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소선』(鐘北小選)은 선귤당(蟬橘堂) 이덕무(李德懋)가 연암 박지원의 기문(奇文) 10편을 뽑아 비평을 하고 서문을 달아 엮어낸 비평집의 국역본이다.
이 책은 원전 《종북소선》의 원형의 미를 최대한 되살렸는데, 한문으로 쓰인 고서를 원형의 미를 고스란히 살려내어 번역한 사례는 국내에서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종북소선》은 지금껏 박지원의 자찬(自撰) 산문집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하지만 서울대 박희병 교수는 그와는 다른 주장을 제기한다. 박 교수의 연구 결과, 《종북소선》은 이덕무가 직접 박지원의 글 중에서 기문을 가려 뽑고 비평을 붙여 엮어낸 자찬 비평서라는 것이다. 이 책이 이덕무의 자찬 비평서라는 근거는 역자 박희병 교수의 역저『연암과 선귤당의 대화』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종북소선》은 학계에 그리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이 아니며, 본격적인 연구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 비평사와 정신사에서 대단히 주목해야 할 문제적 저작이다. 또한 문인 이덕무의 조선 시대 최고의 산문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저작이다.
이에 돌베개는 이덕무의 평선서(評選書) 《종북소선》의 국역본 『종북소선』(부록으로 영인본 첨부)을 출간하고, 이 책에 대한 연구서인 『연암과 선귤당의 대화』를 동시에 출간함으로써, 이덕무의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의 미학적 깊이와 통찰력, 고도의 정신적 사유를 조망하고자 한다. 또한 중세시대 비평의 미학과 근대비평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작가와 비평가 간의 고도의 정신적 대화를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이덕무의 비평서 《종북소선》
《종북소선》은 선귤당(蟬橘堂)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글 10편을 뽑아 평점(評點)을 붙인 필사본 책이다. ‘평점’은 평어(評語)와 권점(圈點)을 말한다. ‘평어’는 논평한 말이고, ‘권점’은 원권(圓圈)과 방점(旁點)을 말한다. ‘원권’은 글 옆에 친 동그라미, 방점은 글 옆에 찍은 점을 말한다.
《종북소선》은 대전의 박지원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책인데, 1987년에 처음 학계에 공개되었다(현재는 원자료의 촬영본만이 남아 있고, 원자료는 그 종적이 묘연하다).
‘종북소선’(鐘北小選)이란 책 이름에서 ‘종북’은 종각(鐘閣)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당시 이덕무는 지금의 탑골공원 일대인 대사동(大寺洞)에 집이 있었으며, ‘종북’은 그의 거주지를 가리킨다. ‘소선’은 작은 선집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종북소선’이라는 책명은 ‘이덕무가 엮은 작은 선집’을 의미한다.
이 책의 글씨는 모두 이덕무의 친필이다(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덕무의 친필본 《영처고》와 비교해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덕무는 박지원의 작품 10편을 뽑고 이를 필사한 뒤, 거기에 권점을 붙이고, 구두점을 찍고, 여러 가지 형식의 평어를 붙였다. 글자의 한 필획 한 필획은 물론이려니와, 권점 하나, 구두점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전체 서문을 썼다. 이 책에 쏟은 이덕무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종북소선》에 대한 논란: 《종북소선》은 누가 만든 책인가?
《종북소선》은 이덕무의 서문 1편과 박지원의 글 10편으로 구성된 책이다. 지금까지 이 책은 박지원의 자찬(自撰) 산문집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심지어 이 책의 서문까지도 박지원의 작품으로 오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서문의 말미에 “청장만제”(靑莊漫題)라고 적혀 있는데도, 학계에서는 오히려 청장(靑莊)이라는 호가 박지원이 쓰던 호이고, 이덕무가 이후에 쓰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내기도 했다.
이러한 오해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朴宗采, 1780∼1835)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아버지 박지원의 문집을 편찬할 때, 이덕무가 지은 서문을 「‘종북소선’ 자서」라는 이름으로 《연암집》에 싣는 한편, 《연암집》 권14와 권15에 《종북소선》을 배치하였다.
그렇다면 《종북소선》은 누가 만든 책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누가 엮은 책인가?
《종북소선》의 서문이 박지원의 글이 아닌 선귤당 이덕무의 글이며,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의 실수로 《연암집》에 편재되었다는 점은 이제 어느 정도 학계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종북소선》을 엮은 주체가 누구인가, 이 지점에서 기존 학계의 주장과 박희병 교수의 주장은 확연히 다르다. 박지원이 《종북소선》을 스스로 찬집했고, 그 문집에 이덕무가 서문을 썼다는 주장이 기존 학계의 중론이다. 그리고 박희병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종북소선》은 이덕무의 비평집이다. 즉, 이덕무가 박지원의 빼어난 글 10편을 뽑아 매 작품마다 평을 단 다음 스스로 서문을 써서 역은 이덕무의 책이다.
조선 시대 최고의 비?가 선귤당 이덕무, 최고의 비평서 《종북소선》
이덕무는 조선 시대 최고의 산문비평가였다. 이덕무를 한마디로 평가하면 ‘독서인’(讀書人)이라는 말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주위 지인들에게 ‘책밖에 모르는 바보’[看書癡]라는 놀림을 받던, 박지원과 교유한 문인 정도로만 알려진 이덕무에게, 비평가라는 타이틀은 왠지 낯설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미학적 깊이와 통찰력, 정신적 높이에서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이덕무의 가장 이덕무다운 점은 다름 아닌 바로 이 비평가로서의 면모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덕무의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가 바로 이 《종북소선》이다.
《종북소선》에는 이덕무의 서문이 붙어 있다. 서문을 쓴 연월은 1771년 10월이다. 《종북소선》이 엮어진 건 이 무렵이라고 생각된다. 이덕무의 나이 31세, 박지원은 당시 35세였다. 이덕무는 이십대 이래 평점비평(評點批評) 행위에 심취했는데, 《종북소선》을 엮은 삼십대 초반에는 그 비평적 기량이 가히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덕무가 당대에 비평가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음은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한 시대의 명사(名士)가 모두 그(이덕무)의 문장을 중히 여겨, 즐겨 함께 노닐었고, 그의 비평을 얻는 것을 금이나 옥보다 귀하게 여겼다.
위 글은 성대중이 쓴 「이무관 애사」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이 시문(詩文)을 지으면 가지고 와 질문하고, 비평을 해 줄 것을 청했는데, 선군(이덕무)께서는 순순히 그에 응하셨다. 평점을 받은 이들은 대개 그것을 잘 간직하였다.
위 글은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가 편찬한 「선고부군유사」에 나오는 말이다. 이덕무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평점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덕무의 평점비평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는 《종북소선》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으며, 앞으로도 자료가 더 나올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현재 이덕무의 미학과 평점비평가로서의 내공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하나의 독립적인 완정(完整)한 저술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로는 《종북소선》이 유일하다.
이덕무는 조선 시대의 평점비평가 중 제1인자였으며, 《종북소선》은 조선 시대 최고의 평점비평서이다.
원형의 미를 되살린 국역본 『종북소선』
원전 《종북소선》에는 고급 중국 종이가 사용되었으며, 먹도 고급의 중국 먹이 사용되었다. 이 책에는 세 가지 색이 보인다. 먹색, 청색, 주홍색이 그것이다. 박지원의 작품은 먹으로 필사되었고, 권점은 청색으로 표시되었으며, 미평·방비·후평 등의 평어는 모두 주홍색으로 기재되었다. 구두점 역시 주홍색이다. 《종북소선》은 이 세 가지 색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데다, 이덕무의 글씨까지 우아하면서도 단정하고 수려(秀麗)해, 책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존재물’로 보인다. 그리하여 《종북소선》을 대하면 마치 서첩(書帖)이나 화첩(畵帖)을 대할 때와 방불한 느낌이 든다.
평점이 달린 필사본 책은 이 외에도 몇 종이 현전하지만, 《종북소선》만큼 책의 ‘예술성’이 높은 평점서(評點書)는 없다.
이번에 출간한 국역본 『종북소선』은 원전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색채뿐 아니라, 한자 원전에 부기된 각종 평점 기호의 위치를 국역된 한글에도 그대로 구현해 냈다. 기호 뿐 아니라 방비, 미평, 후평 등도 한자 원전의 위치에 준하여 한글 국역본에도 그대로 구현하였다. 한자로 쓰인 고전적을 한글로 국역하면서, 그 원형의 미까지 고스란히 되살린 책은 이 책이 최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