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이슬아〉 이슬아의 새로운 도전, ‘소설가 이슬아’의 눈부신 시작용맹하고도 애틋한 딸이 경제권과 주권을 쥐고자신과 가족과 세계의 운명을 바꾸어나가는 이야기상인의 가문에서 태어난 어린 슬아는 모부母父가 가부장인 할아버지로부터 독립한 뒤 생계 전선에 뛰어드는 것을 보면서 자란다. 할아버지의 치하에서 독립하고 11인분의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되던 날, 엄마 복희는 솥뚜껑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다. 가부장이 축적해놓은 터전 위에서 살던 모부와 두 남매는 이제 집과 밥을 온 힘을 다해 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세상은 부를 타고 나지 않은 서민이 빚을 지지 않을 도리가 없게끔 굴러간다.”웅이는 생계를 위해서라면 바다에도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복희 역시 생계를 위해서라면 쓰레기 산에도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슬아는 모부가 거쳐온 지난한 노동의 역사를 지켜보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란 노동을 감당하는 이들이었다. 어떤 어른들은 많이 일하는데도 조금 벌었다. 복희와 웅이처럼 말이다. 가세를 일으키고자 하는 열망이 슬아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복희를 공짜로 누리지 마」, 39쪽)글쓰기로 돈을 벌기 시작한 이래로 그는 ‘낮잠 출판사’를 차리고, 지금까지 몸으로 하는 고된 노동을 지속해야만 했던 모부를 낮잠 출판사의 직원으로 전격 고용한다. 모부에게 딸 슬아는 집안의 가장인 동시에, 직장 상사, CEO이다. 그리고 딸 슬아는 기존 가부장제나 기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임금과 보너스 시스템을 도입한다. 가부장제하에서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고 계절음식을 준비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나, 슬아는 된장 보너스와 김장 보너스 등을 지급하고, 어머니의 집안일과 식사 준비에 합당한 임금을 책정해 철저하게 지급한다. 슬아의 모부 또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슬아를 존중하여 업무시간엔 깍듯하게 존댓말을 하고 슬아의 글쓰기와 출판,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보필한다. 가녀장은 어머니의 대체 불가한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고 모부의 노동이 헐값에 취급받지 않도록 스스로 고용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지만, 이 집안에서 밥과 설거지, 청소는 때로 글과 책에 비해 사소한 일로 취급받곤 한다. 마치 가부장의 집안에서처럼. 이를테면 슬아는 마감을 할 때 엄마 복희가 정성껏 차려놓은 밥상이 귀찮다. 슬아를 기다리느라, 핸드폰에 고개를 박은 가족이 숟가락을 들길 기다리느라, 음식은 차갑게 식어간다. 밥 먹고 하라는 복희의 말에 가녀장은 짜증을 부린다. “왜 그렇게 재촉을 해. 국 좀 식으면 어때서.” 엄마 복희는 부엌에서 믹스커피에 위스키 반잔을 타서 붉어진 얼굴로 혼자 마신다. 슬아는 여성인데도 종종 복희의 부엌과 음식을 소외시키지 않았던가.수많은 할아버지들처럼. 아버지들처럼.우리 할아버지는 언제나 이것에 실패했지. 부엌일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에, 언제나 실패했지. 복희가 차린 밥을 매일 대접받으면서도 그랬지. 슬아는 자신이 가부장의 실패를 반복했다고 느낀다. (「부엌에 영광이 흐르는가」, 233~234쪽)가녀장은 큰 시스템을 혁신해나가고 흔들림 없이 생계를 책임지며 집을 장만하지만, 조그맣고 가까운 일에서 자꾸만 실패한다. 가녀장뿐만 아니라 슬아의 모부들도 마찬가지다. 복희는 낮잠 출판사를 방문한 레즈비언 커플에게 실례되는 질문을 던지고, 웅이는 이름 모를 식당 ‘아줌마’에게 친절하지 않다며 짜증을 낸다. 이 최초의 가녀장 집안 구성원들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이들은 실수하고 넘어지고 서로 이따금 상처를 준다. 일상의 피로와 무심한 습관 속에서 누구나 조금씩의 잘못을 저지르지만, 이들은 끝내 회복하고 수정하고 바로잡으며,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등단문학’은 문학의 한 갈래일 뿐, 제도 바깥에서도 온갖 종류의 문학적인 작품이 탄생하고 있다.”가녀장은 그저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지만, 집안 바깥에서 자주 전쟁을 치른다. 왜 ‘등단’을 하지 않느냐, ‘문학’을 해보고 싶지는 않느냐는 사람들의 집요한 물음에 가녀장은 일갈한다. ‘등단문학’은 모든 글쓰기의 한 장르일 뿐이라고. 그리고 문학에는 어떤 등급이나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은 이미 ‘문학’을 하고 있다고. 제도의 승인을 독자의 반응보다 고귀하게 여기던 시대는 가부장의 시대처럼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이 통쾌한 일갈은 작가 이슬아의 남다른 행보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최근 ‘등단문학’ 바깥에서 터져나오는 여러 재미있고 흥미로운 서사들을 응시하게 한다. 한편 가녀장은 방송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로도 출연하게 되는데, 촬영 직전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슬아에게 스태프들이 브라를 착용해달라고 요청하자 ‘무슨 짓’인가를 해버린다. 이렇듯 가녀장이 가는 길마다 파란과 파격의 행로가 이어진다.“브라를 하고 말고는 제가 알아서 할 일인 것 같은데, 피디님 생각은 어떠세요?”피디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다.“맞습니다. 근데 이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그럼 누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일까요?”“아무래도…… 윗분들이 컨펌하지 않으실 거예요.”슬아는 자신의 유두가 컨펌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게 웃겨서 푸하하 하고 웃어버린다. 슬아가 웃자 모두가 쳐다본다. (「남의 찌찌에 상관 마」, 241쪽)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슬아’다. 이는 작가가 직접 ‘헤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일하고 모녀기업을 지탱하며 얻은 경험담에서 이야기의 힌트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에서 그간 써온 에세이의 에피소드를 넘어 새로운 가녀장의 상을 창조해내고, 동시대의 여성들과 지나간 시대의 어른들을 향해, 서로 생각이 너무 다르다고 느끼는 남성과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가부장의 시대, 그다음은 무엇이냐고. 우리는 어떤 시대에서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느냐고. 『가녀장의 시대』 표지에서 가녀장은 아버지들이 아침에 가장 먼저 집어드는 신문을 사뿐하게 왕관으로 접어 쓰고, 산맥을 머플러처럼 두른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전자담배를 요술봉처럼 흔들며, 자신을 가녀장이자 고용주의 자리에 올려준 글쓰기와 활자매체의 상징, 신문을 도도하게 왕관으로 올려쓴 가녀장은 누군가 자신을 뉴스로 선택하기 전에 스스로 뉴스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될 것이라 선언하는 듯하다. 이 시대의 딸들은 더이상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다. 기댈 곳이 없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가녀장들은 오래된 전통의 승인을 갈구하지 않고, 스스로 새 길을 개척해나간다. 이 소설은 자신과 가족과 세계의 운명을 바꿔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용맹하고도 애틋한 딸들의 서사다. 바야흐로 ‘가녀장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