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를 관통하는 첩보 누아르
1987년 서울, 정보기관의 ‘기술자’ 박도훈과 김대한은 ‘빨갱이’ 조사와 검거로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도훈은 일본과의 금괴 밀수를 빌미로 고정간첩 ‘광명산’의 히로뽕 밀수를 돕게 된다. 하지만 이중간첩 ‘량강 1호’의 첩보로 ‘광명산’은 정보기관에 잡히고, 도훈은 ‘광명산’과의 관계가 들킬 위험에 처한다.
한편 도훈과 함께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김대한은 갖은 방법으로 큰 건설사의 회장까지 올라간 아버지 김판구와는 다르게 원리 원칙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회사가 조총련계와 연결되었을지 모른다는 증거를 입수하고, 더해서 한 남자가 홍콩에서 아내를 죽이고 이를 간첩의 짓으로 무마하려 한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게 된다. 과연 그의 선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숨 막히는 음모와 반전,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을 통해 작가는 흔히 국가, 즉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정보기관원의 어두운 측면을 들여다본다. 기관원들이 애국심을 부르짖으며 활약할수록 세상은 더 혼란해지고 희생자는 늘어간다.
■ 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웃픈’ 현실
팍팍한 현실에서 사람들은 판타지를 그리거나 과거의 영광을 되새긴다. 우리 사회의 복고 열풍은 주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후반을 다루고 있는데, 정치적 민주화와 문화적 다양성이 넘치던 이 시대의 밑바탕에는 고도성장이라는 경제적 자신감과 활력이 있었다. 인기리에 방영된 케이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바로 이 시기를 다루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실업률은 낮았고 은행 금리는 높았으며, 아파트 값은 폭등하던 이 시대의 보통사람들은 아마도 대부분 ‘중산층’이라는 밝은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철거민들이 있었고, 노점상들이 있었으며, 억압받은 노동자의 권리가 있었고, 조작된 간첩들이 있었다. 「응답하라 1988」이 따뜻하고 희망적인 분위기의 1988년을 낭만적으로 보여줬다면, 이 만화는 뒷골목에서 일어난 웃기고도 슬픈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고문하는 중간에 아이들의 성적을 걱정하던 기관원들의 대화나 라디오 진행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사연을 읽는 것을 들었을 때라고 말하는 것처럼 비극은 이렇게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다.
작가가 이 만화에서 당시의 개그를 자주 인용하고, 작품 말미 ‘코멘터리’를 통해 유행어들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그가 섬세하게 시대적 분위기를 포착하여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코멘터리’에서 만화의 배경이 되는 소품을 비롯해, 작가가 참고하고 만화화한 인물과 사건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응답하라 1987”, ‘애국심’이 ‘간첩’을 만들던 시대
‘서울시공무원 간첩조작사건’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국정원 간첩조작사건’을 기억하는가? 국가기관이 있지도 않은 간첩을 만들어내는 황당한 경우로 2011년에 시작하여 2015년에야 무죄로 판결된 사건이다. 실제로 수많은 간첩이 정보기관에 의해 조작되었음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여기 그 ‘조작사건’ 가해자의 시각에서 들여다본 작품이 있다.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기대감과 긴장감이 교차하던 1987년, 우리들의 슬프고 어두운 과거사를 때로는 비장하고 긴장감 있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경쾌하게 만화로 재구성한 작품 『조국과 민족』이다!
1987년 올림픽과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수지김 사건’이 일어난다. 14년이 지나서야 수지김이 간첩이 아니었으며,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여 간첩이란 누명을 씌웠으며, 국정원(당시 안기부)은 진상을 알면서도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사건이다. 강태진 작가는 바로 이 ‘수지김 사건’을 접하면서 국가 정보기관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왜 간첩사건을 조작했는지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작가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비롯한 정부 요원들의 자서전과 신문 기사, 영화, 사건 기록을 접하며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현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국가를 위한다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국민을 괴롭히는 아이러니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만화로 녹여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이 가해자인 정보기관 요원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악의 평범성’을 되묻다
독일 태생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멀쩡하고 평범한 이웃들이 특정한 조건이나 상황에서 비판적 사고를 멈추면, 거대한 악을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러 사건의 이면에는 자신의 행동이 타인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최근에는 아렌트가 대표적 사례로 꼽은 ‘아이히만’이 사실은 자신의 죄를 축소하기 위해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 것처럼 사람들을 속였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근안을 위시한 기관원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들은 대세에 순응하여 그저 시키는 대로 사람들을 고문하고 사건을 조작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악역’을 자임한 것일까? 아마도 진실은 그 두 지점 어딘가에서 유동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조국과 민족』은 정부 요원과 간첩의 경계, 평범한 사람과 범죄자의 경계에 선 인물들을 통해, ‘보통사람들’이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저마다 절박한 상황에 내몰리는 시대의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 영화화 전격 결정
만화적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이 주는 재미,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선. 강태진 작가의 작품이 각광받는 이유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만화가가 되었지만,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흔치 않은 일이다. 기본적으로 그림을 잘 그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 작가가 높이 평가받는 부분은 하나의 줄거리를 따라 현대사의 여러 인물과 사건이 교차되는 치밀한 스토리 구성과 연출에 있다. 또한 만화를 통해 자취집과 포장마차, 다방과 슈퍼마켓을 보고 있으면 마치 1987년 속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고증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다.
그래선지 『조국과 민족』은 연재 도중에 영화화가 결정되었다. 그에 앞서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인 『애욕의 개구리장갑』 역시 영화화가 결정되어 시나리오 공모까지 마친 상태다. 최근 많은 만화들이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가운데 신인 작가라고 할 수 있는 강 작가의 작품도 멀티 콘텐츠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안정적인 작화 능력으로 펼쳐내는 강태진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