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전문가가 나를 포기하고 내가 의학 전문가를 포기했을 때, 내가 만성적 통증이라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갇혀 버린 것처럼 보였을 때, 희한한 탈출구를 제안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라. 그리고 숨을 쉬어라.”
이 책은 영국 출신의 작가 팀 파크스가 풀어 놓는 자신의 건강과 통증, 치유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통증과 치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 저자는 어떤 시점부터 만성 통증에 시달려 왔고, 이 책은 저자가 만성 통증을 겪으며 느꼈던 자신의 몸, 자신의 마음, 자신의 언어에 대한 생각과 경험을 풀어 놓은 책이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잘 나가는 저자 팀 파크스(그는 맨 부커 상 최종 후보에 오른,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출간한 저자이자, 고문학을 번역하는 번역가이고, 학생들에게 번역을 가르치는 사람이다)는 어느 날부터인가 소변을 제대로 누지 못해 잠을 설치고 너무 아파 제대로 앉아 있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을 해왔던 사람이다. 관습적 의학 체계(병원과 의사, 그리고 그들이 행했던 수많은 검사들)는 그의 통증에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의학적 검진의 결과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전립선은 깨끗했다.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던 약도, 식이요법도 효과가 없었다. 통증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권의 책을 통해 호흡 훈련을 접하게 되고, 명상을 접하게 되면서 건강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가게 된다.
“심인성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몸과 마음을 분리된 것으로 본다는 뜻이잖아요.”
저자는 만성적 통증이라는 지독한 감옥 안에서, 그리고 이 감옥을 탈출하는 길을 배우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마음과 몸, 언어와 신체, 정신 없는 현대의 세계와 작가로서의 그의 삶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견고한 진실들을 직면한다.
저자는 언어와 정신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지위를 유지했고 몸은 자신을 방해할 때만 의식하던 ‘대상’이었음을 고백한다. 생각하고 쓰고 말하느라 그의 몸은 늘 긴장해 있었고, 운동을 하는 것조차 몸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사실 보통 나에게 몸은 존재하지 않았다. 몸이 나를 기습할 때, 나를 방해할 때 의식하게 될 뿐이었다. 통증은 바쁜 일정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살펴보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시간을 내지 않았다. “계속 이런 빌어먹을 방해물을 처리하고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할 일을 다 끝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러면서 씩씩거렸다.”(35쪽)
저자는 명상을 접하기 전 우연히 인도에 들러 인도의 전통의학인 아유르베다 의사를 만난다. 저자의 증상이 그 성격과 성정과 관계가 깊다는 의사의 이야기에 저자는 이렇게 되묻는다.
“혹시 이게 전부 심인성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의사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그 말은 많이 사용하지 않습니다, 파크스 씨.”
나는 의사를 보았다.
부인이 설명했다. “심인성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몸과 마음을 분리된 것으로 본다는 뜻이잖아요.” (107쪽)
이 극심한 통증의 경험 속에서 “몸과 마음을 분리하려고 노력하는 문화에서만 심인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나뉜 것을 다시 합치기 위해서. 그리고 이 말은 늘 병, 특히 서양의학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은밀하고 고집스러운 병과 연결되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은 불안한 마음이 몸이라는 기계를 아프게 할 때만 하나가 된다.”(112쪽)는 저자의 깨달음은 실상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 된다.
이 지독한 회의주의자의 명상: 치유기로 마무리 되지 않는 치유기
저자는 어린 시절을 독실한 성공회 교도였던 부모와 보냈고, 도리어 그에 대한 반발로 ‘독실한’ 무신론자가 되었다. 하지만 가장 닮고 싶지 않았던 삶의 모든 기준이 신앙이었던 아버지의 이분법적 태도는 아버지의 반편향이었던 그에게 옮아 있었다. 호전적으로 공식적 학문과 공식적 의학에 의존했으며, 스스로가 합리적이고 회의적이며 현대적이고 서구적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신앙은 털었지만 언어와 신체, 마음과 몸,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갈라 생각하는 태도, 말의 주문에 걸린 채 살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신봉했던 온 몸을 쪼개 관찰하고 진단하는 현대의 의학 체계는 병명을 주지 못했고, 따라서 그가 아플 당시 삶에 가장 핵심적이었던 그 통증은 언어로 설명될 수 없었다.
“종양학과, 서관 5층. 심장병학과, 본관 2층. 몸은 층과 관으로 나뉜다. 주요 장기는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사람들은 마치 세무서에서 부가가치세 신고서나 송장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내장에 관한 전문 정보가 담긴 크고 노란 봉투를 움켜쥐고 그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전체?으로 이곳은 여느 관공서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곳은 안심 시켜주거나 치유해 주는 집이 아니다. 치유가 온전해지는 것을 뜻한다면, 이곳은 웅장한 산업적, 관료적 기업이다.”(93쪽)
“나는 아픈 사람, 논란의 여지 없이 아픈 사람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심각하게 아프기를 바랐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의 상태를 볼 수 있을 것이고, 모든 것이 겉으로 드러날 것이고, 마침내 누군가 뭔가를 해 줄 것 같았다.”(194쪽)
“나는 휴가 때 절대로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지만, 그것은 단지 내가 말로 똑같은 일을 하기 때문일 뿐이다.”(236쪽)
그러던 중 자신의 상태를 적확히 묘사한 한 책을 통해 가만히 누워 몸의 긴장을 푸는 호흡 훈련을 접하게 되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의심치 않았던 명상을 접하게 된다. 그것들은 저자가 평생 처음 받아보는, 언어와 관련이 없는 정신적 과제였다.
“나는 [위파사나 명상 피정]에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위파사나 명상’을 찾아보았다.
‘위파사나는 사물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기 관찰에 의한 자기 정화의 과정이다. 또 보편적인 문제의 보편적인 치료법이다.’
‘보편적’과 ‘치료법’이라는 두 말은 함께 놓으면 소망적 사고를 집약할 뿐이다. 뇌에 총알이 박힌 경우가 아니라면. 반면 정화는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며, 따라서 내가 바랄 수 없는 목표이기도 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대목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명상이 눈을 감고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304쪽)
하지만 가만히 앉아 말을 하지 않고 있는 이 단순해 보이는 행위를 통해 이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는 회의주의자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통증은 나아졌고, 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체험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이 치유기로 마무리 되지 않는 것은 끝까지 이 회의주의적 태도를 져버리지 않는 저자의 태도 때문이다. 저자는 여전히 명상을 한다. 명상에서의 체험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영적이거나 신앙적인 태도로 회귀하지 않았다. 여전히 언어와 자아를 중요하게 여기고 글을 쓴다. 그는 처음 명상을 시작했을 때를 돌아보며 “그 때는 특별한 경험, 우주적 치유의 물결에 대한 욕망이 있었던 것이 보인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이고 과학적고 자신의 문화에 맞는 태도를 보이겠다는 결심과 이성을 초월하고, 실용주의와 과학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았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는 명상을 통해 우리의 언어와 생각이 자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나마 명상을 통해 이야기, 수사, 기만이 없는 침묵과 받아들임의 상태에서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때문에 이 책은 실용적이고 완전한 치유법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실망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지금 우리의 몸과 마음의 관계, 건강과 치유에 대한 중요한 몇 가지 답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제목만 보고 건강 교본이나 자기계발서인 줄 알고 집어 들었다가 D. H. 로렌스나 토머스 하디, 벨라스케스나 마그리트, 간디나 무솔리니, 이탈리아 대 영국, 예수와 붓다, 신앙 치료와 급류 카약에 관한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놀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병이 증상려愎柄치료로 정의될 수 있는 별도의 분리된 것이 아니라, 따로 분리된 부분이 없는 전체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