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전소설의 재발견’ - 돌베개 千년의 우리소설 1차분 출간
‘한국 고전소설의 새로운 레퍼토리’ 구축!
고전은 수많은 책들과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진, 옛사람들의 경험과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보물창고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고전소설은 산문과 달리 우리 민족의 감수성과 상상력의 원형을 보여 준다는 문학적 가치는 물론이고,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역사와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 한 시대의 기록이자, 선조들의 삶과 사상, 경험과 지혜를 가장 생생하게 전해 주는 매개체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고전소설은 당대인들의 애환과 바람, 사회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등을 자연스럽게 반영한, 화석화된 역사가 아닌 삶의 기록으로서의 진짜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고전소설’이라고 하면 황당무계한 에피소드들이 얼기설기 엮여 있는, 그저 그런 옛날이야기라고만 생각해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주인공의 신비로운 출생, 성장 과정에서 겪는 고난, 영웅적 투쟁과 승리 등 그야말로 ‘뻔한’ 내용으로 점철된 『유충렬전』이나 『조웅전』 같은 작품에서 재미와 감동을 얻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시중에 나와 있는 적지 않은 고전소설 선집들이 이런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 비슷비슷한 작품들을 반복 수록하여 독자들에게 우리 고전소설의 레퍼토리가 매우 빈약하다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중고등학교 문학 수업 시간에 배우는 고전소설은 또 어떤가. 청소년들에게 고전소설은 주제와 시대적 배경, 등장인물의 성격 등을 낱낱이 해부하며 그 내용을 외우느라 ‘고전’(苦戰)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더욱이 일부에서는 입시 부담에 매여 있는 청소년들을 겨냥해, ‘꼭 읽어야 할’, ‘논술 필독서’ 같은 선정적인 제목을 내세우며 작품의 줄거리만을 요약한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 책들은 심미적 감흥에 이르게 하거나 어떤 문제의식을 환기하거나, 혹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거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청소년들을 고전소설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千년의 우리소설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천 년의 우리 소설’ 중에서 사상적 역사적 의의와 문학적 가치를 두루 갖춘 명작들을 엄선하여 소개함으로써, 고전소설은 모두 ‘뻔한 옛날이야기’라는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고 우리 고전소설의 진정한 정취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즉, 21세기 한국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한국 고전소설의 새로운 레퍼토리’를 구축하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이를 위해 흔히 고전소설의 한계로 거론되어 온, ‘천편일률적이다, 상투적 구성을 보인다, 단순한 권선징악적 결말로 끝난다, 선인과 악인의 판에 박힌 이분법적 대립으로 일관한다, 역사적 현실적 감각이 부족하다’는 지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작품들을 가능한 한 많이 소개하고자 한다. 1차분에서 「운영전」, 「심생전」, 「최척전」 같은 잘 알려진 명작들은 물론이고, 허균의 대표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남궁선생전」, 민족적 자존의식이 엿보이는 「왕수재」, 명청 교체기의 급변하는 정세를 짐작하게 하는 「강로전」 등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수작들을 새롭게 수록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千년의 우리소설은 총 16권을 출간할 계획이다. ‘기인과 협객’, ‘풍자와 웃음’, ‘꿈과 환상’ 등 흥미로운 제재들을 다룬 단편이나 중편 분량의 한문소설이 다수지만, 시리즈 후반에는 한국 고전소설을 대표하는 일부 장편소설과 한글소설도 수록할 예정이다.
정본의 신뢰성과 쉽고 정확한 번역의 어울림
정본을 바탕으로 한 신뢰성 있는 고전소설 선집
한국 고전소설에는 이본(異本)이 매우 많고, 같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이본에 따라 작품의 의미와 세부 내용이 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뿐 아니라 각각의 이본들은 필사(筆寫) 또는 가필(加筆)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를 다소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하나의 작품마다 주요 이본들을 찾아 꼼꼼히 서로 대비해 가며 시시비비를 가려 하나의 올바른 텍스트, 즉 정본(定本)을 만들어 내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한국 고전소설들은 대부분 정본을 만드는 작업을 생략한 채 번역, 출간되어 왔다. 특정 이본 하나를 현대어로 옮겨 놓은 수준에 머무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본 없이 이루어진 이 결과물들은 신뢰하기가 어렵다. 정본이 있어야 한글로 제대로 옮길 수 있고, 제대로 된 한글 번역이 있어야 비로소 영어나 기타 외국어로의 번역도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 고전소설을 세계에 소개하는 일도 정본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千년의 우리소설은 편역자 박희병 교수(서울대 국문과)가 6년의 노력 끝에 지난 2005년, 83편의 소설을 모아 펴낸 『한국 한문소설 교합구해(校合句解)』를 바탕으로 번역되었다. ‘교합’이란, 현재 남아 있는 모든 자료를 이본(異本)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을 비교 검토해서 하나의 표현이나 문장을 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구해’는 ‘교합’ 과정을 설명하거나 글자와 문장의 뜻을 해설하는 각주를 붙이고, 작품마다 해제를 달았다는 뜻이다. 이처럼 문장 하나, 단어 하나까지 치밀하게 분석하는 학문적 정밀성을 토대로 만들어진 정본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는 기존의 한국 고전소설 선집과는 완전히 차별화된다.
원문의 맛을 살린 쉽고 정확한 번역!
한국 고전소설, 특히 한문으로 쓰인 고전소설은 원문을 얼마나 쉽고 유려한 현대어로 옮길 수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작품의 가독성은 물론이고, 감동과 흥미가 배가될 수도 반감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문을 임의로 각색, 왜곡하거나 원문의 정확성을 손상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이 두 조건은 동시에 쫓아야 하는 두 마리의 토끼와 같은 것이다.
千년의 우리소설은 쉽고 정제된 우리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대전제와 원문의 의미를 정확히 옮겨야 한다는 또 다른 대전제, 번역 과정에서 종종 상충하는 이 두 가지 전제를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고전문학 전공자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모니터링을 시행하여 의견을 수렴하고, 어려운 한자어와 낯선 단어의 사용을 최대한 줄이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고전 문장의 맛과 멋을 최대한 살린 쉽고 정확한 번역을 통해 독자들에게 우리 고전소설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십분 전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