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 정벌 전기〉, 일본이 본 세계
이 책은 16~19세기 일본에서 유통된 대외 전쟁 문헌 대부분을 검토한다. 저자는 이들 문헌을 〈이국 정벌 전기〉라 칭하는데, 주로 일본에서 집필된 문헌이지만 중국(명, 청)과 한국(조선)으로부터 수입된 주요 문헌들도 두루 포함된다. 해외의 문헌들을 일본의 집필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수백 년에 걸쳐 제작된 다종다양한 일본의 대외 전쟁 문헌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근대 이행기의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이 문헌들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이 책의 주요 문제의식이다.
일본의 전쟁 문헌 집필자들은 자국과 외국의 문헌을 방대하게 참고하는 가운데, 자국의 입장과 모순되는 사실들은 대체로 무시했고 허구적 기술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중첩되고 강화되어, 근대에 이르러 조선 지배(혹은 동아시아 지배)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데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를 왜곡과 날조라고 비난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이는 비단 일본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중국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은 나타난다. 저자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시도가 진행된 구체적인 양상이다. 문헌학의 관점에서 이들 문헌의 변천을 분석하는 과정은 자체로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고, 현대 일본의 대외(對外) 의식, 그 기억의 바탕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이 관점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국 정벌 전기와 〈임진왜란〉
이 책은 〈이국 정벌 전기〉라는 이름으로 크게 4개의 문헌군을 검토한다. 그중 절반 이상이 임진왜란 문헌군에 할애되는데, 저자는 주로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들 문헌군들 간의 영향 관계를 분석한다. 임진왜란 문헌군의 경우, 초기의 비망록/견문록류(『조선 이야기』 등), 역사서류(『다이코기』, 『조선 군기 대전』, 『조선태평기』 등), 소설류(『조선 정벌기』, 『에혼 다이코기』 등), 명과 조선의 문헌(『징비록』, 『양조평양록』, 『무비지』 등) 등이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이들 문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집필자의 소속(막부와 번)에 따라, 참고 자료에 따라 그리고 대상 독자에 따라 변화를 보인다. 저자는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비교 제시해 나감으로써, 집필자의 의도와 문헌의 목적을 분석해 나간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인가? 가토 기요마사는 어떻게 인의(仁義)의 장군이 되었으며, 신으로까지 추앙받게 되었는가? 일본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은 승리인가 패배인가? 이 책은 이러한 궁금증에 답하는 한편으로, 임진왜란의 기억이 일본의 대외 의식에서 얼마나 큰 위상을 점하고 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한다.
책의 나머지 절반은 유구 정벌과 삼한 정벌 전설, 에조 정벌 문헌에 할애되었다. 주목할 점은 이들 문헌에 보이는 임진왜란 문헌의 강력한 영향력이다. 삼한 정벌은 〈전설〉이다. 근세 일본의 전쟁 문헌 집필자들은 성긴 전설의 그물 위에 임진왜란 기록을 덧씌움으로써 말 그대로 소설같은 역사를 창조해 낸다. 이렇게 창조해 낸 역사가 사실에 잘 부합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그 세부가 임진왜란과 놀라울 만큼 흡사해 흥미롭다. 이런 유사성은 유구 정벌 문헌과 에조 정벌 문헌에서도 공히 나타나는 바다.
이국 정벌 전기의 성격
〈이국 정벌 전기〉의 4개 문헌군 간에는 집필 의도라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확인된다. 이국 정벌 전기의 집필 의도는 〈정벌〉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자국의 이국 공격을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적인 것이다. 이국과의 전쟁을 〈정벌〉로서 위치 지우기 위하여 〈공격의 논리〉와 〈방어, 반격의 논리〉라는 두 가지 논리가 전개된다. 〈공격의 논리〉란 상대방에 〈음락〉, 〈간신〉, 〈학정〉, 〈망전(忘戰)〉, 〈비례(非禮)〉 등 정벌받아 마땅한 이유(정벌 요소)가 있다고 하여 공격하는 측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전쟁을 일으키는 당사국은 한중일 삼국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인 천도(天道)를 대신하여 상대국을 징벌하는 존재가 된다.
〈공격의 논리〉는 각각의 정벌 요소를 이용하여 복잡한 서술을 전개할 필요가 있는 데 반해, 〈방어, 반격의 논리〉는 간단하다. 발생한, 또는 발생하리라 예상되는 외국으로부터의 침략을 주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논리의 배경에는 전쟁을 일으키는 당사국의 피침략 의식, 피해자 의식이 존재하며, 일본 또는 일본의 우호국에 대한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정당성이 주장된다. 그리고 이 논리가 발전하면, 상대국의 침략이 시작되기 전에 자국에서 선제공격을 가한다고 하는, 이른바 예방 전쟁의 논리가 탄생한다.
〈공격의 논리〉와 〈방어, 반격의 논리〉에 의해 이국과의 전쟁은 〈정벌〉로서 정당화된다.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는 정벌군은 승리할 수밖에 없으며, 처음에는 패배해도 끝끝내 승리를 거둔다는 서술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서술을 위해 전쟁의 전체 국면 가운데 어떤 부분은 강조되고, 어떤 부분은 탈락되고, 또 어떤 부분은 개찬(改竄)된다. 역사서인 『다이코기』에서도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18세기 전기의 통속 군담이나 19세기 초기의 에혼 요미혼과 같은 상업 출판물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한층 강해진다. 더욱 극적인 내용의 읽을거리를 요구하는 독자의 수요에 부응한 결과일 터이다. 이국 정벌 전기의 역사적 전개와 에도 시대에 융성한 상업 출판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성격은, 근세의 이국 정벌 전기와 근세 이전의 이국 정벌 전기를 가르는 큰 특징이다.
전쟁의 문헌학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이 책에서는 〈공격의 논리〉와 〈방어, 반격의 논리〉라는 두 가지 논리를 제시하였다. 이 두 가지 논리에 의해 정당화된 전쟁을, 서구에서는 〈Bellum Iustum〉이라고 불렀고, 한중일 삼국에서는 〈정벌〉이라고 불렀다. 전쟁은 특정한 시대나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인류의 본능 가운데 하나이며, 자기 집단이 일으키는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욕망 역시 마찬가지다. 한중일 삼국의 고유성을 주장하게 되면 전쟁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이 저해될 것이다. 역사를 현대 학문의 언어로 해독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전근대 한중일 삼국의 다양한 전쟁 정당화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근대 동부 유라시아에서 일어난 한일 강제 병합, 청일 전쟁은 물론, 현대 미국의 대테러전,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 행동까지도 보편적 원리의 하나로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 책이 시도하는 〈전쟁의 문헌학〉은 흥미로운 동시에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저자가 소장한 고문헌들 중에서 세심히 선정한 60여 점의 삽화들 또한 이러한 취지에 잘 부합한다. 김시덕 교수는 2011년에 출간한 이 책의 논리를 발전시켜 2017년 초 〈전쟁의 문헌학〉이라는 후속 저서로 펴낼 계획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