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눈, 영화의 입으로 시대를 말한다!
고미숙의 한국사회 쾌도난평,『이 영화를 보라』!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진지하고 유머러스한 고찰
바야흐로 ‘근대적’이란 말이 부정에 더 가까워진 시절이다. 탈근대가 유행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근대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화두다. 그런데 잠깐. 한국의 근대성이란 건 도대체 무엇이던가? 근대적 주체가 생산되던 한국적 메커니즘은 무엇이던가? 100년 전 그때 그 시절 한국에선 무슨 일이 생겼기에 지금까지도 민족, 역사, 언어, 가족, 섹슈얼리티 등은 한국인의 일상과 무의식을 사로잡아 버렸던가를 내내 탐구하던 저자는 마침내 영화와 접속하기에 이른다. 한국영화로 시도해 보는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진지하고 유머러스한 고찰은, 영화와 인문학이 보여 주는 그 환상적인 상생의 리듬을 통해 독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불후의 고전 『열하일기』를 전파하던 고미숙은 과거의 고전에서 우리의 ‘미-래’를 보았다. 이제 그는 근대라는 키워드를 통해 ‘지금-여기’의 증상과 근원을 낱낱이 파헤친다. “근대는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말해 준다면, 고전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고 말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 『이 영화를 보라』를 통해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되는 현재 속에서 현재의 문제로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제안하고 있다. 한국의 근대성에 대한 답과 동시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하고 사회에 만성적인 불만을 가진 인문학자 고미숙이 펼쳐 놓은 한국사회 쾌도난평은 시종일관 웃음을 터뜨리게 하지만 동시에 진지하고 사려깊다. 흑백영화 속에서 채플린이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던 그 ‘웃음’처럼 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젠 체하지 않는 고미숙의 글에는 그래서 ‘뭔가’ 있다. 인문학자가 내뿜는 영화보기의 괴력. 그녀가 ‘이 영화를 보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코드명 : 탈코드- 표상을 전복하라!
세상엔 마땅히 그러려니 하는 것들이 있다. 월드컵 경기에선 ‘우리’나라를 응원하고, 같은 나라 사람끼리는 ‘민족’이란 이름 아래 묘한 연대감을 갖는다. 예술하는 데 한(恨)은 필수고, 가족끼리는 응당 화목한 웃음꽃이 피어야 하며, 고향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곳이어야 한다. 자주 씻는 것은 결코 흠이 되지 않고, 교회에 가서 부모자식 잘 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해 물음표를 붙인다면 오히려 “그게 왜 문제가 되냐”는 반문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고 익숙한 것을 뒤엎는 것이 특기인 저자 고미숙에게 그런 예상되는 반문은 맥을 못 추고 스러진다.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이듯이 가족 역시 근대국민국가의 상징”이라고 소리 높여 민족과 가족에 딴죽을 걸고 있는 이 책은 ‘탈코드’를 코드로 내세워 기존의 근대적 표상체계들을 비판한다. 교회와 조폭에서 동일하게 사용되는 “형제, 자매”라는 가족의 담화방식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살피고, 고향은 고정된 시간성과 장소성을 갖는 곳이 아니라 ‘욕망’이 닿는 곳임을 영화를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괴물>에서 <라디오스타>까지 여섯 편의 한국영화를 관통하는 코드는 다름아닌 ‘탈코드’고, 기존의 통념들을 완벽하게 ‘깨는’ 이 책은 한국사회와 영화를 가볍게 거스르며 쾌속질주한다. 2000년대보다 조선시대에 오히려 더 활발했던 성담론들을 고시조에서 끌고 와 섹슈얼리티가 억압받은 역사는 사실 근대 이후임을 알려 주고(<음란서생>),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한(恨)의 정서에 대해서는 반미(反美)주의자로 커밍아웃하면서까지 강력하게 비판하며(<서편제>), 일상과 네트워킹하는 예술론을 설파한다.
지금 혹시,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국가와 가족과 민족 등등을 받아들일까 말까 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책을 보라. 그리고 이 영화를 보라!
<괴물>에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좀 깨는 책, 『이 영화를 보라』가 <괴물>을 주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1200만 명이라는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 때문에? <살인의 추억> 봉준호와 송강호가 다시 만나서? 민족정서 살짝 건드려 주시는 ‘반미코드’ 때문에? 아니다. 이 책에서 <괴물>이 선택된 이유, 혹은 주목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위생권력의 정치적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멜로 코드가 없다는 특장점과 함께.
지금까지 있었던 <괴물>에 대한 논의는 누가 보더라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가 자명한 정치적 커밍아웃이었다는 것이 주가 됐었더랬다. 그러나 고미숙은 이 영화를 “문명국가가 될수록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더욱 체계적으로 노예화되어 간다”는 이반 일리히의 주장과 나란히 놓고, 위생권력이 대중을 길들이는 교묘한 방법을 비판한다. 괴물이 엄청나게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 같은 특단의 조치인 ‘에이전트 옐로우’ 말고, 고작 불화살에 의해 죽는 것은 결국 권력의 외부에 있는 야생성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다는 위생권력에 대한 조롱이다. 고미숙은 <괴물> 속 미 군의관이 “먼지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면서 독극물을 한강에 방류하여 보이지 않게끔 하는 것에서 시각적인 것을 특권화하면서 도래하는 ‘근대성’을 본다. 뒷간과 논밭이 이어져 있던 것만큼이나 우리의 일상과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던 똥오줌은 근대 이후 보기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갑작스레 타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갑자기 위생을 따지며 도래한 우리의 근대는, 아토피와 같은 ‘지나친’ 위생의 부작용을 낳으며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영화에서 다소 과장되어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 ‘사스’가 중국을 휩쓸었을 때, 근대권력은 바이러스와 테러리스트를 동일하게 간주하여 특수부대와 쾌속정을 투입했다. 문제의 본질은 해결하지도 못한 채 경계령을 선포하고 대중들을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국가가 보여 주는 위생권력의 스펙터클이란 이렇듯 허황하기 그지없다. 따라서 <괴물>은 위생권력과 접속했을 때 충분히 다르게 볼 수 있는 영화다. 그냥 초대형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위생권력과 정치에 한껏 비웃음과 메롱을 날리는 그야말로 ‘깨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라디오스타>에는 이주민들이 산다
왕년에 잘나가던 가수 최곤의 좌충우돌 재기스토리를 다룬 <라디오스타>는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말랑말랑한 휴먼드라마로 기억된다. 실제로, 이준익 감독은 자기의 영화를 보면서 감동하고 거침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꽤 유명하다. 촌스럽고 노골적이긴 하지만 감독이 의도하는 ‘감동’은 여지없이 사람들에게 적중하고, 관객은 함께 그 감동의 도가니에서 눈물을 찍어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라』에서는 <라디오스타>를 마냥 감동스럽게만 그릴 리 만무하다. 저자는 이 영화에서 우리 안의 ‘디아스포라’를 본다. 자본주의 공리계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계급 바깥의 존재들, 비-계급, 이주민, 외부자들로 가득한 이 영화는,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지만,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삶 혹은 축제로서의 ‘코뮤니티’를 그리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좁아 터진 영월 구석에서 록밴드를 하면서 사회에서 부여한 거의 모든 코드를 무시하며 살아가는 이스트리버(동강)는 산골에 살면서도 정착민의 궤도에서 이탈한 존재들이며, 청록다방 김양과 매니저 박민수는 가출한 상태고, 동강순대집 꼬마네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신기할 정도로 가족과 가족주의에 무심한 영화 속에서, 탈코드화된 이 이질적 존재들은 각자의 삶을 새롭게 구성하고 또 새로운 코뮤니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주인공 최곤은 자신을 다시 무대에 서게 해줄 스타팩토리 사장(=자본!)의 멱살을 잡고, 매니저 박민수는 가족, 혹은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방방송국의 오후 방송은 디제이와 청취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세탁소와 철물점 주인한테 외상값 독촉멘트를 날리고, 집나간 아버지를 애타게 찾는 ‘무규칙적 사건’이 된다. 또한 이스트리버와 접속된 이 사건은 대중에게 인터넷으로 전파된다. 가는 곳마다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내는 최곤과 그의 무리들은 이렇게 탈주에서 생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책과 영화의 동사(動詞)적 전환!
한 사람에게서 풍겨 오는 느낌이란 것은 비단 얼굴이나 외양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세상에 대한 태도가 그 느낌을 결정한다. 사람들은 고미숙을 참 ‘비판’적인 사람이라고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세상과 사람에 대해 꽤나 투덜거리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무한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찡그린 그의 표정은 사실 호모 에로스의 얼굴이다.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 것인가, 즐겁게 공부할 것인가를 늘 치열하게 고민하기에 그의 책은 다른 어떤 책들보다 강한 생명력과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다른 어떤 책들과도 ‘다르다’. 영화책이면서도 평소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다는 저자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만큼,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의 중심에는 고미숙이 있다.
이 책은 내 얘기, 우리 모두의 얘기를 하고 있다.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한국과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인의 일상과 무의식을 진단하고 그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시대의 인문학자 고미숙은, “이 사회에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나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하며 우리 모두가 놓지 못하고 있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의문과 공포를 보듬으며 명쾌하게 진단을 내려준다. 욕망의 배치를 바꾸지 않는 한 새로운 시작은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저자는 좀 ‘깨는’ 책 『이 영화를 보라』를 가지고 사람들과 한국사회에 대한 수다를 시작하며 책과 영화를 동사(動詞)로 만들려 한다.
책이 명사(名詞)에서 동사(動詞)로, 즉 액션으로 전환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삶과 직결되어 있을 때다. 미친 소고기를 먹게 될지도 모른다는 삶과 직결된 두려움과 공포가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듯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바꾸는 것은 각자의 일상에 보다 가까운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사람들은 요가 책을 사서 몸을 건강히 하고, 컴퓨터 책을 사서 기술을 익힌다. 뭐니뭐니 해도 실용이 대세인 이때 책에서 실천을 끌어내는 일은 그것이 ‘내 (현실의) 문제’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고미숙은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파워를 가진 사람이다.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문제를 고민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 영화를 보라”는 말은 마치 친구의 권유처럼 다가와 어느새 본 영화도 다시 보게 만든다. 친구가 들려주는 영화이야기는 따라서, 각자의 세계를 증식시키며 오래도록 퇴색하지 않는 영화-인문서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