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성사의 두 별, 다산과 연암의 삶과 글쓰기!
―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다산과 연암
그리고 조선 18세기에 대한 특별한 평전
다산과 연암의 차이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삽화 하나를 소개한다.
먼저, 다산은 말한다. 수령은 “봉록의 많고 적음을 말해서는 안된다”고. 그럼 봉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뭐라고 해야 하나?
“봉록의 후함을 치하하는 자에게는 마땅히 ‘대개가 부정한 물건이 많을 것이니 무어 기뻐할 것이 있으리오’ 하고, 그 박함을 근심해 주는 자에게는 마땅히 ‘요컨대 열 식구가 굶주리지는 않을 터인데 무어 근심할 것이 있으리오’라고 할 것이다.”
크윽, 이렇게 디테일할 수가!
그럼 연암은? 양양부사를 그만두고 돌아온 후 이웃에 사는 친지들과 자리를 함께 했을 때였다. 녹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연암이 말했다.
“1만 2천 냥 받았소이다.”
“그게 정말이오?”
“바다와 산의 빼어난 경치가 1만 냥 가치는 되고 녹봉이 2천 냥이니, 넉넉히 금강산 1만 2천 봉과 겨룰 만하지 않겠소?”
다들 한바탕 크게 웃었다. - p.313
꼭 10년 전, 고미숙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여 큰 호응을 받았던 책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출간하며 그 책 말미에 ‘다산과 연암’을 함께 다룬 짧은 글을 실었다. 조선이라는 중세시대의 ‘외부’를 사유한 두 경로로서 다산과 연암을 조망했던 그 글에서 우리는 막연히 ‘실학자’라는 이름으로 ‘한통속’으로 분류했던 다산과 연암의 달라도 너무 다른 스타일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고미숙은 그때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다산과 연암을 주인공으로, 정조를 주연급 조연으로, ‘문체반정’과 ‘서학’(천주교)를 중심 사건으로 한 새로운 형식의 평전,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이하 『두별: 다산과 연암』)을 내놓았다(이 라이벌평전은 3탄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시리즈에 대해서는 보도자료 말미 소개 참조). 이 책은 평전이되 인물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그리지 않고, 두 인물의 사유와 글쓰기가 부딪치고 흩어지는 지점들을 포착해 다산과 연암의 스타일 대별해 구축해 내고 있다.
두 사람의 스타일 차이는 관리의 녹봉에 대한 에피소드인 위 인용문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다산은 리얼리즘의 대가다. 그렇기에 혁명의 시대라 불리는 20세기에 다산이 그토록 각광받았던 것이리라. 그에 비해 연암은 유머와 패러독스의 달인이다. ‘중세’시대에 ‘근대’마저 살포시 뛰어넘은 21세기형 스타일이랄까. 두 사람의 차이는 둘의 일대기를 쓴 지은이가 누구인가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다산은 환갑 때 본인의 일대기를 스스로 ?자찬묘지명?이라는 글로 길게 정리했다.(나의 생애는 나만이 말할 수 있다!) 반면 연암의 일대기에 가장 중요한 자료인 『과정록』(한글번역본 『나의 아버지 박지원』)의 지은이는 연암의 막내아들 박종채다. 평생 포의(布衣;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 살았던 박종채는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업적이 아버지의 일대기를 쓴 일이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고미숙이 본 다산과 연암의 사주는 둘의 스타일에 너무 잘 들어맞았다! 다산은 불의 사주이고, 연암은 물의 사주였던 것!
물이 지혜라면 불은 열정이다. 오장육부에서 물은 신장을, 불은 심장을 뜻한다. 지혜는 흐르고 열정은 솟구친다. 지혜는 사건과 사실을 꿰뚫는 힘이 있고, 불은 어둠을 밝히는 투시력이 있다. 연암의 글은 물이고 다산의 글은 불이다. 연암은 지혜와 유머가 흘러넘치고 다산의 글은 박학과 격정이 솟구친다. 연암이 좁쌀 한 알에서 우주적 징후를 간파하고자 한다면, 다산은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담아내겠다는 결기로 충만하다. 연암의 생애는 뱀처럼 매끄럽다. 변곡점이 있긴 하지만 급격하게 꺾이는 대목은 드물다. 스스로 물처럼 흘러갔기 때문이다. 반면 다산의 행로와 동선은 급격하다. 가장 큰 변곡점은 정조의 죽음이다. 이전에는 오직 왕을 향해 달려갔다면, 왕이 죽자 그의 인생은 졸지에 곤두박질친다. …… 화려하게 솟구치다 일순 꺼져 버리는 불꽃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그는 …… 다시 날아올랐다. 권력의 장에선 가혹하게 추방당했지만, 지성사에선 최고의 정점에 도달했다. 눈부신 도약 혹은 대반전! 불꽃 속에 큰 물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연암이 ‘불을 품은 물’이라면, 다산은 ‘물을 품은 불’이다. - pp.31-32
이러한 불과 물의 이미지는 이들의 사유는 물론 글쓰기 스타일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들의 대표적 저작 『목민심서』와 『열하일기』만 보아도 그렇다. 『목민심서』는 목민관의 매뉴얼이다. 다산은 이 글을 유배지에 붙박혀 목민관이 임지에 부임할 때부터 벼슬자리를 내놓는 해관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완전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디테일하게 그려냈다. 반면 『열하일기』는 압록강을 건너 연경(지금의 베이징)까지 그리고 연경과 열하를 오가는 길 위에서 쓰여졌다. 이 글에는 온갖 문학양식이 뒤섞여 있으며, 다루는 내용도 소소한 일상의 관찰부터 완전히 낯선 티베트불교에 이르기까지 어떤 하나의 줄기로 꿸 수가 없다. “유머와 패러독스를 통해 의미를 다양하게 분사하는 것이 연암의 전략이라면, 다산은 주석과 인용을 통해 백과전서식 종합에 주력한다. 연암이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면, 다산은 시각적 도표, 요즘으로 치면 프리젠테이션의 명수였다. 눈치챘겠지만, 전자는 물의 속성이고, 후자는 불의 속성이다.”(p.261) 또한 고미숙은 18세기 조선 지성사의 가장 큰 사건인 문체반정과 서학에 대한 연암과 다산의 사유와 태도를 통해 두 사람의 근본적인 기질 차이를 드러내며, 그들이 쓴 편지글, 묘지명, 시 등을 통해 그 차이가 어떻게 글쓰기에 드러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그들의 사유가 20세기 및 21세기와 만나는 지점, 만날 수밖에 없었고 만나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다산, 계몽, 20세기 vs 연암, 촉발, 21세기
다산의 ‘계몽’적 목소리, 그리고 고전경학을 분류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학문적 기질,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잘 이끌어야 한다는 수령관 등은 20세기의 ‘민족주의’와 잘 맞아떨어졌다. 그리하여 “그의 경학은 민족적 주체성의 발로로, 그의 애민사상과 앙가주망은 민중적 이념으로, 사회시에 담긴 분노와 파토스는 리얼리즘적 미학으로. 이 모든 것을 두루 망라하는 저서가 『목민심서』였고, 그 대중적 히트작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였다.”(본문 399쪽) 분명 그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던 것이다. 서구로부터 온 문명(근대)의 빛과 더불어 그를 알아준 시대는 20세기였다. 물론 연암도 근대기 ‘실학담론’의 부상과 더불어 주목을 받긴 했지만, 다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회적 부조리를 향해 목청을 높인 적도 없고, 이상적인 정치의 플랜을 제시한 바도 없기 때문이다. 연암에게 다산과는 달리 문명과 빛, 중심과 주류를 향한 열망이 처음부터 부재한다. “쉽게 말해, 『연암집』에서 민족이나 민중, 리얼리즘에 부응할 만한 텍스트를 찾기란 참으로 난감”한 것이다. 그래서 고미숙은 연암이 “다산이라는 주연을 빛나게 해주는 조연이거나 아니면 다소 ‘어색한’ 파트너로 20세기를 통과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불꽃의 연대인 20세기를 지나 물결의 시대인 21세기가 되었다. 고미숙은 어디든 흘러가고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는 이 디지털 시대의 속성을 ‘물의 연대’로 본다. 주체도 목적도 없이, 어디든 흘러갈 수 있으며, 무엇과 어떻게 만나느냐가 중요한 시대. 연암의 사유와 글쓰기의 특질이 이 시대와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연암은 다산은 ‘나중에 온’ 자지만 ‘먼저’ 우리에게 나타났다. 20세기는 명실상부한 다산의 세기였다. 그때 연암은 배경이었다. 연암은 먼저 왔으되 나중에 온 자다. 21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과의 접속을 시작했다. 이로써 보건대, 역사는 결코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순환하고 변전할 따름이다. 연암은 살아서는 다산의 선배였지만 죽어서는 다산의 후배다. 지금의 감각으로 보자면 다산이 훨씬 노회해 보이고 연암은 풋풋한 청년처럼 느껴진다. ‘뫼비우스의 띠’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p.409
우리는 한때 ‘근대’라는 프리즘을 통해 ‘실학’이라는 틀로 다산과 연암을 함께 묶어 두었다. 고미숙은 그것이 역사적 의미를 가진 때도 분명 있었지만, 이제는 이 두 별을 각각 빛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각자 전혀 다른 리듬과 행로를 밟아간 이 두 별의 차이와 이질성에 주목하는 만큼 우리는 풍요로운 사상을 갖게 될 것이라며 말이다.
지은이의 말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서로 엇갈리던 둘의 동선이 마침내 교차하는 시점이 온다. 연암이 쉰이 다 되어 늦깎이로 ‘생계형 관직’에 나섰을 때, 그때 다산은 ‘왕의 남자’로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다. 이때 둘의 궤적은 사뭇 중첩된다. 문체반정과 수원 화성 축조, 천주교 사태 등 정조의 치세를 장식하는 주요 사건들에 둘은 직?간접으로 연루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더 놀랍게도 서로에 대해 ‘노 코멘트’ 했다. 연암의 글 속에 다산의 흔적은 없다. 다산의 글 속엔? 아주 없지는 않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지어 20여 가지의 환술을 기록하여 놓았다. 이 이치를 안다면 지사(地師; 지관)의 말이 망령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정약용, 「풍수 신앙의 허구성」, 『다산논설선집』, 75쪽) 참 까칠하다. 연암을 마치 동시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에도 더러 『열하일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연암 사후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인데다, 인용한 부분도 하나같이 수레와 벽돌 등 기술지와 관련된 것들뿐이다” - p.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