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병 끝에 죽은 형이 남긴 미완성 유고, 천산 수도원의 비밀은 무엇인가?
―개인의 삶에 끼어들어 작동하는 욕망과 정치, 초월이라는 기제들
『지상의 노래』에는 다섯 가지의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 있다. 형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수도원을 답사하고 벽서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강상호의 이야기. 그 책을 읽고 천산 수도원의 벽서에 관한 글을 쓴 차동연의 이야기. 차동연이 쓴 글을 읽고 차동연에게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 ‘장’의 이야기. 장의 이야기에 나오는 군사정권의 핵심 한정효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사촌 누나 연희를 사랑한 ‘후’의 이야기. 그리고 그 중심에 천산 수도원이 있다.
천산 수도원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은 여행 작가인 강영호와 동생 강상호다. 강상호는 형의 투병을 외면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형의 원고를 정리하여 유고집을 만든다. 교회사 전공자인 차동연의 관심을 끈 것은 천산 수도원의 3평 남짓한 수십 개의 지하 방 벽에 쓰인 성경 구절들. 그는 수도원의 폐허를 발굴하고 그곳 공동체의 성격을 조사하는 데 착수한다. 장은 수도원에 있던 사람들 절반을 내쫓은 다음, 군사정권의 독재자 ‘장군’의 오른팔이었던 한정효를 그곳에 유폐하고 수도원 길목에 초소를 세워 감시한 인물이다. 후는 연희를 겁탈하고 버린 박 중위를 칼로 찌르고 천산 수도원으로 도피하였다가, 오랜 방황 끝에 다시 천산 수도원을 찾는다. 그러나 뜻밖에도, 왜곡된 정치권력이 불러일으킨 비극의 현장이 후를 기다리고 있다. 구원과 초월, 욕망과 죄의식 등 신성과 세속이 뒤엉키며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졌던 천산 수도원의 거대한 실체를 목도하게 된 차동연. 그는 이제 엄청난 고민에 휩싸인다.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가. 역사와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 죄의식에 사로잡혀 유업을 이어 가는 자
『지상의 노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또한 죽은 자가 유업을 남기고 살아 있는 자가 이를 마무리하는 장면을 소설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천산 수도원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강영호와 이를 마무리하여 유고집에 실은 강상호. 역사의 추문을 마음속에 묻어 둔 채 길고 긴 세월을 보내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생을 마감한 장과 그의 고백을 듣고 내용을 옮겨 적은 차동연. 그리고 죽어 가던 한정효가 최후까지 하던 일을 대신 마무리하고 숨을 거둔 후. 주요 인물들이 모두 동일한 관계 속에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관계 구조는 소설 전체를 떠받드는 핵심 원리라고도 볼 수 있다.
■ 새로운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하다
『지상의 노래』의 중심에 있는 것은 소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후의 이야기다. 소설은 후의 이야기와 함께 강상호, 차동연, 장, 한정효의 이야기들을 차례로 들려주는데, 이 이야기 덩어리들은 대위법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8장에서는 차동연과 후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게 진행된다. 각각의 절을 끝맺는 몇 개의 문장들과 차동연과 후가 천산 수도원을 찾아가는 장면, 그리고 두 사람이 수도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 목격하게 되는 장면도 매우 유사하다. 시간의 차원을 달리하는 두 개의 이야기가 나란히 놓여, 30년 전 후가 했던 것을 지금 차동연이 하고, 30년 전 후가 보았던 것을 지금 차동연이 보는 형식이다. 문학평론가 정영훈은 후의 이야기를 차동연이 쓴 소설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신학자 차동연은 천산 수도원의 실체와 정황을 밝힐 수 없었으나, 딜레마에 빠진 역사학자 차동연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소설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후의 이야기는 차동연이 신문 기사를 통해 미처 할 수 없었던 이야기, 그의 욕망을 충족할 수 없었던 것들을 대리 보충해 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인물과 허구적 인물, 역사의 굴곡 속에서 죄책을 짊어지고 살아온 인물과 개인적 관계 속에서 죄책을 짊어지고 살아온 인물이 만나고, 둘이 하나의 과제를 수행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다. 또한 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깊은 죄의식, 역사의 추문, 자신들의 믿음을 견지하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수도원 공동체의 정결한 신앙과 함께 이 이야기는 역사보다 보편적이고 신문 기사보다 풍성해진다. 그것은 차동연과 작가 이승우가 오버랩되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체제의 비극이 야기한 72개의 지하 방은 카타콤인가, 아니면 ‘쉬는 곳’을 뜻하는 체메테리움(Coemeterium)인가. 결국 그 모든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 작품 해설 중에서
소설의 중심은 비어 있고, 이 빈 곳을 ‘후’의 이야기가 채운다. 드러난 것의 빈틈에서 이야기가 태어난다. 빈틈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후의 이야기는 하나의 예시이다. 그 이야기는 누군가(who)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누구나(whoever) 쓸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드러난 것에서 빈틈을 발견한 자, 이 빈틈을 메우고자 하는 욕망으로 충만한 자, 그리고 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펜을 들어 쓰는 자, 그가 작가다. 우리가 경험한 삶으로부터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욕망을 가진 자, 무엇보다 그 이야기를 어떤 보편적인 차원에 놓고 이리저리 굴려 보는 자, 그가 작가다. ‘차동연’의 내면에는 적어도 세 가지 다른 형태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애초에 그가 품었던 것은 신학자로서의 욕망이었고, 여기에 역사학자로서의 욕망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 둘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욕망이 새롭게 출현하고 있다. 어쩐지 이는 작가 이승우가 걸어온 길과도 닮아 있다는 느낌이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욕망이 가장 나중에 온 것이라는 사실은, 작가로서의 이승우의 자부심을 보여 주는 대목일지도 모른다. ― 정영훈(문학평론가.경상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