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만나는
파울 첼란 탄생 100주년 기념 전집
그의 언어는 불가능한 진실을 만지려는 것처럼 무겁고, 그의 시는 세계를 칼로 도려낸 것처럼 일순을 향한다. - 황인찬(시인)
20세기 가장 중요한 시인, 2차세계대전 이후를 대표하는 유럽 시인 중 한 명인 파울 첼란.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유대인으로 겪어내야 했던 비극적 운명과 고통을 수수께끼 같은 시어에 함축적으로 담아낸 그의 시를 고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만난다. 2020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선보이는 문학동네 파울 첼란 전집은 대표작은 물론 초기 시와 유고시, 산문과 연설문까지 아울러 첼란 작품세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기념비적 작업물이다.
2000년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일곱 권으로 출간된 파울 첼란 전집을 번역의 저본으로 삼아 첼란이 프랑스어, 러시아어, 영어 등으로 번역한 시를 묶은 두 권을 제외한 전작을 전5권으로 선보인다. 첼란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이자 나치 수용소에 대해 출판된 최초의 시들 중 하나인 「죽음의 푸가」가 실린 공식적인 첫 시집 『양귀비와 기억』을 비롯해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 『언어격자』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를 묶은 1권, 『숨전환』 『실낱태양들』 『빛의 압박』 『눈의 부분』을 묶은 2권이 2020년 1차로 출간되며, 『유골단지에서 나온 모래』 『시간의 농가』를 비롯해 「산속에서의 대화」 등의 산문, 게오르크 뷔히너 상 수상 연설문인 「자오선」 등이 묶인 3권, 부코비나, 부쿠레슈티, 빈 시절의 초기작이 담긴 4권과 앞선 여덟 권의 시집에 묶이지 않은 시와 후기 시, 집필 시기를 알 수 없는 시들을 묶은 5권을 끝으로 2021년 완간될 예정이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심장에 새긴 시인 파울 첼란
파울 첼란은 1920년 11월 부코비나 체르노비츠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부코비나(‘너도밤나무의 땅’이라는 의미)는 18세기 후반까지 오스만제국, 그후로는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차세계대전 후 루마니아에, 2차세계대전중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되었다.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유대인, 독일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등이 공존하는 다민족, 다언어, 다문화 지역이었던 이곳 인구의 거의 절반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고 히브리어와 이디시어를 바탕으로 유대교와 유대 문화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첼란이 태어날 당시에는 루마니아 영토였으나 유대정신을 계승하길 바랐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유대인 학교에 다니며 히브리어를 배웠고, 독일문학에 심취했으며 표준독일어 교육을 중시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집안에서는 독일어를 썼다. 이와 같은 안팎의 사정에 언어적 재능이 더해져 첼란은 독일어는 물론, 히브리어, 이디시어, 루마니아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도 익숙해졌다. 훗날 그의 비범하고 빛나는 시 창작, 랭보와 발레리, 오시프 만델스탐, 디킨슨 등의 시 번역에서 발휘되는 언어감각이 이렇게 벼려지고 있었다.
십대 시절 남몰래 시를 쓰기 시작하지만 대학자격시험을 치른 후 의학 공부를 위해 프랑스 투르로 떠났고 일 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1940년 소련이, 일 년 후 루마니아가 재점령하면서 파시스트 정부와 나치 독일에 의해 게토가 된 체르노비츠에서 첼란은 시를 쓰고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번역했다. 곧 유대인 학살추방수용소 추방이 시작되어 부모가 수용소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고, 첼란은 탈출했다가 다시 루마니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간 뒤 그 소식을 듣게 된다. 첼란의 지인들은 부모를 고통 속에 버려두었다는 엄청난 죄책감을 토로했다고 전한다. 홀로코스트의 경험과 함께 부모의 죽음은 이후의 삶과 시 세계에 영구히 각인되었다.
1944년 2월에야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던 첼란은 체르노비츠를 떠나 부쿠레슈티에서 러시아 문학을 루마니아어로 번역하며 루마니아 잡지 『아고라』에 처음으로 시를 실었다. 빈으로, 다시 파리로 거처를 옮겼고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하고 파리에 정착했다. 빈 시절 출간한 『유골단지에서 나온 모래』를 오자가 많다는 이유로 회수한 뒤 1952년 공식적인 첫 시집인 『양귀비와 기억』을 시작으로,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 『언어격자』 『누구도 아닌 이의 장미』까지 독일 피셔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주어캄프로 출판사를 옮겨 『숨전환』 『실낱태양들』을 펴냈고 1970년 4월 센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 뒤 『빛의 압박』 『눈의 부분』 『시간의 농가』 등이 출간되었다. 브레멘 문학상, 게오르크 뷔히너 상,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예술대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으며, 특히 브레멘 문학상 수상 연설문과 게오르크 뷔히너 상 수상 연설문은 그 자체로 시적 영감이 가득한 예술적 텍스트로 알려져 있다.
한편 첼란은 여러 작가와 교유했다. 문학적 동반자였던 잉게보르크 바흐만, 유대계 독일 시인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스웨덴으로 이주한 넬리 작스, 어린 시절 친구였던 유대인 작가이자 첼란의 처음이자 마지막 이스라엘 여행에서 만난 일라나 슈무엘리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첼란은 그들에 대한 시를 쓰거나 시를 헌정하며 각별한 친분과 우정을 기렸다. 그들 사이에 오간 편지, 첼란의 일면을 담아낸 회고록 등은 수수께끼 같은 첼란의 시에 한걸음 다가갈 열쇠가 되어준다. 문학동네는 바흐만과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마음의 시간』(가제)을 2021년 파울 첼란 전집 완간과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부식된, 조각난, 갈라진
그럼에도 “의미론적 빛으로 가득”찬
파울 첼란 전집 2권은 네 권의 시집 『숨전환』 『실낱태양들』 『빛의 압박』 『눈의 부분』의 수록작 330여 편을 묶은 것이다. 1967년 출간된 『숨전환』은 주어캄프로 출판사를 옮겨 펴낸 첫 시집으로, 수록된 시들은 그보다 앞선 1965년 파리에서 『숨의 결정』이라는 연작으로 소개되었다. 첼란의 아내이자 판화가이기도 했던 지젤의 동판화 8점이 함께 수록된 이 연작은 애서가 소장용으로 75부만 제작된 일회성 출판물이었다. 1968년 출간된 『실낱태양들』은 첼란 생전에 출간된 마지막 시집이며, 1970년 4월 그가 센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고 석 달 후 『빛의 압박』이, 이듬해 『눈의 부분』이 출간되었다. 『빛의 압박』의 시들은 1969년 봄 파리에서 소장용으로 85부만 제작된 일회성 출판물인 연작 『검은통행세』를 통해 지젤의 동판화 14점과 함께 소개되었다.
“첼란의 모든 시는 생략적이고, 중의적이고, 쉬운 해석을 거부한다.”(뉴요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그의 시는 극단적으로 생략되고 분절되며 침묵에 가까워진다. 단어는 “부식”되고, 글로 “쓰인 것은 움푹 파”이고, 말들은 “균열”되며, 급기야 시는 아무것도 아닌 것, 무가 된다.
부식되었다/ 그대 언어의 광채바람에 의해/ 헛경험이 뱉어낸 가지각색의-/ 수다―백 개의-/ 혀를 가진 내-/ 시詩, 무無가 되었던 것. (본문 43쪽)
유골단지, 재, 납골당, 무덤 같은 단어가 곳곳에 박혀 “죽음의 빛이 장악”하고 있고, ‘샤워실은 언어를 삼키고 입식독방의 벽에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는 곳, “대화가 거의 범죄가 되는” 이 회색빛 세계에서, ‘입술은 금치산 선고를’ 받았고, ‘입은 진실을 그저 더듬거릴 뿐’이다. 파편으로, 조각으로 말을 잃어버린 암울함을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첼란의 서명과도 같은 ‘새로운 조어’를 만날 수 있다. ‘숨전환’ ‘실낱태양들’ 등의 제목, “밝음허기” “우울의 빠름” “나무노래” “모래종양” “그림자바퀴”, 그 밖의 수많은 첼란의 시어는 익숙한 단어를 모으고 다시 조합하는 변용을 거친 것으로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른 무언가를 일깨운다.
“나는 내 존재와 무관한 시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놀랍도록 현실적으로, 타협 없이 경험을 담아낸 시
“검은 기억”을 간직하고, “이리로 와서-침묵된 사람” “찢긴 사람” “가면 같은 얼굴”의 “반쯤 파먹힌 자” “꿰뚫린 사람”, 그리고 “계급적으로 그늘이 진 자”로 표현되는 시 속의 인물 역시 첼란으로 읽힌다.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무시무시한 절멸로부터 공포를 느꼈고, 부모를 죽인 “원수의 언어”로 시를 써야 하는 고통에 시달렸으며, 평생 어디에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았던 이스라엘에서마저도 그곳에 속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절망했던 그일 것이다. 스스로 말했듯 그 자신의 존재와 무관한 시는 단 한 줄도 없으며, ‘놀랍도록 현실적이고 독창적으로, 타협 없이 자기경험과 세계의 경험을 마지막 철자 하나하나까지 적확한 단어로 담아냈다’(만하이머 모르겐). 그리하여 “죽을 만큼 정확한 손”으로 말하는, “손가락 속의 모든 이 노래를” 들려주는, “글을 짊어진 이” 또한 첼란일 것이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언어가, 상실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기에(브레멘 문학상 수상 연설문). 그 언어로 빛과 구원을 말한다.
언젠가,/ 그때 나는 그를 들었다,/ 그때 그는 세계를 씻었다,/ 보이지 않게, 밤새도록,/ 실제로.// 하나 그리고 무한,/ 파괴했다,/ 나를 이루었다.// 빛이 있었다. 구원이었다. (본문 141쪽)
(……) 혹한의 말들에/ 거칠어져/ 희망이 그 말들을 향하여 껑충거렸다,// 창문이 날아간다, 우리는 바깥에 있다, (본문 222쪽)
네가 내 안에서 소멸하는 것처럼:// 마지막/ 다 해진/ 숨의 매듭에도/ 너는 꽂는다/ 파편 하나를/ 삶을. (본문 310쪽)
파울 첼란을 읽으며 항상 받는 인상은 그의 어휘가 작고 무겁다는 것이다. 가장 가벼운 목소리를 시에 담을 때조차 그의 언어는 단단한 추처럼 지면을 누른다. 번역된 시에 익숙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그의 시를 읽는 좋은 방법은 그 말들의 무게를 조금씩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의 언어는 불가능한 진실을 만지려는 것처럼 무겁고, 그의 시는 세계를 칼로 도려낸 것처럼 일순을 향한다. 그 낯선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잘 벼린 말들을 조금씩 매만지며 되새겨야 한다. 이것이 하나의 순간을, 그 전체를 담아내려는 것임을 숙지하고서, 조금씩 입에 녹여 먹는 것처럼, 그 단어들을 음미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시인이 그리는 아름다운 한순간이 불현듯 손에 잡히는 경험을 하게 되리라.
정말 오래도록 기다려온 책이다. 습작하던 시절, 얼마 번역되지 않은 그의 시를 찾아 여러 첼란 선집 사이를 헤매고는 했다. 이제야 겨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불안과 불투명의 시대에 마침맞게 찾아온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가 그리는 이 비현실적으로 순수한 실존은 지금 우리의 삶과 너무도 닮아 있으면서, 또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 황인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