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정철이 전작인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에 이어 이번에 펴내는 책 『권력 이동으로 보는 한국사』에서도 화두로 삼은 주제는 ‘개혁’이다. 그는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에서 대동법을 국가 운영의 문제이자 세금을 통한 국가 전체의 개혁이었다는 데 초점을 맞춰 서술했다. 대동법으로 기존 세금의 약 80%가 감소되었는데, 이를 체제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개혁의 방식을 취해 진행시켜 나가는 과정에 주목했다. 두 번째 책인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는 대동법을 실행해 나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이, 이원익, 조익, 김육 네 사람을 통해 대동법의 각 단계 개혁마다 과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발전해갔는지를 살펴보았다. 앞의 두 권이 조선시대에 한정하여 제도사와 인물사에 방점을 두었다면, 『권력 이동으로 보는 한국사』는 삼국시대부터 여말선초까지 다룬 통사에서 변화가 일어난 전환기의 개혁을 살펴본다.
한국사에서 주목할 만한
다섯 시대 다섯 번의 권력 이동
1. 642~676년
고구려·백제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신라가 당나라까지 몰아내며 통일을 이루는 과정이다. 이른바 삼국항쟁기다. 이 시기 한반도 내 힘의 불균형을 초래한 근본적인 이유는 초강대국 당나라의 등장이었다. 이 외부 영향이 삼국 각각에 어떻게 내부화되었는지, 삼국 간 전쟁에서 승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642년은 고구려와 백제에서 커다란 정치적 사건들이 일어난 중요한 해다. 신라도 이해에 백제의 군사 공격을 받고 영토의 1/3에 가까운 수십 개 성을 잃는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그로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676년까지 숨 가쁘게 진행되는 삼국의 국내·국제 상황을 들여다본다.
2. 8세기 말~원종과 애노의 난(889)
통일 후 신라는 유례없는 번영을 누렸지만 점차 사회 내부 갈등이 고조되었다. 사회를 해체하는 힘인 골품제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골품제는 신라가 성장하고 팽창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는데, 그것이 처음 마련될 때만 해도 전쟁 없이 사회를 통합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가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배제와 갈등의 원리가 되어버렸다. 진골 귀족의 배타성은 합리적 국정 윤영과 개혁을 위해 필요했던 6두품과의 협력을 어렵게 했고, 지방 세력을 배제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중앙은 차츰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지방은 조각조각 파편화되었다. 이때 새로운 지배층 호족이 등장했다.
3. 원종과 애노의 난~고려 광종(949~975)
후삼국시대에서 고려 건국으로 가는 과정은 국가의 정치적 중심과 지배층의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천년의 고도 경주는 이미 국가의 정치 중심에서 쇠락하고, 진골 중심의 지배층도 약해지면서 지방 호족들이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 시대는 후삼국시대와 고려 초(광종)의 두 시기로 나뉜다. 후삼국시대는 전국에 산재한 호족들이 새로운 사회적 힘의 균형점으로 수렴되는 과정이었다. 광종은 호족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그가 이 위험한 일을 추진한 과정을 살폈다.
4. 1259~1356년까지 원간섭기
원나라는 고려의 정치·사회 지형을 재구성하고 새 지배 세력을 낳았다. 시간이 흐르자 세계 제국 원나라가 구축한 질서에서 고려의 위치와 정체성을 놓고 고려 지배층 내부에서 의견이 나뉘었다. 원간섭기 권력을 장악하고 농단한 부원배(附元輩)는 원나라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지만, 단순히 부패의 뿌리라고만 규정할 수만 없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로 환원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였다. 이 시기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지, 개혁의 양상은 어떠했는지 살폈다.
5. 1356(공민왕 5)~1392년
원간섭기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약 130년은 개혁의 관점에서 3단계를 거쳤다. 1단계는 공민왕 5년 이전으로 원나라가 허락하고 요구한 개혁이 추진되었다. 2단계는 원나라 지배를 벗어나 진행되었다. 공민왕 5년부터 위화도 회군(1388) 전까지의 개혁이다. 3단계는 고려왕조를 벗어나기 시작한 개혁이다. 14세기 고려의 두 가지 국가 개혁 과제는 원나라 지배를 벗어나는 것과 전민 개혁을 통한 민생 개선이었다. 이 두 과제가 추진되면서 고려에서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폈다.
개혁의 다양한 색깔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한국사 변화의 마디마디에서 보면 개혁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개혁을 주도한 이는 대체로 역사에 기록으로 남은 최고 통치자 국왕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영웅이라 명명해도 손색없는 시대의 주인공인 인물도 있고,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사상가와 학자도 있고, 관료 행정가도 있다. 역사의 큰 변화는 이들 주인공이 나서서 이뤄낸 것 같지만, 그 변화를 추동하고 역사를 움직인 힘은 공동체 성원이 합의하고 요구하는 윤리적 가치였다. 몇 가지만 짧게 훑어보자.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가 살았던 당대의 주인공들로는 고구려의 연개소문, 백제의 의자왕, 그리고 당나라 태종과 고종이다. 모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인물이고, 그들 나름의 국내 개혁을 주도했다. 국제 관계에서나 국내 정치에서나 기대 이상의 놀라운 성공을 거둔 이는 신라의 김춘추이다. 그는 고구려나 당과의 외교 관계뿐만 아니라 국내 개혁에서도 성과를 나타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김춘추가 실시한 개혁의 특징은 당나라 제도를 수입하여 유교 정치 이념을 강화한 것이었다. 그는 당 태종에게 석전과 유교 강론에 참석할 수 있도록 부탁하고 참관했으며, 중국 문물 수용의 상징적 조치로 조정에서 관리들이 입는 관복을 요청했다. 불교적 경향이 강한 신라에 유교적 국가 운영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원간섭기의 충선왕은 고려 충렬왕과 원나라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군주이다. 원간섭기 고려는 경제적 사회적 폐단이 심했다. 세력가들이 농장을 만들어 토지를 겸병하고 농민들은 살던 곳을 떠나 유망했으며, 조정의 인사행정은 문란했다. 원간섭기 고려 국왕이 거의 그렇듯이 충선왕도 즉위와 퇴위, 복위를 반복했던 국왕이다. 첫 번째 재위 기간에 충선왕은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우선 부왕 충렬왕의 측근 세력으로 원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을 개혁 대상으로 보고 관원을 대폭적으로 감축했으며, 정방을 폐지하여 부원배들의 성장을 막고자 했다.
사림원이라는 개혁 기구를 설치하여 능력 있는 관료를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저자는 기존의 일부 연구에서 충선왕의 개혁이 ‘반원적’ 성격을 띠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원나라 중심의 세계질서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의 자리는 고려 개경보다 원 제국 수도인 대도에 더 어울렸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왕위에 있으면서 고려보다 대도에 더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선왕이 추진한 정책은 인사행정의 문제와 경제적 부패를 바로잡는다는 개혁의 주요 내용을 확인하고, 이후 개혁의 방향 설정과도 같은 기구인 사림원을 설치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여말선초의 영웅이자 주인공으로는 위화도회군에 이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단연 꼽을 만하지만, 개혁 내용과 관련해 살펴볼 때는 조준의 사전(私田) 개혁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사전 개혁이 조선 건국과 이어진다는 면에서 보면 이성계라는 인물과 떨어뜨릴 수 없지만, 개혁을 구상하고 실행해 나가는 데 핵심 인물은 조준이다.
사실 고려 말의 전제 개혁은 원간섭기에도 계속 시도되었던 것이다. ‘전민변정(田民辨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조준의 전제 개혁은 이전과 확실히 구분된다. 즉, 이전까지는 사전에 대한 법 규정이 원칙대로 운영되지 않아 문란하다고 보았지만, 조준은 국가의 파악에서 벗어난 사전을 혁파하여 나라 안 토지를 모두 ‘공전(公田)’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볼 때 어진 정치의 출발은 토지제도 개혁이며, 이를 빼고서는 정치를 논할 수 없다. 당연히 강력한 기득권 세력의 거센 반대가 있었다. 고려 말의 성리학자이자 조선 건국의 기본 세력인 신흥유신을 키워낸 이색조차 옛 법을 경솔히 고칠 수 없다며 조준의 사전 개혁에 반대하고 방해했을 정도니, 그 개혁의 내용이 얼마나 과감하고 혁명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전 개혁을 끝까지 추진한 세력은 결국 왕조 교체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