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웃음을 만나다!
『용재총화』를 관통하는 웃음 코드
『용재총화』의 이야기들 속에는 성현의 긍정적인 사고와 유머 감각이 녹아 있다. 그는 승지 벼슬에서 파직되어 두 명의 벗과 함께 금강산 유람을 떠났는데, 초라한 행색 때문에 역졸에게 무시를 당할 때조차 껄껄 웃으면서 그 상황을 즐겼다. 또 성현은 장난기가 많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벗에게 벌레가 담긴 편지를 보낸다거나 친구의 말을 훔치는 등 장난을 일삼았고, 사대부들이 서로를 골린 이야기나 백성들이 서로 골린 이야기를 많이 채집해 기록했다.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는 늘 ‘주위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다’는 말로 끝이 난다. 결국 장난의 목적은 다름 아닌 웃음이다. 『용재총화』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성현의 주위에는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간혹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웃음으로 시작해 웃음으로 끝난다.
『용재총화』를 통해, 우리는 조선 초기 우리나라 문화가 성대하게 꽃피던 시기, 선비들과 백성들이 무엇에 웃고 울었는지, 무슨 꿈을 꾸고 무슨 재미로 살았으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사랑을 했는지 소상히 알게 된다. 근엄하게 앉아 책만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던 선비들이 사실은 혀를 내두를 만큼 장난꾸러기였고, 예절과 규범에 갇혀 있을 것 같던 여성들 중에서도 그들의 욕구에 정직한 이가 있었다. 물론 범속한 이들이 근접할 수 없는 숭고한 절의와 용기를 보여주는 위인들도 많았고, 이들은 그 인품에 합당한 존경을 받았다. 백성들의 골계담은 주로 바보를 놀려주는 이야기거나 바보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웃음은 냉소적이지 않고 따뜻하며, 씁쓸하지 않고 유쾌하다. 귀신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마음을 담대하게 갖고 귀신을 대한다면 귀신에게 해를 입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당대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역사 이야기를 통해, 음식 하나, 글자 하나, 춤사위 하나에도 깃들여 있는 선인들의 지혜와 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구성
『용재총화』는 각 이야기에 대한 제목이 따로 없으며, 장을 나눈 기준도 뚜렷하지 않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이야기의 소재를 기준으로 일곱 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1장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2장은 역사책에 빠진 야사(野史)를, 3장에는 선비들의 일화를, 4장에는 영웅과 지사(志士)의 일화를, 5장에는 민중의 해학이 담긴 이야기를, 6장에는 귀신 이야기를, 7장에는 우리나라 역사와 풍속 이야기를 담았다.
[안생의 사랑]
안생은 아내가 죽은 후 홀로 살다가 신분이 천한 여종을 후처로 삼는다. 둘의 사이는 매우 좋았고 처가에서도 안생을 아껴 재물을 보태주기에 이른다.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다른 사위들이 안생을 시기해 여종의 주인에게 그를 모함하고 이에 재상은 여종을 잡아와 가둔다. 안생은 문지기에게 돈을 주며 몰래 아내와 만나지만 그 사실을 재상이 알게 되어 여종을 다른 이에게 시집보내려 하는데, 혼인식 전날 밤 여종은 목매어 자살한다. 이 이야기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아내의 제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안생의 눈앞에 아내가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꿈에서라도 아내를 한 번 보길 원했던 안생은 아내가 정말 나타나자 무서워하면서 도망친다. 아내를 사랑한 마음도 진심이고, 귀신을 무서워하는 마음도 진심이다.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와 권력 때문에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사랑이 얽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어우동]
어우동은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왕족과 결혼했다. 외모도 빼어나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독차지했을 법하다. 그러나 어우동은 만인이 부러워하는 삶에 만족하지 않고 그릇 만드는 공인(工人)과 사랑을 나눈다. 남편에게 불륜이 발각되어 쫓겨나자 자신과 뜻이 맞는 여종과 함께 집을 나와 자유롭게 애인을 구한다. 하룻밤 밀애의 상대를 구하기도 하고 부부처럼 지내는 애인도 만든다. 그러다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죄로 사형을 받게 된다. 사형 집행 날 어우동을 위로해주는 이는 오직 여종뿐이었다. 당시 한 기생이 수청을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를 맞자 “어우동은 행실이 문란하다고 벌을 주고, 나는 절개를 지켰다고 벌을 주니, 어찌 나라에서 이렇게 법을 다르게 적용하는가?”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양반 여성에게 절개를 가르치는 것이나 기생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것 모두 윤리나 도덕과 아무 관계없는 양반 남성의 이익을 위한 술책일 뿐이다. 비록 사대부 남성에 의해 재단된 기록이긴 하나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사용한 여성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기념비적인 일이다.
이 외에도 바보나 소경, 물정 모르는 승려, 어리석은 선비를 놀리는 내용이 많다. 바보 이야기에서 나오는 웃음은 독자가 그 바보보다 똑똑하다고 여기는 데서 기인한다. 또 지위가 낮은 사람이 지위가 높은 이를 속일 때 그 웃음은 증폭된다. 상급자는 권위를 내세우며 하급자를 억압하지만 실상은 하급자보다 아둔하고 탐욕스럽다는 인식이 상좌가 사승을 놀리는 이야기에 담겨 있다. 여색에 초연하다고 알려져 있는 승려는 실상 과부와 잠잘 생각만 하는 보통 남성일 뿐이고 점잖은 체하는 소경 점쟁이는 부인 몰래 미녀를 만날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이들의 허영심과 우리의 허영심이 과연 다를까? 속는 사람은 악인이 아니라 허세를 부리는 보통 사람이니, 바보 이야기의 다음 주인공은 우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성현의 이야기 속에는 도깨비와 귀신이 나오고 귀신을 쫓는 사람과 운명을 읽는 점쟁이가 등장한다. 귀신은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만, 사람은 귀신을 쫓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귀신의 짝사랑이 애달프게 그려진다. 담력이 큰 사람은 귀신을 내쫓고 담력이 약한 사람은 귀신에 들리거나 병에 걸린다. 결국 귀신과 사람은 함께 살 수 없다. 그러나 귀신도 한때 사람이었고 사람도 죽어서 귀신이 될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귀신과 사람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존재다. 사람들이 무서워하면서도 귀신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과 같은 듯 다른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아닐까.
또한 성현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나라의 문학, 음악, 미술, 풍속, 지리, 역사와 일본과 여진족의 풍속이 실렸다. 다방면에 걸친 성현의 깊은 지식과 날카로운 비평 감각이 돋보인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역사적으로 뛰어난 예술가와 예술 작품을 선택하고 그 장단점을 비평하는 데서 그의 상당한 내공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