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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16년 10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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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48쪽 | 564g | 140*210*30mm |
ISBN13 | 9788956057842 |
ISBN10 | 8956057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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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란 신의 질문이다
드라마 <도깨비>에 유덕화(육성재)에 빙의된 신을 통해 작가 김은숙은 ‘신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의 계획 같기도 실수 같기도 한가?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 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상식에 의하면 운명이란 정해진 것입니다. 설령 예정된 운명을 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운명이란 자고로 그렇게 강고해야 운명이라 불릴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드라마 <도깨비>에서 유덕화의 몸을 빌린 신의 말은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운명이란 질문의 형태라는 것. 물음표를 달고 있는 운명과 이미 정해진 것으로서의 운명이 과연 양립할 수 있을까요?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는 이안(제레미 레너)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딸아이를 낳을 것입니다. 이것이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운명의 어법입니다. 그런데, 김은숙이 그린 신은 운명을 질문이라고 규정합니다. 이안은 루이스를 만나 사랑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여 딸아이를 낳을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인간의 몫으로 남겨두었다고 하네요. 어쩌면 우리는 그 인간의 몫을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인 지도 모릅니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정하고 우리의 과거를 분석해 보면 왠지 우리의 삶에 우연이란 없어 보입니다. 특히 어떤 사건이든 주의를 기울여 집중해 보면 설령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를 넘어 인과의 맞물림이 지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심증이 있습니다. 예컨대 띄엄띄엄 보자면 평범해 보이는 우연들의 겹침도 ‘각성한’ 당사자에게는 그녀와의 사랑을 마땅한 것으로 만드는 필연인 것만 같습니다.
달리 생각해 볼 여지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지 능력, 혹은 분석 능력은 지금까지의 삶을 온전히 인과적으로 해석할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럴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면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인과성이 선명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그 결과로써 미래를 확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를 무한히 분석하면 그리고 내가 만난 그 누군가도 무한히 분석하면 이 만남도 예측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무한히 분석할 수 없죠. 그러니까 경험에 기대게 된다는 거에요.
- 이정우.『주름, 갈래, 울림』. p.135
라이프니츠의 관점에 기대면 이 세상이 정말 원인과 결과가 지배하는 세상임을 인간은 알 수가 없습니다. 명백히 알 수가 없는 것을 토대로 우주가 정말 원인과 결과에 의해 결정된 세계이며 더구나 ‘예정조화’의 섭리가 구현되어 가고 있다고 믿는 것은 도리 없이 ‘형이상학’, 혹은 ‘하나 마나한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미래를 보는 루이스가 있습니다. 미래를 보지 못했던 그녀가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까닭이 제법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결국 그것은 ‘신내림’의 일종이 아닐까요? 적어도 그녀가 보게 된 미래의 경위를 우리의 분석적이고 공간적인 언어로 환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녀의 체험과 체득을 신비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여겨 볼 점 중 하나는 루이스가 미래를 보게 되는 토대가 인간적 관점에서의 ‘무한 분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통찰이며 직관입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만 않으면 오히려 매끄럽게 쓸 수 있는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 테드 창.「네 인생의 이야기」. p.202
미래를 알게 되었을 때, 더구나 그 미래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응당한 도전일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결정론자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의지와 실천에 의해 미래는 바뀔 것이므로 미래를 바꾸려는 순간 그는 결코 미래를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의지란 의식의 본질적인 일부인 것이다.
- 테드 창. p.210
다행히 우리가 아는 영매, 무녀는 인과율에 지배되는 존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어떤 특이점들을 직관합니다. 달리 말하면 인과성이라는 논리적인 서식은 순차적인 시간을 요구하므로 시간을 초월하는 직관이나 통찰의 속성과는 부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통찰하는 자는 결정론자가 아니라 운명론자라고 해야 좀 더 그럴 듯해 보입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운명이란 인간의 힘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 운명을 향해 가는 여정에 각고의 노력이 투입된다고 해도 예정되어 있는 운명, 혹은 결정적인 큰 운명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예컨대, 루이스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아무리 딸의 죽음을 바꾸기 위해 노력을 하더라도 딸의 죽음을 가져오는 사건이 운명이라면 그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자신의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아들을 버리지만 신탁은 어김없이 실현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탁들은 미리 예언되지만 결국 바뀌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타임 리프를 소재로 하는 대개의 창작물들은 이러한 운명론적 서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과적 해석과 목적론적 해석이 양립하는
테드 창의 소설, 그리고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는 그 운명의 구조에 대해 고찰합니다. 테드 창이 주목한 것은 언어의 구조입니다. 시간 순서대로 선형적으로 나열되는 언어는 우리의 사고와 습관을 규정합니다. 앞서는 것이 뒤의 것을 배출하는 사건들의 연쇄적인 나열들은 원인과 결과로서 인과성의 사슬을 형성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의식하는 시간의 구조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외계에서 온 헵타포드들은 인류의 자명한 시간 의식에 의문을 던집니다. 정말 자연에 존재하는 시간의 구조는 선형적이며 그에 따라 사건들은 인과적인 것일까요? 만약 시간이라는 것이 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며 또한 사건들의 선형성과 인과성 자체가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비선형적이고 비인과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들에게 시간 역시 공간과 마찬가지로 통째로 인식될 수 있지는 않을까요?
각각의 블록은 몇 년 동안의 기억에 해당됐다. 이것들은 순서대로거나 연속적으로 도착하지 않았지만, 곧 오십 년에 걸친 세월의 기억을 형성했다. 이것은 내가 ‘헵타포드 B’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언어를 숙지하고 있는 기간이며, 플래퍼와 래즈베리와의 인터뷰로 시작해서 나의 죽음으로 끝난다. … 이따금 ‘헵타포드 B’가 진정한 우위를 점하면서 일별의 순간이 올 때, 나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한다.
- 테드 창. p.223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또 어떻게 가능할까요? 소설도 영화도 헵타포드들의 언어 축조에 공을 들이고 있으며, 특히 영화에서는 원형 구조에 일시에 배치되는 ‘헵타포드 B’의 패턴을 통해 선형성이 파괴되는 언어의 이미지를 환상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묘사된 언어의 특성보다는 소설에 나오는 ‘페르마의 원리’와 목적론적 관점이 비유적으로 이해하기는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작용’이나 적분에 의해 정의되는 다른 것들처럼 헵타포드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테드 창. p.207
광원을 출발한 빛은 어떻게 알고 최소 시간이 되는 경로를 찾아 공기와 물의 경계면을 통과해 가는 걸까요? 흔히들 빛의 속도로 달리게 되면 상대적으로 시간은 무한히 길어진다고 하는데, 혹시 헵타포드처럼 ‘광자photon’에겐 시작과 끝이라는 시각은 분절되지 않고 동시적인 것은 아닐까요? 물리학에서 인과적 설명을 벗어나는 것은 최소시간의 원리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왜 물질과 에너지가 에너지 보존이나 엔트로피의 법칙을 만족하도록 운동하고 변화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고립계에서 어떤 물질의 운동은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을 만족하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는 ‘목적론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약 돌이 땅 위로 떨어지는 까닭을 우주 안에서 자신의 절대위치로 회귀하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목적론적 관점입니다. 어떤 계 혹은 물질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 혹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행태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재미있게도 물리에서는 합심하여 ‘반물리학적’이라고 조롱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인데 얼핏 보아도 ‘하나 마나한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낙하하는 물체의 높이 감소와 속력의 증가가 에너지 보존에 부합되도록 변화된다는 물리학적 답변이 딱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논법과 구조상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어떤 계에 내재되어 있는 에너지 보존이라는 속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물체는 그러한 행태를 보이는 것이니까요.
양자역학에서는 조금 색다른 해석을 내 놓습니다. 광원을 출발한 광자들은 ‘확률’로써 행동합니다. A점에서 B점으로 가는 임의의 경로를 선택하여 소요 시간을 계산하고 그 시간이 걸리는 경로에 대하여 확률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B점에 도달할 확률이 높은 경로들의 광자만이 B점의 밝기에 더 큰 영향을 줄 것이고, 계산을 해 보면 그 경로들은 ‘최소 시간의 원리’를 만족하는 경로에 밀집해 있습니다. 페르마의 최소 시간의 원리와 좀 다른 점은 그 빛이 오직 최소 시간이 되는 단 하나의 경로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빛이 최소 시간을 만족할 ‘목적으로’ 단 하나의 경로를 따라 미리 알고 이동한다는 목적론적 시각은 조금 비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양자들의 양자역학적 거동 또한 목적론적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양자인 빛은 확률파동적 거동이라는 속성을 부여받고 그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물리적 사건이 인과적으로도 목적론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빗대어 “모든 언어적 사건은 정보의 전달과 계획의 현실화하라는 측면에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보의 전달은 순차적이고 인과적이지만, 동시에 이미 예정된 미래를 현실화하는 목적론적 속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언어에 목적론적인 속성이 있다고 한다면 순전히 목적론적인 언어 체계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언어는 유동적 실재를 고착화하는 공간 표상의 산물이다.
시작과 끝이 동일시되고 하나의 발화가 행위가 되며 한 순간을 통해 전체가 체득되는 순간은 득도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신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화가들의 그림은 어떨까요? 아닌게 아니라 영화가 묘사하는 ‘헵타포드 B’는 한 장의 수묵화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림은 보편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는 적절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는 공유할 수 있는 규칙을 가져야 하고 공유할 수 있는 규칙은 요소들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규칙으로 규정되는 요소들은 분절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어는 ‘공간표상’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공간 표상은 실제적 삶과 행동의 필요성에서 유리한다. 행동의 요구는 실재적 지속의 직관과는 상반되는 것으로서 지성이 자아의 본래적 모습을 소외시키는 과정에서 실현된다. 자아는 의식의 표층과 심층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내적 상태 즉 심층자아가 상호 침투하는 흐름이며 자유의 본래적 모습을 표현한다면 사회적 삶과 관계하는 표층자아는 소통의 필요성에 의해 내적 상태를 양화하고 언어로 표현한다. 언어는 유동적 실재를 고착화하는 공간 표상의 산물이다. 질적 변화를 본성으로 하는 의식 상태는 고정되는 순간 변질과 왜곡을 겪는다. 따라서 언어는 실재를 충만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황수영. 『베르그손-지속과 생명의 형이상학』. p.48
에컨대, 우리가 슬픔이란 느낌을 가질 때 과연 그 감정을 크다, 작다는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예지적이긴 하지만 루이스에게 딸의 죽음이 주는 슬픔은 말 그대로 지금의 나에게 침투하는 흐름, 즉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정한 경계를 가진 언어로 고정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따라 스며드는 유동적인 슬픔을, 고통을 정량화된 좌표에 질감을 없애고 분절적인 수학적 위치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공간은 수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장이다. 시간 속에서 단위들을 연속적으로 더함으로써 수를 형성하고자 해도 시간은 이렇게 더해진 단위들을 묶는 원리가 될 수 없다.
황수영. p.40
우리의 의식 속에 지속되는 시간이 공간적으로 표상된 것이 언어라고 하면, 시간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희망이자 가상의 언어가 ‘햅타포드 B’일 법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비언어적인 언어인 셈이죠.
그런데, 이 비언어적 언어의 심상은 공간 표상인 언어에서 기원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햅타 포드 B’를 체득하면서 루이스는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사건들’을 모두 알게 됩니다. 사건들은 어떤 특이점을 형성하죠. 결혼, 출산, 이혼, 딸의 죽음 등등, 그것들은 하나의 사건으로 다른 사건들과 분절되면서 공간적인 형태로 표상됩니다. 그것들은 계열을 이루며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져 있으며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처럼 시간의 공간 표상은 필연적으로 결정론적 시각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은 그야말로 무한히 많습니다. 가령 루이스의 결혼과 출산 사이, 아니 눈을 마주하고 키스에 이르는 그 짧은 사이에도 사건들은 무한합니다. 그것을 모두 다 안다는 것은 결국 무한히 아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공간 표상인 언어가 세계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한다면 소설과 영화가 그리고 있는 이 비언어적 언어는 다만 세계를 무한히 담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건들을 무한히 나눈다는 것과 그것들을 일시에 인지한다는 것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미분을 하면서 동시에 적분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헵타포드의 관점으로 바꾸면 그들에겐 어쩌면 미래의 어떤 사건들을 모두 알고 있다는 인지적 능력 따윈 없는 것이 아닐까요? 비언어적 언어에 시간에 대한 인간적 관념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건을 안다는 인지적 관념 역시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헵타포드 B’를 일부 체득한 루이스는 어떤 느낌일까요?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테드 창. p.230
저는 도리어 루이스가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는지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헵타포드 B’를 체득하게 되면 시간의 공간 표상은 사라지고 언어로 포착되지 않은 의식의 흐름만이 남게 되지 않을까요? “내적 환희, 슬픔, 미적 감정, 정열” 등과 같은 ‘심적 상태’가 분절 없이 뒤엉켜 연속되는 통째의 흐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우디의 성당 앞에서 순간 얼어붙은 채 눈물을 흘리는 어떤 관광객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혹은 오래 전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읽고 도서관을 나와 걸었던 짧은 밤길 속에서의 제 모습도 떠올려 봅니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나 ‘헵타포드 B’를 체득한 것과 같은 순간들을 일상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만, 그 순간들이 너무 찰나이고 또한 너무 드물게 일어나기 때문에, 아니 점점 더 드문드문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모르고 있거나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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