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하는 중국이 전지구적인 권력구조를 바꿔 놓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가장 먼저 펼쳐 들어야 할 책
국가는 정치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단위이고, 정치는 권력관계에 의거한다. 국가의 진화 역시 권력관계를 떠나서 설명하기 힘들다. 중국에서 대국의 형성도 그 진화의 결과이며, 이는 권력의 내재적 속성과 관련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여기서 권력의 속성, 특히 확대나 집중의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이 책은 중국에서 통일제국이 등장하고 동아시아 질서가 형성되는 시기를 다룬다. 이 기간은 중국사에서 역사 초기부터 진한시대까지의 시절에 해당하며, 나무에 비유한다면, 중국이든 동아시아든 그 뿌리와 밑동이 형성된 가장 근본적인 시기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이 시기 역사는 중국 정치권력의 통합 과정이고, 한편으로 권력의 외연적 확대와 다른 한편으로 권력의 집중을 의미한다. 권력의 확대는 국가가 보유하는 권력자원, 무엇보다도 영토와 인구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요소들의 증가를 말하며, 권력의 집중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구축으로 나타난다. 중국에서 이는 관료제와 군현제로 대표된다. 정치권력의 외연적 확대와 집중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진행됐으며, 권력의 지역적 확대가 정점에 이른 진한 시기에는 중앙집권적 통치구조도 갖추어진다. 이 역사적인 권력 작용의 장대한 파노라마가 이 책이 담으려는 골자다.
아울러 이 책은 초기 국가권력이 등장하고 확대되는 과정이 이념적으로 어떻게 뒷받침되었는지, 좀 더 정확하게는 역사적 현실이 정치사상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세밀히 분석한다. 이를 위해 두 개의 장을 별도로 할애해, 유가ㆍ도가ㆍ법가ㆍ묵가 등 제자백가로 통칭되는 초기 정치사상의 문헌들을 보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해석해 낸다.
권력 작용의 메커니즘을 통해 본 중국, 대국의 형성사
제1부 대국화의 전개
첫 번째 장, 대국 형성의 메커니즘_책 전체의 분석틀을 제공한다. 특히 대국의 형성 과정을 이론적ㆍ실증적으로 설명한다. 먼저 권력의 양적 크기, 권력구성 요소들 사이의 균형에 대한 요구, 그에 상응하여 상정될 수 있는 국가의 최적 크기와 권력 확대의 메커니즘 등 권력의 작용 및 확대와 결부되는 이론적 문제들을 살펴본다. 이후 앞서 이론적으로 설명된 권력의 특징들을 초기 문헌과 자료들을 통해서 실증한다. 특히 소규모의 성읍국가의 존재, 권력통합의 전개, 영토의 확대와 그 한계 등에 주목한다. 마지막으로는 초기 정치체제의 역사적 형태로서 봉건제 그리고 국제질서로서 조공체제의 출현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설명한다.
두 번째 장, 대국의 역사적 형성_방법론적으로 기존 역사서들이 주로 시간적 변화에 주목할 뿐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공간적 측면에 초점을 둔다. 그리하여 고대사는 통일-분열-통일의 역사가 아니라, 작은 정치체들이 하나의 통일국가로 통합되는 과정이었음에 주목한다. 통합은 중국의 공간적 확대로 나타났는데, 춘추시대에는 과거 이적으로 간주되던 주변 국가들의 중원진출을 통해 그리고 전국시대에는 그 너머의 이민족 거주지역의 정복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외연적 확대에 상응하는 정치체제도 구축되었다. 그것은 주의 동성제후 분봉, 소국들의 병합, 영토국가의 성립, 군현의 설치와 관료제의 도입 등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구축을 의미한다. 진의 통일은 지속적인 권력 확대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세 번째 장, 대외팽창의 과정과 패턴_주변 민족들에 대한 공략과 영토적 팽창과정을 다룬다. 이것은 전국시대 북방의 국가들과 통일 후 진에 의해 전개되었지만, 전한 중반 무제에 의한 대대적인 정복사업으로 그 한계에 이르렀다. 여기서는 중앙아시아를 주무대로 했던 흉노匈奴, 중원 서쪽의 유목과 농경을 겸한 강족羌族, 여러 작은 소수민족 집단들이 거주하던 서남부와 남부의 파巴ㆍ촉蜀, 서남이西南夷, 무릉장사만武陵長沙蠻, 오령五嶺 이남의 남월南越과 동월東越, 동북쪽의 (고)조선(古)朝鮮, 그리고 서북쪽의 서역西域 등이 제국에 차례로 복속되거나 군현화되는 과정을 다룬다. 이때 그들의 저항과 제국에 의한 지배의 한계에 관해서도 주목한다. 광역에 대한 권력의 확대와 그것의 궁극적 종료는 일종의 다층적 지배구조와 함께 조공체제로 묘사되는 동아시아 질서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네 번째 장, 대외정책과 동아시아 국제질서_대국의 대외정책에 관해 다룬다. 먼저 특정 시점에서 구체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제기되었던 대외정책에 관한 논의들이 소개된다. 그것은 주로 융적戎狄ㆍ흉노匈ㆍ서남이西南夷ㆍ월越ㆍ강羌ㆍ선비鮮卑 등 주변 민족들에 대한 정책적 방안들이다. 이어 대외정책에 대한 개념상의 체계화가 시도되는데, 상이한 목표들과 수단들을 지배 정도와 비용의 관계에 따라 분류하고, 그들 사이에 다양한 조합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정복지역에 대한 상이한 지배형태인 변군邊郡ㆍ도道ㆍ부도위部都尉ㆍ속국도위屬國都尉ㆍ서역도호西域都護 등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제국의 지배 밖에 있으면서 단지 조공관계만 유지하는 방식, 즉 조공체제를 살펴본다. 특히 제국과 한반도 주변 국가들 사이에 가시화되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등장이 다루어진다.
제2부 대국화의 이념
다섯 번째 장, 대국화의 정치이론_정치권력의 형성과 통합 과정을 뒷받침하는 정치이론을 살펴본다. 특히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사상에 반영된 다양한 입장들이 검토된다. 주요 테마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자연상태와 국가의 기원, 둘째는 통합적 정치질서의 구상이다. 자연상태와 국가의 기원과 관련하여, 유가는 각기 문명적 낙후와 성인에 의한 계몽, 묵가는 무질서와 성인에 의한 조정, 법가는 갈등과 법ㆍ제도에 의한 해결, 도가는 평화와 무위의 정치를 강조했다. 한편 통합적 질서의 구상과 관련하여 유가는 봉건적 천하를 강조한다면, 법가는 패권적 천하에 기반을 둔다. 묵가는 전체적 사고가 강한 반면, 도가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자연적 천하를 지향한다. 통일제국 이후에는 통합적ㆍ절충적 입장이 두드러지나 점차 유가가 우위를 점한다.
여섯 번째 장, 대외질서 관념의 변천: 천하관과 화이구분_국내적 통합과 대외팽창 과정에서 나타나는 천하질서와 피아彼我에 관한 관념을 살펴본다. 그것은 크게 천하관天下觀과 화이구분華夷區分으로 나뉠 수 있는데, 각기 공간적ㆍ종족적 질서를 내포한다. 천하관과 관련해서는 천하의 공간적 확대에 주목하고, 특히 유가적 천하관을 대표하는 ‘보천지하溥天之下 막비왕토莫非王土’의 해석에 있어서 시기적 변화를 살펴본다. 화이구분과 관련해서는 공자와 그 이후 유가들의 이적관, [상서] ?순전?에 보이는 네 죄인의 추방에 대한 해석상의 변화, 그리고 무제 시기 [춘추번로]와 [사기]의 역사기술에 반영된 이적의 중화적 기원과 연계성에 관해 살펴본다. 이때 관련 개념들에 대한 해석상의 시기적 변화에 주목한다. 아울러 유가의 화이관이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종족적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일곱 번째 장, 천하의 지리적 구획과 크기_‘구주九州’ㆍ‘오복五服’ㆍ‘구복九服’ 등 초기 문헌에 나타나는 천하와 중국에 대한 지리적 관념체계를 다룬다. 구주는 하夏의 시조 우禹가 치수 이후 전국을 9개의 지방으로 구획했던 것에 기원한다. 오복과 구복은 중심부터 주변, 즉 왕과 제후 그리고 중원과 이민족 사이의 위계적 구조를 나타낸다. 구복은 천하의 크기와 구조에 있어서 오복이 크게 확장되고 세분화된 형태이다. 여기서는 특히 세 관념들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함으로써 천하와 중국(및 이민족)의 크기와 그 내부구조를 드러낸다. 그와 함께 그러한 관념들이 정치권력의 통합과 확대를 반영함과 더불어 대외정책상의 논거로 제기되는 점에도 주목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관념들이 후대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 규정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살펴본다.
제3부 대국의 권력구조
여덟 번째 장, 중앙권력_중앙권력 기구와 그 권력자원에 대해서 다룬다. 중앙의 권력기구에는 최고통치자로서 황제와 그 측근들, 승상과 관료기구, 군대 등이 해당된다. 대국의 통치에는 권력구성 요소들의 복합적 성격으로 인해 근본적인 갈등이 존재했다. 황제로의 권력집중은 외척이나 환관의 득세를 가져왔고, 승상 등 관료기구를 약화시켰다. 군대와 장수에 대한 통제의 요구와 군사적 전문성 사이에도 내재적 긴장이 있었다. 토지ㆍ농업ㆍ상업ㆍ재정 등은 권력의 사회경제적 기반이지만 이들을 둘러싼 정부와 사회세력들의 대립이 두드러졌다. 지역간의 차이는 상업적 이익을 확대하여 중농억상 정책을 무력화시켰다. 화폐는 대국경제의 관리에 유용했지만, 불법주조 문제뿐 아니라 자급자족적 농업경제와는 모순되는 면이 있었다.
아홉 번째 장, 지방권력과 행정_지방조직과 행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권력의 지속적인 통합 과정에서 이루어진 지방조직의 형성과 변화이다. 제국의 지방행정 단위인 ‘현’과 ‘군’은 춘추전국시대 진행된 권력의 통합과 집중의 산물로서 진秦에 의한 통일 이전에 이미 보편적으로 구축되었다. 두 번째는 군현화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봉건제후의 제거이다. 주로 전한前漢 시기 봉건제후의 거세를 위한 각종 정책들이 분석된다. 세 번째로 한의 지방구획과 지방행정이 다루어진다. 먼저 인구의 지리적 분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지리적 원근에 따른 군현적 지배의 차이를 밝힌다. 이어 군과 현의 행정책임자인 태수와 현령의 임면과 그들의 특징에 관해 살펴본다. 제국은 특히 지방정부의 문제해결 능력 제고와 지방권력에 대한 통제라는 상반된 요구에 직면했다.
열 번째 장, 중심과 주변_광역에 대한 지배에서 발생하는 부가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여기에는 크게 수도의 위치, 장성, 그리고 이민족에 대한 정책이 포함된다. 수도와 관련해서는 성읍국가ㆍ영토국가ㆍ통일국가에서 각기 상이하게 나타나는 특징들에 주목한다. 특히 수도의 중심성은 광역의 (통일)국가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이어 고대 중국의 두 정치경제적 중심지, 즉 관중關中의 서안 부근과 관동關東의 낙양 부근의 입지적 차이가 부각된다. 다음으로, 전국시대와 진한 시기에 축조된 장성을 다룬다. 장성은 단순히 농경과 유목의 구분에 입각한 방어가 아니라, 새로운 정복지의 방어와 추가적 공격을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광역에 대한 군현적 지배의 제한된 형태로서, 도道ㆍ속방屬邦ㆍ부도위部都尉 등 각종 이민족 정책들을 살펴본다.
열한 번째 장, 대국의 유산과 과제: 서구적 시각_서구에서의 관련 논의에 의거하여 중국의 대국적 규모에 따른 정치적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전통적 정치체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크기와 민주주의에 관한 서구의 담론을 정리한다. 전자와 관련해서 전통 중국의 대국적 속성과 그에 따른 정치 경제적 특징들, 이를테면 전제주의와 사회경제적 정체성停滯性 등이 강조된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폴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와 근대 사회계약론 등에 반영된 소국지향과 함께 근대에 규모가 커진 국민국가에서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제기된 연방제와 대의제 논의들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앞선 논의를 바탕으로 향후 중국 민주주의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본다.
연구의 구상과 방식
이 연구는 약 10여년에 걸친 산고의 결과다. 본래 현대 중국정치를 전공한 필자는 새로이 고문독해 능력과 더불어 고대사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아야 했으며, 연구방법에 있어서도 기존의 역사학과 다른 정치학적 분석틀을 구축해야 했다. 연구는 처음부터 일정한 가설이나 결론을 갖고 진행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해결책은 달리 있지 않았고, 독서와 생각을 지속하면서 그 결과를 정리하고 거듭 수정해 나가는 일뿐이었다. 사실 연구의 대부분이 진행된 상황에서야 비로소 다시 체계를 잡을 수 있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연구의 출발 역시 가능한 한 원전을 읽는 방식을 택했다. 원전에 대한 치중은 해석상 오류의 가능성도 있지만, 그에 반해 선입견이나 상반된 해석들로 인한 혼란을 줄일 수 있고, 가장 중요하게는 연구자의 목적에 따라 일관되고 때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수도 있는 장점이 있었다.
책 곳곳에 삽입된 도표와 지도들도 이렇게 섬세하고 치밀한 연구 기록의 결과들이다. 방대하게 흩어져 있던 역사 자료들을 맥락에 맞춰 체계적으로 도표화했으며, 당시 상황을 증거하는 지도들도 일일이 고증을 거쳐 다시 그리거나 재수록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