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근대 동양에서 사회진화론을 둘러싼 담론
19세기 말 서구 사회에서 진리로 통용되었던 사회진화론이 동양에서는 자기 보존을 위하여 어떻게 수용되고 재해석되었는지를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담론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강자의 자기 합리화 또는 약자의 자기 보존이라는 현실적 목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한국에 전래된 사회진화론은 긍정적 기능과 더불어 부정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긍정적 측면으로는, 사회진화론이 한국의 근대화와 독립을 위해 필요한 계몽운동과 실력 양성 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으로는, 강자의 약자 지배를 자연법칙으로 승인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자발적으로 정당화하고 말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이제 사회진화론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회진화론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외투를 걸치고, 노벨 경제학상이라는 훈장을 달고서, 이 시대의 진리로 자처하며, 또다시 인류를 약육강식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 ― pp. 233~234에서
제7장 유교 자본주의 담론의 반(反)유교적 성격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은 종종 유교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해왔다. 과연 유교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독립변수가 될 수 있는가? 여기서는 유교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놓은 논리의 허와 실을 살피고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그런 담론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살핀다.
유교에서 제시하는 바람직한 삶과 사회에 대한 청사진, 자기 규율과 자기 절제의 미덕 등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이 몰고온 폐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가 적극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지적 자산인 것이다. … 해방 이후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은 철저하게 반전통적이었고 반유교적인 것이었다. 박정희는 유교 자본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라, 오히려 반유교적 자본주의의 시조였다. 진정한 유교 정신은 한국의 근대사에서 성취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체제수호와 노동통제 그리고 정권안정을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진보로서 유교 정신은 비록 과거 어느 시점에서도 실현된 적이 없지만, 미래 사회에서는 반드시 성취하여야 할 이상이다. ― pp. 269~270에서
제8장 아시아적 가치와 유교 담론
1997년 말, 아시아에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아시아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에 불이 붙었다. 아시아적 가치라는 개념은 말 그대로 아시아 문화권이 간직한 독특한 가치체계를 말한다. 왜 갑자기 이것이 문제로 떠올랐을까? 아시아적 가치를 둘러싼 당시의 논의를 통해 유교를 바라보는 동서양의 왜곡된 시각에 대해 알아본다.
아시아적 가치라는 개념은 서구가 아시아를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정당화 논리로 활용될 뿐 아니라, 나아가서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기제로 활용되기도 한다. 소위 세계경찰을 자부하는 미국의 인권 외교가 그것이다. 미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와 민족을 중시하는 아시아의 정치 관행이 심각한 인권침해를 가져온다고 경고해왔다. 바로 아시아의 문화적 요인 때문에 서구식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 미국은 중국의 인권은 문제 삼아도 친미정권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은 문제 삼지 않는다. … 미국은 이렇게 세계 경영 전략에서 이탈하는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필요에 따라 인권을 앞세운 무력침공과 내정간섭을 자행해왔으며, 그때마다 아시아적 가치는 예외없이 인권에 방해가 되는 문화적 독소로 지목받아왔다. ― pp. 283~284에서
제9장 유교의 관점에서 본 문화의 진보
19세기 이후 서양은 유교사상을 진보와는 거리가 먼 것, 정체적이고 퇴보적인 사상으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근대성의 위기와 더불어 진보에 대해 심각한 회의가 제기된 오늘날 유교문명은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과연 유교문명이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우리 삶은 진정 전보다 나아진 것일까? 날로 악화되는 국제정치 분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대규모 전쟁과 계급 간의 불평등, 물신숭배와 사물화, 행복에 대한 지표의 상실 등을 보면 누가 다시 진보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 유교의 관점에서 볼 때 “끊임없이 욕망을 자기 복제해내는 자본주의의 체계” 그리고 “탐욕과 질투를 추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학”은 퇴보를 향하여 달려가는 광란의 질주이다. … 유교의 이상사회관은 욕망을 위한 욕망을 추구하는 대신 욕망을 반성적으로 절제할 것을 요구하며, 계산과 암수를 노리는 도구적 인간관계 대신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유대감을 목표로 하고, 자유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온갖 무절제와 방종함 대신 자아를 수양해 인격을 완성할 것을 권고한다. ― pp. 321~322에서
제10장 다름의 존중과 다양성의 철학을 위하여
지금은 다름의 철학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우리는 효율성이라는 단일한 잣대에서 벗어나 욕망의 절제를 배워야 한다. 경쟁을 통한 이익의 극대화라는 단일한 잣대에서 벗어나 나눔과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 …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서양과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되어온 동양의 윤리관을 되돌아보게 된다. 자연 안에서 절욕하는 삶, 균평과 공유를 통한 공동체 안에서의 조화, 공동선의 추구를 통한 구성원들의 유대와 화목, 자아수양을 통한 인격의 완성, 그리고 노동과 여가의 융합 등은 미개 문명이 지닌 퇴보사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상이다. ― p. 343에서
제1장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우리 안에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을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주며, 그것이 우리의 정신문화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은 유교를 둘러싼 여러 오해와 편견을 만들어내고 있다.
서양철학의 후기 근대적 전환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문화의 각 방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새롭게 낭만화된 동양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서구인들에게 도피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서구 근대성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부풀려져 예찬되기도 한다. 그 예로 서구의 어떤 동양학자는 장자를 리처드 로티와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주창자라고 해석하는가 하면 또 어떤 동양학자는 유교를 신실용주의와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공자나 장자가 지하에서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 아마도 포복절도할 것이다. ― p. 38에서
제2장 서양의 유교 이해에 대한 담론학적 분석
16세기 동서 항로의 개통 이래 20세기 말까지 서양인들이 유교문명을 보아온 관점을 담론 분석의 각도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서양인들이 견지해온 유교에 관한 관점들을 시기별로 분석함으로써, 그들이 유교를 연구하고자 했던 정치적 의도를 살펴본다.
17세기부터 현재까지 동서 문명 교섭사의 전 과정에서 서구인들이 유교를 바라보아온 관점은 그야말로 편견과 왜곡의 역사였다. … 프랑스에서 볼테르는 절대왕정을 비판하기 위하여 유교적 군주를 개명군주로 치켜세웠지만, 영국에서는 세습귀족들이 신흥 자본계급을 억누르기 위해 유교적 성왕정치를 이상으로 내세웠다. 디드로는 종교의 권위에 대항하기 위하여 유교를 이신론으로 예찬하였지만, 몽테스키외는 삼권분립을 수립하기 위하여 유교적 전제정치를 비판하였다. …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서양의 유교 연구도 시들해졌지만, 문혁 이후 중국에서 유교 부흥론과 현대 신유가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자 서양의 유교 연구도 다시 활발해졌다는 사실, … 그리고 동서 문화 교류의 중심지인 동서문화센터가 미 국무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미국의 환태평양 연안국가 진출의 교두보인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미국의 동양에 대한 신식민주의적 지배전략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 pp. 68~72에서
제3장 대만과 중국의 유교 담론
여기서는 20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대만과 중국에서 진행된 유교 담론을 분석하여 유교가 각기 다른 사회 분위기에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되어왔는지 살펴본다. 이것은 유교라는 문화적 상징이 정치권력과 어떻게 연계되어왔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소재이다.
대만의 경우, 그간 유교 담론은 주로 관변 지식인들이 권위주의적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했고, 갈수록 위축되어가는 외교적 상황에서 자국민의 민족 감정을 응집하기 위한 동원 기제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 중국대륙의 경우, 유교 담론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사회주의 개혁과 정치투쟁을 가속화하기 위한 동원 기제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개혁?개방과 더불어 시장경제를 수용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유교 자본주의권의 권위주의적 발전노선을 모델로 삼기 위해 활용되었다. ― p. 112에서
제4장 조선조의 도통(道統) 담론과 학문, 정치 권력
조선시대에 전개된 도통 담론을 정치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우리 역사 속에 존재했던 지식과 권력의 상호관계를 살펴본다.
유교 사회에서 도통이 갖는 본래적 의미는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 순정성과 학문적 권위를 공론을 통해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론을 특정 당색이 독점적으로 주도하던 조선 후기에 들면, 도통이라는 문화적 상징은 철저하게 권력관계에 장악되어버리고, 심지어 도덕적 순정성과 학문적 권위를 평가하는 기준마저 현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었던 것이다. … 정치권력에 의한 문화와 학문의 도구화, 그리고 특정 집단에 의한 공론의 독점은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를 통한 공론의 결집, 그리고 학문과 문화가 지닌 비판적 기능의 회복 등은 민주주의를 심화하기 위해 우리가 조선 후기라는 반면교사로부터 새겨들어야 하는 고언(苦言)이다. ― pp. 154~157에서
제5장 한국 전통의 공 담론과 근대적 변용
한국인이 가진 나쁜 기질(?)로 흔히 ‘공(公)과 사(私)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들곤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유를 유교 전통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글을 보면 오히려 공과 사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는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공?사 관념이 흐릿해진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전통적 공?사 관념의 특징을 규명해야 하고, 나아가 이러한 문화적 특징이 현대 한국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통시대에 성리학자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이러한 작은 공(혈연, 학맥, 지연 등)이 더 큰 범위(즉, 국가의 차원)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써, 더 큰 공, 나아가서는 무아지공에 도달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더 큰 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심지어는 무아지공의 자세로 헌신했던 일은 전통적 공 관념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도기적 혼란기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하던 소시민들은 ‘작은 집단의 공’만을 유일한 공으로 추구하고 더 큰 공을 추구하려 하지 않았다. ― p. 19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