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실상을 증언하는
용등시화의 가치
『용등시화』는 19세기 후반 고종 시대 시단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거의 유일한 사료다. 불행하게도 조선 말기 고종 시대의 문단과 문인의 활동상은 다른 어떤 시기보다 남아 있는 사료가 부족하다.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면서 전통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거침없이 허물어지는 시기라 차분하게 직접 체험한 시대의 문화예술을 되짚어보는 여유를 누리지 못했던 까닭이다. 특히 중추적 인물들이 자신의 활동을 회고하는 저술을 남기지 못했다. 이 점에서 『용등시화』는 대단히 큰 위상을 점한다.
실제로 『용등시화』에는 저자 자신이 체험한 시창작의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강위ㆍ이상수ㆍ정기우ㆍ김윤식ㆍ이중하ㆍ여규형ㆍ김택영ㆍ이건창ㆍ황현ㆍ이남규와 같은 당대 주요 작가를 포함하여 군소 작가 수십 명의 생생한 일화와 시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어떤 저술도 이만한 규모로 그 시기 시단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밖에도 대원군ㆍ김홍집ㆍ어윤중ㆍ민영목ㆍ김옥균ㆍ유길준 등 조선 말기 정계의 저명한 인물들의 시와 일화도 실려 있는데, 이 또한 다른 어떤 문헌에서도 볼 수 없는 기록이다.
『용등시화』가 지닌 두 번째 가치는 ‘남사(南社)’라는 고종 시대 시단을 대표하는 시사(詩社)의 활동을 풍성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남사는 한양의 남쪽, 곧 남산 북쪽의 회현방(會賢坊)을 중심으로 창작 활동을 함께한 시사이다. 소론 문인이 주도하여 홍기주ㆍ이중하ㆍ정기우ㆍ여규형ㆍ이건창ㆍ정만조 등이 주축이 되고, 여기에 많은 시인들이 참여하였다. 시화 곳곳에서 이른바 ‘남사제명승(南社諸名勝, 남사의 여러 명사)’들이 벌인 시회의 현장과 거기에서 창작된 작품과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세 번째로 말할 수 있는 가치는 『용등시화』의 내용 대부분이 간접 견문이나 독서를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저자가 직접 체험한 시단의 실상과 많은 시인들과 교유한 양상, 그리고 주고받은 작품에 대한 평론이라는 점이다. 시단 현장의 견문과 체험이 그 현장에 있었던 저자의 손끝을 통해 독자에게 직접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다. 다른 저술의 내용을 재론하거나 재인용하지 않고, 거의 모두 직접 보고 확인한 사실과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썼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남다르다. 다시 말해 『용등시화』는 저자가 증언하는 고종 시대 시단의 활동상이면서 동시에 지성인들의 숨겨진 일화를 기록한 빼어난 야사의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당시 역사를 이해하는 데 충분히 가치 있는 사료로 활용될 수 있다.
네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가치는 현재에는 거의 존재가 묻힌 여항시인이나 지방문인의 존재와 작품의 성취를 크게 부각시킨 점이다. 남사와 관련을 맺은 유명 무명의 시인들이 시화에는 다수 등장한다. 시를 잘 지은 이학원이 이건창의 소개로 시사에 처음 나온 사연(21칙), 순창 아전의 아들로 시를 잘 지은 이현식(22칙), 충청도 강경의 객주로 시를 잘 지은 방달주(34칙), 경상도 영덕 아전의 서자인 주효상(35칙), 하동 출신 시인 성혜영과 김창순(60칙), 순창의 시인 설규석(80칙), 호서의 떠돌이 시인 심상모(82칙), 강경의 시인 초강 김상우 부자(85칙), 영해민란의 주모자 남두병(74칙), 그리고 무정이 직접 만나본 승려 시인(94칙)과 기녀 시인(96칙~98칙) 등이다. 이 모두가 조선 말기 시단에서 크고 작은 활약을 한 시인들로서 그들에 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용등시화』를 다시금 신뢰할 만한 문헌으로 격상시키는 전거가 된다.
변화와 발전을 읽어냈던
한문학의 근대에 관한 균형 잡힌 통찰
『용등시화』 제90칙에서 저자는 조선 시풍의 양대 조류를 조선 중기 이전과 근고(近古) 시대의 두 가지 경향으로 놓고, 앞선 시기의 경향과는 반대가 되는 경향을 ‘한시사가(漢詩四家, 이덕무ㆍ박제가ㆍ유득공ㆍ이서구)’와 신위가 대표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중엽 이전에는 오로지 당시(唐詩)를 일삼았으나 건릉(健陵, 정조) 이후로는 사가가 오로지 송시(宋詩)를 일삼아서 시체(詩體)가 일변하였다”라는 단언을 전하면서 사가를 조선 후기 시풍 변화의 중추적 핵심으로 인정하였다.
또한 19세기를 사가가 일으킨 변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단계로 이해하여, 전반기에는 신위가 후반기 고종 대에는 강위나 이건창이 뒤 시기 경향을 계승하여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다고 해석하였다. 즉, 18세기 후반의 사가, 19세기 전반의 신위, 19세기 후반의 강위와 이건창이란 시단의 거장들을 중심으로 한시사의 변화를 포착하고, 나아가 그 변화를 발전의 시각으로 읽어낸 것이다. 특히 저자는 정조 시대를 근대 한시의 기점으로 보고, 근대 한시의 방향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이 구도는 탁월한 견해일 뿐만 아니라 18세기 이후 시단의 거시적 조류를 명료하고 간명하게 정리한 결과였다. 시사를 파악하는 이와 같은 선명한 구도는 저자의 참신한 견해이면서 동시에 그가 속한 시대 및 시사 동인과 공유하는 시각이었다.
『용등시화』를 통해 달성된 이와 같은 그의 통찰은 20세기 이후 독자적 견해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김태준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문학사가 대부분이 문학의 전개과정을 일종의 생명체와 같이 이해하고 18세기 이후 쇠퇴기에 접어들어 조선 말기 이후 그 명맥이 끊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한 것과는 그 관점과 평가가 크게 다르다.
이렇게 근대 한시단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관심을 토대로 세운 저자의 문학사적 구도는 이후 그의 ?조선시문변천?과 ?조선근대문장가약서?라는 학술논문으로 발전한다. 경성제대 강의안이었던 두 논문은 영조ㆍ정조 시대 문학을 근대의 출발로 삼아 이후의 시문과 문장가의 맥락을 잡고 있다. 근대적 학술논문으로서 두 편의 글은 정조 이후 조선 말기의 한문학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논문에서는 학계의 상식과 다르게 고종 시대 문장가로 이응진과 이상수, 이근수를 포함하고, 경술(經術)을 담은 문장을 특별히 중시하며, 강위ㆍ김택영ㆍ이건창ㆍ황현ㆍ이남규 등 남사 구성원을 대거 포함했다. 이는 『용등시화』가 저자의 문학사 구도의 설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말해준다. 즉, 『용등시화』는 18세기와 19세기 한문학사와 한시사의 구도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파악한 첫 번째 저술로서, 문학의 근대를 조망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문재 빛나던 젊은 문사는
한학계 태두를 거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남았지만
이 책을 현대어로 옮기고 해제 작업을 마친 안대회 교수는 『용등시화』를 평가할 때 걸림돌은 바로 저자 정만조 자신이라 말한다.
관료로서 크고 작은 직책을 맡았던 정만조는 개화파로서 주요한 중앙의 직책을 두루 거쳤고, 1895년 갑오개혁 때는 김홍집 내각에서 중용되기도 했다. 아관파천 이후 1896년 4월 을미사변에 연루된 혐의로 15년형을 받아 전라도 진도에 유배되었지만, 유배생활을 하는 11년 동안 진도와 목포 등지에서 창작과 교육 활동을 하다가 1907년 11월 고종이 억지로 퇴위한 뒤에 사면되었다.
이후 그는 문화와 학술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친일행적을 이어갔다. 대동학회를 비롯한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서는 조선총독부 참사관실 위원 촉탁으로 조선도서의 해제사업을 맡았다. 1913년 이래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의 운영과 활동을 주관하여 『경학원잡지』를 주도적으로 편찬하였고, 경학원 부제학과 대제학을 지냈다. 1922년 이후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 1925년 이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강사, 1927년 4월 조선사편수회 위원, 1930년 명륜학원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유학과 전통학술계 분야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다. 또한 한학과 한시 분야의 대가로 인정받아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비롯한 일제강점기 언론계에서도 두루 활동하였다. 즉, 그의 삶은 대한제국 몰락기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가 뚜렷하게 갈리고, 생애 후반기의 학술과 문예활동은 법률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될 만큼 전형적인 친일 지식인의 행적을 따른다.
『용등시화』는 그의 생애 전반기 마지막 단계에서 쓰인 저술로, 어찌 보면 이 작품은 한 문사의 생애의 빛깔을 나누는 상징적인 징표와도 같다. 시화를 쓴 이후 친일행각을 노골화함으로써 매도와 질타의 대상이 되어간 저자 탓에 시화를 널리 읽히고 제대로 평가하기가 망설여진다고 번역자 안대회 교수는 고백한다. 그러나 저자의 친일행적은 그것대로 평가하여야 하지만, 시화와 그에 실린 내용을 친일행적의 기준으로만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인다. 조선 말기 시단과 지성계, 정치계를 깊이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탁월한 저술로서 『용등시화』 그 자체를 직시하자는 것이 학자로서 그의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