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올해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한 이병률 시인이 3년 만에 두번째 시집 『바람의 사생활』을 출간했다. 풍경의 갈피들과 삶의 쓸쓸함에 대해 천착함으로써 아름다운 작품세계를 선보여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한층 더 성숙한 시적 절제와 감성으로 행간의 울림을 극대화한다.
“거대한 시간을 견디는 자가 할 일은 그리움이 전부”(「시인의 말」)라고 시인도 얘기했듯 이번 시집에는 비장하고 도저한 그리움과 기다림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시적 소재와 전략은 자칫 감상으로 전락할 수 있으나 시인의 깊은 사유와 통제를 거침으로써 절제된 감성의 시세계로 빛나면서 확장된다. 시인은 가닿을 수 없는 것들과 쉽게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여준다. 시집 곳곳에서 기억할 수 없는, 모호한 듯한, 쉽게 상을 잡을 수 없는 진술들이 엿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한 가지에 대해서만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산다”(「뒤돌아보기보다는」) “그럴 수 없는 일들이 그렇게 되고 마는 바닷가에서였습니다”(「달에게 보내는 별들의 종소리」) “내가 나에게 뭐라 말을 거느라”(「물의 말」) “온다 하고 오지 않는 것들이 보낸 환청”(「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상황에서는 대상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존재 역시 불투명하고 주체와 객체 역시 확고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는 “왜 그리 한없이 서 있냐고 물을 수는 없는”(「뒷모습」) 것이고, 그리움의 대상은 “누군가 내 집에 다녀”(「나비의 겨울」)간 존재이거나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인 당신”(「저녁의 습격」)처럼 알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화자 역시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누군가 들어와 넌 누구냐”(「아무도 모른다」)고 질문을 끊임없이 받는 존재이다. 이렇듯 명명할 수 없는 것들과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것들에 대해 시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묵묵히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기억나지 않는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일뿐이다. 그것들에 대해 섣불리 이야기할 때 기억의 원형은 훼손되고, 사실은 왜곡되게 마련이라는 것을 시인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얼 기다리는지 말해버리는 순간 모든 구실은 사라지고’(「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알게 되면 그것을 잃는 일이므로 껴안고 있으면서도 몰라야 하는 것’(「아무도 모른다」)이 바로 시인의 운명이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시공간 역시 명확하지 않고 절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빛과 어둠의 중간 영역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 몸의 주인은 저녁’(「꽃들의 계곡」)이라 말하거나, ‘황혼’이나 ‘해질 무렵’(「저녁 풍경 너머 풍경」 「동백 그늘」 「저녁의 습격」)처럼 빛과 어둠으로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 시공간에서만 시적 사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은 수치화할 수 없음으로 찰나가 영원이고, 한 순간이 수백년, 수천년을 뛰어넘는다. 한 생은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는 시간(「무늬들」)이고,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시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일생에 한번 찾아오는 인연과 풍경’(「거인고래」「시취」)은 만나거나 잡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다녀간 것으로 치자는 셈”(「거인고래」)이 될 수도 있고, “사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에나 있어도 무방”한(「절벽 갈래 바다 갈래」) 것이 되기도 한다. 만나야 하는 것과 잡을 수 없는 것들이 이미 만난 것일 수 있고 지나가버린 것일 수 있다는 쓸쓸하고도 쓸쓸한 인식이 이 시집의 강한 흡인력이다.
이 막막하고 고독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시인은 ‘마지막 풍경’(「거인고래」)을 보기 위해 “자꾸 먼 데를 보는 습관이 낸 길 위”를 걷거나, ‘수많은 풍경과 풍경 너머의 풍경’(「저녁 풍경 너머 풍경」)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거기에서 삶의 비애를 시에 찍어 인화한다. 이 여행은 낭만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더 더 먼 곳’(「겹」)까지 끌고 가는, “다시 올 수 없는 극지를 향해”(「소년들」) 몰고 가는 처절한 상상력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 극지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비극적이다. 같이 얼어 죽은 연인들(「견인」)이나 동반자살하는 남녀(「황금포도 여인숙」)에 대한 묘사는 ‘만경창파의 인연’(「한 사람의 나무 그림자」)이 죽거나 영혼결혼식을 통함으로써 겨우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생 동안 기다리고 견디는 시인의 태도가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사랑의 역사」) 깨달으면서도, ‘누대에 걸쳐 수백년 동안’ 형성된 마음과 기억이 ‘수십겹’이라는 사실에 미어지면서도 그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내면의 ‘벽’을 털어내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것이다(「별의 각질」). 이러한 풍경은 ‘사내’와 ‘바람’이라는 말처럼 누대에 걸쳐 유전되는 운명을 지녔다. 그리고 그 운명 속에서 잊혀질 수 없는 한 생애는 봄날처럼, 현재진행형으로, 간곡하고 슬프게 지나가는 중이다.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열 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바람의 사생활」)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 온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당신이라는 제국」 부분)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이병률 시인을 가리켜 “헤어짐의 풍경, 공기, 기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는 바람”이고, ‘헤어짐을 짓는 사내’(해설 「이렇게 헤어짐을 짓는다」)라고 칭했듯, 이번 시집에는 일생에 걸친 사랑과 이별, 기다림, 인연의 어긋남, 침묵, 풍경이 적막하고 쓸쓸하고 아름답게 녹아 있다. “길 위로 사무치고 사무치는”(「저녁 풍경 너머 풍경」) 풍경을, “폭설처럼 먹먹하던 사랑”(「견인」)의 풍경을 그만의 독특한 어법으로 일구어낸다. ‘사랑하는 일이 무의미’(「고양이 감정의 쓸모」)라고 생각하며, “서쪽 어디쯤에선가 행불(行不)이 되거나 하는 일”(「서쪽」)을 꿈꾸기도 하지만, 철저하게 기다리고 견디는 단독자의 외로움으로 인해 그의 시세계는 섬광과도 같은 빛을 발한다. 이병률은 쓸쓸함이 아무리 깊어도 “차창 밖 벌판에 쌓인 눈만큼”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어디로든 가지 않아도” “어디든 지나가”면서 “오로지 혼자인 것에 기대어 가고 있”는(「동유럽 종단열차 」) 길 위의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