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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5년 11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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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6쪽 | 400g | 135*195*20mm |
ISBN13 | 9788984319363 |
ISBN10 | 8984319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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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중간 놀이 시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2교시 끝나고 운동장에 나가서 교장 선생님 말씀 듣고 체조도 하는 시간이었다. 월요일을 기다렸다. 월요일에는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상을 주는 순서가 있었다. 몇 학년 몇 반 누구, 부르면 구령대에 올라가서 공손하게 상을 받고 아이들은 박수를 쳤다. 받을 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월요일이 되면 설렜다. 상을 받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6년 내내 부럽게 쳐다만 봤다.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 시간에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구령대에 올라가서 상을 받으면 앞으로의 내 삶이 조금은 환해질 것 같았다. 넌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전교생이 치는 박수에 그런 위로와 격려의 말이 섞여 있을 것 같아 구령대에 올라가서 상을 받아 보고 싶었다.
나는 한참이나 모자란 아이였다. 글씨도 못 쓰고 그림도 못 그리고 공부는 더 못 했다.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욕심만 많은 아이였다. 친구도 별로 없었다. 나라는 아이가 여기 이렇게 있다고 박수로써 상장으로써 증거하고 싶었다. 위로와 격려, 축하의 박수. 짝짝짝. 그렇게 졸업을 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때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박수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나의 삶의 모습이 어떠할지. 슬프고도 기이한 전조를 느꼈다. 십 년 후, 이십 년 후의 모습이 예상되었다.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상과 박수를 받았더라면 그게 자신감으로 연결돼서 활기찬 인생 계획을 세우고 진취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들을 하며 나는 급격히 늙어갔다.
매달 내야 하는 방세, 급식비, 교복비, 수학여행비, 분기별로 내야 하는 납부금. 돈 걱정만 하며 살게 될 미래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 친구를 보라」의 '나'처럼 사람들은 나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장차 내가 무엇이 될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나 역시 그랬다. 사채 빚이나 지지 않고 살면 다행이지라는 자학적인 생각들. 콤플렉스는 심해지고 사람들이 나만 미워한다는 피해 망상까지 생겼다.
책을 읽었다. 어쩌다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돈이 생기면 시내에 있는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돈이 부족하면 헌책방에 갔다. 지하방으로 책들을 사다 날랐다. 원체 멍청해서 읽어도 이해가 안 됐다. 그래도 읽었다. 읽는 동안 낮이 밤으로 봄이 여름으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시간이 마구 흘러갔다. 읽다 보니 대학교에 들어가 있었다. 책을 읽는 것외에는 한 것이 없었는데. 들어가서도 열등감을 이겨 내기 위해 읽었다. 글은 여전히 못썼다. 못 쓰는 대신 잘 쓴 문장들을 읽었다. 내가 아니어도 잘 쓰니까.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을 읽었다. 『목화밭 엽기전』도 읽었다. 세련된 문장, 소설의 구조를 뛰어넘는 구조, 폭력스럽고 야만스러운 이야기, 그런 인물들, 짠하고 애처로운 '나'의 고백들, 사라진 작가, 선생들도 모르던 그의 행방. 요즘 작가 중에 누가 제일 잘 쓰냐는 질문에 다들 백민석.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백민석. 그가 사라지고 젊은(젊다고 하니까, 젊은) 작가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했다. 새롭다, 이전에는 없는 방식이다, 참신하다, 그로테스크하다, 번뜩인다는 심사평을 달고서.
월요일, 전교 1등이 사라져버린 틈을 타, 이름을 불러서 구령대에 오르게 한 후 상을 주고 박수를 치게 했다. 기괴한 일인데 전교 1등은 단 한 번도 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그가 전교 1등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선생들은 돈 많고 집안 좋고 말 잘 듣는 애들만 뽑아서 잘한다, 칭찬하고 상을 주고 박수를 받게 했다. 몇몇 애들만 전교 1등에게 다가가서 힘내라고 응원해 줄 뿐이었다. 잘 버티고 꿋꿋하게 지내던 전교 1등은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선생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라진 전교 1등 대신 그의 그늘에 가려졌던 애들이 구령대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뭘 모르는 아이들은 축하해주고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줬다.
백민석이 사라지기 전 출간한 소설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을 읽고 이래도 되나, 이러면 안 되는데 걱정이 들었다. 이름을 불러주지도 상을 주지도 박수를 쳐주지도 않았다. 지독히 슬프고 우스운 이야기. 소설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희망들을 어둡고 슬프게 그려내고 있었다. aw로 대신한 나의 상상 속 친구. 시체로 표현되는 살아있는 자들과 맺고 싶었던 관계. 아파트 복도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유년. 백민석의 문장은 교정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문장을 써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런 문장들을 쓰려면 엄청나게 많은 글들을 읽어야지 쓸 수 있다. 그런 문장들은 쉬지 않고 한달음에 쓰는 문장들이다. 지우지 않으려고 머릿속에서 문장의 순서를 짜 맞춘 뒤 바로 써 내는 것이다. 대단한 감각. 누굴 흉내 내려고 하지 않는다. 쓰다 보니 자신만의 세계가 완성이 되었다. 유년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세상의 적의에 용감하게 맞서 싸우려고 글을 썼다. 용감해지진 않았지만 매일 밤 자괴감에 빠져 불면증을 겪는 일은 적어졌다.
두 번째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을 읽고 거봐, 우리 생각이 맞잖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출간된 지 15년이 넘은 소설집인데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은 과거의 책이 아니다. 연도를 헤아릴 수 없는 먼 미래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예언서이다. 소설의 구조는 전복되고 문장은 날이 잔뜩 서서 우리를 포함한 모두의 심장을 찌른다. 초등학교 이후로도 공식적인 칭찬과 격려를 받아본 적이 없다. 문서화된 축하의 말도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 비뚤어지지도 않고 사채 빚도 지지 않았다. 이유는 구령대에 올랐던 시간이 지나면 그 짦은 순간을 다시 경험해 보고 싶어서 기술만 습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환호의 순간이 없는 일상을 보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도 눈치챘다. 우리는 지하, 책만 가득한 세계에서 당신의 책들을 읽으며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다. 『목화밭 엽기전』이후 한창림의 삶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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