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문학은 정서나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려서 문자로 나타낸 예술작품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문학은 ‘상상想像’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사실’이 아닌 글, 즉 ‘허구’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하다. 당장 「창세기」 저자들은 세상과 인류의 창조, 죄의 기원, 낙원의 상실을 기록하며 자신들이 역사적 진실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글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실로 읽히기도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허구로 읽힌다.
그렇다면 문학은 허구적, 즉 상상적인 글인가 아닌가에 따라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특별한 방식으로 선택하고 사용하는 것을 근거로 정의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즉 문학의 형식적 요소인 소리, 이미지, 리듬, 구문, 여러 서술기법 등 제반 장치를 채택하는 것이다. 문학을 정의하려는 시도들은 고대로부터 다방면으로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최소한 필자의 생각으로는 ‘언어의 특별한 운용’이라는 이 명제는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또한 예술작품으로서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오류가 없는 정의가 될 것 같다. 우선 작품을 보며 논의를 계속하기로 하자.
발가락이 노란 새 한 마리 숲을 꿰고 있습니다
새의 맥박소리 가늘게 흔들려 고요를 꿰고 있습니다
돌이 물밑에 가만 엎드려 물살을 꿰고 있습니다
시간이 소리를 꿰고 소리는 시간을 꿰고 있습니다
물뱀이 단풍을 시침질하는 햇살을 꿰고 있습니다
푸른 물잠자리 날개가 바람을 꿰고 있습니다
너와집 처마 그을음이 가을의 중심을 꿰고 있습니다
-「물수제비」 전문
시 「물수제비」는 시집을 대표할 만한 중요한 의미가 담긴 작품인데, 독자도 필독해 보아야 할 가치를 갖는 작품이 될 것이다.
작품은 일곱 개의 행들이 각각 하나씩의 연을 만들고 있다. 따라서 작품은 일곱 연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짧고 깔끔하다. 우선 다가오는 이 시의 매력은 너와집이 보이는 가을 산촌의 맑고 깨끗한 서경敍景의 능력에 있다. 마치 롱테이크 기법으로 찍은 선명한 영상을 보는 느낌이다.
시인은 먼저 숲을 가로지르는 한 마리 새를 포착한다. 그런데 시인의 포커스는 그 새의 “발가락이 노란” 것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숲의 고요는 “새의 맥박소리”도 들릴 것 같다. 시인의 섬세한 감각은 또한 물살을 꿰며 “돌이 물밑에 가만 엎드려” 있는 것도 영상에 담는다. 그리고 잠깐 호흡을 고르며 이런 정경이 “시간이 소리를 꿰고 소리는 시간을 꿰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서경은 계속된다. “물뱀이 단풍을 시침질하는 햇살을”, “푸른 물잠자리 날개가 바람을 꿰고” 있는 것을 포착하고 마침내 “가을의 중심”에서 “너와집 처마 그을음”까지 보여주며 그림 같은 영상의 막을 내린다.
조국 산촌의 여러 아름다운 가을 풍광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경치다. 단풍이 물드는 숲, 숲을 나는 새, 투명한 개울물, 그 위를 비추는 맑은 햇살은 대할 때마다 모국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하지만 우리를 압도하는 거대하고 웅장한 풍광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가을의 산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우 ‘낯익은’ 풍경일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익숙하고 낯익은 풍경을 특별한 방식의 언어사용으로 작은 부분의 특징까지 낯설게 만들면서 선명하게 부각시켜내고 있다.
이제 글의 초입에서 문학의 정의를 언급하며 거론되기도 한 ‘특별한 언어 운용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인간의 언어는 인류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로 생긴 의미의 기호다. 그런데 언어를 독특하게 사용함으로서 그 의미의 모체인 경험을 자극하여 재생시킬 수 있다. 사람의 경험이란 우선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문학 언어는 바로 이런 감각적 지각을 자극하는 능력과 이를 십분 응용하려하는 독특함이 있다. ‘심상’, 즉 ‘이미지’다.
그런데 심상은 시·청·후·미·촉각의 오감이 동시에 함께 어울리며 발현되기도 한다. 또한 오감 뿐 아니라 희로애락과 같은 정서적 충동을 야기하는 심상들도 얼마든지 나타나게 마련이다.
첫 연에서는 “발가락이 노란 새 한 마리 숲을 꿰고” 있고, 둘째 연에서는 그 “새의 맥박소리 가늘게 흔들려 고요를 꿰고” 있다. 발가락이 ‘노란’ 색깔의 새는 우리의 시각적 심상을, 새의 ‘맥박소리’는 우리의 청각적 심상을 자극한다. 셋째 연에서는 “돌이 물밑에 가만 엎드려 물살을 꿰고” 있다. 물밑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돌의 모습’은 우리의 눈을, 그 위에 흘러가는 ‘물살의 소리’는 우리의 귀를 가볍게 건드리고 있다.
새의 맥박소리까지 느낄 수 있다니 얼마나 고요한 숲인가. 이런 ‘고요함’ 속에는 새의 날갯짓 소리도 흐르는 물살의 소리도 충분히 지각될 것이다. 그런데 맥박도 날갯짓도 물살도 움직이는 것이고 모든 움직임에는 힘과 시간이 작동한다. 그래서 ‘소리’ 또한 비로소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시인은 넷째 연에서 이런 자연의 이치를 “시간이 소리를 꿰고 소리는 시간을 꿰고” 있다고 간명하게 발화한다. 이 작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세계 이해를 위한 시인의 관념이 얼핏 드러나는 진술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따분한 설교조의 ‘가르침’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시인은 이어 자신의 진술을 증명이나 하듯 계속하여 숲의 정황을 묘사한다.
다섯째 연에서는 물뱀이 “단풍을 시침질하는 햇살” 아래 물살을 헤엄쳐 건너가고 있다. ‘시침질’은 옷을 완성하기 전에 먼저 몸에 잘 맞는지 보기 위해 대강 하는 바느질을 의미한다. 소위 ‘가봉假縫’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계절은 한참 가을인 것은 맞지만 겨울 직전의 만추는 아니다. 햇살이 나무의 붉은 단풍 옷을 가봉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시침질하는 햇살”은 의외의 신선한 비유로 일반적 심상보다 한 차원 높은 시적 전개라 아니할 수 없다.
여섯째 연에서는 “푸른 물잠자리 날개가 바람을 꿰고” 있다. ‘바람’ 역시 기압의 변화에 의하여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이다. 맑고 깨끗한 가을의 대기가 “푸른 물잠자리”의 날개와 어우러지며 한층 선연하게 드러난다. 고요한 숲 속의 작은 ‘정중동’의 모습들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너와집 처마 그을음이 가을의 중심을 꿰고”있다. 새도 물뱀도 잠자리도 숲과 바람처럼 자연의 일부일 뿐 사람과 함께 기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와집’은 사람이 그 안에서 직접 사는 곳으로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인간 냄새가 풍기는 장소다. “처마 그을음”에 시선을 모둘 필요가 있다. ‘그을음’은 아궁이 같은 곳에 불을 피울 때 연기와 함께 섞여 나오는 검은 먼지 같은 것으로 세월이 흐르며 이것이 내려앉은 처마, 벽, 천장 같은 곳을 까맣게 변색시킨다. 너와집은 얇은 돌 조각으로 지붕을 인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나 볼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집이다. 더구나 처마의 그을음으로 보아 이집은 새로 지어진 집이 절대 아니다. 우리가 주시할 점은 “너와집 처마 그을음”이 신산한 삶의 모습을 정확하게 은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랜 풍상을 견딘 산골 집에서 사는 순박하지만 초라한 사람의 삶이 이 시구에서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연민의 감정과 이에 따른 관념을 느낀다. 그러나 이를 직설적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시인은 하늘의 달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물 위에 일렁이는 달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