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년의 우리소설〉은 신라 말기인 9세기경부터 조선 후기인 19세기까지의 우리 소설, 즉 ‘천 년의 우리 소설’ 가운데 시공의 차이를 뛰어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감동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명작만을 가려 뽑은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한국 고전소설의 새로운 레퍼토리’를 구축하기 위해 한국학과 고전문학을 전공한 박희병, 정길수 두 교수에 의해 기획되었다. 외국의 다양한 소설과 한국 근현대소설에 가려져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 고전소설을, 이 시리즈를 통해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 고전소설의 기원
― 천 년 전 기이한 인물의 기이한 이야기
한국 고전소설은 신라 말 고려 초에 성립되었다. 그 대표작에 해당하는 「최치원」(崔致遠)·「조신전」(調信傳)·「호원」(虎願) 등 신라·고려 시대에 창작된 초기 한문소설을 이 책에 실었다. 오늘날 동아시아 단편소설의 발생은 7세기경까지 올려 잡는 추세다. 중국 당나라 전기(傳奇)의 대표작들이 후대의 단편소설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학계에서는 설화와 소설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거듭하여 우리 소설사의 시초를 신라 말 고려 초로 보는 데 차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신라·고려 시대의 소설은 조선 시대의 고전소설에 비하면 대체로 분량이 짧고 소박해서 세련된 맛이 떨어지지만, 소설로서의 최소 요건을 갖춘 가운데 주제를 간명하게 전달하고 있는 작품들이어서 초기 소설의 모습을 더듬어보기에 충분하다.
소설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동시기에 창작된 인상적인 설화들도 책 후반부에 함께 수록하여 초기 소설의 형성 과정과 그 시대적 분위기를 엿보게 했다. 불교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 많고, 보편적인 애정 주제의 작품도 다수 있는데, 어느 작품이든 천 년 전 기이한 인물의 기이한 이야기다.
_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실려 전한다. 이 작품은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주인공의 성격 묘사, 노힐부득의 내면적 갈등 서술, 작품의 짜임새 등의 측면에서 설화로부터 소설로 옮아가는 초기 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_ 「호원」은 역시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김현감호」(金現感虎)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인간과 호랑이의 사랑이라는 허황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상층 남성과 하층 여성 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우의한 작품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남녀의 자유로운 사랑이 결국 신분 차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여주인공의 희생으로 마무리되는 셈이어서, 호랑이 처녀의 마지막 말이 주는 울림도 더욱 크게 느껴진다.
_ 「온달」은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실려 있다. 이 작품에서는 민중적 사유와 정서가 확인된다. 공주와 비천한 바보의 사랑이라는 소재,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천한 존재로 멸시받던 인물이 사실은 영웅의 자질을 품고 있었다는 설정, 그 과정에서 남성을 이끌어 주는 한편 ‘동명왕 신화’처럼 명마(名馬)를 조련해 내는 여성의 역할 등이 그에 해당한다. 민간의 이야기가 소설로 상승한 결과일 것으로 생각한다.
_ 「조신전」은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옛날 경주가 서울이던 시절”이라는 구절로 시작되는바, 고려 전기에 창작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 작품은 ‘꿈’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구도를 취했다. 비슷한 구도의 이른 시기 작품으로 중국 당나라 때의 「침중기」(枕中記) 그리고 『구운몽』(九雲夢)을 들 수 있다.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인생의 가치를 묻는 「조신전」의 주제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일찍이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는 「조신전」에 윤색을 가해 1947년에 「꿈」이라는 소설을 쓴 바 있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넘나드는 오늘날의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도 「조신전」과 『구운몽』의 연장선상에서 그 의미를 반추해 볼 수 있다.
_ 「최치원」은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인이 썼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작품의 말미에 “최치원이 심은 모란이 아직도 있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최치원의 시대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때의 인물이 아닐까 한다. 이 작품은 중국 문헌에 전하는 ‘쌍녀분(雙女墳) 설화’를 대폭 확장한 작품이다. ‘쌍녀분 설화’에서는 최치원이 요절한 두 자매의 무덤에 우연히 갔다가 시를 지어 조문하자 그날 밤 두 자매가 나타나 감사하며 자신들이 요절하게 된 사연을 말한 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에 떠났다는 내용이 지극히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최치원」은 주인공에 개성을 부여하고 대화 장면을 확장하며 세부 묘사를 충실히 하고 여러 편의 시를 삽입함으로써 ‘쌍녀분 설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작품이 되었다. 후대의 소설에 비하면 미숙한 점이 보이기도 하지만 기존의 설화와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면모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게다가 고독한 주인공,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특징으로 삼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요건을 잘 갖춘 작품이기도 해서 최초의 한국 고전소설로 거듭 주목되어 왔다.
_ 「설씨」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설씨」 역시 남녀의 결연 과정이 서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일반적인 열전이 인물의 미덕과 업적을 기리는 데 초점을 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점 대단히 파격적이다.
_ 「연화부인」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인 이거인(李居仁)의 작품이다. 이거인은 고려 말에 명주부사(溟州府使)를 지내면서 명주(溟州: 강릉)에 전해 오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전하는 것은 「연화부인」뿐이다. 이 작품은, 노랫말은 전하지 않고 제목과 배경 설화만 전하는 「명주가」(溟州歌)의 배경 설화를 소재로 삼고 있는데, 설화에서 소설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_ 「백운과 제후」는 『삼국사절요』에 수록된 작품이다. 작품 안에 남녀의 결연을 방해하는 사건이 두 번이나 발생하고, 적대적 인물과 협객의 면모를 지닌 조력자가 등장하는 등 초기 소설로는 이례적으로 복잡한 플롯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작은 상당한 분량의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_ 「김천」은 『고려사』 열전의 ‘효우전’(孝友傳) 중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원나라에 포로로 붙잡혀간 어머니와 동생을 되찾아오겠다는 김천의 집념을 간략한 필치로 그려냈다. 이 작품은 13세기 후반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고려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소설로 형상화한 드문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소설 형식의 측면에서는 전(傳)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한문단편소설인 전계소설(傳系小說)의 선구적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