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삶과 문명의 뼈대를 선사한 재미를 추구하는 본능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를 통해, 혁신과 아이디어의 역사를 과학기술과 접목해 독창적이고 흥미롭게 풀어낸 스티븐 존슨. 그가 이번에는 인류 문명을 발전시켜온 놀이와 경이, 그 희열의 역사에 주목한다.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된 역사관과 문명관에 익숙한 우리는, 놀이와 쾌락이 삶과 문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간과한다. 첨단 과학기술 발명가나 정치 혁명가들을 존경하듯, 놀이공간과 장난감과 쾌락의 도구를 만든 이들도 칭송받아야 마땅하다고 스티븐 존슨은 강조한다. 뼈로 만든 피리, 커피, 후추, 파노라마, 옥양목, 주사위 게임 등,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 사물들은 모두 세상을 놀라게 했다. 새로운 체험, 맛, 촉감, 소리. 새롭고 놀라운 것을 추구하는 우리 안의 본성은 이들을 통한 보상을 즐긴다.
놀이가 지닌 더 놀라운 혁신의 힘은, 생물학적 욕구와 무관한 새로운 문화적 제도와 관행, 시설을 구축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늘 새로운 체험을 갈구하는, 놀라움을 지향하는 우리 본능에 이미 ‘혁신’이라는 잠재력이 깃들어 있다. 새롭고 사소한 것들은 당장은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공간과 장치들을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명을 추구할 발판으로 만든다.
커피 맛은 근대 언론 기관 탄생에 도움을 주었다. 우아하게 장식된 포목점이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서민의 사소한 즐거움에 불과했던 움직이는 장난감은 어느새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고 인류문명을 증진하고 있다. 『원더랜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러한 연결고리가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풍부한 사례와 연구, 문헌, 영감이 넘치는 사고 전환과 거침없는 문장으로 펼쳐 보인다.
인류가 삶에서 누리는 사소한 쾌락과 즐거움을 통해 혁신에 가속도가 붙고, 미래 사회 또한 영향을 받으며 달라진다. 현대문명은 심심풀이에 불과했던 놀이와 장난감이 일구어낸 놀라운 결과물이다. 놀라움과 재미는 인류에게 즐거움뿐만 아니라 삶과 문명의 뼈대를 선사했다는 것이다.
신비한 바다 달팽이의 자줏빛이 낳은 서비스 산업
‘티리언 퍼플’은 달팽이의 분비물로 만드는 자주색 염료다. 고대 페니키아인들은 부와 고귀함의 상징이 된 이 색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달팽이를 잡으러 항해를떠났다. 지중해를 벗어나 미지의 대서양으로 진출하면서 그들이 남긴 발자취는 인류의 탐험 역사에서 분수령이 된다. 하잘것없는 염료를 구하러 가는 여정. 위대한 탐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목화로 만든 천인 옥양목은 아무리 빨아도 색상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촉감과 화려한 문양도 유럽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동인도회사는 이 직물 때문에 더 큰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다. 옥양목은 유통된 지 150년이 지나서 더 수요가 늘어난다. 17세기가 되어서야 등장한, 화려하게 꾸며진 상점 때문이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가 아니라 보고 즐기는 공간이 된 상점에 전시된 천에 반한 귀부인들이, 상점을 둘러보는 소일에 빠져들면서 옥양목도 더불어 인기가 올라갔다. 19세기 들어 몽마르쉐 같은 백화점과 쇼핑몰이 탄생하면서, 자유로이 구경하고 소비하는 현상은 삶에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을 더했다. 구경하며 눈으로 즐길 수 있는 경이로운 세상과의 만남은 서비스 산업의 탄생을 알렸다. 화려한 인테리어는 최초의 마케팅 기법이었다.
뼈로 만든 피리에서 시작된 컴퓨터 키보드와 프로그래밍
음악은 가장 추상적인 형태의 예술이다. 음악이 없어도 생물학적인 삶에는 지장이 없다. 음악은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 색달랐기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뼈로 만든 인류 최초의 피리 소리가 고막을 울린 이후로 인간은 새로운 소리, 색다른 소리를 낼 새로운 재료, 새로운 화음을 추구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과 과정에서, 음악과는 상관없는 다양한 면에서도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치는 기술 진전이 동반되었다.
컴퓨터 발명에는 뮤직박스, 하프시코드 키보드, 자동 연주 피아노도 한몫했다. 일종의 프로그래밍 기계들인 셈이다. 유랑극단과 명장들도 역사상 획기적인 기술인 코드 개발에 기여했다. 뮤직박스에 들어 있는, 핀이 돌출된 원통에서 소프트웨어가 탄생했다. 피아노 건반을 통해 오늘날 컴퓨터 키보드 자판이 개발되어 디지털 혁명의 씨앗이 되었다. 음파를 기록하려는 시도도 주파수 변조 기술과 확장 대역 기술로 진화해, 무선전화통신망, 블루투스, 와이파이 등 수많은 무선 장치에 쓰인다. 또한 정보를 처리하고 공유할 때 사용하는 새로운 도구를 개발하는 데 음악의 도구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고 공유하려는 시도가 다른 분야에서 혁명을 촉발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최초의 정보 공유 네트워크는 바로 음악 파일을 교환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음악은 최초로 부호화되고, 최초로 자동화되고, 최초로 프로그래밍 되고, 최초로 디지털 상품화하고, 최초로 개인과 개인의 네트워크를 통해 유통된 인간 활동이다.
후추가 가꾼, 아름답고 풍요로운 베니스와 암스테르담
수많은 다른 쾌락이 그랬듯, 다양한 맛을 선사하는 향신료에 반한 인간은 지리적, 실존적으로 멀리 진출한다. 향신료는 달성 가능한 욕망의 지평을 넓혔고 다시 세상의 지평을 확장했다. 새로운 체험, 새로운 욕망, 새로운 맛을 향한 탐험의 욕구가 그러한 경계를 확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900년경 무슬림 향신료 무역 경로를 그린 지도를 보면, 오늘날 세계 무슬림 인구 분포도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정향, 계피, 육두구의 씨앗과 봉오리를 통해 세계 시장이라는 개념이 싹트게 되었다. 한편 로마제국은 후추가 듬뿍 들어간 산해진미로 향연을 벌이느라 경제를 탕진해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향신료에 맛들인 인간들은 새로운 착취 방법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형태의 독도법과 항해법, 새로운 구조의 기업을 발명했다. 세상의 물리적인 거리를 좁혀, 수마트라에서 재배된 후추가 보다 효율적으로 런던과 암스테르담 가정집의 부엌까지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향신료를 향한 인간의 탐닉은 말 그대로 모험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세상 어느 곳이든 쉽게 오가게 된 배경에는 그 하찮은 향신료가 있었다. 세계무역, 제국주의,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와 발견, 주식회사, 베니스와 암스테르담의 아름다움, 이 모두가 향신료 그리고 향신료 무역으로 인한 결과다.
빛과 어둠 속 환영을 통해 인공지능과 교감하는 인간상
18세기 무대에서 빛과 환등기를 이용한 유령 제조사와 자동기계 발명가들은, 환영의 위력을 최초로 이용해 우리를 공포에 몰아넣고 즐겁게 했다. 이후 예술가, 흥행사, 과학자들은 수세기에 걸쳐 수백 가지 착시현상을 발견한다. 뇌는 일련의 속임수를 발달시켜왔다. 그 덕에 우리는 가장자리, 움직임, 사물들 간의 3차원 관계 등을 감지한다. 이러한 환영, 즉 눈속임은 입체경, 원근법, 파노라마 기법으로 이어진다. 평범한 사람들 눈앞에, 신세계가 열리고 성찰하고 정보를 얻고 공감하고 흥미를 보일 영역이 확장된 것이다.
전람회와 마술공연은 더 다양해지고, 이로써 영화가 탄생한다. 영화는 관객이 배우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근접촬영(close-up) 기법을 통해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한다. 영화는 여러 혁신기술과 창의적인 촬영기법의 총체이다. 또한 캄캄한 공간에서 환상에 몰입하게 해주는 대가로 고정된 가격에 표를 파는 사업모델까지 흡수한 매체이기도 하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와 [백설 공주]를 통해 환영의 세계는 기술적, 정서적으로 도약한다. 디즈니가 손으로 셀룰로이드에 그려 넣어 초당 24프레임의 속도로 영사된 가상 인물들이 마치 사람 같아서, 관객은 그들과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설 공주] 시사회에서 흐느끼던 관객들은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든 환영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일어날 근본적인 변화를 시사했다.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들이지만, 그 ‘유명 인사’가 화면에 등장하면 그들의 삶에 엄청나게 몰입하며 감정적으로 투자한다. 가상 존재와 인간의 감정적인 교감은, 시리(Siri) 같은 소프트웨어에서 음성도우미 등을 지나 인공지능의 세계로까지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컴퓨터와 함께 노는 인간을 탄생시킨 게임의 힘
체스부터 현대 온라인 게임에 이르기까지, 게임은 초기 당대 사회 질서와 일반 생활방식, 규율까지 반영하며 발달되어왔다. 얼핏 하찮게 보이는 게임이라는 가상 세계는 지배구조, 법률, 사회적인 관계를 갖춘 진짜 세상의 변화에 일조했다. 인공지능을 탐색하게 된 계기는 체스 게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한편 미국 보드 게임은 대부분 윤리적이고 실용적인 교훈을 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모노폴리]의 전신인 [지주게임]은 모든 사람에게 토지의 권리가 있다는 의미를 담아, 사회 정치적인 혁명 수단의 일환이기도 했다. 게임은 국경을 초월해 여러 사람이 관여한 공동의 결과물이다.
주사위와 룰렛 도박 등 우연과 확률의 요소가 작용하는 게임에서 발달된 확률이론은 보험 산업과 헤지펀드를 낳았다. 원주민의 공의 탄성에서 발견한 고무라는 물질은 재료과학으로 이어졌다. 컴퓨터과학자들의 하부문화로 탄생한 [우주전쟁!]은 오늘날 비디오게임 산업으로 진화했다. 또한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플랫폼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복잡한 기계를 ‘놀이’라는 목적을 추구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게임은 디지털 혁명의 씨앗이 되고, 주사위 놀이는 확률이론의 토대를 마련하고, 보드게임은 사회를 조직화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재미 추구로 시작된 게임이 오늘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이토록 정교하고 무궁무진하다.
또 하나의 혁신, 함께 모여 놀고 토론하는 공공장소
기술혁신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간적 혁신 또한 인류와 문명 발전과 아이디어 생산에 있어 중요하다. 선술집은 순수한 여흥과 민주주의의 공간이다. 민중을 위한 시설이었고, 평민들은 다른 곳에서는 허락되지 않은 표현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를 한껏 누렸다. 이러한 술집들은 대중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성적 해방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놀이와 여가용으로 시작된 공간에서 위험하고 신선한 아이디어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버마스가 주장한 개념인 ‘공중(公衆)’이 등장해 여론과 공론을 형성한 것이다. 영국 식민지인 미국 전역에 생긴 선술집은 반란의 온상이 되었다. 독립선언문이 미국 식민지 전역에서 우렁차게 낭독되어 독립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 장소도 선술집들이다. 로마인은 타베르나를 이용해 제국을 하나로 유지하고, 미국인들은 선술집을 이용해 제국을 무너뜨렸다.
또한 커피 하우스는 영국 계몽주의 운동을 상업적, 예술적, 문학적으로 꽃피우는 데 그 어떤 물리적 공간보다도 크게 기여했다. 커피가 유럽인들의 정신을 명료하게 하고 기억력을 향상시켰다면, 커피 하우스는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공간을 선사했다. 신기한 물건들이 전시된 커피 하우스 내부의 진열장은 새로운 유형의 지적인 호기심, 새로운 유형의 학문 추구를 상징했다. 최초의 공공박물관, 보험회사, 공식 주식거래, 주간지 등은 모두 커피 하우스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렸다. 합법적인 소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여가활동을 창조해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종교단체나 가정처럼 서열화된 공간에서는 나오기 힘든 수많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탄생시켰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자연으로부터의 즐거움을 구현한 동물원과 국립공원, 20세기 산업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오락 사업인 놀이공원은 놀라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이 일군 독특한 현대적 산물이다. 도심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휴식 공간인 공원은 가장 평화롭고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공적인 장소인 것이다. 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온갖 집단들이 평화롭게 어울리는 사회적 공간이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은 오늘날 흔히 인류의 진보를 상징한다고 여기는 마천루나 휴대전화나 인공위성 못지않게, 인류가 이룬 혁혁한 성과다. 1천 년 전 향신료 무역이 성행하면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세계 유통망과 더불어 시작된 기나긴 프로젝트가 드디어 완성된 결과물인 셈이다.
놀이와 즐거움에는 혁신이 깃든다!
이 놀라운 결과들은 모두 실용과 필요성이 아니라, 유희와 경이로움과 미의식이 낳은 결과다. 인간의 혁신을 둘러싼 기술 발명 욕구, 이윤 추구 욕구, 정복욕, 지위 추구 욕구에서 발견되곤 하는 뜻밖의 동기. 바로 새로운 경험과 신기함과 미(美) 그 자체를 통해 얻는 즐거움이다. 새로움을 탐험하고 경험을 확장하려는 욕구야말로, 순수한 쾌락과 생존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쾌락을 구분하는 요소다. 유희를 즐기려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마음을 열고 새로운 경이를 맞이한다.
새로운 것들은 낯설고, 삶에서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당장 도움이 되지 않기에 무시되곤 한다. 그러나 색다름을 추구하면 뜻밖의 상황이 펼쳐지고 새로운 것에 노출된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공간과 장치들을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명을 추구할 발판으로 삼는다. 순간의 정신적 쾌락이 혁명적인 아이디어로 이어져 산업과 역사를 바꾼다. 『원더랜드』는 재미와 놀라움이라는 것 말고는 딱히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습관, 관습, 환경을 돌아보는 책이다.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노동에서 해방된 이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와 기술, 그리고 사회적 공간과 문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시대든 다가올 시대를 꿈꾸고, 꿈꾸는 동안 다가올 시대를 창조한다.” 프랑스 역사학자 미셸레의 말이다. 이러한 꿈은 누구나 즉흥적으로, 뜻밖에, 어마어마하게 창의적인 놀이를 마음껏 시도해볼 수 있는 경이로움과 유희의 공간에서 펼쳐진다. 놀이와 즐거움에는 혁신이 깃든다. 그 사소한 혁신들이 더 나은 미래를, 새로운 ‘원더랜드’를 창조한다. ‘사람들이 가장 신바람 나게 노는 곳에서 미래가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