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차(茶) 문화의 시작과 끝, 승려의 차 문화
이 책은 ‘한국의 차 문화 천년’ 시리즈의 일곱 번째 권으로,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약 천백여 년 동안 승려들이 기록한 차 문화 관련 글을 정리·번역한 것이다. 한국의 차 문화는 불교와 함께 성쇠를 같이했으며, 사찰은 그 맥을 잇는 장소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차를 연구한 모로오카(諸岡存)와 이에이리(家入一雄)는 한국의 차 문화가 일본이나 중국처럼 민간 문화로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를 조선의 물 때문이라고 말했다.(〈朝鮮の茶と禪〉)
“좋은 물이 귀한 중국에서는 차가 국민 보건의 측면에서 절대적인 필수품이었지만, 수질이 좋은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이를테면 대동강 물도 평양 근방의 상류는 특히 깨끗해서 수돗물보다 훨씬 좋다. 세균 등이 적을 뿐만 아니라 찻물에 알맞고 빨래에는 더욱 알맞다. 조선인이 흰옷을 즐겨 입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왕실에서 음용된 것을 제외하면 그 명맥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은 사찰에서 승려들이 향유한 차 문화였다.”〈한국의 차 문화 천년 6-근현대의 차 문화〉 참조
차 문화를 향유한 승려들이 남긴 시문과 행적은 현재 일부를 제외하곤 일반에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한국의 차 문화 천년〉 시리즈는 조선후기(1, 2권), 삼국시대·고려(3권), 조선초기(4권), 조선중기(5권), 근현대(6권)까지의 시대별 고찰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7권으로 ‘승려의 차 문화’를 따로 엮었다.
이 책에 수록한 인물은 신라의 교각(喬覺)으로부터 고려의 의천(義天), 조선의 기화(己和), 보우(普雨), 휴정(休靜), 약탄(若坦), 각안(覺岸), 근대승 정호(鼎鎬) 등 모두 57인에 이른다. 이중에서 고려의 승려로는 혜심과 충지, 조선의 승려로는 보우·각안·보정 등이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특히 보정은 80여 편의 차시(茶詩)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혜장(惠藏)과 의순(意恂: 법호 초의草衣)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함께 〈한국의 차 문화 천년〉 시리즈의 조선후기 편(1, 2권)에 미리 수록했으므로 여기서는 제외했다.
◎ 구도(求道)의 한 방편, 차(茶)를 마시는 승려들
승려의 시나 게송(偈頌), 일화를 보면 늘 차를 마시는 장면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중국 당나라의 선승(禪僧) 조주(趙州)가 ‘끽다거’(喫茶去)라고 한 일화이다. 조주는 늘 가르침을 청하는 제자들에게 “차나 한잔 마시게”(喫茶去)라고 했다 한다. 승려들은 차를 마시는 행위를 선(禪)의 한 방편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많은 승려들의 시에 차를 마시는 이야기가 있고, 특히 조주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고려의 승려인 무의자(無衣子) 혜심이 쓴 『차샘』(茶泉)이라는 시를 보면,
묵은 이끼 속으로 솔뿌리 뻗고
돌구멍엔 시원한 샘물 솟누나.
호쾌한 방편을 얻기 어려워
조주(趙州)의 선(禪)을 몸소 잡아 보노라.
라고 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조주의 선 즉 ‘차’를 달여 마시노라고 하였다.
또 다른 고려의 승려 경한(景閑)의 시 『가장 중요한 의리는』을 보면 조주 선사의 화두(話頭)를 시의 주요 소재로 삼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의리는
이글거리는 화로에 눈꽃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
이러한 가운데 차를 내오는 사람이 있다면
유나(維那)가 하필 한 방망이만 내리치겠는가?
그럼에도 차를 내오려는 사람이 있는가?
나오너라! 나오너라!
승려는 차 마시는 행위뿐 아니라 차나무를 경작하면서도 그 속에서 불법의 묘를 깨달았다. 다음의 시가 그것이다.
차나무는 아무도 부른 사람 없건만
보살들이 찾아와서 산차(山茶)를 따네.
초목은 터럭 하나 움직이지 않지만
본체와 작용이 당당히 어긋나지 않네 _혜근,『차를 따며』
이처럼 구도(求道)의 한 방편으로서 차 문화는 불가에서 그 맥을 이어 왔으며, 현재도 여전히 차 문화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 불교 의식으로서의 차(茶) 문화
우리는 흔히 명절 아침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茶禮)라고 말한다. 국어사전에 ‘신세다례’(新歲茶禮)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새해에 지내는 차례를 의미한다. 그러니 원래 차례는 ‘다례’라고 읽는 게 맞다. 그렇다면 차례는 지금처럼 갖가지 음식을 조상에게 올리는 성대한 예식이 아닌, 어쩌면 차 한 잔 올리는 조촐한 예식이었는지 모르겠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중국 사신을 대접하던 상(床)을 다례상이라고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국 사신이 들어왔을 때 모두 “행다례”(行茶禮)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조선 시대의 승려 각안의 시『다가』(茶歌)를 보면, “공자의 사당에 잔을 올려 참신(參神)하고, 석가의 법당에 정갈하게 공양하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유불(儒彿)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에게 차(茶)는 의식의 하나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승려 기화는 진산(珍山) 스님의 영전에 아래와 같은 게송을 지어 올렸다.
한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고
한 조각 마음은 한 잔의 차에 담겼네.
부디 이 차 한 잔 맛보소서
맛보시면 무량의 즐거움 생길지니.
불가에서는 음력 3월 3일에 해당하는 삼짇날에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린다. 삼국유사 경덕왕(景德王) 충담사 표훈대덕조(忠談師表訓大德條)에는 승려 충담(忠談)이 해마다 삼짇날과 중굿날(重九日. 음력 9월 9일)에 경주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께 차를 달여 공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불교와 차 문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일본인 모리 다메조(森爲三, 1884~1962)의 기록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 보림사, 다보사, 백양사, 송광사 등 전라도 지역 사찰에 다수의 차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백련사와 보림사에는 차밭이 남아 있다.
◎ 완성된 차의 품격, 초의의 차(茶)
각안의 시 중에 『초의차』라는 것이 있는데 그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비 막 갠 곡우 날 / 펴지지 않은 연록빛 찻싹을
솥에 살짝 덖어 내어 / 밀실에서 잘 말리네.
측백나무 틀로 모나거나 둥글게 찍어 내어 / 죽순 껍질로 포장하네.
바깥바람 들지 않게 단단히 간수하니 / 찻잔 가득 차 향기 감도네.
위 시는 초의 선사가 입적한 뒤 그가 만든 차를 간직해 두었다가 달여 마시며 지은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초의차’는 덖고 말리고 포장하는 방법에 있어 하나의 완성된 품격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초의 선사의 이름이 붙은 고유한 차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책 마지막 근현대의 승려 정호의『옥보대 아래 다풍이 크게 무너지다』를 보면, 초의 선사의 『동다송』을 인용하여 다풍(茶風)이 크게 무너졌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조선의 차 문화는 ‘초의’에 와서 하나의 정점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 차는 달리 약재를 구하기 힘든 산속 암자의 승려들에게 좋은 약이었다. 각안의『다약설』(茶藥說) 등 여러 승려의 기록을 보면 차를 약으로 복용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기관지가 안 좋거나 이질에 걸렸을 때 차를 달여 먹어 효험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긴긴 밤 수행을 하며 잠을 쫓기 위해 차를 마시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