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말한다
격려로 가득한 자유분방한 철학적 성격 분석, 삶에 위안을 주는 철학 산책
유머와 통찰력으로 가득 찬 철학적 연애소설로 유명한 젊은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철학사 속에서 일상적인 삶의 문제를 다룬 가장 탁월한 여섯 명의 정신에 눈길을 돌린다. 그리하여 돈의 결핍, 사랑의 고통, 부당한 대우, 불안, 실패에 대한 공포와 순응에의 압력 등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에 대해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의 처방전이 소개된다.
15세기 전, 로마의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임박한 사형 실행을 앞두고 멋진 생각에 마주쳤다. 그는 자신의 특수한 상황을 위로하는 한 권의 책을 침착하게 써내려간다. 그가 쓴 『철학의 위안』이라 이름 붙여진 그 책은 그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고전이 되었다. 이제 그 고전의 이름을 이어받아 알랭 드 보통이 내놓은 포스트모던한 글쓰기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원제 『철학의 위안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은 그 발랄함과 위트로 명백하게 보에티우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재기 넘치는 철학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우리네 삶을 바꾸고, 삶에 필요한 위안을 엿듣기 위해 유명한 철학자들의 삶과 저작을 통해 그들과의 면담을 요청한다. 그들은 때때로 난해하지만 삶의 고난과 좌절에 대처하는 실제적인 조언을 주었던 철학자들이다. 알랭 드 보통은 느긋한 사색을 통해 소크라테스로부터 니체까지 철학의 실마리를 꼼꼼하게, 경박함 없이 세련되며, 허세 없이 지적으로 적어나간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가 인기 없음보다 더 위로가 되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어떻게 증명했는가를 알랭 드 보통은 친절하고 유능하게 안내한다. 에피쿠로스는 가진 돈이 없는데 대해 적절한 위로를 건넨다. 세네카는 직업의 상실 등 좌절에 조언을 제공한다. 성적 불능, 지적 차별 등 부당한 평가에 대해서는 몽테뉴의 위로가 주어진다.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로는 쇼펜하우어의 생에서 찾아진다. 그리고 니체는 질병과도 같은 고독에 대해 철저히 상담해 준다.
이 책은 유용한 철학 입문서이며 재미나고 그만큼 박식하다. 독자들이 철학적 단상들에 무거워하지 않도록 기발한 그림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것들은 저자의 개인적 일화들과 매력 있는 고백적 언어로 한층 발효된다. 이 책은 진짜 위로가 무언가를 보여준다. 살가운, 상쾌한, 참으로 따뜻한 알랭 드 보통의 언어는 철학의 대중화라는 불가능해 보였던 작업을 이뤄낸 것처럼 보인다. 유쾌하게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Don't worry, Be happy”
어제까지 실연의 상심에 삶을 비관하던 베르테르가 다시 삶의 기쁨과 또 다른 관계를 희망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독특한 철학 입문서이며, 당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 자기 도움에의 흥미 있는 길잡이이자 외롭고 궁핍한 영혼을 위한 진짜 치킨 스프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은 뒤에 당신은 모든 어려운 철학책들을 책장에서 치우게 될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에 대한 해외 서평
From Amazon.com
“그건 바로 상식이지.”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어려운 책을 넘겨보다가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 때 우리가 하는 말이라고. 그렇다. 심원한 생각들은 아이들의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다. 알랭 드 보통은 느긋한 사색을 통해 우리들이 이해를 접어두었던 소크라테스로부터 니체까지 철학의 실마리를 꼼꼼하게 적어나간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재미있다. 알랭 드 보통이 1997년에 발표한 『프루스트는 어떻게 당신의 삶을 바꿨나』는 지난 시대 기념비적인 사유의 대가를 탐험한 새로운 방향의 문학비평서였다. 그는 이번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부터 달아나, 그 길 밖으로 나간 위대한 ‘생각쟁이’들을 추적한다.
……젠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칸트가 말하는 사랑에 대한 조언은 정작 사랑에 있어서는 영락없는 재앙이라고. 알랭 드 보통은 몽테뉴로부터 부당한 평가에 대한 위로를 전해 듣고, 쇼펜하우어의 글에서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로를 찾는다.
보통 사치에 대한 탐닉과 관련되어 언급되는 에피쿠로스는 가진 돈이 없는 것에 대한 위로를 전해준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심리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물질 차원에서만 좇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음을 정리하는 대신 유혹하는 물건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친구의 조언 대신 캐시미어로 만든 카디건을 구입하는 것이다. ……영혼을 위한 주술사가 되기 전에 알랭 드 보통은 제1급의 소설가였다. 그리고 그 점은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From Kirkus Reviews
알랭 드 보통은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를 방문한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가 인기 없음보다 더 위로가 되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어떻게 증명했는가를 알랭 드 보통은 친절하고 유능하게 안내한다.
그는 충분한 돈이 없는 것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해 에피쿠로스의 조언을 경청한다. 또한 위대한 에세이스트는 무기력, 허영, 그리고 몸의 부실함을 위무하고 기운을 복돋아준다. 몽테뉴는 송곳눈과 톱으로 거짓을 뚫고 삶을 직관했다. .
보르도로부터 온 신사는 우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선언한다. 이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왜 사람들이 잘못된 파트너와 사랑에 빠지는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짝의 선택은 무의식적으로 우량의 자손을 얻으려는 행위라고. 그렇다면 당신의 불운한 결혼은 완전히 논리적인 것이 된다.
이 책은 진짜 위로가 무언가를 보여준다. 살가운, 상쾌한, 참으로 따뜻한 알랭 드 보통의 언어는 철학의 대중화라는 불가능해 보였던 작업을 이뤄낸 것처럼 보인다.
책 속으로
인기 없음, 빈곤, 좌절, 부당함, 실연, 고통에 대한 허브 치료와도 같은 유쾌한 위안
우리가 철학도가 아닌 이상, 철학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각자의 평범하고 열등함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도움의 말이다. 그러한 철학의 임무를 잊지 않으면서 알랭 드 보통은 6명의 현자를 불러내 그들이 삶과 사유를 어떻게 일치시키려 했는가를 살핀다. 그들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는 철학사에서 독특하고도 예외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들로서 서로의 글과 전기에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일상의 문제를 철학의 주제로 삼아 삶의 철학을 전개한 인물들이다.
1장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 -그대가 아는 것들은 그게 전부인가
슬프게도 우리는 ……모든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러다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말이나 빈정거리는 의견이라도 들으면 금방 당황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위안이 되는 질문을 던지는데 실패하고 만다. 도대체 무슨 근거에서 이런 혹평을 할까? 우리는 진솔하고 치열하게 사고하는 비평가의 반대와 그저 염세와 질투심에서 행동하는 비평가의 반대를 똑같은 비중으로 취급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끝까지 이성적일 수 있다는 신념, 즉 비난에 직면할 때 흔히 보이기 쉬운 병적인 흥분이 아닌 확신을 부여했다. 소크라테스의 상징이 되다시피 한 그 주제는 바로 철학을 통해서 현명해지자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에는 지적 회의를 품어보자는 초대장이 깔려 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은 관행이나 관념을 따르려는 무기력한 경향에 맞서 균형을 취하게 하는 힘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다수의 미움을 사는 것과 옳은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감상적인 믿음을 조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천재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기 십상이다. 우리가 만약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잘못되었다고 비난받을 때에 무조건 자신이 옳다는 식으로 고집을 부린다면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삶에서 거부의 정당한 이유보다 단순히 거부하는 자세만을 보려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 존재란 살다보면 잘못된 길로 접어들 때도 있기 때문에 간혹 자연스레 자신의 관점에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진실과 인기 없음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판단력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요소를 하나 덧붙였다. 다름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삶의 방식이 어떤 반대에 봉착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그것이 그릇된 것이라고 확신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2장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 -행복한 삶을 위해서 나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인류는 영구히 무의미하고 무익한 고통의 희생자가 된다. 물건의 구입이나 순수한 쾌락의 증대에 어떤 제한이 있는지를 모르는 탓에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할 불안으로 안달복달하면서…….
쾌락주의의 핵심에는, '무엇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까?'라는 질문 못지않게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이 들어 있다. 우리는 그 답을 제출하는 데 언제나 서툴다.
에피쿠로스처럼 진솔하게 유쾌한 삶의 방식에 대한 관심을 털어놓았던 철학자는 거의 없었다. 흔히 쾌락주의자라 불리는 에피쿠로스의 시각에서 보면, 철학의 임무는 우리 각자가 원인 모를 우울증과 욕망의 충동을 해석하도록 돕고,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그릇된 계획을 세우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철학은 우리의 고통에 대해 직관적인 진단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보다 훌륭한 치유와 진정한 행복으로 안내할 것이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또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위해서 우리는 값비싼 물건을 갈망하게 되는 순간에 그것을 사는 것이 옳은지를 자신에게 엄숙히 물어봐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생의 성공을 향한 인간의 모험이 제아무리 인상적이라 해도, 그 성취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은 그들이 불러일으킨 쾌락에 따르는 것이라고. 사치와 유행으로 채워진 광고 이미지 속의 행복 구매 리스트를 자신만의 행복 리스트로 채워보는 것은 어떨까.
3장 좌절에 대한 위안 -이게 진짜 내가 두려워했던 그 상황이란 말인가
격노란 우리 앞에 닥친 좌절이 결코 삶의 계약서에는 씌어져 있지 않다는 확신에서 야기된다. 그 확신의 (결과야 제아무리 비극적일지라도) 낙천적인 기원을 따져보면 거의 희극 같지만 말이다.
또 하나의 상징적인 철학자의 죽음을 맞이한 세네카. 그는 자신의 희망들이 갑작스럽게 현실과 극단적인 갈등을 빚을 때도 절대로 의지박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현실의 위협적인 강요에도 위엄으로 맞섰던 것이다. 다른 스토아 사상가들과 더불어 세네카는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철학적'이라는 단어와 재앙에 대한 냉정하고 중용적인 영속적 이미지를 창조해냈다. 세네카는 처음부터 ‘철학’이란 것에 대해 인간이 각자의 희망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는 일을 지원하는 수양으로 인식했다. 억울한 그의 죽음의 현장에서 울부짖는 동료들에게 세네카가 보인 반응은, '철학'을 어디 내팽개쳤느냐는 꾸짖음과 이어 곧 들이닥칠 불운에 맞서겠다는 결심이 어디 갔느냐는 힐난이었다.
세네카의 저작 전편을 살피다보면, 인간은 평소에 잘 준비하고 또 잘 이해하는 좌절에 봉착해서는 잘 참아 넘기는 반면에 기대를 하지 않았거나 예상하지 않은 좌절을 겪으면 엄청난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문구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세계의 진정한 모습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좌절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런 좌절감에 따라붙는 위험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해줘야 하지 않을까. 철학의 임무란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딪혀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지 않을까.
좌절에 봉착할 때 우리가 얼마나 서투르게 반응하느냐는 우리가 어떤 것을 정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단적으로 결정된다. 인간은 스스로가 예상치 않았던 것에 의해서 가장 큰 상처를 받기 때문에 우리는 늘 마음속에 재앙을 당할 가능성을 품고 있어야 한다고 세네카는 제안했다. “만약 자네가 모든 근심을 날려버리기를 원한다면, 자네가 두려워하고 있는 그 일들이 분명히 일어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게나”라고.
4장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 -지식이란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스스로 경험했고,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했던 병을 떠올리고, 또 자신의 처지를 바꿔놓은 사소한 것들을 돌이켜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경험을 통해 스스로에게 미래의 변화를 준비하게 하고 자신의 처지를 정밀 검사한다. 심지어 카이사르의 삶까지도 우리 자신의 삶보다 더 모범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황제의 것이든 서민의 것이든, 삶이란 그 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철학이 강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화이다. “우리 인간의 괴로움 중에서 가장 세련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존재를 경멸하는 것이다.” 이어 몽테뉴는 몸을 가진 인간 존재에게 최고의 위로의 말을 건넨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용납 못해 안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복잡다단한 육체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기를 그만두고 그것을 그렇게 무서워할 것도 없고 그렇게 굴욕적이지도 않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
몽테뉴는 진리와 선과 미를 결정하고 야만과 문명화를 구분하는 방식을 수정하고자 했다. 자신이 사는 나라, 자신의 사회 구조, 자신의 습관 체계 등이 많은 미덕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미덕으로 받아지는 것들이 자신에게 익숙한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어서는 안 되며 다른 관습들이 우리에게 낯설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결점으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국적과 친숙함, 권위는 선(善)을 결정하는 기준으로는 불합리하다.
5장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 -사랑이 삶을 지배하는 이유
이 세상엔 타고난 잘못이 딱 하나 있다. 우리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관념이 바로 그것이다……. 이 타고난 잘못을 우리가 고집하는 한…… 이 세상은 모순으로 꽉 찬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위대한 일에서든 아니면 하찮은 일에서든 이 세상과 삶은 행복한 존재를 지원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그리 대단찮은 것이라고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섬세하고도 오만한 사고는 크나큰 불편함과 충고를 건네준다. ‘생에 대한 의지’의 논리를 기술하는 그의 염세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를 위안하는가.
생의 목적으로 많은 이들이 행복과 사랑을 말한다.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는 무의미한 전력투구라 말한다. 사랑이란 것은 성적 관심은 별도로 하더라도, 혐오스럽고, 경멸할만하고, 심지어 상극으로까지 보이는 상대에게 자신을 맡기게 만든다. 이 때 종(種)의 의지는 개인의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신과 상반되는 특질들에 눈을 감아버리고, 모든 것을 그릇되게 판단하고, 자신의 열정의 대상과 자신을 영원히 묶어버린다. 그런 환상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그 환상은 종족 유지라는 종의 의지가 다 충족되고 나면 금방 사라지고 이제 평생을 혐오하면서 살아야 할 파트너만 남게 된다. 바로 여기에 이성적이고 탁월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종종 잔소리가 심하고 악마 같기도 한 여자들과 사는 이유,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도 왜 자신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 이유는 그 남자가 종국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그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제3자(아기)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방해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행복이란 생전에 꼭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란 확고한 가정에서 행복 사냥에 나서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늘 좌절하기만 하는 희망과 그로 인한 불만이 비롯되는 것이다. 적절한 충고와 가르침으로, 젊은이들의 마음에서 이 세상이 그들에게 내놓을 게 아주 많다는 식의 그릇된 관념을 털어 낼 수만 있다면 그들은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바로 쇼펜하우어가 한 일이 그것이다.
6장 곤경에 대한 위안 -피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아픔을 참고 감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조화처럼 달콤하고 거칠고 예리하고 무던하고 부드럽고 떠들썩한 다양한 음색뿐만 아니라 부조화로도 구성된다. 만약에 어느 음악가가 한 음색만을 좋아한다면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그 음악가는 모든 음색을 활용하여 조화를 일궈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역시 삶을 구성하는 선과 악을 가지고 그렇게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걸리는 병중에서 가장 나쁜 병은 사람들이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방식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치유로 보이는 것이 결국에는 그 치유의 대상이 되었던 병보다 더 독한 무엇인가를 낳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으레 즉각적으로 효과를 나타내는 수단들, 즉 마취와 도취, 도피와 위안들을 치유책으로 여긴다. 여기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고통을 즉각적으로 진정시키는 방법들은 그 고통을 낳은 불만을 악화시키는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비범한 인간 니체는 그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그리고 삶의 불행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보다는 전체인류의 운명을 돌아보며 뭔가를 아는 사람으로 행동하고자 했다. 그러니 고통은 그 자신이 숭고한 존재로 오르기 위한 에너지원이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고통에게 단 한 시간이라도 육신에 머물 기회를 주지 않으려 하며, 장래 예상 가능한 고민들을 사전에 예방하고 막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고통과 불쾌감을 악마적이고 혐오스럽고 전멸시켜 마땅한 것으로, 더 나아가 존재의 허물로 규정한다. 이때 인간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위안으로서의 종교이다. 알코올과 기독교라는 마취제가 그런 것들이다. 니체는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은 인간의 행복에 대해 아는 것이 참으로 적다고 일갈한다. 그 이유는 행복과 불행이란 함께 성장하는 자매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인간은 가능하다면 고통을 물리치기를 원하지만 실재로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고통을 증폭시키고 그 전보다 더 악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니체는 인생이란 즐기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더 그것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삶의 아름다운 면을 얻기를 포기하고 금욕을 실천하라고 말한다. 열정과 욕망이 지닌 어리석음과 그 어리석음에서 연유하는 불쾌한 결과를 피할 목적으로 그것들을 파괴하는 것이 오늘날의 문화라고 한다면, 니체에게는 그것이 그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였다. 이에 니체의 의지 가득한 삶을 읽고서 우리는 적잖이 위로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