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 : 생각과 욕망을 표현하고, 이 시대 문화의 공통요소를 소비하는 장소!
몸의 역사에 눈길을 돌리면, 무엇보다도 물질문명의 핵심, 인간이 기술을 투자하고 수많은 요소를 대면하면서 행동하고 느끼는 방식을 복원할 수 있다. 뤼시앵 페브르(Lucien Febvre)의 말대로 ‘구체적인’ 인간, ‘살아 있는 인간,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이 세계로부터 수많은 존재가 드러난다. 이 세계에는 일차적인 '물질‘ 환경뿐만 아니라 음식, 추위, 냄새와 수많은 유동성이라든가 악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온갖 인상, 몸짓, 생산물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몸의 역사는 우리가 직접 부딪치는 세계, 감각과 환경의 세계, 모든 물질 ’상태‘의 세계를 가장 먼저 복원해준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느끼고 그 느낌을 이용하도록 강요하는 물질적인 조건, 거주 방식, 교환 방식, 물건을 만드는 방식과 함께 변하는 세계이다.
몸을 국가 차원에서, 사회관계 속에서 또는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몸을 생각하고, 대하고, 가꾸는 방식이 문화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구축되었기 때문에 ‘몸의 역사’ ― 몸을 보는 관점, 몸을 대하는 태도, 몸가짐이나 운동과 관련된 담론, 의학이나 주술, 종교적으로 받들거나 저주하는 몸 ― 를 쓰고, 몸을 창문이나 입구로 삼아 과거로 들어가 인류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이 몸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신성한 몸과 사악한 몸, 건강하고 깨끗한 몸과 병들고 냄새나고 더러운 몸, 귀한 몸과 천한 몸, 아름다운 몸과 추한 몸, 순결한 몸과 음탕한 몸, 평범한 몸과 범죄를 저지르는 몸, 비싼 몸과 싼 몸, 이렇게 정치, 종교,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몸을 분류하고 각각의 규범을 발전시키고 때로는 대중의 믿음을 억압하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권장하는 모습을 역사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언제부터 역사학계에서는 인간의 ‘몸’에 주목하기 시작했는가
이 책이 2005년 프랑스에서 출간되게 된 데에는 위와 같은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서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역사학계 내에서의 변화조짐을 들여다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날학파의 역사적 성공을 짚을 수 있다. 1974년 [역사하기](Faire de l'histoire) 제3권 “새로운 대상”(Nouveaux objets, sous la direction de Jacques Le Goff et Pierre Nora, Editions Gallimard)에서 공식 주제로 등록된 ‘몸’은 사실상 역사의 바깥에서 먼저 관심을 가진 주제였다. 의사는 병든 몸, 법률가는 고문당한 몸,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철학자는 여성의 몸에 눈길을 주었다. 학문 가운데 가장 전통 깊은 역사학은 20세기 초부터 사회사 분야를 개척하고, 그 뒤 언어학, 인류학, 사회학 같은 새로운 분야의 도전을 받으면 그 분야의 방법론을 전유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렇게 해서 몸이라는 주제도 역사학의 새로운 연구주제가 되었다. 전체사가 아니라 조각난 역사이긴 해도, 몸의 역사는 그 나름대로 문화 전반의 주제를 담는다. 사고방식과 상징, 예절, 의학, 미술, 종교의 중심에 몸이 있다. 그리고 그 연구는 아직도 진행중이며, 강의주제로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몸의 역사] 제1권의 책임편집자인 조르주 비가렐로와 필자 라파엘 만드레시 그리고 티에리 피용 세 사람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2007년 11월 15일부터 2008년 5월 29일까지 “몸의 역사, 대상, 방법론”(Histoire du corps, objets, methodes)을 강의했다. 강의 목적에서 말하듯이, “역사가는 오랫동안 몸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과학은 그 중요성과 깊이를 밝혔다. 몸의 독창적인 위치는 개인과 사회적 경험이 만나는 데 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이렇게 역사학은 오랫동안 잊었던 몸을 깨웠고, 그 풍부한 역사를 파헤쳤다.
왜 몸의 역사를 르네상스 시기부터 시작하는가
제1권의 서론을 보면, 왜 이 책이 르네상스부터 18세기까지 몸의 역사를 추적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비가렐로는 ‘근대의’ 몸이 르네상스 시대에 출현했다고 말한다. 그 시대 사람들은 몸이 그 자체의 ‘추진력’과 그 자신의 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능을 가졌다고 규정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몸을 개별화하는 문화가 생겨 옛 문화와 충돌하였다. 중세 그림과 달리, 르네상스 시대 만테냐의 그림에서 ‘몸의 발명’이 분명히 드러났다. 몸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해지고 사실적이 되었다는 것은 가치체계가 바뀌었음을 증명한다. 이렇게 강조한다고 해서 몸을 둘러싼 신구논쟁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종교와 관습이 몸의 해방과 개별화를 늦추는 힘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몽주의 시대까지 몸에 정신을 집중하고 합리적인 제도로써 개별화를 뒷받침해주는 가운데, 근본적으로 두 가지 긴장이 생겼다. 하나는 집단적 강제가 드세졌다는 점, 또 하나는 개인의 해방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집단의 강제가 드세진 현상과 관련해서, 1750년 이후 인구의 힘을 새롭게 자각하면서 공간을 개량하고, 풍요롭게 만들고, 보존하는 과제에서 공중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와 함께 노동 인구, 수명, 건강의 문제가 공동체의 관심사항이 되었다. 개인의 해방과 관련해서는 개인의 감수성이 승리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자아의 등장이 두드러진 증거를 남겼다. 공증인이 작성한 유산목록(사후재산목록, inventaire apres deces)을 보면, 개인 초상화가 늘어나고 그 대신 종교화가 많이 줄었다. 초상화의 내용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표시를 더 많이 담으면서 전보다 덜 엄숙해졌다. 이렇게 “근대인의 몸은 해방과 함께 복종이라는 두 가지 역동적 요소가 뒤섞인 특별한 곳이 되었다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서론)
다양한 몸의 세계, 각 분야 전공자들에 의한 세밀한 분석과 풍부한 도판자료!
제1장의 저자는 온갖 고통을 겪은 구세주의 몸을 여러 가지로 분석했다. 구세주의 몸에 난 다섯 개의 상처와 못, 창끝마저 신성시하는 믿음을 분석했다. 특히 로마 병사 롱기누스가 찌른 창끝이 심장을 향해 오른쪽 갈비뼈 아래를 뚫고 들어간 뒤, 거기서 흐르는 피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결되는 신성한 의미를 갖는다고 분석한다. 이외에도 성유물을 둘러싼 서양세계의 독특한 문화사를 속속들이 보여주면서 근대가 중세와는 다른 새로운 인간관을 보여주었지만, 아직도 종교가 일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였기에 ‘몸’ 역시 그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제3장에서 우리는 청춘기의 남녀가 교제할 때의 규칙, 혼전관행, 생식과 쾌락 사이의 부부 행동, 매춘, 홀로 성욕을 다스리기, 여성 동성애자 문제를 만난다. 이 글의 저자는 주로 법률문서에서 개인의 몸가짐과 사회적 습관의 정보를 얻어,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몸과 성적 관행을 분석한다. 법률자료는 거대구조(제도와 문화적 규범)와 미시적 관계(개인의 처세 경험과 책략)가 몸의 욕망을 둘러싸고 어떻게 부딪치고 복잡하게 얽히는지 설명한다. 그는 지난 세기 말 30년 동안 쌓인 업적을 종합하여 르네상스 시대부터 앙시앵 레짐 말까지 성욕의 역사를 다룬다. 18세기 말, 애정과 결혼은 적어도 이론상으로 폭넓게 조화를 이뤘지만, 한편 사회는 점점 부르주아의 성격을 띠고 강한 성적 수치심을 느끼면서 몸과 성욕을 예절의 중심에서 가장 먼 변두리로 쫓아버리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제4장인 「몸을 움직이다, 놀다」에서는 몸짓과 그것의 표현이 18세기에 들어서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학, 문화, 사회의 세 차원에서 일어난 변화는 몸의 운동을 보는 고전적 시각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첫째, 측량과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힘을 계산하고, 모든 결과와 발전을 예측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발전과 완전성을 중시하는 전혀 새로운 풍조가 생겼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측량과 조사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집단, 인간의 힘, 인구의 힘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공동체는 사람들의 몸에 영향을 끼치는 일을 임무로 삼았다. “인류를 완전하게 만드는” 기술은 의사뿐만 아니라 정치인의 계획이기도 했다. 몸은 전보다 더 집단적으로 동원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위생은 그 어느 때보다 새로워진 건강상태를 투사해야 했다. 몸을 보는 시각도 바뀌어야 했다. 셋째, 몸의 기능과 관련된 새로운 표상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체액을 기준으로 삼던 태도를 천천히 버리고 신경과 섬유조직의 역할을 강조하고 오직 해부학에 호기심을 보이던 데서, 이제는 생리학적 호기심을 더욱 중시하며 전통적인 정화 처방보다는 자극의 처방을 특별히 생각하게 되었다. 몸의 운동을 중시하면서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노스의 전통 의학이 오랫동안 특별 취급하던 4체액의 특성을 조금씩 잊었고, 또 음색이나 감수성에 다소 신비스러운 덕목을 부여했다.
제6장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해부학과 관련된 그릇된 통념부터 바로 잡으면서 시작한다. 이 글의 저자는 중세에 해부를 하지 않은 것이 기독교의 영향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럴 만한 근거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통념은 보니파키우스 8세가 1299년에 반포한 칙령(Detestande feritatis, 우리가 마땅히 혐오해야 할 잔인성) 때문에 생겼는데, 교황은 죽은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까지 좀 더 쉽게 운반하려고 죽은 자의 몸을 잘라내는 ‘잔인한 관습’을 없애고자 한 것이지 이 시대에 시작된 해부학을 금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비인간적인 몸’을 다룬 제8장과 ‘왕의 몸’을 다룬 제9장 등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글을 통해서 우리가 흔히 통념상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역사적’ 측면에서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