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엔 멸망했지만, 위대한 로마 제국의 문명은 현대 서방 유럽 국가들과 그들이 세운 문명의 발전에 방대한 영향을 끼쳤고, 오랫동안 서양사의 다른 어떤 부문보다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기원전 753년에 테베레 강변의 작은 구릉에서 시작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로 팽창해서 서기 476년에 멸망하기까지, 약 1200여 년 동안 고대 지중해 문명을 완성했다. 로마인들은 문명의 건설이라는 점에서 오리엔트 인들보다 시기적으로 뒤졌고, 그리스인들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을 떨쳐버리지 못했지만, 그 어떤 고대인들보다 현실적이었고,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언어, 다양한 종교로 이루어진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고전 문명을 확립시킬 수 있었다. 로마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서양 문명의 뿌리를 이해하는 것이고, 미래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을 얻는 길이다.
이 프로그램은 로마사 개론서를 보는 것처럼, 시대별 로마의 전반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다.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로마 유적지도 볼 만하다.
1) The Republic of Rome 로마 공화정
로물루스를 시조로 하는 왕정의 시대였으나, 6세기말 라틴족이 에트루리아족의 왕을 추방하고 공화정을 수립함으로써, 진정한 로마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공화정은 실질적으로 귀족 정치의 형태였으나, 계속되는 전쟁으로 평민의 역할이 중요해짐에 따라 호민관이 생기고,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이 제정됐으며, 참정권이 확대됐다. 120년간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의 결과 로마는 지중해를 장악한 뒤,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를 각각 정복하여 헬레니즘 세계를 완전히 정복했으나, 이후 로마 공화정은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겪으면서, 공화정 후기, 카이사르와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의 3두 정치가 시작됐다.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손잡은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이 불가피해져서 기원전 49년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해서 폼페이우스를 타도하고 독재 권력을 수립했지만, 기원 전 44년 공화정의 전통을 지키려는 브루투스에게 암살됐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제2회 삼두정치를 시작하려했으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은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대파함으로써 로마 공화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2) Age of Emperors 황제의 시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암살을 거울삼아서 공화제를 존속시키면서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에게, 군사-행정-종교의 최고 통치자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내주었고,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사실상 황제가 됐다. 스스로 제1의 시민임을 자처한 그는 로마의 경제적 번영과 함께, 라틴 문화를 보급시키고 발전시켰다. 이후 로마 제국의 왕위는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이어졌다.
당시 로마인이 남긴 유적지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이다. 콜로세움은 서기 70년 베스파사아누스 황제가 발주해서, 10년 뒤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되었다. 개장 첫날 이곳에선 5만 명 이상의 로마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검투사들의 경기가 벌어졌다. 로마인들이 즐기던 경기 중엔 이륜마차 경기도 있었는데, 두 가지 모두 매우 폭력적이고 위험한 경기였다. 로마인들이 즐기던 놀이가 모두 폭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종종 연극과 음악회를 보러 다녔고, 공중목욕탕에서 몸을 씻으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시작된 초기 제정 시대에, 로마 제국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는 문화적인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고, 황제들은 로마 시민들에게 위대한 로마 제국의 한 사람이라는 자긍심을 불어 넣어주었다.
3) Building an Empire 팍스 로마나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 시대를 이룩한 5현제(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로마 제국의 영토는 최고에 달했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문화가 발달했다.
로마제국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언어, 다양한 종교가 바탕이 된 `문화의 도가니`였다. 위대한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를 중심으로 각각의 속주마다 도시가 발달했으며, 로마와 속주를 연결하는 도로가 건설됐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발달된 도로망을 따라 무역이 발달했으며, 초기 우체국 시스템의 밑바탕이 됐다.
로마제정 초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폼페이는 고대 도시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으며 인구가 2만에서 5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6세기 이후 시작된 폼페이 발굴 사업으로, 폼페이 옛 시가의 거의 절반 정도가 발굴됐으며, 당시 로마 시민들의 쾌락적이고 향락적인 도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4) The Enduring Legacy 제국의 몰락
팔레스티나 남부에 있던 고대 로마 점령지 `유대`에서 싹튼 유대교는 유일신 여호와를 믿는 헤브루 인들의 신앙으로서, 민족적 고난을 메시아의 구원으로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는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배타성을 배격하고 민족과 계급을 초월한 신의 보편적 사랑을 역설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성립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전파된 것은, 범인류적인 평등사상과 인류의 보편적 구원 사상이 로마의 세계 시민 사상과 결부됐으며, 동시에 로마 제정 당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인 착취로 고통받던 평민과 노예들에게 커다란 복음이 됐기 때문이었다. 로마 황제들은 황제 숭배 사상을 거부하고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를 위협적인 종교로 규정하고 박해를 시작했지만, 그리스도교의 평등사상과 구원의 복음은 점차 지배계급에까지 파급되어,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라노 칙령을 내림으로써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분열된 제국을 통일하고 정치, 경제를 재정비하여 전제 군주정을 확립하였으며,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로마 제국의 중흥을 꾀하였으나, 결국 로마 제국의 와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게르만의 계속적인 침입과 로마 사회의 쇠퇴로 말미암아,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했고, 476년 결국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역사 속에서 잊혀지지 않았고, 그들의 값진 문화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