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당시 디스코 클럽의 플로어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이들의 노래들 중에서 가장 정통 록적인 ‘It’s my life(23위)’는 록의 고전으로 대우받고 있다. 이 외에도 히트 차트에 등록된 ‘I’m crying(19위)’와 ‘Bring it on home to me(32위)’, 싱글로 히트하진 않았지만 록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We’ve gotta get out of this place’, 시카고 블루스의 전설인 지미 리드(Jimmy Reed)의 곡을 리매이크 한 ‘Bright lights, Big city’, 그리고 같은 백인 블루스 싱어들과의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에릭 버든의 완벽한 가창 실력을 입증한 ‘For Miss Caulker’까지 영국에서 온 5명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에릭이 자신의 목소리를 앞세운 보컬 카리스마로 알란과의 알력이 스멀스멀 피어나자 알란 프라이스는 애니멀스를 탈퇴해 나름의 활동을 시작했고, 이 쟁탈전의 승리로 밴드의 주도권을 쥔 에릭 버든은 공석으로 비어 있는 자리에 데이브 로베리(Dave Rowberry)를 앉히고 그룹의 새로운 설계도를 작성했다. 그러나 에릭은 알란의 반쪽이었고, 알란도 에릭의 절반이었다. 그 둘은 헤어지고 나서야 그들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절대적인지를 실감하게 되면서 1976년에 원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음악의 최소주의 미학을 구현한 3인조 뉴웨이브 밴드 폴리스(Police - 스팅이 있었던)의 기타리스트 앤디 서머스(Andy Summers)는 1960년대 후반 에릭과의 친분으로 애니멀스에 몸담기도 했었다. 1970년대 들어서 에릭은 이 위대한 밴드를 접고 두 차례나 내한 공연을 가진 덴마크 출신의 하모니카 연주자 리 오스카(Lee Oskar)와 여러 흑인 뮤지션들을 규합해 소울 그룹 워(War)를 조직해 치열한 순위 경쟁에 참전해 ‘Why can’t we be friends?(6위)’를 랭크 시켰다. 이 트랙은 1997년 스카 펑크 밴드 스매시 마우스(Smash Mouth)가 재해석해 자신들의 데뷔 음반에 수록하기도 했다. 1976년과 1983년에 다시금 모여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했지만 역전된 음악 환경은 ‘새로운 애니멀스’에게 호의적이지 못했고 다시 이들은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만든 옛 영예의 그림자 속에서 현재의 숨결을 이어가는 것이다.
밴드 : Love (러브 (록 밴드),Love Revisited)
멤버: Johnny Echols, Mike Randle, David Green, David Chapple 멤버: Johnny Echols, Mike Randle, David Green, David Chapple
스택스 레코드(Stax Records)의 스튜디오 세션 밴드 스택스 레코드(Stax Records)의 스튜디오 세션 밴드
멤버 : 행크 마빈(Hank Marvin, 보컬), 브루스 웰치(Bruce Welch, 기타), 브라이언 베네트(Brian Bennett, 드럼) 멤버 : 행크 마빈(Hank Marvin, 보컬), 브루스 웰치(Bruce Welch, 기타), 브라이언 베네트(Brian Bennett, 드럼)
멤버 : 마크 스테인(Mark Stein, 키보드), 팀 보거트(Tim Bogert, 베이스), 빈스 마텔(Vince Martell, 보컬), 카마인 어피스(Carmine Appice, 드럼) 멤버 : 마크 스테인(Mark Stein, 키보드), 팀 보거트(Tim Bogert, 베이스), 빈스 마텔(Vince Martell, 보컬), 카마인 어피스(Carmine Appice, 드럼)
밴드 : Booker T. & the M.G.'s (부커 티 앤 더 엠지스)
미국 남부의 멤피스 소울을 이끈 알앤비/펑크 밴드 미국 남부의 멤피스 소울을 이끈 알앤비/펑크 밴드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
밴드 : The Stooges (더 스투지스,Iggy & The Stooges)
멤버 : 이기 팝(Iggy Pop, 보컬), 스콧 애쉬튼(Scott Asheton, 드럼), 제임스 윌리엄슨(James Williamson, 기타), 마이크 와트(Mike Watt) 자랑스러운 음악 유산을 지닌 도시 디트로이트는 1960년대 말에 베리 고디의 모타운 레이블이 주도하는 달짝지근한 소울과 동의어였다. 하지만 1969년에 스투지스의 셀프타이틀 데뷔앨범과 함께 완전히 달라졌다. 프론트맨 이기 스투지... 멤버 : 이기 팝(Iggy Pop, 보컬), 스콧 애쉬튼(Scott Asheton, 드럼), 제임스 윌리엄슨(James Williamson, 기타), 마이크 와트(Mike Watt)

자랑스러운 음악 유산을 지닌 도시 디트로이트는 1960년대 말에 베리 고디의 모타운 레이블이 주도하는 달짝지근한 소울과 동의어였다. 하지만 1969년에 스투지스의 셀프타이틀 데뷔앨범과 함께 완전히 달라졌다. 프론트맨 이기 스투지(이 무렵에는 이 이름을 썼다)는 원시적인 울부짖음을, 신랄하게 퍼부어대는 기타 사운드는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을 폭발시켰다. 스투지스가 일렉트라 레이블에 발탁된 것은 추가적인 선택이었다. 스카우트 담당 대니 필즈는 거라지 록 밴드 MC5와 계약을 맺으러 갔다가 스투지스의 라이브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들에게도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1969년 6월 스투지스는 뉴욕으로 갔고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탈퇴한 존 케일과 함께 데뷔앨범을 만들었다. 하지만 스투지스는 녹음할 곡이 부족한 상태였다. 라이브 무대에서 멋진 공연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완성된 곡은 세 곡뿐이었다. 그래서 일렉트라의 사장 잭 홀츠먼은 그들을 호텔 방으로 몰아넣고 이틀 만에 앨범을 채울 곡을 다 만들어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완전한 거라지 록도 아니고 지나치게 청승맞지도 않은 재기발랄한 곡들이 태어났다. 존 케일은 곡에 절제를 부여함으로써 당장 폭발할 것 같은 ‘1969’이 광기로 빠져들지 않게 했고 ‘I Wanna Be Your Dog’에서 격렬하고 공격적인 기타가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제어했다.

그가 직접 비올라를 연주한 ‘We Will Fall’은 이기의 뛰어난 보컬을 살리기 위해, 마약에 취해 몰아지경에 빠진 듯한 느낌을 주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 시절처럼 10분에 이르는 대곡으로 만들어냈다. 이기 스투지스는 이기 팝으로 거듭났고 필즈가 “잘 팔릴 만한 명품”이라고 표현한 이 앨범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후 폭발적으로 발전할 펑크의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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