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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미니북 세트 21-30권

전 권 한글판+영문판

[ 전10권 ]
니콜라이 고골, 다자이 오사무, 오 헨리, L. 프랭크 바움, 앙드레 지드 저 외 4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더클래식 | 2014년 04월 01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상품 가격정보
정가 79,000원
판매가 71,100 (10% 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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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미니북 세트 21-30권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4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2,160쪽 | 100*135*70mm
ISBN13 9791155512340
ISBN10 115551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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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저자 소개 (9명)

저 : 니콜라이 고골 (Nikolai Vasilievich Gogol,알로프)
1809년 폴타바 지방에서 폴란드-우크라이나계 소귀족 집안 출신으로 미르고로드 군의 작은 마을 소로친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문학을 좋아했으며, 고교 시절에는 직접 희곡을 써서 공연을 하고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본래 성인 고골리야노프스키에서 앞부분만을 따 필명으로 사용했다. 네진의 김나지움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문화 예술을 섭렵했고, 알로프라는 필명으로 낭만주의 시와 서사시, 이야기... 1809년 폴타바 지방에서 폴란드-우크라이나계 소귀족 집안 출신으로 미르고로드 군의 작은 마을 소로친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문학을 좋아했으며, 고교 시절에는 직접 희곡을 써서 공연을 하고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본래 성인 고골리야노프스키에서 앞부분만을 따 필명으로 사용했다. 네진의 김나지움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문화 예술을 섭렵했고, 알로프라는 필명으로 낭만주의 시와 서사시, 이야기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828년 김나지움을 마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는 관공서에서 일을 하기도 했으나 작가로서의 소명 의식을 가지고 시와 소설들을 발표했다.

작가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수록한 첫 소설집 『디칸카 근교의 야화』(1831~32)가 발표되면서였다.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룬 이 소설들이 큰 인기를 누리면서 고골은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푸시킨과 같은 문호들을 만났고, 1830년대 대부분을 역사, 드라마, 에세이, 픽션 등 다양한 문학 장르를 실험하는 데 보냈다. 1835년에는 『아라베스크』와 『미르고로드』가 출간되었다. 『아라베스크』는 고골의 사실주의 기법이 확립된 단편 「광인일기」, 「초상화」가 포함된 글 모음집이며, 『미르고로드』는 환상성·풍자성이 도드라진 네 편의 작품을 담은 소설집이다. 「코」와 「마차」는 1836년 각각 개별적으로 문학잡지에 발표되었고, 같은 해에 『감찰관』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어 호황을 누렸다. 『감찰관』은 고골이 자신의 창작 경향을 사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 새롭게 전향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1836년 이후로는 로마 등 주로 외국에 거주하면서 『죽은 혼』 1부를 집필하였다. 고골의 문학적 역량이 집결된 대작 『죽은 혼』 1부는 1842년 출판되어 문단에서 거의 절대적인 호평을 받았고, 같은 해 전집에 포함되어 발표된 「외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걸작 단편소설이다. 1840년대를 거치며 작가로서의 자신의 재능에 회의를 느낀 고골은 악에 대해 풍자한 지금까지의 소설과는 다른, 도덕적 완성과 악에서의 부활을 그린 『죽은 혼』 2부를 집필하기 시작하나 실패한다.

결국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단식을 단행하다 1852년 마흔세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모스크바에 묻혔다. 그의 사인은 의학적으로 기아, 티푸스 혹은 우울증으로 규정되어 왔으며 그의 영혼이 유탈 이체한 상태에서 생매장되었다는 주장이 20세기 초에 제기되어 유력한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늘날까지 그의 죽음은 출생보다 더 신비로운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고골은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로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사실주의적 묘사 기법과 풍자적 문체로 도스토옙스키를 포함한 후대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저 : 다자이 오사무 (Dazai Osamu,だざい おさむ,太宰 治,츠시마 슈지津島修治)
1909년 6월 19일, 일본 아오모리 현 쓰가루 군 카나기무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가진 자로서의 죄책감을 느꼈고,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성장한다. 1930년,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지만, 중퇴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井伏_... 1909년 6월 19일, 일본 아오모리 현 쓰가루 군 카나기무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가진 자로서의 죄책감을 느꼈고,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성장한다.

1930년,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지만, 중퇴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井伏_二]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그는 본명 대신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35년 소설 「역행(逆行)」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5년 제1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단편 「역행」이 올랐지만 차석에 그쳤고, 1936년에는 첫 단편집 『만년(晩年)』을 발표한다. 복막염 치료에 사용된 진통제 주사로 인해 약물 중독에 빠지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겪지만, 소설 집필에 전념한다. 1939년에 스승 이부세 마스지의 중매로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한 후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많은 작품을 썼다.

1947년에는 전쟁에서 패한 일본 사회의 혼란한 현실을 반영한 작품인 「사양(斜陽)」을 발표한다. 전후 「사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 작가가 된다. 그의 작가적 위상은 1948년에 발표된, 작가 개인의 체험을 반영한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수차례 자살 기도를 거듭했던 대표작은 『만년(晩年)』, 『사양(斜陽)』, 「달려라 메로스」, 『쓰기루(津?)』, 「여학생」, 「비용의 아내」, 등. 그는 1948년 6월 13일, 폐 질환이 악화되자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人間失格)』을 남기고 카페 여급과 함께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저 : 오 헨리 (O. Henry,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
미국 단편 소설 작가로서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에서 태어났다. 보통 사람들, 특히 뉴욕 시민들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단편 소설들은 우연의 일치가 작중인물에 미치는 영향을 우울하고 냉소적인 유머를 통해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갑작스런 결말로 인해 극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그의 등록상표가 되다시피했으나 그런 ... 미국 단편 소설 작가로서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에서 태어났다. 보통 사람들, 특히 뉴욕 시민들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단편 소설들은 우연의 일치가 작중인물에 미치는 영향을 우울하고 냉소적인 유머를 통해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갑작스런 결말로 인해 극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그의 등록상표가 되다시피했으나 그런 수법의 유행이 한물가자 평론가들은 바로 그런 수법 때문에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숙모가 교사로 있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졸업 후에는 숙부의 잡화상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1882년 텍사스로 가서 농장, 국유지 관리국을 거쳐 오스틴에 있는 제1국립은행의 은행원으로 일했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 그의 작품 「20년 뒤」나 「경찰관과 찬송가」 등에서 고스란히 나타난다. 1894년 주간지 [롤링 스톤 The Rolling Stone]지를 창간했으나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휴스턴 포스트 Houston Post>에서 기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했고 가끔 만화도 기고했다.

1887년 애설 에스티스와 결혼했으며, 이무렵부터 습작(習作)을 시작했다. 1896년 2월 은행 공금횡령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온두라스로 도피했다. 그러나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오스틴으로 돌아왔고, 당국의 배려로 재판은 아내가 죽을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는 최소한의 형을 받고 1898년 오하이오의 컬럼버스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모범적인 복역으로 형기는 3년 3개월로 줄어들었다. 그는 교도소의 병원에서 야간에 약제사로 일하면서 딸 마거릿의 부양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썼다.

미국 남서부와 중남미를 무대로 한 그의 모험소설은 즉각 잡지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으며 그는 출감하면서 이름을 W. S. 포터에서 O. 헨리로 바꾸었다. 1902년 헨리는 스스로 '지하철위에 건설된 바그다드'라고 묘사했던 도시인 뉴욕에 도착했다. 1903년 12월부터 1906년 1월까지 그는 뉴욕의 [월드 World]에 매주 글을 쓰면서 동시에 잡지에도 기고했다.

최초의 소설집 『캐비지와 왕 Cabbages and Kings』(1904)은 온두라스를 배경으로 이국적인 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이며 『400만 The Four Million』(1906)·『The Trimmed Lamp』(1907)는 뉴욕 시민들의 일상 생활과 낭만과 모험에 대한 추구를 묘사했고, 『서부의 마음 Heart of the West』(1907)는 텍사스 산맥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환상적인 내용의 소설이다.

헨리의 말년은 자신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악화된 건강, 금전상 압박과의 싸움, 알코올 중독 등으로 얼룩졌다. 1907년에 한 재혼은 불행했다. 1910년 6월 5일, 과로와 간경화, 당뇨병 등으로 뉴욕 종합병원에서 사망했다. 사후에 『Sixes and Sevens』(1911)·『뒹구는 돌 Rolling Stones』(1912)·『Waifs and Strays』(1917) 등 3권의 선집이 나왔다. 나중에 즉흥적으로 쓴 소설과 시를 모은 『O. 헨리 선집 O. Henryana』(1920)·『Letters to Lithopolis』(1922)와 초기의 작품을 모은 2권의 책 『Houston Post, Postscripts』(1923)·『O. Henry Encore』(1939)가 출간되었다. 『경찰관과 찬송가 The Cop and the Anthem』·『마지막 잎새 The Last Leaf』 등의 단편에서 보이는 따뜻한 휴머니즘은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제럴드 랭퍼드가 쓴 전기 『앨리어스 O. 헨리 Alias O. Henry』가 1957년에 나왔다. 대표 작품 소설로는 『현자의 선물』, 『경찰관과 찬송가』, 『마지막 잎새』, 『양배추와 왕』, 『크리스마스 선물』, 『20년 후』, 『운명의 길』이 있다.
아동과 청소년에게 널리 읽히는 고전, 『오즈의 마법사』를 쓴 작가이다. 1856년 미국 뉴욕 주에서 태어났다. 극작가, 극장 경영자, 신문기자, 영업사원, 심지어 닭을 기르는 일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아내의 격려로 좌절하지 않은 그는 밤마다 아이들을 위해 이야기를 지었으며 장모 마틸다 게이지의 권유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프랭크 바움의 첫 책은 흥미롭게도 『함부르크 양육법』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아동과 청소년에게 널리 읽히는 고전, 『오즈의 마법사』를 쓴 작가이다. 1856년 미국 뉴욕 주에서 태어났다. 극작가, 극장 경영자, 신문기자, 영업사원, 심지어 닭을 기르는 일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아내의 격려로 좌절하지 않은 그는 밤마다 아이들을 위해 이야기를 지었으며 장모 마틸다 게이지의 권유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프랭크 바움의 첫 책은 흥미롭게도 『함부르크 양육법』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결혼 후 한 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마더 구즈' 책들을 출간한 것이 좋은 반응을 얻었고, 잡지사의 편집장으로서의 자리도 탄탄히 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바움은 어린이를 위한 책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1899년 W. W. 덴슬로우와 함게 작업한 『파더 구즈 : 그의 책』은 출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듬해인 1900년, 평범한 시골 소녀의 독특한 모험담을 담은 『오즈의 마법사』를 출간하면서 잊혀지지 않을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후에 작가는 어른들을 위한 책도 여러 편 썼으나 그다지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오즈의 마법사』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의 편지에 파 묻혀 모두 14권에 이르는 '오즈' 시리즈 『오즈의 마법사 The Wonderful Wizard of Oz』, 『환상의 나라 오즈 The Marvelous Land of Oz 』, 『오즈의 오즈마 공주 Ozma of Oz』, 『도로시와 오즈의 마법사 Dorothy and the Wizard in Oz』, 『오즈로 가는 길 The Road to Oz』, 『오즈의 에메랄드 시 The Emerald City of Oz』, 『오즈의 누더기 소녀 The Patchwork Girl of Oz』, 『오즈의 작은 마법사 이야기 Little Wizard Stories of Oz』, 『오즈의 틱톡 Tik-Tok of Oz』, 『오즈의 허수아비 The Scarecrow of Oz』, 『오즈의 링키팅크 Rinkitink in Oz』, 『오즈의 사라진 공주 The Lost Princess of Oz』, 『오즈의 양철 나무꾼 The Tin Woodman of Oz』, 『오즈의 마법 The Magic of Oz』, 『오즈의 글린다 Glinda of Oz』 를 출간했다. 이 중 마지막 14권을 쓸 때 바움은 병원에서 그의 마지막 생을 보내고 있었고 끝내 그 책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저 : 앙드레 지드 (Andr-Paul-Guillaume Gide,앙드레 폴 기욤 지드)
인간 내면에 대한 정직한 탐구를 담은 작품들로,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대표자로 자리 잡은 소설가. 1869년 11월 22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법과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청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지드는 1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엄격한 교율을 강조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예민하고 신경성 발작이 잦은 학생이라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18살때부터 문학에 빠지면서 상징주의의 ... 인간 내면에 대한 정직한 탐구를 담은 작품들로,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대표자로 자리 잡은 소설가. 1869년 11월 22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파리법과 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청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지드는 1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엄격한 교율을 강조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예민하고 신경성 발작이 잦은 학생이라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18살때부터 문학에 빠지면서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이네를 탐독했고 그리스 신화와 성서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던 사촌 누나 마들렌은 그에게 예술혼을 유발시키는 평생의 동반자였다. 1891년 사촌 누이 마들렌 롱도에게 청혼했지만 거부당하고 그녀에 대한 열띤 사랑을 담은 처녀작 소설 『앙드레 발테르의 수첩』을 처음 발표하고 시인 말라르메가 이끄는 ‘화요회’에서 예술가들과 친교를 쌓는 등 작가로서 첫발을 떼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것은 1893년의 아프리카 여행이었다. 아프리카의 작렬하는 태양과 야성적 풍토는 지금까지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엄격한 그리스도교적 윤리에서의 해방을 가져왔으며, 모든 구속에서 풀려난 강렬한 생명력을 향유하는 것이 삶의 길임을 가르쳐주었다. 1893년 북아프리카로 떠난 여행에서 첫 동성애 경험을 하게 되고, 모든 도덕적·종교적 구속과 금기로부터 해방감을 체험하게 된다.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의지는 지드의 문학의 독특한 출발점이 되어주었다.

1894년 어머니가 죽자 앙드레 지드는 1895년 어릴 적부터 흠모해 오던 연상의 외사촌 누이 마들렌 롱도와 결혼했으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오로지 정신적인 관계에 국한된 것이었다. 1896년 라로크 자치구의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시장으로 있으면서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상의 양식』을 완성했다. 젊음의 열광과 자유의 삶에 대한 고백록인『지상의 양식』은 출간 당시에는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본능에 충실한 자유의 삶과 종교적인 도덕과의 대립에 대한 주제는 이후의 창작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1909년 친구들과 함께 잡지 『라 누벨 르뷔 프랑세즈』(『NRF』)를 창간했으며, 이 잡지의 창간호에서부터 『좁은 문』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지드가 핵심 멤버로 활약한 이 잡지는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중흥에 기여한 수많은 작가들을 세상에 알리는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적 현실에도 점차 눈을 뜨게 되면서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공산주의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문단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 20세기 문학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고 그가 유일하게 '소설'이라고 지칭한 『사전꾼들 Les Fauxmonnayeurs』(1926)을 발표함으로써 종래의 소설 관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형식과 구성을 시도했다. 사회적 현실에도 점차 눈을 뜨게 되면서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공산주의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앙드레 지드는 『배덕자』,『좁은 문』,『전원 교향악』,『사전꾼들』을 쓰면서 작가의 직무에 몰두하는 한편, 이러한 주제에 대한 갈등을 1926년부터 쓰기 시작한 자서전 『한 알의 밀이 죽지 않는다면』에 담아 위대한 고백 문학 작품으로 남겼다.

또 프랑스 식민주의에 시달리는 원주민의 참상을 여지 없이 폭로한 『콩고 여행 Voyage au Congo』(1926)과 문화적 폐쇄성과 획일성을 맹렬히 비난한 『소련기행 Retour de L'URSS』(1936)으로 사회적 활동을 하기도 했다. 여러 논문에서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론』을 비롯한 외국문학과 프랑스 문학에 대한 활발한 비평활동을 하기도 했다. 1938년 아내가 죽자 사실상 모든 창작을 끝맺고 평생 옹호했던 개인의 자유에 대해 전통의 가치와 도덕과의 공존을 모색했다.

앙드레 지드는 종교와 도덕의 구속과 타율성을 거부하고 진정한 도덕성의 탐구를 통해 새로운 인간 정신의 풍토를 만드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7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명예학위를 받았다. 기성의 종교, 도덕의 구속을 거부하고 열정적인 구도자로 평생의 작품 세계를 추구한 끝에 그해 11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50년 1939년부터 80회 생일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기록을 담은『일기』의 마지막 권을 출판한 지드는 1951년 82세를 일기로 파리의 자택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1891년 첫 작품 '앙드레 왈테르의 수기'를 발표한 이래, 주로 도덕과 욕망 사이의 갈등을 다룬 작품을 발표했다. 『지상의 양식』에서는 앙드레 지드는 전세계 젊은이에게 육체와 정신의 해방 찬가를 보낸다. 가르와 몽테블랑에서 카뮈와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욕망을 부정하는 종교와 윤리로부터 해방을 꿈꾸던 세대에게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고 표현하라는 이 책의 호소는 전후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삶이 베풀어주는 기쁨을 최대한 향유하겠다는 그의 문학의 독특한 출발점은 바로 이 책에서 비롯하였다.

『좁은 문』은 그의 대표작으로 육체적인 쾌락과 지상의 행복을 승화시켜 현실적인 '사랑'을 종교적인 '존재'로 창조하거 사랑하는 남녀의 감정이 얼마나 높을 수 있으며, 절대 순수의 경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19세기 합리주의 사상에 종지부를 찍고 새것을 제시하는 현대 문학의 복음서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외의 작품으로 『앙드레 왈테르의 수기』(1891), 『지상의 양식』(1897), 『좁은 문』(1909), 『배덕자』(1902), 『교황청의 지하도』(1914), 『전원교향악』(1919), 『콩고 기행』(1927), 『탕아귀가』(1907), 『도스토예프스키론』(1920), 『코리동』(1924), 『위폐 제조자들』(1926), 『나르시스론』 등 다수가 있다.
1899년 7월 21일 미국 일리노이 주 오크 파크(현재의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의사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를 두었고, 여섯 남매 중 장남이었다. 평생을 낚시와 사냥, 투우 등에 집착했으며, 다방면에 걸쳐 맹렬한 행동을 추구하고, 행동의 세계를 통해 자아의 확대를 성취하려 했다. 그러한 인생관은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고등학생 때 학교 주간지 편집을 맡아 직접 기사와 단편을 썼으며, ... 1899년 7월 21일 미국 일리노이 주 오크 파크(현재의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의사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를 두었고, 여섯 남매 중 장남이었다. 평생을 낚시와 사냥, 투우 등에 집착했으며, 다방면에 걸쳐 맹렬한 행동을 추구하고, 행동의 세계를 통해 자아의 확대를 성취하려 했다. 그러한 인생관은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고등학생 때 학교 주간지 편집을 맡아 직접 기사와 단편을 썼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917년 [캔자스시티 스타]의 수습기자로 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적십자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하기도 했으며,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다리에 중상을 입고 귀국했다. 휴전 후 캐나다 [토론토 스타]의 특파원이 되어 유럽 각지를 돌며 그리스-터키 전쟁을 보도하기도 했다. 1921년, 해외 특파원으로 건너간 파리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등 유명 작가들과 교유하는 등 근대주의적 작가들과 미술가들과 어울리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23년 『세 편의 단편과 열 편의 시(詩)』를 시작으로 『우리들의 시대에』, 『봄의 분류(奔流)』,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발표했다.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삶을 그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소설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그후 1920년대 ‘로스트 제너레이션(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피츠제럴드’와 ‘포그너’와 함께 3대 작가로 성장하였다.

그의 첫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1926년에 발표했는데, 헤밍웨이의 대다수 작품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에 발표되었다. 전쟁 중 나누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 전쟁문학의 걸작 『무기여 잘 있거라』(1929)는 그가 작가로서 명성을 얻는 데 공헌했으며, 1936년 『킬리만자로의 눈』,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0)는 출판되자마자 수십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린다. 이후 10년 만에 소설 한 편을 발표하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52년 인간의 희망과 불굴의 정신을 풀어낸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여 큰 찬사를 받았으며,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통해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지만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러나 이 해에 두 번의 비행기 사고를 당하는데, 말년에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집필 활동도 막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행동의 규범에 철저한 만큼이나 죽음과 대결하는 삶의 성실성과 숭고함을 작품에 투영하려 노력해왔다. 1959년에는 아이다호 주로 거처를 옮겼고, 1961년 여름, 헤밍웨이는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1961년 케첨의 자택에서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표작으로는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952년 『노인과 바다』 등이 있다.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후 10여 년 넘게 긴 침체기를 겪었지만, 인생의 절망과 희망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신념을 잃지 않으면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미국의 소설가이며 단편 작가이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그중에서도 1920년대 화려하고도 향락적인 재즈 시대를 배경으로 무너져 가는 미국의 모습과 ‘로스트제너레이션’의 무절제와 환멸을 그린 작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등과 함께 20세기 초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작품과 생애,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된 인물이다. 1896년 9월 24일 미네소타 ... 미국의 소설가이며 단편 작가이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그중에서도 1920년대 화려하고도 향락적인 재즈 시대를 배경으로 무너져 가는 미국의 모습과 ‘로스트제너레이션’의 무절제와 환멸을 그린 작가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등과 함께 20세기 초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작품과 생애,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된 인물이다. 1896년 9월 24일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자퇴 후, 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1919년 장편소설 『낙원의 이쪽』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25년 4월, 피츠제럴드는 장편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완성했는데, 1920년대 대공황 이전 호황기를 누리던 미국의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전후의 공허와 환멸로부터 도피하고자 향락에 빠진 로스트제너레이션의 혼란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작품에서 청춘의 욕망과 절망이 절묘하게 묘사되고 있다. 세계적인 명작으로 연극,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고 있다.

헤밍웨이는 “이토록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면, 앞으로 이보다 더 뛰어난 작품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라며 작품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T. S. 엘리엇은 “헨리 제임스 이후 미국 소설이 내디딘 첫걸음”이라고, 거트루드 스타인은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로 동시대를 창조했다.”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데뷔작 『낙원의 이쪽』의 절반도 팔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죽은 후 재조명되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장편소설로 『밤은 부드러워』, 『마지막 거물의 사랑(미완)』, 『말괄량이와 철학자들』, 『낙원의 이쪽』, 『아름답고도 저주받은 사람들』, 『재즈 시대의 이야기들』, 『위대한 개츠비』, 『얼음 궁전』, 『밤은 부드러워』, 『기상나팔 소리』등을 비롯해 중단편 160여 편을 남기고 1940년 12월 21일 4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저 : 레프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사상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손꼽힌다.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살과 9살 때 각각 모친과 부친을 여의고, 이후 고모를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세가 되던 1844년에 까잔 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사교계를 ...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사상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손꼽힌다.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살과 9살 때 각각 모친과 부친을 여의고, 이후 고모를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세가 되던 1844년에 까잔 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사교계를 출입하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곧 자퇴해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3년간 방탕하게 생활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카프카스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1852년 문학지 [동시대인]에 처녀작인 자전소설 중편 「유년 시절」를 발표하여 투르게네프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53년에는 『소년시절』을, 1856년에는 『청년시절』을 썼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전쟁 경험은 훗날 그의 비폭력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56)를 써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이듬해 잡지 『소브레멘니크』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렸다. 1859년에 고향인 야스나야 뽈랴나에 농민 학교를 세우는 등 농촌 계몽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며 농민학교를 세웠다.

34세가 되던 1862년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하여 슬하에 모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볼가 스텝 지역에 있는 영지를 경영하며 농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869년 5년에 걸쳐 집필한 대표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873년에는 『안나 카레니나』의 집필을 시작해 1877년에 완성했으며, 1880년대는 톨스토이가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크로이체르 소나타』『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등의 작품이 쓰인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에 비판을 가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사십대 후반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 문제를 천착하면서 작품세계의 분수령이 되는 『참회록』(1879)을 내놓았고, 정치, 사회, 종교, 사상적 문제들에 관해 계속해서 저술하고 활동했다.

또한 술과 담배를 끊고 손수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며, 빈민 구제 활동도 했다.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고,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크로이처 소나타』(1889)를 통해 깊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으며,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와 『부활』(1899)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 이반과 그의 두 형제 이야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땅이 많이 필요한가?』, 『세 가지 질문』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극단적인 도덕가가 되어 1880년 이후에 낸 일련의 저술에서 국가와 교회를 부정하고, 육체의 나약함과 사유재산을 비난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저작물에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저작권을 포기하는 선언을 했고(1891),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되었으며, 출판으로 인한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1901년 『부활』에 러시아 정교를 모독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 『부활』(1899)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사유재산과 저작권 포기 문제로 시작된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나 폐렴을 앓다가 현재 톨스토이 역이 되어 있는 아스타포보 역장의 관사에서 8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임종 때 아내를 보기를 거부한 톨스토이의 마지막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 왜 사람들은……”이었다.

귀족의 아들이었으나 왜곡된 사상과 이질적인 현실에 회의를 느껴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추구했다. 그는 고귀한 인생 성찰을 통해 러시아 문학과 정치, 종교관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고, 인간 내면과 삶의 참 진리를 담은 수많은 걸작을 남겨 지금까지도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존경받고 있다. 인간과 진리를 사랑했던 대문호 톨스토이. 그는 세계 문학의 역사를 바꾼 걸작들을 남긴 소설가이자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까지 영향을 준 ‘무소유, 무저항’의 철학을 남긴 사상가였다. 톨스토이의 작품만이 지닌 문체와 서사적 힘은 지금 보아도 여전하다. 특히 소설 속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이야기의 서사성, 섬세한 인물 심리 묘사 등이 돋보이며,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로 인정받고 있다.
저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Anton Pavlovich Chekhov,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실주의 희곡의 대가로 불리는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 Чехов, 1860∼1904)는 러시아 남부의 흑해 연안 항구 도시인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벨은 항구도시 타간로크에서 잡화점을 운영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새벽 기도와 성가대 활동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작가의 유년 시절의 지각(知覺)을 지배하게 된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파산해 온 가족이 모스크바로 떠난 후 체호프는 타간로크...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실주의 희곡의 대가로 불리는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 Чехов, 1860∼1904)는 러시아 남부의 흑해 연안 항구 도시인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벨은 항구도시 타간로크에서 잡화점을 운영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새벽 기도와 성가대 활동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작가의 유년 시절의 지각(知覺)을 지배하게 된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파산해 온 가족이 모스크바로 떠난 후 체호프는 타간로크에 혼자 남았다. 이때부터 체호프는 독립심과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학비를 벌며 공부하던 그는 고학으로 중등학교를 마친 뒤 1879년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단편소설들을 쓰기 시작했고, 졸업 후 의사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에 나섰다. ‘안토샤 체혼테’, ‘내 형의 아우’, ‘쓸개 빠진 남자’와 같은 필명으로 생계를 위해 유머 잡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단편들은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소품들이 대부분이었다. 1885년 12월 체호프는 레이킨의 초대를 받아 페테르부르크로 가게 된다.

거기서 드미트리 바실리예비치 그리고로비치와 알렉세이 세르게예비치 수보린을 알게 된다. 1884년 의사 자격을 얻은 후 결핵을 앓는 와중에도 의료 봉사와 글쓰기를 병행하며 풍자와 유머가 담긴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리고로비치는 체호프의 『사냥꾼』을 읽으면서 그의 위대한 재능이 소모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 무렵 그에게 당대 최고의 작가 그리고로비치가 천재적인 재능을 낭비하지 말고 문학에 집중하라는 조언의 편지를 보내 온다.

이 충고 이후 1887년 봄 무렵부터 체호프는 이전과는 다른, 보다 객관적인 작가로 변모하게 된다. 한편으로 수보린은 체호프에게 고정 지면을 내주었고, 경제적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의 경제적 후원 덕택에 체호프는 원고 마감 시간과 주제의 제약과 같은 현실적 부담에서 벗어나 전업 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황야』, 『지루한 이야기』, 『등불』 등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고, 30세 때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기점으로 사회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다루며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작가로서의 자각을 새로이 하여 단편집 『황혼』(1887)으로 푸슈킨상을 받고 희곡 『이바노프』(1887), 중편소설 『대초원』(1888)을 발표하며 그동안의 스타일에 작별을 고했다. 1890년에는 사할린 섬으로 가 당시 제정 러시아의 유형 제도를 면밀히 관찰하고 이에 관한 르포르타주 『사할린 섬』(1895)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대중의 엄청난 주목을 받았으며, 사할린에서 만난 하층민 유형수들과 정부 제도의 부조리는 이후 발표되는 그의 작품이 민중의 삶에 더욱 밀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2년 모스크바 근교의 멜리호보에 정착한 작가는 왕성한 창작열로 『6호실』(1892), 『문학 선생』(1889∼1894), 『롯실트의 바이올린』(1894), 『대학생』(1894), 『3년』(1895), 『다락이 있는 집』(1896), 『나의 삶』(1896), 『갈매기』(1896), 『농군들』(1897)과 같은 후기 걸작들을 집필했다.

한편으로 농민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톨스토이, 코롤렌코와 함께 기근(饑饉)과 콜레라 퇴치 자선사업을 펼쳤으며, 학교와 병원 건립 등 사회사업에도 참여했다. 1898년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크림 반도의 얄타로 이사한 체호프는 우울과 고독 속에서 나날을 보냈는데, 모스크바 예술극장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와의 결혼으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용무가 있어서』(1899), 『사랑스러운 여인』(1899),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 『바냐 외삼촌』(1899), 『골짜기에서』(1900), 『세 자매』(1901), 『약혼녀』(1903) 등을 발표했다.

1904년 1월 17일 체호프의 생일에 초연된 [벚나무 동산]과 창작 25주년 축하연은 그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었지만, 그의 건강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같은 해 6월 독일 바덴베일레르(Баденвейлер)로 아내 올가 크니페르와 요양을 떠나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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