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경학의 밝은 빛, 심대윤
일찍이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근세의 학자로서 이익과 안정복은 역사학으로 빼어났고, 정약용은 정치학으로 뛰어났다. 그러나 심대윤은 적막한 가운데 외롭게 지켜, 명성이 파묻히게 되었다. … 그러나 공정하게 논평하건대 정밀한 뜻과 빼어난 해석이 여러 학설 가운데에서 빼어났으니 삼한(三韓?조선) 경학의 밝은 빛이라 하겠다.”
백운(白雲) 심대윤(沈大允, 1806~1872). 증조부의 당화로 폐족 상태를 전전했지만, 생존을 위해 수공업에 종사하고 약국 운영도 마다치 않으며, 학문 연구에 몰두한 19세기 사상가이다. 하지만 당대에 그의 학문은 수구적이고 폐쇄적인 정신 풍토에서 제빛을 보지 못해 사장되어야만 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의 글을 모아 영인한 [심대윤 전집](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원구원 刊, 2005)이 세상에 나온 것도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이 책 [백운집]은 한문 원전 그대로였던 [심대윤 전집]을 현대의 독자들이 읽기 쉽게 우리말로 번역하고, 그에 세세한 주석을 붙인 것이다. 19세기 은둔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사상가의 삶의 고뇌와 그 사상의 정수가 오늘날의 언어로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인간 심대윤의 재조명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되 공공성을 아우르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19세기는 역사의 대전환이 눈앞에 닥친 위기의 시공간이었다. 이 지점에서 백운 심대윤이란 학자는 자기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을 심각하게 고민한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는 생존 당시에도 세상에 매몰된 상태였으며, 사후로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이렇게 된 요인은 바로 그 자신의 사상에 있었다.
그의 사상체계는 한마디로 ‘이(利)’에 핵심이 있었다. 도의 근본은 ‘이’에 있다고 보았으니 ‘이’를 욕구하는 태도가 인간의 본성임을 간파하고 긍정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은 인욕을 타기하고 ‘이’를 부정했는데, 그는 인간으로서 욕망이 없으면 목석이 아니냐고 공박하면서 “인민이 재부를 욕구하는 것은 천성이다. 사람이 하늘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오래전부터다.”고 부르짖었다. 물론 인간이 사리와 탐욕을 마구 부리도록 방임해 두자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공(公)’의 개념이다. 어디까지나 사람들과 더불어 이익을 누리는 여인동리(與人同利)의 방법을 강구하여 이를 지공지도(至公之道)라고 주장한 것이다. 공리주의, 심대윤 사상의 실천적 목적지는 바로 ‘복리’에 있었다. 그가 말년에 쓴 주저가 다름 아닌 [복리전서(福利全書)]였다.
―심대윤의 학문과 학문하는 자세
심대윤은 경전을 통해 학문에 입문하고, 이를 체득한 다음 제자백가나 음양(陰陽), 술수(術數) 같은 것을 공부하였다. 그는 독학으로 학문에 나아갔으며, 10대 중반에 사서삼경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학문적인 성취가 없자 20년 동안 경전 공부를 작파하였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학문적 논지를 세련되게 하지 못한 단점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유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이점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학문 방법은 색다르다. 그는 [춘추(春秋)]를 현실 토대 위에서 독법하는 방법을 체득한 다음, 제자서(諸子書)와 기타 서적들을 섭렵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경전을 이해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즉, 학문의 과정과 방법이 자신의 현실 처지와 관련이 깊다. 자신의 역사적 안목과 삶의 체험을 경학 저술에 접목시키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동사(東史)]와 [전사(全史)]를 집필한 것이라든가, 당대 현실에 바탕을 둔 경학 해석 등도 모두 이러한 학문관의 소산이다. 그는 30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경전 공부에 몰입하였고, 그 뒤 거의 수십 년간이나 경전의 주석 작업에 매달렸다. 그의 학문적 좌표가 곧 경전의 올바른 이해였음을 이러한 작업에서 알 수 있다. 그의 다양한 독서 경험과 역사서에 대한 깊은 이해나 독법도, 따지고 보면 자신이 목표로 하였던 올바른 경전의 해석을 위한 수단이었다.
사물의 실리를 통하여 실득(實得)을 탐구하는 그의 학문 자세가 곧 그가 평생 지향했던 학문 방법이었다. 이러한 학문자세는 장구(章句)에 얽매어 해석하는 정주(程朱)의 학문과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당시 학자들의 학문풍토와 그 방향을 달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성취한 경학 세계 또한 당시 학자들의 경전 해석과 그 궤를 달리한다. 그가 실(實)을 바탕에 깔고 경학으로 현실에 대응하려고 한 자체가 이미 주자의 사유와 그 담론을 전혀 달리한다. 그는 현실 토대에서 벗어나 관념적으로 이해한 정주(程朱)적 학문 태도를 부정하고 실리와 실득에 바탕을 둔 학문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특징은 가학적인 학통과도 약간의 관련성이 있는데, 그의 증조부의 형이었던 심육(沈?)이 조선 양명학(陽明學)의 개조라고 불리는 정제두(鄭齊斗)의 수제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생을 걸었던 경학 저술은 양적인 면에서는 물론이며, 질적인 면에서도 19세기 경학사의 한 획을 긋는 업적이다.
[백운집]의 특징과 구성
이번에 번역해 펴내는 [백운집]은 심대윤이 30대 시절부터 지은 시문(詩文)을 엮은 것으로, 이 시기는 그의 경학 관련 저술 중 상당수가 편찬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본다.
첫째, 소외된 삶의 기록으로서의 의미이다. 혹독한 당화를 입어 처형을 당하고 변방에 버려진 폐족의 후예로 그는 태어났다. 이런 처지에서 고난과 역경에 좌절하지 않고 살아남아 인간의 자존을 견결히 지키면서 학문에 정진한 자의 독백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가족사의 처절한 비극이 담긴 ?남정록(南征錄)?, 생계를 위해 공방을 운영했던 체험기에 해당하는 ?치목반기(治木槃記)?는 특히 감명 깊은 작품이다.
둘째, 사상을 논리적으로 개진한 측면이다. 그에게 경학 연구가 비판 사상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라면, 산문 짓기는 자신의 주의 주장을 설명하고 선전하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심대윤 사상의 체계적인 진술, 이론의 정수는 경학 저술보다 산문 작품에서 만나게 된다.
셋째, 고문사(古文辭)에 힘을 쓴 측면이다. 그의 작품 목차를 살펴보면 의작(擬作)·개작(改作) 및 제후(題後)라고 붙여진 제목이 허다히 눈에 띈다. 당송대의 명편들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전국책(戰國策)],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 고문사가 주 대상으로 잡혀 있다. 흉내 내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비판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고문사를 기본으로 학습하면서 묵수하지 않고 자신의 안목과 기량으로 바꾸고 고치고 주제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장은 양한(兩漢)으로 곧장 달려서 당송 이하로는 오직 한유(韓愈) 이외에는 귀의할 곳이 없다고 여겼다.”(鄭萬朝, ?近代文章家略敍?)는 지적을 받은 바도 있었다. 그의 경학 담론이 정주의 정통적인 해석을 넘어서 경전의 원문으로 돌아가 독자적으로 해석해 냈던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백운 산문은 개성적으로 독이(獨異)한 경지를 추구했다.
그의 시문을 전하는 책자로 현재 파악된 것은 5종―[백운문초(白雲文抄)](서울대 규장각 소장), [한중수필(閒中隨筆)](연세대 도서관 소장), [백운집(白雲集)](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백운집](영남대 동빈문고 소장), [백운유초(白雲遺草)](개인 소장)―이다. 모두 필사본으로 체제를 갖춘 상태가 아니기에, 이번에 펴내는 [백운집]은 전체를 통괄하여 전통적인 문집 체제로 편성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번역의 저본은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심대윤 전집](전3책, 2000) 중, 제1책에 수록된 [백운문초]를 기본 텍스트로 삼고, 여러 이본들을 참조했다.
또한 부록으로 심대윤의 제자인 정인표(鄭寅杓)가 찬한 ?동구선생서술(東邱先生敍述)?과 ?송오선생사략(松塢先生事略)?(심대윤의 수제자로 인정받았던 정기하(鄭基夏)에 대한 기록)을 수록했다. 아울러 책의 말미에 ?백운 심대윤 선생 연보?를 수록해 그의 생애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