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고 즐겁게 문학을, 그들의 놀이터에 놀러가보자!
Axt
(우선 악스트의 창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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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이름만 봐도 들뜨게 하는 작가분들이 대거 참여하신 잡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지부터 깔끔하니, 줄줄이 나열된 이름과 정면을 응시하는 천명관 작가의 얼굴이 보인다.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쓴 솔직한 리뷰에서부터, 던져진 주제에 에너지 가득 담긴 그림들, 이우성 시인의 재밌는 뮤비 리뷰, 잡지커버 인물인 천명관 작가의 인터뷰(특히 주목!!), 전경린, 배수아, 김경욱 작가들의 단편, 그리고 이기호, 김이설, 최정화 작가의 연재소설까지(백가흠 작가의 사진 찍는 실력도 감각적인 듯 해요. 멋진 사진들도 감상할 수 있지요).
너무 풍성하고 푸짐한 이 문예지는 무게감에 비해 담겨 있는게 매우 두둑하다.
지금의 한국문학은 왜 외면 당하는지, 왜 문학을 좋아하는 건지 의문의 질문을 가끔 듣거나 하게 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악스트에서 시원하게 답을 해준다. 대담한 질문에 답을 던져주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천명관 작가를 창간호의 커버인물로 선정한 게 아닌가 어림짐작하게 만들 정도로 그의 인터뷰는 여러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흥분과 설렘에 자꾸만 횡설수설하게 만든다.
흔히 문단 밖에 선 독자나 작가 지망생들은 그 견고하고 단단한 벽에 부딪히기도, 좌절하기도, 어렵다고 외면하기도 했다. 또는 그 안의 현실을 상상해보며 꿈을 꾸기도 환상을 품기도 했을 것이다. 작가, 뭔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같고 꿈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니 부럽기도 하면서(무엇보다 월요병이나 출퇴근, 야근의 압박은 없을 것 같아서), 나와는 많이 동떨어진 세계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술 각 분야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일종의 편견이나 선입견 등을 느껴보지 않았을까. 물론 그 안엔 사실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과 소통할만한, 그들의 세계를 짐작할 만한 그 어떤 게 작품 뿐이었다면 독자가 먼저 찾아보지 않는 한 그 길 또한 막힌거나 다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엔 재밌고 멋진 작품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한국문학은 유독 어렵다고 느끼게 하고, 더 소프트하고 심플한 외국문학을 찾게끔 하는 것일까. 분위기도 한 몫 하는 것일까.
하지만 문학에 목마른 독자들이 곳곳에 존재할 것이다.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분명 많이 존재할테지만, 그들은 종종 사회의 벽 앞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독서와 사유의 시간을 박탈당한 것일 수도. 밥벌이가 우선인데 문학을 찾아볼 겨를이 있을 수가 있나,
그래서 악스트의 창간이 반가운 것이다.
난 종종 문화예술 계통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왜 예술을 하려면 배고파야 하고, 열정만 가지고서 임해야 하는가. 어쨌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왜 정당하게 맡은 일에 정당한 페이를 요구하면 속물로 지칭되는 것인지. 예술을 하려면 몇 년간은 그렇게 굶주려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 예술을 하려는 열정이면 충분하다는 식으로 눈과 귀를 막고 갈취해가는 그러한 행태가 참 불편하고 어이가 없었다. (청춘이라고, 젊기 때문에 이정도는 겪어봐야 된다는 건 참...)
각설하고 ,
악스트의 시작은 카프카로부터 비롯되었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 카프카 -
악스트의 마지막 장, 편집위원들의 말을 들여다보자.
자기 안의 고독을 일깨우기 위해 사람들은 책을 읽습니다. 아직도 책이, 문학이 그런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믿기 때문에 『Axt』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도끼는 무엇을 쪼개고 가르는 무기가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 가슴에 품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이기 위해 도끼를 들었습니다. 조금 덜 지루하고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놀이터를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끝까지 살아남은 책의 운명을 존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도끼가 가장 먼저 쪼갤 것은 문학이 지루하다는 편견입니다. 『Axt』는 지리멸렬을 권위로 삼은 상상력에 대한 저항입니다.
우리는 매혹당하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나눌 수 있는 쾌락을 나누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소설, 그 중 단편은 특히나 여느 다른 나라의 문학과 비견하여 결코 뒤지지 않게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방문한 한 블로그에서 등단한 어느 시인이 자신의 창작품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 그는 청탁이라든지, 등단이라든지 제도에 묶여 있는 문단의 현 세태가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탄식하였다. 이는 악스트에 실린 천명관 작가의 인터뷰 내용의 어느 부분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등단, 문학상 등 더이상 그들만의 리그라고 불리지 않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
매년 등단한 작가들만 해도 수백명이 될 텐데. 여전히 작가를 꿈꾸고 잘 읽고 잘 쓰는 이들이 넘쳐날 텐데. 진짜 작가라고 불릴 수 있는, 문예지 지면의 한 켠을 차지할 수 있는 작가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 이름만 작가이지 청탁이 들어오지 않아 다시 등단을 해야 하는 경우는 또 어떠한지.
그래서 이에 따른 문단의 현실을 두고 천명관 작가의 돌직구는 어찌나 시원스러운지, 정말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이다. (궁금하시다면 악스트의 창간호를 구독하여 읽어보시기를~!)
요즘 팟캐스트라든지, 어플이라든지 접근이 용이한 매체가 늘어나고 있다. 문학 관련 팟캐스트의 등장도 무척이나 반가웠다. 단순히 책을 팔기 위한 도구만이 아닌, 각자의 개성을 가진 매체를 통해 듣는 작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궁금증을 풀었고, 친밀감을 더했다.
익숙치 않던 작품과 작가의 목소리와 이야기로 마냥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던 세계와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진 것이다.
내가 몰랐던 것들, 멋진 문장들, 재밌는 이야기들. 읽을 거리가 많아질수록 기쁘고 괜스레 뿌듯해진다.
악스트가 멋지고 재밌게 시작한 처음처럼 앞으로도 이만큼만 유지되기를, 또한 그들이 말한 것처럼 작가들은 물론 독자들과의 소통도 잘 이뤄지는, 기꺼이 위로와 격려의 판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란다.
한 가지 바람을 덧붙여보자면, 시 또한 이러한 문예지가 탄생되어 새롭게 독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싶다. 횡설수설, 앞에서는 한국문학이 독자들에게 외면 당하기도 한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소설만큼은 애정 듬뿍 담긴 독자들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시는 어떠한가. 내 주변만 보아도 시는 왠지 어렵고 더더욱 그들만의 리그라는 이미지가 많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장르의 특성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냥 마냥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시 문예지도 생기면 어떠할까,
하는 소망과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안의 품은 도끼로 얼어붙은 감정의 바다를 깨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