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꾸 쓰고 싶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연수
2003년 가을 한국, 도서관― 2004년 연변 벌판 모래바람― 2008년 가을 다시, 한국
2003년 가을 어느 날, 작가 김연수는 1930년대 초반 북간도의 항일유격근거지(한인 소비에트) 내부에서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사건, 이른바 ‘반민생단 투쟁’에 착안한 소설을 쓰기 위해 일산의 한 도서관을 찾는다. 조선인으로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조선혁명을 위해 먼저 중국혁명을 외쳐야 했던 시작부터 모순을 껴안았던 전사들, 국제주의자로서의 이중임무를 띤 채로 일제가 아닌 동지의 손에 의해 봄날 꽃잎처럼 죽어간 수천의 젊은 목숨들, 자신이 누구인지는 결국 죽고 나서야 시체로서만 말할 수 있었던 그 기막힌 사연의 인물들을 찾아 김연수는 사전과 사료들을 뒤적이고 복사하고 칼로 오려 노트에 붙여갔다. 그러나 이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그곳’이 아닌 ‘현재-이곳’에 앉아 그들의 삶과 내면을 짐작하기란 말 그대로 ‘상상불가’의 영역이었으니. 작가가 내린 결론은 적어도 그들이 죽어간 연변 땅에 가서 소설을 쓰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소설이었기에 그 갈증과 열망은 더했다.
소문난 아키비스트 김연수가 학부시절부터 섬광처럼 붙들린 이 뒤틀린 역사의 한 페이지는 결국 그를 국경 밖으로, 경계 너머로 이끈다. 2003년 12월에 연길 공항에 첫발을 디딘 후 꼬박 9개월여를 그곳 연변대학교 기숙사와 도서관에 붙박였다. 그리하여 소설 '밤은 노래한다'는 2004년 봄부터 겨울까지 계간 '파라21'에 연재되며 ‘첫’ 선을 보인다. 하지만 단행본으로의 출간까지는 아직 먼 여정이 남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작가의 발길은 중국과 일본, 연변과 러시아, 미국과 독일을 분주히 오갔다. 그러는 짬짬이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묶었고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과 올봄 산문집 '여행할 권리'까지 선보였다. 더군다나 이 책들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밤은 노래한다'와 관련한 정보와 사유의 흔적은 독자들의 원망 섞인 궁금증을 더욱 부추겼다. 그리고 2008년 9월, 그러니까 연재를 마치고 자그마치 4년의 시간을 더 보태 작가는 드디어 장편 '밤은 노래한다'의 일단락을 맺는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개인의 운명
―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역사 속으로 명멸해간 이름 없는 영혼들
언젠가부터 작가 김연수의 관심사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 국경을 넘어가서 존재하는 사람들, 체제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전통적 소설 문법의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운데서도 그의 오롯한 관심사는 글쓰기를 통한 ‘나의 정체성 찾기=나란 누구인가’였다. 전작들에서 이번 소설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된 수많은 개인의 아픔과 내면을 응시하는 작가의 눈이 그만큼 깊고 집요했던 이유다.
“국경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묻고 싶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어떤 곳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제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만 하는가?”―산문집 '여행할 권리' 中
일찍부터 타인의 배제, 확고부동한 이분법의 세계―조국, 민족, 이념보다는 ‘인간의 조건’에 매료되었던 그에게, 일제 강점기하, 중국과 일본, 조선의 점이지대(漸移地帶)였던 북간도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과 조차지 ‘영국더기’를 둘러싸고 전해지는 가슴 저릿한 사연들은 소설가로서 저버릴 수 없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엄혹한 세계에서 조선의 해방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고상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혁명에 투신했던 동지들이 서로를 일제의 간첩으로 몰아 마치 마녀사냥을 하듯 무차별 처형을 감행하고 급기야 3, 4년 만에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 기막힌 사연은 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소망하고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알게 되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는 점에서, 1927년 낡은 세계를 부숴버리겠다며 밤마다 영국더기 동산교회에 모여 열에 들뜬 목소리로 혁명을 떠들어대던 네 명의 중학생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뒤질세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서둘러 선언했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건 당신도, 나도,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도 마찬가지다.” ―본문 247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
죽음 직전의 연인이 써 보낸,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버린 한 장의 편지
'밤은 노래한다'는 일제강점기의 1930년대 초, 저마다의 사연과 핏빛 서러움을 간직한 이들이 몰려든 북간도 땅을 배경으로, 박도만, 최도식, 안세훈, 박길룡 등 혁명과 새로운 시대를 꿈꿨던 네 명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친구인 이정희라는 신여성, 그리고 만철(滿鐵)의 조선인 측량기수로 그녀 이정희를 사랑했던 김해연에게 찾아온 잔혹한 운명, 가혹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인을 꿈꾸었지만 내지인마냥 일본인과 함께 일하고 술을 마시며 그저 운명적인 단 하나의 사랑을 맘에 품었다가 어느 순간, 조국과 이념, 혁명과 죽음에 직면하면서 세계의 복잡한 이면에 눈떠가는 한 남자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손을 저주하며 삶을 저버리고자 했지만 다시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또 한 하나의 순정에 가슴 치는 애틋한 연애기이기도 하다. “북간도 고난한 삶의 흔적이 몸으로 스며든 사람들의 얼굴이 인화지 위에 검은 꽃처럼 피어나”듯 이번 소설의 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원하고 또 원했던 바로 그 소설!
20년간 쓰고자 했던 작가의 열망, 동만주 벌판의 아픈 역사가 되살아난다
1989년 갓 대학 신입생 신고를 마치자마자 선배들을 통해 접하게 된 마르크시즘, 1994년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속의 낯선 북한 지명들, 1995년에 접한 일본 학자 와다 하루키의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1999년 신주백 박사의 『만주 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연변대 김성호 박사의 『1930년 연변 민생단 사건 연구』, 한홍구 교수의 박사논문 「상처받은 민족주의―1930년대 간도에서의 민생단 사건과 김일성』, 그리고 2008년 여름 촛불시위 현장에서 맞닥뜨린 어린 학생들의 풋풋하고 진정 어린 눈빛들, 가장 최근에 다녀온 몽골 평원에서 바라봤던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과 모래바람, 그리고 수많은 별빛까지. 그간 작가의 열망이 간절했던 만큼 이 작품에 쏟은 시간과 귀한 자료와 벅찬 독려에 함께했던 기억들이다. 물론 2003년 말부터 2004년까지 작가가 직접 연변 땅을 배회하며 판 발품으로 거둬들인, 몸에 새긴 북간도의 이야기들을 빠뜨리면 안 될 것이다.
『밤은 노래한다』의 책장 갈피마다 불멸의 사랑을 노래한 하이네의 시구처럼 밤과 낮의 빛을 오가는 듯한 김연수의 시적 이고 밀도 높은 문장 속에 자신의 삶 앞에 정직하고 진실해서 아름다웠던 사람들의 숨결, 가슴 아픈 역사가 녹아들어 있다. 인생을 뒤바꿔버린 단 하나의 사랑, 단 한 명의 여인, 그리고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남자가 건네받은 단 한 장의 편지에서 얽히고설킨 운명의 실타래가 풀려나듯이 작가 김연수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다. 마치 주인공 김해연이 “어둠이 내릴 때까지 정희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읽을 수 없는 부분이, 마침내 보이고 또 읽히게 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고 질문하고 회의했던 것처럼 작가 역시 『밤은 노래한다』에 등장하는 비극 속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놓고 죽어간 작중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듭 질문하고 또 회의했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게 우리의 윤리다. 내가 끝내 소설을 탈고하는 이유는 바로 그 윤리 때문이다. 나는 영원히 타인의 삶을 알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설가로서 끝내 실패할지 모르지만, 다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죽을 때까지 소설가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타인의 삶 앞에서 윤리적이고자 한다. 그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나 슬픈 운명을 지닌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김연수 산문 「타인의 삶」에서
1990년대 초반에 등단하여 그보다 더 오래고 튼실한 문학적 내공으로 오로지 글쓰기로만 승부해온 김연수의 그간 행보는 동세대 작가들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화려했다. 5권의 장편소설과 3권의 소설집에 한국을 대표하는 크고 작은 문학상들의 잇단 수상. 새로운 작품이 소개될 때마다 열혈 팬심은 물론이요, 문단 안팎의 신망은 그만큼 두터워진 게 사실이다. 어느 시인의 단언처럼 ‘21세기 한국문학의 블루칩’ 소설가로서 이미 일가를 이룬 작가 김연수다. 충분히 지적이고 충분히 진지하고 충분히 낭만적인 작가 김연수, 그의 역사와 사랑을 노래한 여섯번째 장편 '밤은 노래한다' 역시 그 오랜 기대에 충분히 값하는 ‘김연수 대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