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1 조창완(chogaci@hitel.net)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소설같은 삶을 살아간다고 푸념한다. 소설같은 삶의 연원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의 구분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자의적으로 얻어진 삶, 타의적으로 얻어진 삶으로 나누는 이도 있을 것이다. 가령 박완서의 삶은 전쟁이나 남편, 아들과의 사별 같이 자의적으로 얻어진 것 이라기 보다는 타의적으로 얻어진 것이 많다. 뚜렷이 구분하기는 그렇지만 공선옥도 그런 스타일이다. 반면에 은희경이나 김인숙 같이 자의적으로 얻어진 삶의 성격이 뚜렷한 작가들이 있다. 공지영의 삶은 표면적으로 타의적으로 얻어진 것 같은 삶처럼 보이지만 순전히 자의적으로 얻어진 삶을 살아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80년대 초반이라는 상황이 강압적으로 다가왔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분명히 타의에서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그 길을 걸었다. 현장 체험이, 옥바라지가, 결혼이, 출산이, 이혼이 모두가 상당부분 자의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자의적인 글쓰기의 최대 약점은 자신의 푸념이나 고독을 공적인 공간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는 영향이 있을 것이다. 물론 자의적인 고통을 통해 글쓰기를 하는 작가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쁠 것은 없다. 다만 지금의 소설의 문제를 지적할 때 가장 빈번하게 지적되는 사소설(私小說)식의 글쓰기는 폐해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공지영의 소설집은 재미있는 특성을 보여준다. 상당히 긴 시간 동안의 작품이 모여 완성된 소설집을 읽으며, 나는 그녀의 글쓰기가 뭔가에 대한 적지 않은 고심을 해야했다. 참고로 말한다면 난 그녀의 근작 소설인 봉순이 언니에 드러나는 그녀의 의식과 글쓰기에 대해 비난성의 공격을 한 적이 있다.
이 모음집의 중심소설은 아니지만 '진지한 남자'라는 소설을 통해 내 나름대로 이 소설집을 읽어본다. '진지한 남자'라는 소설은 발문을 쓴 이병훈의 지적처럼 내용자체를 소설로 보기에 부족한 소설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나온 맥락은 무엇일까. 이병천도 뒤에 지적하지만 이 소설은 공지영이 자신을 힐난하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냉소의 일종으로 난 소설을 읽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화가는 작가의 다름 아니다. 물론 소설로 대치되어야할 것이며 그림이란 소설로 읽었다.
우선 세상에 대한 냉소로 이런 소설을 쓴 것은 아직은 젊은 작가로 지나치게 거만한 느낌이 든다. 공지영의 최근 글쓰기는 평단은 물론이고, 소설의 맛을 찾는 미식가 독자들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물론 이것은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의 평가일 뿐이다) 이런 지적이 나오게 된 것도 독자로서의 느낌과 소위 몇 작가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오만한 엘리트 의식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지적들에 대해 무시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작가의 오만으로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소설 '진지한 남자'에서 화가가 소재로 삼는 변혁을 갈망하는 그림이나 '일그러진 부처'라는 소재 문제를 보자. 이 소설 역시 그녀의 초반기 소설과 같이 사회적 색채를 띤 소설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앞부분에 있는 '광기의 역사'나 '조용한 나날'의 경우 앞은 강하게 뒤는 느슨하게 사회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특히 94년에 쓰인 '광기의 역사'는 그녀가 소시민주의로 발을 덜 들여놓았던 시기의 힘을 보여준다. 이후에 쓰여진 수록 작품의 대부분은 이 시대에 일그러진 부처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군상을 보여주는데 충실한다. 독자에 따라서는 그 소설들이 그녀의 실제 생활과 적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연스럽게 긴장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사실 그녀의 표현처럼 삶이란 고독해서 일그러진 부처처럼 살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화가의 일거수 일투족이 세상에게 휘둘리듯이 작가란 필연적으로 휘둘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런 독자들의 반응에 지나치게 반응한다면 좁은 작가의 소견이 좁다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의 내용을 보면 언론사에 대한 냉소에서, 잡지들의 과도한 폭로근성, PC통신 동호회, 문학평론가 등의 부박한 현상에 대한 비판을 던진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소설가가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수단인 소설로 이런 것을 지적하는 것은 경솔하다. 차라리 칼럼이나 기고로 그런 지적을 했다면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위험한 것이 냉소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나이인 작가가 소설을 통해 냉소를 던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장난이라고 생각된다.
이번에 모여진 소설에서 그녀는 작가로서 타고난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 같다. 기형도의 대학시절에 대한 패로디로 시작되는 '광기의 역사'는 사회와의 시선을 유지하며, 자신에게 가장 복잡했던 시대를 회고한다. 가장 근작인 '고독'은 요즘 여성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의식의 '공동화'현상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이다.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는 화두를 놓고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제목처럼 공허함 속에 빠져있다.
아들의 죽음 후에 여행을 떠난 중견 촬영감독과 수학 선생인 부부의 여행이야기를 담은 '길'은 나에게 펠리니의 '라스트라다'(길)라는 영화를 생각나게 했다.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촬영감독의 호젓함은 젤 소미나를 잃고 고함치는 잠파노의 절규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인 것을 어찌할까.
상실의 기억을 담은 표제작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는 여성작가들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수성이라는 무기를 잘 배치한 소설이다. 페루로 떠나버린 사람의 환영(?)과 이야기하는 한 디자이너의 쓸쓸한 독백이다. 읽기에 지나치게 공허한 감이 있다. '조용한 나날'은 평온한 가운데 잠복되어 있는 속물근성과 권태에 대한 신랄한 보고서다. '모스크바..' 역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오랫동안 쓰여진 소설의 묶음이라서 그런지, 또 작가의 사고가 상당히 불안정했던 시기의 기록이라 그런지 소설집 전반은 질서도 없고, 혼란스럽다.(물론 질서가 미덕 만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근래에 읽는 여성작가들의 소설은 소위 몇몇 작가들이 경쟁적으로 장난을 치는 행태가 아닌가 싶다. 사실 장난을 대체할 만한 흥밋거리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가보다 하지만 조금은 씁쓸한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