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리던 이탈리아로
1775년 괴테는 카를 아우구스트 공의 초대로 바이마르로 옮겼다. 그 뒤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10년은 정치가, 관리로서 바쁘기 이를 데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는 고문관이 되어 귀족 대열에 들어선 뒤 재상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런 괴테가 왜 모든 것을 뒤로하고 갑자기 이탈리아로 떠났을까? 그 무렵 괴테는 모든 부문에서 벽을 느끼고 있었다. 먼저 슈타인 부인과의 육체가 따르지 않은 사랑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있었다. 젊을 때의 괴테는 정력이 강한 사람으로, 바이마르에 왔을 무렵에는 같은 나이인 카를 아우구스트 공과 함께 여성을 유혹하기도 하고 거친 방탕의 날들을 보냈다. 그 뒤 궁정 마두(馬頭)의 아내, 슈타인 부인을 만나고 나서 궁정인으로서의 몸가짐 등 가르침을 받으면서 균형잡힌 인격을 서서히 몸에 지녀 갔다. 이것은 문학으로 말하자면 괴테의 ‘질풍노도의 시대’에서 고전주의에의 이행기에 속한다. 괴테는 외할아버지로부터 여성을 좋아하는 성격을 이어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사실 외할아버지는 베츨러에서 법률 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에, 남의 아내와의 정사가 드러나 가발을 내팽개친 채 황급히 달아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능하여 뒷날 프랑크푸르트 시의 시장까지 지냈다.
인간적 너무나 인간적 욕정
괴테는 외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여성을 사랑하고, 사랑한 여성과 헤어질 때마다 아름다운 시를 창작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사랑을 한 프리디케 브리온과의 사랑에서는 명작 『들장미』·『5월의 노래』, 마리안네 빌레머와의 사랑에서는 『서동시집』이 탄생했고, 슈타인 부인과의 사랑에서는 『이피게니에』·『슈타인 부인에게』, 72세 때 17세 소녀 빌리케 폰 레보초와의 사랑과 실연에서는 『열정』 3부작을 썼다. 괴테는 바이마르에서 슈타인 부인을 만나 많은 시와 편지를 그녀에게 바쳤다. 어떤 시에서는 부인을 ‘아, 전생에서 당신은 나의 누이, 나의 아내이다’라고까지 말한다. 괴테는 슈타인 부인을 더없이 사랑해 평생 동안 17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탈리아 기행』 또한 그녀에게 보낸 편지가 바탕을 이룬다. 슈타인 부인은 평생 7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괴테와 육체관계 맺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바이마르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녀 자신만 아닌 괴테에게도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괴테는 슈타인 부인을 사모하고 번민하며 겸양, 체념, 인내를 배웠지만, 자기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유부녀에 대한 감정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더욱 복잡미묘해졌다. 그녀와의 교제를 더 이어가도 육체적 채움은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괴테는 이탈리아로 떠날 것을 마음먹는다. 이탈리아 여행은 슈타인 부인과의 애틋한 이별이기도 했다.
둘째, 그는 스스로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괴테는 본디 자신을 시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바이마르에 오고 나서 정무에 바빠, 긍정적으로 볼 만한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완성한 대작은 없고, 뛰어난 서정시도 그리 많지 않다. 오직 하나의 예외는 이탈리아를 향한 동경을 적은 시 [미뇽] 뿐이었다.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차츰 무뎌져 갔고 작가로서의 명성도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시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나리라는 위기감을 품은 괴테는 시재(詩才)와 영혼의 재생을 위해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결심했다.
셋째,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느꼈다. 정치가로서 광산 개발, 도로 건설, 토목공사 등을 지휘하고 계획 입안 등을 하고 있었는데, 좁은 땅 바이마르에서는 괴테가 생각한 것만큼 성과가 오르지 않았다. 그에게 안정을 가져다준 바이마르가 이제는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따라서 스트레스가 쌓인 그는 정치가로서의 자신에게 한계를 느끼고 건강마저 해쳤다. 이렇게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괴테를 남쪽으로 내모는 인연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이탈리아로 훌쩍 떠나 버리게 만든 것이다.
로마 하늘 아래 대문호로 거듭 태어나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 같은 시대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괴테는 37세 때인 1786년 9월 3일 독일 땅을 떠난 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 곳곳을 두루 여행하면서 눈과 마음을 열고 새로운 세계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이 여행은 괴테 자신의 인간적 성숙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독일 문학의 발전 과정에서도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괴테가 조화와 균형의 고전미에 눈을 돌리게 된 이탈리아 여행 이후의 시기를 우리는 ‘독일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독일 미학자 빙켈만이 로마를 ‘온 세계를 위한 위대한 학교’라고까지 규정했듯이 그리스와 더불어 이탈리아 로마는 유럽 문명의 발상지로서 오래전부터 세계인이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특히 알프스 이북 지역의 유럽인들은 그들의 음울한 잿빛 하늘을 벗어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광의 이탈리아로 떠나고픈 갈망을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산다. 괴테 또한 유년 시절부터 이탈리아를 동경해 왔다. 그러나 여행자의 발길을 이탈리아로 유혹하는 것은 단지 그 땅의 수려한 경관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유럽인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 함양과 자기 수양을 위해서 그들 문명의 고향, 그 영원한 수도 로마를 찾는 것이다.
괴테는 도덕이나 세간의 평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과 예술을 동경했다. 밝고 넓은 하늘이 주는 자연과 사랑의 선물을 가장 큰 행복이라 여겼다. 신체 노출을 극도로 싫어하는 종교가 가로막고 있던 북쪽 작은 세계에서는 고대 그리스 ? 로마의 나신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여행자 괴테는 너무나 사소한 형식에 구애된 딱딱하고 어두컴컴한 밀실에서 빠져나와 대자연 속에서 땀을 흘리며 참된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소박하고 자연스런 관능적 사랑, 흘러넘치는 순수한 관락의 표출, 생활과 의사 결정의 자유. 시인의 생각의 날개는 그런 세상을 날고 있었다. 괴테는 로마에 도착한 날을 자신의 ‘제2의 탄생일’이자 ‘참된 삶이 다시 시작된 날’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괴테는 고독하며 자유로웠다.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생활하든, 떠돌든, 사랑을 하더라도 바이마르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눈빛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위선적인 생활에서 인간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가 태어날 때부터 지녔던 눈부시게 빛나는 관능적인 사람으로 돌아오게끔 했다. 괴테는 자연 속에 예술이 있고 예술 속에 자연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자신이 정치가도 화가도 아니라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여행의 고독은 괴테에게, 오랜 세월 바랐던 작가 생활을 되돌려주었다. 괴테는 전부터 쓰려 했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시간을 마련해 두는 걸 잊지 않았다.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깊이 몰두한 대상은 자연, 인간, 사회, 예술이었다. 그는 로마의 유적지를 찾아다녔고 인류의 유산인 건축, 조각, 그림을 감상하면서 문학적으로 풍성한 결실을 거둔다. 『이피게니에』를 운문 형식으로 고쳐 썼고, 『에그몬트』를 마침내 탈고했으며, 15년이나 묵혀두었던 『파우스트』를 다시 꺼내 몇 장면을 덧붙이기도 했다. 대문호 괴테 문학의 완성이 이탈리아 여행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