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물이 다 그러하듯이, 전통시대의 동아시아 세계도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하나의 총합적(總合的) 세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띠라서 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를 구성하였던 개별적 성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성분들과의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전체 동아시아 세계 안에서 점하는 개별적 성분의 위상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위 글은 지난 1999년 나온 김한규의 저서 『한중관계사』 1, 2의 「머리말」의 첫머리이다. 지은이는 역사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동아시아사의 전체적인 구조와 체계를 염두에 두고 이 분야의 역사를 연구해왔다. 지은이의 연구는 “개별적 사실(史實)의 의미를 전체적 역사 체계 안에서 파악하는 총합적인 연구와 서술”을 지향하며 한국, 중국, 티베트의 역사를 바라본다. 따라서 그의 연구는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민족국가 및 민족국가의 국경선에 갇힌 일국사를 넘어 주변의 역사와 역동적으로 만나고 교통하는 한국 역사, 중국 역사, 티베트 역사로 나아간다.
얼핏 보면 낯설게 느낄 수도 있는 ‘요동 역사공동체’라는 새로운 역사학 범주와 이에 따른 ‘요동사(遼東史)’ 서술은 이러한 그의 연구 이력과 방법에서 나왔다. 지은이는 먼저 오늘날의 민족국가 ‘한국’ ‘중국’ 개념, 그것에 갇혀 있는 ‘한국사’ ‘중국사’ 개념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특히 동아시아사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중국사를 연구할 때에는 ‘중화민국’ 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개념과, 역사적으로 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존재했던 특정한 역사공동체를 가려 볼 것을 강력히 주문한다.
“중국사의 형성에 작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중국이요 중국인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국과 중국인만이 중국사의 형성에 작용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와 그 인민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역사상의 모든 공간과 그 거주인들이 중국사의 구성 요소라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시에도 모두 중국이었고 중국인이었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또한 현재의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규정하려 하면, 역사가가 처한 현재의 입장이 바뀜에 따라 그 사실도 변질되지 않을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축소된다고 해서, 그 축소된 부분을 중국이 아니라고 다시 부인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기본적인 개념을 정확하게 확립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논쟁도, 어떠한 역사 서술도 불가능하다” ―「결론: 요동사를 위하여」, 『요동사』에서
위 발언은 이 책 서술의 바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은 상식 속의 ‘한국’ ‘한국사’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관철되는데, 역사상의 ‘한국(韓國)’이 특정한 국가(민족국가)의 명칭이 아니라, 중국 및 제민족과 함께 동아시아사의 특수한 사정과 역사 안에 함께 역동적으로 교류하며 존재한 ‘특정한 역사공체’라는 점을 먼저 강조한다.
‘요동 역사공동체’ ‘요동사’라는 범주는 이러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제안되고 있다. 지은이는 선진(先秦) 문헌, 25사, 한중 양측의 『실록』 등 현존하는 일차 사료, 한중 양측의 역사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제민족(종족)의 민족지(民族誌, 또는 종족지), 기간 생산된 한중일 및 러시아의 방대한 논문들을 낱낱이 살피고 해석한 끝에 ‘요동’을 역사상의 ‘한국’과 ‘중국’ 사이에 존재한 제3의 역사공동체로 보게 되었다. 지은이는 오늘날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보통 ‘만주’라고 부르는 곳, 중국인은 ‘동북’이라고 부르는 곳, 전통적으로는 ‘요동’이라고 일컬었던 요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예맥계의 조선 부여 고구려 등과 숙신계의 말갈 여진 만주, 동호계의 선비 거란 몽골 등 여러 세력이 번갈아 이 지역사의 중심이 되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및 요 금 원 청(후금) 등의 여러 나라를 세우고, 명멸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에 지은이는 ‘요동’을 한반도의 한인(韓人)이 주체가 된 삼한연맹체와 신라 백제 고려 조선 한국(대한민국) 등 ‘역사상의 한국’의 여러 국가들이나 중원에서 출현해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인(漢人)이 세운 상주연맹체와 진(秦) 한 위 진(晉) 수 당 송 명 중국(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등 ‘역사상의 중국’의 여러 국가들과는 구별되는 제3의 독자적인 역사공동체로 파악하고, 요동의 독자적인 역사 체계의 위상과 의의를 인정하여 그 역사를 서술하게 되었다.
지은이는 역사학의 ‘범주’ ‘개념’ ‘사료’ ‘자료’ 들을 근본적으로 반성, 회의하는 가운데 오직 학문적 논리와 방법, 또한 학자적 양심에 따라 위와 같은 연구를 진행해왔으나 학문 밖에서 온 비난에 종종 부딪혔다. 지난 1994년에는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로부터 중국학국제학술회의에 초청을 받고서도 사전에 주최 측에 보낸 ‘역사상 ‘요동’ 개념과 ‘중국사’ 범주’를 주제로 한 발표문이 ‘한중 우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발표를 할 수 없었고, 중국 측 요청으로 중국어로 번역되었던 『한중관계사』 1, 2 또한 “이러한 설법이 제국주의 침략에 복무하고 민족분열주의의 주장을 위한” 것으로 비난받아 출간할 수가 없었다.
한편 한국에서도 『한중관계사』 1, 2는 내니 못 내니 하며 출간이 2년이나 지연되었었고, 『요동사』의 경우 책의 출간을 사전에 보도한 일부 언론에 의해 그의 연구를 제대로, 차분히 검토한 적이 없는 일부 연구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히 고구려사와 관련해 그러했지만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역사적 시공간을 과연 오늘날의 민족국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가 하는 그의 방법적인 비판과 반성은 중국, 한국 어느 쪽으로부터도 올바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이때 ‘중국’ ‘한국’ 등 기본적인 범주, 개념에 대한 비판과 반성도 함께 가려진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이전의 연구를 더욱 발전시켜 ‘요동’을 독자적인 존재 의미를 가진 역사공동체로 보고 있다. 요동에서 발흥, 발전한 일련의 국가들을 ‘요동사’라는 독자적 역사 체계를 형성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동사’를 통해 아전인수격으로 다투어온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적 아집이 ‘논리적’으로 극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십수 년에 걸쳐 엄청난 규모의 사료를 실제로 파헤쳐 이룬, 742면에 달하는 본격적인 연구서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란 실로 어려울 것이다. 범주, 개념, 상식에 대한 비판과 회의, 사료를 충실히 소화해 인용해 통사 서술 곳곳에 끼워 넣은 문단 등이 일견 까다롭게 비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책을 대하고 나면, 마치 사마천의 문장을 보는 듯한 유려한 문체 덕분에, 지은이의 주장과 제시한 증거, 반증을 수이 따라갈 수 있다. 시세는 사람을 쉽게 흥분시킬 때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필요한, 차분하고 묵직한 연구의 일독을 감히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