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를 통해 우리 역사를 배운다!...오천 년 우리 역사와 함께 강화의 역사
선사시대와 고조선 그리고 삼국시대의 강화도
기록에 의하면, 상고시대에 강화도의 이름은 ‘갑비고차甲比古次’였다. 고구려 때는 한자어로 ‘혈구穴口’라고 했다. 언어학자들은 두 말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강화도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바다로 흘러들어 만나는 지점에 있다. 바다 쪽에서 바라보면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는 매우 중요한 곳으로, 지명의 유래는 중요한 구멍 또는 입구가 되는 신성한 땅임을 말해 준다.
강화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실로 오래되었다. 고인돌 무덤들이 그 증거이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에 달하는 4만여 기의 고인돌이 우리나라에 몰려 있고, 그 가운데 150여 기가 서해의 섬 강화도 북부에 집중되어 있다. 섬인데도 척박하지 않은 천혜의 자연환경이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터전을 마련해 준 것이다. 강화도에서는 북방식 고인돌(탁자식 고인돌)뿐 아니라, 바둑판식(남방식 고인돌)과 개석식 고인돌을 모두 볼 수 있다. 너무나 유명한 고조선의 유적 마니산과 참성단, 삼랑성(정족산성).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에 지나지 않지만, 정족산 고요한 숲에 있는 산성을 따라 거닐어 보면 오래된 산성이 전하는 신비한 기운이 느껴질 것이다.
삼국시대의 유적은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 소수림왕 대에 건립한 전등사가 유일하다. 기록으로 전하는 바는 없지만,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가 강화도의 주인이 되어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전등사는 대웅전 처마 밑의 벌거벗은 나부상으로 유명하다. 이 나부상에 얽힌 이야기와 본디 진종사였다가 전등사로 이름이 바뀐 사연이 본문에 소개되어 있다.
13세기 천하의 패자 몽골에 맞선 시기, 고려시대의 강화도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이후, 고려는 강화도 천도를 단행한다. 무신정권의 강압에 못 이겨 고려 고종은 이 결정에 따랐다. 1232년 6월 천도를 했고, 강화는 강도로 승격되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몽골은 살리타를 보내 2차 침입을 하게 된다. 이때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초조대장경과 교장(속장경의 원래 이름)이 불타고, 경주의 황룡사 9층탑도 소실되었다.
기세등등하던 무신정권도 최씨 집안의 몰락과 함께 점차 약화되었다. 이런 정세 변화에 따라 1259년부터 원종은 몽골과 화해를 시도하였다. 마침내 1270년 개경은 다시 도읍의 자리를 되찾았다. 몽골은 항몽의 근거지인 강화의 모든 시설을 우리 손으로 소각하고 파손할 것을 명령했다. 이때 강화에 있던 고려의 유적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소실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강도 시절 간행된 팔만대장경만은 화마를 입지 않고 잘 보존되어, 지난 6월에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서구 열강이 조선의 길목, 강화도에서 각축을 벌이다
파죽지세로 고려를 짓밟던 몽골도 강화해협을 건너는 것은 두려워했으나, 후금과 뒤이은 청은 해전에 능한 한족 병사를 앞세워 배금정책과 소중화주의에 빠져 있던 조선의 자존심을 단숨에 꺾어버렸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그것인데, 두 호란 모두 인조 대에 일어났다.
정묘호란(1627년) 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조선은 얼마간 후금과 대치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강화도 연미정에서 형제의 관계를 맺은 뒤에야 후금을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연미정은 강화 10경의 하나로, 정자에서 멀리 육지쪽을 바라보면 바다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병자호란(1636년) 때는 청병들이 일찌감치 강화로 가는 길목을 막아, 인조는 속수무책으로 남한산성에서 수성만 하다가 결국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말았다.
파당의 폐해를 막고 왕권을 강화하려 한 영ㆍ정조 대 이후 순조가 즉위했다. 순조 이후는 천주교를 학문으로 연구하다 종교로 받아들이게 된 남인과 천주교도가 일대 환란을 겪은 시기다. 병인박해(1866년)로 당시 제국주의 열강 중 하나인 프랑스를 끌어들이게 되었다. 강화산성, 갑곶진, 삼랑성, 초지진에서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프랑스군의 앞선 무기에 대항해 지략으로 맞서 결국 승리를 이끌어냈지만, 프랑스군은 철군하면서 강화에 있는 조선의 문화재들을 불태우거나 대거 약탈해갔다. 그 전리품에 포함된 것이 국보급 유물인 외규장각 도서들이다.
프랑스 이후 강화도에는 잇달아 미국과 일본의 신식 군함들이 들이닥쳐 통상을 빌미로 싸움을 걸었다. 프랑스와 미국의 신식무기에도 아랑곳 않고 투지를 불태운 조선은 일본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일본과 맺은 우리나라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강화도 연무당에서 체결된 것이다.
전쟁의 불길이 끊이지 않은 강화도의 해안에는 진, 보, 돈대, 포대들이 빼곡하다. 5개의 진, 7개의 보, 54개의 돈대, 8개의 포대는 모두 조선시대에 설치한 군사방어시설들이다.
분단 반세기로 인해 잘 보존된 자연환경
강화도가 역사의 섬이라면 서쪽의 교동도, 석모도, 볼음도는 자연의 섬들이다. 노을이 아름다운 석모도, 때 묻지 않은 교동도, 새들의 낙원 볼음도!
석모도에는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도량 중 하나인 보문사가 있고, 보문사를 감싸고 있는 낙가산에는 거대한 눈썹바위 아래 새겨진 마애석불좌상이 있다.
때 묻지 않은 교동도라고 하는 까닭은 교동도 북쪽 해상으로는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이 지나고, 섬을 관통해서는 민간인 출입통제선이 지나기 때문이다. 5,60년대로 시간이 멈춘 곳, 이곳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국토 분단의 현실에 대해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섬에 한번 들어갔다 하면 보름이나 지나야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서해 오지였던 볼음도. 요새는 카페리가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볼음도의 자랑거리는 청정무구한 자연경관이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기 때문에 새들의 낙원이기도 하다. 강화 전체에서 갯벌이 관찰할 수 있지만, 볼음도에서는 특이하게 경운기를 타고 끝도 없는 갯벌을 달려볼 수 있다.
4,5,6학년의 사회교과 학습을 돕는 알찬 길잡이
초등학교 4학년은 사회 교과에는 역사 유적과 문화재, 박물관 등을 알아보면서 역사 학습이 시작되는 시기다. 아이들은 상고시대부터 대한제국까지 대략적인 역사의 흐름을 자연스레 파악하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강화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상당히 일치한다. 그런 덕분에 강화도는 초등학생들이 매년 한두 번은 찾게 되는 체험학습지가 되고 있다.
이 책을 쓰신 세 분의 공저자는 모두 전현직 초등학교 교사이기 때문에 사회 교과와 관련된 강화의 핵심을 명쾌하게 짚어 준다. 뿐만 아니라, '○○의 모든 것'이라는 특별지면을 마련해 심화 ? 확장 학습이 되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이를 테면, 전등사와 보문사를 들러보고 궁금한 점은 '사찰의 모든 것'을 보면 되고, 철종 외가를 보고 한옥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면 '한옥의 모든 것'을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