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사유, 상상과 표현을 빼고 나면 인간이 무엇이겠는가?”
― 우리 시대 실천적 지성 도정일의 ‘책 읽는 사회’ ‘생각하는 사회’ 만들기 프로젝트
괴테의 어머니는 밤마다 일곱 살짜리 아들과 함께 하늘의 별들 사이에 이야기의 길을 만들고 이야기로 아들을 키운 사람이다. 생각해보니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천지만물 사이에 이야기의 길을 열고 있는 사람들은 이 땅에도 많다. 이 산문집은 그분들에게 보내드리는 내 마음의 인사다. _서문에서
“당신은 지구에 왜 왔는가?”
지금의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은 2001년 6월 ‘도서관 콘텐츠 확충과 책 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범했다. 시민단체의 명칭에서 드러나듯 이 운동은 두 가지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하나는 전국 공공도서관의 연간 도서 구입비를 대폭 증가시켜 도서관의 내실을 탄탄하게 다지는 일이고 또하나는 ‘책 읽는 사람’ ‘책 읽는 가족’ ‘책 읽는 사회’의 문화를 가꾸어가는 일이다. 도서관을 짓고, 도서관에 충분한 장서를 공급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책 읽는 습관을 형성하도록 하고 동시에 그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은 한 사회의 물질적·정신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국가와 사회와 나서서 하지 못하는 일을 비영리 민간단체가 (“도중에 엎어지지 않고”) 올해로 13년째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산문집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는 한국 사회에 ‘도서관운동’ ‘책읽는사회만들기운동’이 필요한 이유와, 그 운동의 맥락과 진행 상황, 소기의 성과 등이 직간접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딱딱한 도서관 이야기, 책 이야기는 이 산문집에서 찾아볼 수 없거니와 저자의 글쓰기 스타일에도 없는 양식이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라는 표제처럼 수록문들에는 밥 딜런, 괴테, 하퍼 리, 고은, 바스코 포파, 만해 한용운, 폴 뉴먼 등 작가 예술인들의 재미난 일화가 가득하다. 책은 독자에게 ‘발견-연결-성찰’의 경험, 자기 확장의 경험을 선물처럼 준다. 책은 인간의 ‘기억, 사유, 상상, 표현’인 까닭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매체이고 인간존재의 핵심부에 자리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책 읽는 ‘사업’에 그토록 무심하고도 게을러왔던가? 저자의 단골 질문 “당신은 지구에 왜 왔는가?”를 저자 자신에게 되던지면 어떤 대답이 날아올까? 이 산문집의 표제는 그 대답의 일환이 아닐까? 별들 사이에 길을 놓기 위해서?
이야기 들려주기가 결코 일방통행이 아니라 ‘아들과 자기 사이의 특별한 사건’이라는 것을 괴테의 어머니는 잘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들이 반응하고 그 반응에 어머니가 반응함으로써 화자와 청자는 서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자극받는다. 이 자극은 이야기 지어내기를 즐거운 일이게 한다. 밤하늘의 별과 별 사이를 즐겁게 나는 상상력은 또 별과 인간을 잇고, 지상의 별들인 사람과 사람의 가슴 사이에, 사람과 개구리 사이에 길을 놓는다. 이야기는 단순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반응이며 길 놓기이고 연결하기다. 이 연결의 능력이 상상력이다. _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중에서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보내야 그는 남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의 뿌리는 같고,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게 생태학의 통찰이고 동양의 세계관이라면, 책은 나와 나 아닌 것을 연결해주는 가장 오래된 공감의 매체이다. 책이 공생의 도구이고 책 읽기가 공생의 습관이라는 건 실험을 통해 한차례 증명된 바 있기도 하다. 미국 예술기금위원회가 2002년에 실시한 ‘미국인의 예술 참여도’ 조사를 보면 문학 읽기의 사회적 의미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문학 독자들의 사회적 자선활동 참여율이 43%임에 비해 비독자의 참여율은 17%에 그쳤고, 음악회에 가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는 등 인접 예술 영역에 대한 참여도 역시 문학 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83쪽).
얼마나 많이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인간은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을까? 하늘에서 ‘하늘’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독특한 능력의 하나다. 그러나 그 능력을 발휘하자면 성장기의 정신의 확장이 필요하다. 딜런의 노래는 계속된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보내야/ 그는 남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죽음들이 있어야 할까?” 이런 물음들 끝에 딜런의 노래는 후렴구로 대답한다.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 속에 들려온다네, 바람 속에 들려온다네.” 남들의 울음소리를 듣자면 인간에게는 연민과 겸손을 확장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능력을 키우는 비밀은 성장기의 아이들을 자유롭게 숨쉬며 자랄 수 있게 하는 바람 속에 있다. _바람의 비밀 중에서
2001년 8월 시카고 시가 ‘함께 읽을 한 권의 책’으로 『앵무새 죽이기』를 선정하고 대대적으로 홍보에 나선 것은 시카고의 모든 시민이 인종 차별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설정하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시카고의 책 읽기 사례를 소개한 저자의 칼럼(『씨네21』 2001년 9월 11일)을 읽은 당시 MBC의 김영희 PD는 2001년 말 〈느낌표〉 프로그램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꼭지를 구상했다고 한다.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코너는 2003년 말 폐지되기까지 25권의 도서를 선정해 범시민 독서운동을 이끌었고, 순천, 제천, 진해, 청주, 제주, 서귀포 등지의 기적의 도서관 설립 과정을 중계해 책과 도서관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의식수준을 한층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1부 ‘이야기 사이로’와 2부 ‘공생의 도구, 책’은 이야기와 이야기 매체(책)가 왜 인간 사회에 필요한지, 인간의 성장과 교육과 사회 발전에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인지를 다양한 사례를 들어 제시한다. 밥 딜런의 노래 〈바람 속에 들려온다네〉에 담긴 인간 성장의 철학, 고은 시인의 『만인보』에서 새삼 다시 만나는 잊혀졌던 ‘우리’의 이름들, 바스코 포파의 시 ?작은 상자?로 읽어보는 ‘당신의 홈페이지’, 『동물농장』의 속편격 우화 『스노볼의 기회』에 묘사된 ‘자본주의 동물농장’의 모습, 돈키호테의 복잡성을 통해 바라본 우리들 자신의 초상 등 문학에서 끌어올린 다양한 소재들로 저자는 산문에 숨을 불어넣고 살아 숨쉬는 산문을 들고 독자를 방문한다.
3부 ‘이미지를 읽는다는 것’에는 저자의 영화 리뷰 9편이 실렸다. 1995~1996년에 주로 씌어진 영화 칼럼들은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를 예리하게 읽어내고 있어 마치 도정일의 시 비평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한편 한국 영화 시장에서 비교적 성공한 축에 드는 〈매트릭스〉 〈러브 액츄얼리〉 〈늑대와 춤을〉 같은 영화들을 보고서 저자는 호된 비평의 철퇴를 내리기도 한다.
4부 ‘시대를 위하여, 시대에 맞서서’는 20세기 말, 21세기 초라는 당시 시대에 부친 저자의 안부편지처럼 읽힌다. 책 읽는 사회를 만들자는 운동은 아이들(영유아부터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에 이르기까지)을 어떻게 키울까라는 교육 문제, 세계화라는 새로운 시대정신, 한국 특유의 민주주의 문화 등을 함께 고려하지 않고서는 진행할 수 없는 시민운동이다. 도정일의 시대 읽기, 시대에 부친 그의 편지는 근 20년간 저자의 관심, 생각, 고민 등을 총망라해 보여주는 셈이다.
책 말미에 실린 인터뷰 ‘좀비 바이러스의 맞서라’는 인터넷매체 〈프레시안〉이 북섹션을 출범시키면서 진행한 것인데, 한국의 독서/서평문화 이외에도 시장, 시민, 계몽, 청춘, 언론 등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어 그의 최근 문제의식과 사유의 일단을 개괄하는 데 유용한 대담이다. 전국 11개 기적의 도서관에 게시되어 있는(현재 서울시 도봉구에 12번째 기적의 도서관이 세워지고 있다) ‘기적의 도서관 설립 정신과 취지’문과 2002년 ‘세계 책의 날’을 기념해 발표된 선언문은 시민단체의 ‘도서관운동’ ‘책읽는사회만들기운동’에 관심 있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록으로 실었다. (*)
● 저자의 말
이 산문집을 내면서 내가 정말로 감사하고 싶은 다행한 일이 한 가지 있다. 나와 내 친구들이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약칭 ‘책사회’)을 시작한 것이 2001년 6월인데, 그 단체가 도중에 엎어지지 않고 13년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비영리 민간단체의 독서문화운동이 10년 넘게 버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함께 활동해주고 도와준 덕분이다. 개수로 스무 가지가 넘는 ‘책사회’의 여러 활동들에 적극 참여하고 일을 이끌어주시는 분들에게, 그리고 오랜 기간 그 단체를 밀어주고 있는 소액 후원자들에게 특히 감사하고 싶다. 그런 분들은 전국 방방곡곡에 있다. 그들에게, 그리고 다른 모든 관심 가진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기 위해 ‘책사회’는 작년 11월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책읽는사회만들기 12년, 감사의 날’이라는 행사를 열었다. 비록 날짜를 맞추지 못해 해를 넘기긴 했어도 이 산문집은 원래 그날 행사에 맞추어 낼 양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괴테의 어머니는 밤마다 일곱 살짜리 아들과 함께 하늘의 별들 사이에 이야기의 길을 만들고 이야기로 아들을 키운 사람이다. 생각해보니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천지만물 사이에 이야기의 길을 열고 있는 사람들은 이 땅에도 많다. 이 산문집은 그분들에게 보내드리는 내 마음의 인사다. _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