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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ng (스팅) - Duets

[ 디지팩 ]
Sting, Melody Gardot, Eric Clapton, Mylene Farmer, Cheb Mami 노래 외 10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Universal / A&M Records | 2021년 03월 26일 첫번째 구매리뷰를 남겨주세요. | 판매지수 132 판매지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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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ng (스팅) - Duets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21년 03월 26일
제조국 EU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Disc
  • 01 Little Something (Feat. Melody Gardot)
  • 02 It's Probably Me (Feat. Eric Clapton)
  • 03 Stolen Car (Feat. Mylene Farmer)
  • 04 Desert Rose (Feat. Cheb Mami)
  • 05 Rise & Fall (Feat. Craig David)
  • 06 Whever I Say Your Name (Feat. Mary J. Blige)
  • 07 Don't Make Me Wait (Feat. Shaggy)
  • 08 Reste (Feat. Gims)
  • 09 We'll Be Together (Feat. Annie Lennox)
  • 10 L'amour C'est Comme Un Jou (Feat. Charles Aznavour)
  • 11 My Funny Valentine (Feat. Herbie Hancock)
  • 12 Fragile (Feat. Julio Iglesias)
  • 13 Mama (Feat. Gashi)
  • 14 September (Feat. Zucchero)
  • 15 Practical Arrangement (Feat. Jo Lawry)
  • 16 None Of Us Are Free (Feat. Sam Moore)
  • 17 In The Wee Small Hours Of The Morning (Feat. Chris Botti)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아티스트 소개 (15명)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 영국 출신의 팝 아티스트 스팅은 절대 현실의 삶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이다. 20년 넘게 계속된 그의 음악세계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된다. 그는 스타덤에 오르면서 겪는 매너리즘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발표하는 앨범마다 팬들에게 신선함과 새로움을 선사했다. 그는 뉴 밀레니엄 특수(特需)에 발맞춰 1999년에 발표한 앨범 < Brand New Day >에서도 컨트리와 랩을 과감히 수용하여 젊은 피 못지 않은 독창력을 선보였다. 이 앨범으로 스팅은 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팝 가수’와 ‘최고의 팝 앨범’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처럼 음악에 녹아있는 스팅의 탐구적인 철학은 장외로까지 연결되어 그 강도가 더욱 강해졌다. 얼마 전 그는 6월 7일과 1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버그에서 갖기로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를 전격 취소했다. 이유는 외르크 하이더 당수가 이끄는 극우 자유당이 오스트리아 새 연정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음악관이 퇴보나 보수가 아닌 진보와 개혁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스팅의 음악색깔은 그의 외곬수적인 성격과는 달리 ‘다색(多色)’이다. 그의 음악 속에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장르가 만나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순수하지 않은 혼합적인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록, 순수한 재즈에는 흥미가 없다." 한 채널에 귀를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채널 안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스팅의 퓨전 지향은 아트록 그룹 커브드 에어 출신의 스튜어트 코플랜드, 애니멀스 출신의 앤디 서머스와 함께 했던 록그룹 폴리스 시절부터 이미 시작됐다. 그룹의 음악은 단순하게 몰아치는 펑크에 머물지 않고 레게, 재즈, 민속음악 등을 집어넣어서 감칠맛 나게 요리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유니크한 사운드였다. 스팅의 재즈 어프로치가 돋보이는 베이스라인, 레게 리듬을 완벽히 구사하는 코플랜드의 드럼 테크닉, 그리고 에코가 약간 가미된 서머스의 클린 톤의 기타는 폴리스 사운드의 결정체였다. 그들의 데뷔작 < Outlandos D’ Amour >와 2집 < Reggatta De Blanc >의 히트곡 ‘Can’t stand losing you’, ‘Walking on the moon’에서 시도된 이국적인 레게 뮤직이 그 한 예다. 영·미 음악 중심에서 벗어나 제3세계로 음악의 발판을 넓힌 것이다. 스팅은 1983년에 발표한 폴리스의 5집 앨범 < Synchronicity >의 수록곡 ‘Every breath you take’로 8주 동안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인기정점에 섰을 때 그룹을 해산시켰다. 멤버간의 불화도 원인이었지만 가장 큰 해체이유는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처음 시작하는 나의 입장이 전혀 두렵지 않다. 나는 모든 상황 속에 내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그의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솔로 활동과 함께 스팅은 월드 뮤직으로 한 단계 도약을 꾀했다. 그는 자메이카에서 녹음한 1985년 솔로 데뷔작 <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 >에서 색소폰 주자 브랜포드 마샬리스, 키보디스트 케니 커크랜드 등 젊은 재즈 뮤지션을 영입하여 고품격·고감도 재즈 음악을 선보였다. 하지만 단순히 재즈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민속 음악을 차용한 ‘Russians’, 중동 풍의 리듬이 인상적인 ‘We work the black seam’ 등 전세계에 펼쳐져 있는 다채로운 음악 소재들을 자신의 앨범에 담았다. 모든 곡을 포르투갈어로 부른 1988년 EP < ...Nada Como El Sol >, 1996년 앨범 < Mercury Falling >의 ‘Valparaiso’에서 나타나는 아일랜드의 민족정서, 1997년 베스트 앨범 < The Very Best Of Sting & The Police >에서 퍼프 대디가 참여하여 힙합 버전으로 새롭게 탈바꿈된 < Roxanne ’97 > 역시 크로스오버를 위한 스팅의 실험정신이 담겨진 작품들이다. 스팅의 음악은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그래서 선뜻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대중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스팅에 대한 국내 여성 팬들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여기에는 영화음악이 한몫을 했다. 그는 영화 < 레옹(Leon) >의 ‘Shape of my heart’, < 네 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Four Weddings & A Funeral) >의 ‘The secret marriage’,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의 ‘Angel eyes’, ‘It’s a lonesome old town’ 등을 통해 팬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팅은 아예 까메오가 아닌 배우로서 1979년 영화 < Quadrophenia >를 비롯 < Brimston & Treacle >, < Dune >, < The Bride >, < Plenty >, <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 등 많은 작품에서 열연을 했다. 그가 영화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팅은 대중이 아닌 자기자신을 위해 음악을 한다.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곡을 쓴다." 상업성에 포박 당하여 자아(自我)를 상실해버린 뮤지션들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다. 때문에 그의 음악에는 예술성이 베어있다. 50이 넘는 나이에도 다양한 변화를 모색하며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는 자신감 또한 마찬가지다.
노래 : Melody Gardot (멜로디 가르도)
재즈 보컬 재즈 보컬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 # 살아있는 음악 전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 년의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부터는 ‘진짜 블루스’에 접속불가를 외치는 대중들에게 팝 지향적인 ‘달콤 쌉싸름한 블루스’를 패스워드로 내놓아 블루스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그래미 트로피를 13번이나 받았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92년 야드버즈, 1993년 크림, 그리고 지난해 개인 자격으로 헌액된 것에서도 클랩튼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지난해 ‘블루스의 제왕’ B.B 킹(B.B King)과 협연한 작품〔Riding With The King〕으로 이번 그래미 시상식 ‘최고의 트래디셔널 블루스 앨범(Best Traditional Blues album)’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클랩튼은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Slowhand)’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기타 테크닉에 있어서도 대가(大家)의 경지에 올랐다. 감정을 질펀하게 쏟아내면서도 정확하고 절제된 테크닉을 구사하는 벤딩 주법(일명 쵸킹)과 비브라토는 다른 연주자들이 흉내조차 힘들 정도다. 그의 기타 연주와 관련하여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칭찬 코멘트를 들어보자. “에릭은 정말 재주가 많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플레이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감정과 함께 블루스를 연주한다. 그가 연주할 때 당신은 그것이 블루스라는 것을 알 것이다.” -B.B 킹-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블루스 연주가 뛰어나다. 왜냐하면 그는 블루스를 공부했고, 그것에 대해 당당하기 때문이다.” -제프 벡(Jeff Beck)-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연주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하늘에서 치는 천둥번개 같았다.” -존 이써리지(John Etheridge) 하지만 이런 융숭한 대접에 대해 클랩튼은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악평을 받았을 때 그 사실을 소화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평도 마찬가지다.”며 자신을 향한 관심을 무척 꺼려했다. 그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나같이 연주하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자기 스타일로 연주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보다는 그들만의 길을 개척할 것을 충고한다. 그의 음악과 인생 여로(旅路)가 굴곡이 심했기에 그 말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 전설의 시작 에릭 클랩튼은 1945년 3월 30일 영국 서레이(Surrey)주의 리플리(Ripley)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살 생일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고 블루스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여 할머니 품에서 자라며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흑인들의 비참함과 슬픔을 노래한 블루스가 그에게 찾아간 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랩튼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빅 빌 블룬지(Big Bill Broonzy),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ie Johnson) 등 초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성장했다. 특히 ‘델타 블루스의 왕’이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로버트 존슨의 앨범들은 내가 음악적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야드버즈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뛰어난 블루스 기타 테크닉은 단숨에 그룹의 사운드를 특징지었고, 매니저 지오지오 고멜스키(Giorgio Gomelsky)는 그에게 ‘슬로우 핸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클랩튼은 그룹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며 1965년 3월 팀을 떠나 존 메이올이 이끌었던 블루스브레이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야드버즈를 탈퇴한 직후 그가 연주했던 ‘For Your Love’는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했다. 이후 야드버즈는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가세하며 전성시대를 누렸다. 바로 록음악계의 ‘3대 기타리스트’가 야즈버즈를 통해 모두 비상했다. # 나, 블루스로 돌아갈래! 이 당시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이와 관계된 에피소드 한가지. 그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휴지기 동안에 다른 뮤지션들과 전세계를 돌며 블루스 전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클랩튼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몇몇 멤버들이 영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한 클럽에서 계속 머물며 공연을 계속했다. 그는 그러나 강도로 돌변한 클럽 주인의 협박으로 옷과 새로 산 마샬 앰프를 놔둔 채 영국으로 도망쳐야했다. 음악 외에는 모든 일에 문외한이었던 ‘순수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존 메이올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자신만의 그룹을 결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1966년 존 메이올 몰래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와 함께 크림을 조직하고 합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음악 전문지 <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 >의 폭로로 인해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이때 런던의 한 빌딩 벽에는 ‘클랜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에릭 클랩튼은 크림을 통해 ‘악기 예술의 미학’을 획득했다. 블루스와 재즈가 절묘하게 어울러진 그들의 사운드는 즉흥적이고 빠르며 굉음을 발산했다. 멤버들의 정교하고 뛰어난 연주 실력은 타 밴드와의 간격 차를 크게 벌려놓았고, 음악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그들의 앨범들인 1966년의 < Fresh Cream >, 1967년의 < Disraeli Gears >, 그리고 이듬해의 < Wheels Of Fire > 모두 명반으로 손꼽히며 파죽지세의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한자리에 모은 더블 앨범 < Wheels Of Fire >는 미국에서 4주간 정상을 차지하며 멤버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바로 이 작품에 명곡 ‘White room’이 수록되어 있다. 그룹은 그러나 서로간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1968년 11월 해산했다. 클랩튼의 음악 이력 중 최고의 절정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트리오는 1993년 1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으로 재결합 공연을 가져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크림의 해체 이듬해 클랩튼은 진저 베이커와 함께 트래픽(Traffic) 출신의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페밀리(Family)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Rick Grech)를 영입하여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탄생시켰다. 언론에서는 ‘인스턴트 슈퍼 그룹’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들은 공연 때 ‘최후의 슈퍼 그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언론의 지적대로 그들은 1969년 데뷔 앨범 < Blind Faith >를 내놓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 ‘레일라’의 비극 에릭 클랩튼의 1970년대는 한 여인과의 슬픈 사랑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다름 아닌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Patti Boyd)였다. 클랩튼은 1968년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조지의 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같은 해 공개된 솔로 음반 < Wonderwall Music >에서 기타를 맡을 정도로 조지 해리슨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조지와 음악적 교류를 하면서 패티를 본 후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당시 종교에 심취해 있던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패티 보이드는 클랩튼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었다. 음악 밖에 모르던 에릭은 그만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와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실의에 빠진 에릭 클랩튼은 술과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이런 사랑에 대한 좌절감과 패배감은 1970년 11월에 발표된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의 마스터피스 < Layla & Other Assorted Lovesongs >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남편이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어요/ 바보처럼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져버렸죠/레일라 당신은 나를 무릎꿇게 만들었어요/ 레일라, 당신께 애원합니다/ 제발...’. 수록곡 ‘Layla’의 구구 절절한 가사처럼 에릭 클랩튼의 상처받은 마음은 노래 전체에 용광로처럼 녹아들었다.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바닥까지 긁어내어, 그 고통을 음악으로 걸러냈다. ‘처절한 내면의 사생화’다. 클랩튼의 이러한 마음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얼마 후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했고, 둘은 1979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음반은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블루스와 삶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걸작의 반열로 들어섰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1부 실연의 파장은 매우 컸다. 에릭 클랩튼은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알코올과 약물 중독으로 인하여 병원과 요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다. 기타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드라마틱한 재기 스토리가 전개된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그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그룹 후(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였다. 피트는 이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찬밥취급을 받던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으로 데려와 음악계에 데뷔시키는 등 ‘선행’을 벌여왔다. 피트는 클랩튼에게 마약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했고, 1973년 에렉 클랩튼의 레인보우 콘서트를 주최해 재기의 무대를 마련해줬다. 클랩튼은 데릭 앤 도미노스 이후 3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피트는 에릭 클랩튼이 정신을 못 차리자 하와이안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력을 회복한 에릭 클랩튼은 1년 뒤 재기 작품 < 461 Ocean Boulevard >를 내놓았다. 앨범이 출시되기까지는 피트 타운센드와 함께 RSO 레이블의 사장인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의 도움이 컸다. 그는 폐인이 된 클랩튼을 위해 요양장소로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선뜻 내주며 재기의 기틀을 마련케 했다. 클랩튼도 스틱우드의 호의에 고개 숙여 감사하며 다시 기타를 집어들었다. 스틱우드의 별장주소가 바로 이 앨범의 타이틀이다. 스틱우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것이다. 밥 말리(Bob Marley)의 곡을 리메이크한 ‘I shot the sheriff’는 정상을 차지했고, ‘Let it grow’, ‘Give me strength’ 등이 인기가도를 달리며 ‘기타의 신’으로 부활했다. 이후 연이어 내놓은 앨범들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특히 ‘Wonderful tonight’이 실려있는 1977년 작품 < Slowhand >는 300만장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에릭 클랩튼은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던 이 시기를 잊지 못하고, 1999년 마약 중독자 치료기금을 위해 자신의 기타 100대를 경매에 내놓은바 있다. # 극적인 재기 드라마 2부 에릭 클랩튼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꾸준하게 앨범을 발표하지만 별다른 활약상을 보이지 못했다. 물론 1989년 작품 < Journeyman >같은 수작을 낚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룹시절과 달리 음악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에너지가 없어지고 느슨해진 팝 블루스’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현실무대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운명의 여인’ 패티 보이드와 헤어지고 이탈리아 투어 도중 만난 젊은 사진작가이자 배우였던 로리 델 산토(Lori Del Santo)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코너(Corner)가 뉴욕 맨하탄의 아파트에서 실족사한 것이다. 나중에 에릭 클랩튼은 “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경찰관과 의료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며 망연자실했던 당시의 심정을 묘사했다. 클랩튼은 그러나 ‘예전처럼’ 기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기타와 노래에 더욱 몰두했다. 음악만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것을 이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는 1992년 영화 < 러쉬(Rush) >의 사운드 트랙에 삽입된 ‘Tears in heaven’에 죽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실었다. MTV의 제안으로 그 해 녹음된 앨범 < Unplugged >에서의 백미도 단연 이 곡이었다. 어쿠스틱 기타에 실린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듬해 그래미는 그에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등 알짜배기를 포함하여 6개의 트로피를 ‘위로 선물’로 전달했다. ‘추억’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재진입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1994년 발매한 < From The Cradle >은 흥행과 평단 양편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얻었다.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를 동시 석권하였고, 블루스의 성찬을 담아낸 작품으로 격찬 받았다. 4년 뒤에 내놓은 앨범 < Pilgrim > 또한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전설은 영원하다 에릭 클랩튼은 작품마다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켰다. 혼을 불어넣었다. 올해 발표한 앨범 < Reptile >에도 그의 숨결을 살아 숨쉰다. 신작의 기저에 흐르는 물줄기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촌의 죽음’이다. 삼촌에 대한 존경심을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옮겼다. “‘Reptile(사전적 의미로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뜻)’은 삼촌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Reptile’이란 단어는 사랑스러운 말이다.” 이 음반은 프로듀서 사이먼 클리미에(Simon Climie)를 포함하여 전작 < Riding With The King >의 세션팀이 그대로 참여했다. 또한 시카고 소울의 거장 커티스 메이필드(Cutis Mayfield)의 빈자리를 남겨둔 채 임프레션스(The Impressions)가 부드러운 화음을 더하고 있다. 블루스뿐만 아니라 레게, 컨트리,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로 음악 지류를 넓히고 있는 클랩튼은 새 앨범에서도 그 폭을 확대했다. 퓨전 재즈풍의 기타 연주가 도입됐으며, 라틴 음악의 요소도 엿보인다. 보사 노바의 흥취가 물씬 풍기는 첫 곡 ‘Reptile’을 비롯해, ‘Modern girl’, ‘Son & sylvia’ 등에서 알 수 있다. ‘리듬’에 대한 클랩튼의 지속적인 실험이다. 선배들을 향한 오마쥬도 계속된다. 에릭 클랩튼의 음악적 스승 중 한 명인 기타리스트 J.J. 케일(J.J. Cale)의 ‘Travelin` light’, 1985년에 세상을 떠난 ‘점프 블루스의 대가’ 빅 조 터너(Big Joe Turner)의 고전 ‘Got you on my mind’ 등이 그것이다. 또한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1980년대 히트넘버 ‘I ain`t gonna stand for it’, 레이 찰스(Ray Charles)의 ‘Come back baby’를 새롭게 재해석하며 두 명의 맹인 거장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는 그러나 ‘향수’를 풍기지 않는다. 애절하면서도 포근하게 감싸안는 음색과 선율로 그만의 분위기를 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곡조에 맞게 ‘톤’을 찾아내는, 바로 ‘기타의 신’만이 할 수 있는 특허품이다. 음악을 만들고 듣는 이가 인간이지만 ‘비인간적’인 음악이 판치는 요즘이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의 음악과 인생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을 달리지 않는다. 합일점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다. 특히 역경 속에서 소중한 음악의 싹을 틔우고 키워냈다. 내면의 고통과 이별의 슬픔을 블루스로 쏟아냈다. ‘인간의 음악’이다. 당연하다. 허나 바로 이 점 때문에 클랩튼은 전설로 추앙 받는다.
노래 : Mylene Farmer (밀렌 파르메르)
노래 : Craig David (크레이그 데이빗 )
영국의 R&B 가뭄을 단번에 해갈시켜준 브리티시 R&B 신동 영국의 R&B? 좀 낯설다. R&B 음악은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던가? 사실 그렇다해도 무리는 아니다. 근래 영국에서 배출된 R&B 가수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9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실(Seal)이 있었고, 여성 가수로 리사 스탠스필드나 가브리엘이 있었다. ‘High’라는 곡으로 국내에 유명해진 듀오 라이트하우스 ... 영국의 R&B 가뭄을 단번에 해갈시켜준 브리티시 R&B 신동 영국의 R&B? 좀 낯설다. R&B 음악은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던가? 사실 그렇다해도 무리는 아니다. 근래 영국에서 배출된 R&B 가수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9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실(Seal)이 있었고, 여성 가수로 리사 스탠스필드나 가브리엘이 있었다. ‘High’라는 곡으로 국내에 유명해진 듀오 라이트하우스 패밀리도 영국 출신이다. 그렇지만 90년대 후반을 지나 현 2000년대에 와서는 전혀 찾아보기 힘들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영국에는 R&B 뮤지션이 없단 말인가. 영국이 그런 음악을 싫어해서일까. 아니다. 미국 R&B 가수들은 영국에서도 인기 있으며 그들은 종종 차트 정상에 오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일까. 이방인인 우리에게 그것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일 수밖에 없으나 추측해보면, 아무래도 영국인들 특유의 고집스런 성질, 즉 ‘영국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미국 얼터너티브 록에 맞서 브릿 팝을 고수했던 영국성! 자존심이나 프라이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그 기질 탓에 여타의 영국 뮤지션들이 ‘양키’ 냄새나는 음악을 꺼려했던 것 같다. 물론 이건 추측이지만 영국인들은 그러고도 족히 남을만한 위인들이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미국의 R&B 뮤지션들이 자국에 와서 큰 인기를 누리는 걸 바라만 봤던 영국인들은 내심 속이 쓰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 ‘속 쓰림’은 그러나 지난해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한 소년에 의해 한방에 치유되었다. 그는 물론 크레이그 데이비드다. 스티비 원더, 테렌스 트렌트 디아비, 시스코 등의 미국가수들을 좋아하노라고 공공연히 밝힌 이 열아홉 살 소년은 미국식 R&B와 힙 합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거기에 영국 특유의 멜로디 감각도 곁들여 미국과 영국을 동시 만족시킬 수 있는 산뜻한 R&B를 개척해냈다. 어쩐지 출발부터 예감이 좋았다. 앨범을 발매하기도 전부터 눈길을 끌더니 첫 싱글이 발매되자마자 차트 정상에 올랐고, 얼마 후 나온 데뷔앨범도 앨범차트 1위를 점령했다. 자국의 좀 괜찮은 뮤지션이 나왔다 하면 무한대로 ‘밀어주는’ 영국 언론들도 신이 났다.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 만난 격. 모두들 신동이 나왔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ME) >지는 “왜 이제야..”라는 감격조로 그의 출현을 반겼으며, “왜 크레이그 데이비드가 지금까지 영국 최고의 R&B 가수인가. 대답은 바로 그의 앨범에 있다.”고 그를 한껏 치켜세웠다. R&B 키드에서 라디오.클럽 DJ로 그리고 R&B 뮤지션으로 이제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1981년 5월 5일 영국의 사우스햄튼(Southamton)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정말로’ 음악과 함께 보냈다. 그의 손엔 언제나 가사를 적기 위한 노트북이나 펜이 있었고, 방바닥에는 멜로디를 녹음하기 위한 구술용 소형 녹음기가 있었다. 그 시절 그의 가장 큰 모험은 어머니의 감시의 눈을 피해 몰래 자신이 좋아하는 R&B에 탐닉하는 것이었다. 14살 때부터는 동네의 해적방송국 < PCRS 106.5FM >, 또 인근의 유명 클럽에서 DJ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주로 R&B를 틀었지만 곧 둔중한 레게 베이스와 작렬하는 비트의 개러지 하우스 댄스로 전향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향후 음악동료가 될 마크 힐(Mark Hill)과의 운명적 만남이 성사된다. 어머니의 권유로 나간 작곡 대회에서 우승한 뒤, 크레이그 데이비드는 개러지 밴드 아트풀 다저(Artful Dodger)의 멤버이기도한 마크 힐과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주말마다 런던으로 원정 다니며 디제잉하던 그는 휴먼 리그의 히트곡인 ‘Human’을 R&B로 변형시킨 그의 첫 레코드를 녹음했고, 얼마 후 아트풀 다저의 ‘Rewind’를 버전업해서 발표해 언더그라운드에서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다. 계속해서 그와 마크 힐은 여러 라디오방송에서 성공적인 개러지 공연을 치르면서 더욱 주가를 올렸으며 그 때문에 데이비드는 ‘개러지 뮤지션’이라는 다소 곡해된 인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첫 싱글 ‘Fill me in’이 발매되자 그 같은 인칭오류는 사라졌다. 그의 진가는 R&B였다. 라틴 풍의 감미로운 기타 연주, 극도로 잘게 쪼개지는 비트, 로맨틱한 전염성 멜로디라인, 부드러운 키보드와 드럼, 거기에 곡예 하듯 질주하는 멋진 보컬 등 ‘크레이그 데이비드 표’ R&B의 특질이 모두 포함된 그 곡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Fill Me In’은 곧바로 영국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그는 ‘1위 곡을 가진 가장 어린 영국 남성 솔로가수’로 기록되었다. 그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두 번째 싱글 ‘7 Days’ 역시 1위에 올랐고, 2000년 8월 발매한 데뷔앨범 < Born To Do It >도 가뿐히 차트 정상을 밟았다. 그가 좋아하는 한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제목을 붙였다는 이 음반은 R&B는 물론 록, 소울, 개러지, 재즈 그리고 라틴의 영향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음악은 복잡하지만 그가 가사에서 다룬 소재는 단순하다. 어린 나이답게 그는 여성에 대해서, 또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곡을 썼다. 그는 자기 또래의 심리를 가사에 그대로 반영했으며 R&B의 섹슈얼리티에도 충실했다. ‘7 Days’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과 7일간 ‘마라톤 정사’를 벌인다는 재미난(?) 내용을 담고 있다. “월요일에 여자를 만나서 화요일에는 술을 마시며 사랑을 나눴지. 우린 수요일까지 사랑을 나눴어. 그리고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까지 계속해서. 일요일에야 우린 겨우 쉴 수 있었지. 난 사실 그리 색마는 아니야. 하지만 하룻밤 사랑으로는 너무 모자란 걸.” 그 외에 시스코의 ‘Thong song’이 연상되는 ‘Can’t be messing ’round’, 10대의 풋풋한 향기가 느껴지는 파티송 ‘Time to party’, 넘버원 싱글 ‘Booty man’ 등 모든 수록곡들은 < NME >가 말했듯, 그가 왜 최고의 R&B 가수인지 확인시켜준다. 이 천재 소년의 노래들을 들어보면, 올 2월에 개최된 < 브리티시 어워즈 >에서 로비 윌리엄스에게 참패한 것쯤은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만큼 그의 테크닉은 경이에 가깝다. 국내에는 미처 발매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R&B 매니아들 사이에선 이미 컬트적 지지를 받은 지 오래다. 이젠 일반 음악팬들에게도 공개되니 이 음반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애니 레녹스(Annie Lennox)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뉴웨이브 그룹 유리드믹스(Eurythmics) 시절부터 가창력과 음악적인 능력을 동시에 인정받은 여성 싱어 송라이터다. 그녀의 작곡 실력과 회색 톤의 깊고 중성적인 음색, 그리고 소울풀한 창법은 12년 동안 3장의 앨범만을 발표하는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여성 싱어 송라이터 위치를 굳건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4년 1... 애니 레녹스(Annie Lennox)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뉴웨이브 그룹 유리드믹스(Eurythmics) 시절부터 가창력과 음악적인 능력을 동시에 인정받은 여성 싱어 송라이터다. 그녀의 작곡 실력과 회색 톤의 깊고 중성적인 음색, 그리고 소울풀한 창법은 12년 동안 3장의 앨범만을 발표하는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여성 싱어 송라이터 위치를 굳건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4년 12월 25일,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에서 태어난 애니 레녹스는 어린 시절부터 배운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음악 잠재력을 키웠다. 1970년대 후반 그녀가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던 레스토랑에서 데이브 스튜어트를 만나서 결성한 유리드믹스는 1980년부터 11년 동안 역동적인 활동을 보여주면서 1991년에 화려한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그러나 그녀의 첫 싱글은 유리드믹스에 몸담고 있던 1988년에 소울 싱어 알 그린(Al Green)과 듀엣으로 부른 ‘Put a little love in your heart(9위)’이다. 그 해에 개봉된 영화 에 삽입된 이 노래로 가능성을 타진한 애니 레녹스는 그룹 해산 1년 후인 1992년에 공식적으로 솔로 데뷔 앨범 를 발표해 ‘Why(34위)’와 ‘Walking on broken glass(14위)’가 그녀의 인지도를 높였다. 1995년에 공개한 솔로 2집 는 100%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리메이크 한 대범한 앨범이었다. 싱글히트곡으로는 더 러버 스피크스(The Lover Speaks)의 오리지널을 다시 불러 그녀에게 그래미 최우수 여성 가수상을 안겨준 ‘No more “I love you’s”(23위)’ 뿐이었지만 국내에서는 프로콜 해럼(Procol Harum)의 원곡을 커버한 ‘A whiter shade of pale’도 높은 인기를 누렸고, 펑크 밴드 클래시(Clash)의 노래를 재해석한 ‘Train in vain’ 등 익히 알려진 곡들은 매니아 층으로부터 환영받았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전후 한 시기에 1980년대의 뉴웨이브 음악을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애니 레녹스와 데이브 스튜어트는 일시적으로 모여 자선 공연을 갖기도 했다. 2003년에는 8년만에 세 번째 솔로 앨범을 공개해 조금도 퇴색하지 않은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있다.
노래 : Mary J. Blige (메리 제이 블라이즈)
‘힙합 소울의 여왕’ 메리 제이 블라이즈(Mary J. Blige)는 지금까지 발표한 다섯 장의 음반들 통해서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구축해나간 실력파 여성 R&B싱어이다. 1990년대 초반 R&B 계열에 혜성같이 등장한 그녀는 타고난 가창력을 등에 업고 단숨에 흑인음악 신(Scene)에서 촉망받는 여성가수로 거듭나며 성공적인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971년 1월 11일 ‘랩 / 힙합의 메카’ 뉴욕의 브롱스에... ‘힙합 소울의 여왕’ 메리 제이 블라이즈(Mary J. Blige)는 지금까지 발표한 다섯 장의 음반들 통해서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구축해나간 실력파 여성 R&B싱어이다. 1990년대 초반 R&B 계열에 혜성같이 등장한 그녀는 타고난 가창력을 등에 업고 단숨에 흑인음악 신(Scene)에서 촉망받는 여성가수로 거듭나며 성공적인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971년 1월 11일 ‘랩 / 힙합의 메카’ 뉴욕의 브롱스에서 태어난 메리 제이 블라이즈는 어린 시절부터 글래디스 나이트(Gladys knight), 알 그린(Al Green) 등의 소울을 즐겨들으며 풍부한 감성을 키워갔다. 이런 덕분에 지금까지도 그녀는 고음역이나 현란한 기교 위주가 아닌 ‘영혼으로 노래하는 싱어’라는 평가를 받게됐다. 그녀는 자신이 존경했던 아니타 베이커(Anita Baker)의 곡 ‘Caught up’을 가라오케 장비로 불러서 녹음한 데모 테이프가 레코드의 사장이던 안드레 헤렐(Andre Harrell)의 눈에 띄어 가수로 데뷔하는 결정적인 기회를 얻었다. 헤렐은 그녀의 보이스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결국 의 프로듀서로 활동하던 션 “퍼피” 콤스(Sean “Puffy” Combs), 일명 피 디디(P Diddy)는 그녀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곧바로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1992년 그녀의 데뷔작 이 발표되었을 때 비평계와 음악팬들은 파워풀한 가창력을 겸비한 걸출한 소울 싱어의 탄생에 한바탕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매력적인 보이스를 맘껏 자랑하며 소울과 R&B가 절묘하게 결합된 음악으로 그녀는 금새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이나 샤카 칸(Chaka Khan)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촉망받았다. 무려 300만장의 음반판매고를 기록한 그녀의 데뷔작품은 앨범차트 6위까지 순항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Real love’(7위), ‘Sweet thing’(28위), ‘You remind me’(29위), ‘Love no limit’(44위), ‘Reminisce’(57위) 같은 다수의 싱글 곡을 배출했다. 이듬해 같은 레이블 소속 아티스트들과 함께 (1993)에 참여한 후 다시금 피 디디와 작업한 소포모어 음반 (1994년)는 앨범차트 7위까지 기록했고 힙합과 소울을 성공적으로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기행진을 이어나갔다. 흑인들의 슬픔과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을 담은 곡들을 수록한 두 번째 음반은 싱글 ‘I’m goin’ down’(22위), You bring me joy(57위) 등이 히트했고, 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이듬해 그래미상에서 ‘베스트 R&B 앨범’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두 장의 음반으로 게토 흑인여성의 진솔한 삶과 생각들을 생생하게 표현해낸 그녀는 결국 ‘힙합 소울의 여왕’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자연스레 얻게되었다. 프로듀스를 맡았던 피 디디가 명성을 드높이게 된 계기가 된 시점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 후 잠깐의 시간동안 그녀는 베이비페이스(Babyface)가 총 프로듀스를 맡은 영화 의 사운드트랙 수록곡이었던 ‘Not gon’ cry’(2위)를 빅 히트시키기도 했다. 2집의 녹음기간 동안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기도 한 그녀는 자신을 지원해준 서지 나이트(Suge Knight)의 레이블과 계약하고 세 번째 정규음반 작업에 들어갔다. 1997년에 발매된 3집 는 지미 잼(Jimmy Jam) & 테리 루이스(Terry Lewis) 작곡콤비와 더불어 베이비페이스, 알 켈리(R. Kelly), 로드니 저킨스(Rodney Jerkins) 같은 실력파 뮤지션들과 함께 했다. 음반은 발매 첫 주 빌보드 앨범차트 정상에 등극했고 ‘Everything’(24위), ‘I can love you’(28위) 같은 준(準)히트 싱글을 배출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예전작품에 비해 보다 진부한 소울 사운드이다”라면서 다소 못마땅해 했지만 팬들은 여전히 그녀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이듬해인 1998년에 라이브 음반 (21위)를 발표한 뒤 그녀는 흑인 게토정신을 보다 더 공고히 한 4집 (1999년)를 발표했다. 음반은 ‘All that I can say’(44위)의 히트와 더불어 앨범 차트 2위까지 올랐으며 전작에 비해 그녀만의 스타일을 좀더 풍부하고 우아하게 담아내 한층 세련되고 깊이를 더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엘튼 존(Elton John)과 버니 토핀(Bernie Taupin),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아레사 프랭클린,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로렌 힐(Lauryn Hill), 베이비페이스 등 장르를 초월한 여러 뮤지션들과의 신선한 교류 중에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은 음악을 들려줘 다시 한번 1990년대 최고의 ‘소울 퀸’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2001년에 발매된 5집 는 그녀가 이전에 발표했던 그 어떤 작품보다도 음악적인 면에서 보다 많이 관여했으며 작곡까지 손을 대는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음반은 앨범차트 2위까지 기록했고, ‘Family affair’(1위), ‘No more drama’(15위) 같은 빅히트 싱글을 양산해냈다. 같은 해 모음집 를 발표해 스티비 원더의 ‘Overjoyed’를 커버해 수록했고, 이듬해에는 (76위)를 발표해 ‘Rainy dayz’(12위)를 히트시켰다. 지난해 그래미상에서는 무려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노래 : Charles Aznavour (샤를르 아즈나부르)
프랑스 샹송 가수 프랑스 샹송 가수
노래 : Julio Iglesias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 체결로 한때 중동평화를 이끌어냈던 이집트의 고(故) 사다트 대통령이 1970년대 후반 대통령 전용 특별헬리콥터를 타고 지방시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사하라 사막에서 매우 어렵게 살고 있는 유목민들을 목격하고 비행사에게 착륙을 지시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성은’을 베푸는 과정에서 사다트대통령은 생활 형편이 곤란한 이 유목민들이 모두 카세트녹음기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훌리오 이글레...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 체결로 한때 중동평화를 이끌어냈던 이집트의 고(故) 사다트 대통령이 1970년대 후반 대통령 전용 특별헬리콥터를 타고 지방시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사하라 사막에서 매우 어렵게 살고 있는 유목민들을 목격하고 비행사에게 착륙을 지시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성은’을 베푸는 과정에서 사다트대통령은 생활 형편이 곤란한 이 유목민들이 모두 카세트녹음기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라는 이름의 가수 테입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사다트대통령이 “이 가수를 압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일제히 “알다마다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죠.”라고 대답했다. 다음에는 “스페인어로 노래하는 가수인데, 노랫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유목민은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었다. “모릅니다. 하지만 이 노래가 러브송인지는 압니다. 그러면 됐지, 언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다트대통령은 유목민들이 훌리오는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대통령인지는 전혀 알지 못한 것 같았다고 뒤에 술회한 바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틴 가수로 꼽히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진가를 설명하는 데는 이 하나의 일화로 충분할 것이다. 1970년대에는 라틴 권역에서 만 이름이 알려진 그는 1980년대 들어서는 세계를 주름잡는 진정한 글로벌 스타로 거듭났다. ‘사하라 사막에서 사하라 호텔에 이르기까지’, ‘이집트에서 미국까지’ 전 세계 각계각층이 그의 매력에 포박된 것이다. 특히 중년여성들은 부드럽고 넉넉한 그의 목소리와 외모에 빠져 압도적 팬 층을 형성, 이를 두고 이탈리아의 한 여류 사회학자는 훌리오를 ‘폐경(肺經)기 여성의 새로운 남성적 상징’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1943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출생한 훌리오는 가수가 되기 전 법학 공부를 하던 중(영국 캠브리지 대학 졸업) 스페인의 축구 명문구단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골키퍼로 선수활동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교통사고로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자 가수로 지망을 조정했다. 1968년 오디션에서 합격한 뒤 스페인 지역 레이블을 통해 성공적인 음반활동을 하다가 1970년대 들어서는 부지런히 라틴 국가들을 돌며 지명도를 축적했다. 1978년 ‘CBS 인터내셔널’과 계약을 체결했으며 그 전후로 발표한 앨범들인 < A Mis 33 Anos >(1977년) < Emociones >(1979년) < Hey >(1980년)로 잇달아 히트를 기록,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음반시장을 주름잡았다. 1979년의 ‘Quiereme mucho(Ou est passee ma boheme)’와 1980년의 ‘Hey’가 이 시기의 빅 히트송들. 특히 ‘Hey’는 1980년대 초반 국내 라디오를 잠식, 적어도 한국에서는 최고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애청 레퍼토리로 기성세대의 기억에 남아 있다. 스페인어 이탈리어 불어만을 노래하던 그는 1980년대를 맞아서는 영미시장을 노려 1981년에는 콜 포터(Cole Porter)의 작품인 ‘Begin the beguine’를 스페인어로 부른 ‘Volver a empezar’로 마침내 영국차트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영어 곡보다는 여전히 스페인어 노래들이 더 사랑을 받았다. 1982년 앨범 < Moments >에서는 ‘Nathalie’를 비롯해 ‘Amor’ ‘Momentos’ ‘La paloma’ 등이 거푸 히트했다. 이 무렵 국내에선 ‘Hey’에 이어 다시 ‘Nathalie’가 폭발적으로 애청되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앨범을 찾는 고객들이 매장에 쇄도했다. 1984년 우리의 한 연예 잡지는 국가를 막론한 그의 폭넓은 인기에 주목, “현재 음악계에는 마이클 잭슨과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라이벌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는 기사를 게재했을 정도였다. 1983년 콜롬비아 레코드사로부처 전 세계 1억장 판매고로 다이아몬드 디스크를 받은 그는 이듬해 완연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꿈의 목표인 미국진출을 시도한다. 철저한 계획 하에 전곡을 영어로 부른 앨범 < 1100 Bell Air Place >를 내놓아 여기서 컨트리 슈퍼스타 윌리 넬슨(Willie Nelson)과 호흡을 맞춘 곡 ‘To all the girls I’ve loved before’는 전미차트 5위에 오르며 순식간에 1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 노래는 ‘전에 내가 사랑했던 모든 여인들에게’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유독 여성 팬이 많은 그의 이미지를 적절히 활용하는 기획이 돋보였다.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와 부른 곡 ‘All of you’도 19위에 올라 성공을 반복했다. 이후부터는 지속적으로 영어 노래를 앨범에 수록하기 시작해, ‘Ni te tengo ni te olivido’으로 다시 라틴의 맹주임을 확인시킨 앨범 < Libra >에서도 콜 포터의 곡 ‘I’ve got you under my skin’을 소화했다. 1988년에 낸 앨범 < Non Stop >에서도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와 짝을 맞춘 ‘My love’로 다시 싱글 차트에 명함을 내밀었다. (1993년 프랭크 시내트라의 앨범 < Duets >에선 ‘Summer wind’를 프랭크 시내트라와 함께 하모니를 일궜다) 스탠더드 팝에 대한 그만의 여유 넘치는 해석은 1990년 팝 리메이크 앨범인 < Starry Night >의 성공을 이끌었으며 여기선 제목을 제공해준 돈 맥클린의 ‘Vincent’와 리오 세이어의 ‘When I need you’가 널리 애청되었다. 1994년 앨범 < Crazy >에서도 윌리 넬슨이 써준 타이틀곡 ‘Crazy’는 줄기차게 전파를 탔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다시 중심을 라틴 앨범으로 돌려, 1995년 < La Carretera >, 1996년의 < Tango >, 2000년의 < Noche De Cuatro Lunas >, 2003년의 < Divorcio > 등을 발표했지만 선율의 매력은 영어 앨범보다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스페인어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는 물론 독일어 포르투갈어 심지어 일본어로도 노래를 불렀다. 그리하여 총 7개 국어로 부른 노래로 지금까지 2억장이 넘는 앨범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대 들어서 시장에서의 위치는 전 같지 않지만 여전히 앨범 판매력과 공연에서의 관객동원력은 유지하고 있다. 그의 인기는 아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Enrique Iglesias)가 잇고 있다.
노래 : Zucchero (주케로,Zucchero Sugar Fornaciari)
걸쭉하고 목소리로 노래하는 주케로(Zucchero)는 이탈리아의 국보급 가수로 통하는 인물이다. 국내에도 히트곡 모음집을 비롯한 몇 장의 앨범이 공개된 바 있다. 비록 미국과 영국의 팝 스타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1990년에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곡 ‘Senz una donna’(Without a woman)는 국내 팬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다. 기타 영웅 에릭 클랩튼(Eric Clapto... 걸쭉하고 목소리로 노래하는 주케로(Zucchero)는 이탈리아의 국보급 가수로 통하는 인물이다. 국내에도 히트곡 모음집을 비롯한 몇 장의 앨범이 공개된 바 있다. 비록 미국과 영국의 팝 스타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1990년에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곡 ‘Senz una donna’(Without a woman)는 국내 팬들에게도 꽤 알려져 있다. 기타 영웅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함께 유럽 투어에 나서기도 했으며, 위대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연례 자선행사로 유명한 ‘파바로티와 친구들’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 얼굴도 알려져 있다. 1956년 생이며 본명은 알델모 포르나치아리(Aldelmo Fornaciari). 70년대 말에 수의약품을 전공하면서 볼롱가에서 밴드를 결성했지만 지명도를 획득하지 못했고 결국 80년대 초반에는 노래부르기에서 작곡으로 전향했다. 하지만 86년 < Respetto > 앨범과 함께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 시작해 이듬해 앨범 < Blues >가 본국 이탈리아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면서 비로소 톱스타로 부상했다. ‘Senz una donna’가 수록된 87년의 앨범 < Ora Incenso Birra >도 유럽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Senz una donna’는 1991년 영국 소울 가수 폴 영(Paul Young)과 함께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뒤섞은 버전으로 다시 발표되어 영국차트 5위에 올랐다. 이 때가 이탈리아를 벗어 국제적 명성을 확보한 시점. 한편 이 싱글이 수록된 1990년의 앨범 < Zucchero Fornaciari >는 국제적 지향을 뚜렷이 반영, 영어 노래가 포함되었으며 에릭 클랩튼과 R&B 오르간주자인 지미 스미스(Jimmy Smith)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90년대 초반 그가 영국차트에 명함을 내민 또 다른 2곡은 모두 듀엣 곡으로 소울 여가수 랜디 크로포드(Randy Crawford)와 부른 ‘Diamante’와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호흡을 맞춘 ‘Miserere’로 뒤 곡은 U2의 보노(Bono)가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로써 얻은 지명도로 1994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도 출연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 트리뷰트 공연에 참여해 노래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영국가수로 비교한다면 조 카커(Joe Cocker)와 유사한 ‘블루스와 소울 성향의 록’이다. 앨범 제목으로 ‘블루스’로 내걸었다는 점이나, 폴 영 랜디 크로포드와 노래했다는 것이 말해준다. 열정적이고 혼에 넘친 창법이란 점에서 영미 소울 가수들과 유사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이탈리아적 요소를 놓치지 않는 것이 특징. 그는 2003년 프랑스 프로듀서 알랑 시몬(Alan Simon)이 주도한 환경 프로젝트 앨범 < Gaia >에 인도네시아 앙군(Anngun)과 함께 ‘World’란 곡으로 참여했다.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은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정통 재즈에서부터 최첨단 일렉트로닉 악기를 내세운 재즈 퓨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보여왔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향이 느껴지는 강한 서정성의 < Maiden Voyage >(1965)에서 슬라이 & 패밀리 스톤 풍의 펑키 리듬이 압도적인 < Headhunters >(1973)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특정 스타일로 규정될 수 없다. ...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은 4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정통 재즈에서부터 최첨단 일렉트로닉 악기를 내세운 재즈 퓨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보여왔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영향이 느껴지는 강한 서정성의 < Maiden Voyage >(1965)에서 슬라이 & 패밀리 스톤 풍의 펑키 리듬이 압도적인 < Headhunters >(1973)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은 특정 스타일로 규정될 수 없다. 정통 재즈에서부터, R&B, 일렉트로닉 뮤직, 펑키 등 다채로운 음악지형도를 펼쳐온 그는 한마디로 ‘변신’을 즐기는 재즈맨이다. 1940년 4월12일 미국 시카고의 사우스사이스에서 허버트 제프리 핸콕(Herbert Jeffery Hancock)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는 7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 일찍 두각을 나타내 11살에 이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모차르트 협주곡 D장조를 연주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기계 다루는데도 재능을 보여 나중에는 재즈 뮤지션으로서는 특이하게 대학서 전자공학을 전공한다. 이런 경력은 그가 1960년대 일렉트릭 피아노인 펜더 로즈(Fender Rhodes)나 클라비넷(Clavinet)과 같은 키보드 사운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대학서 만난 색스폰 주자 행크 모블리, 트럼펫 주자 리 모건과 연주 활동을 하면서 도날드 버드의 권유로 1961년 뉴욕으로 진출해 그의 밴드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재즈맨의 길을 걷게 된다. 잠시 후 재즈 레이블 블루 노트(Blue Note)사가 그에게 계약을 요청, 이듬해인 1962년 데뷔작 < Takin’ off >(1962)를 내놓는다.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 풍의 펑키한 피아노 주법이 인상적인 이 앨범의 수록곡 ‘Watermelon man’은 라틴 재즈 퍼커션 주자인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의 노래 버전으로 더 유명하다. 총 7장의 앨범을 블루 노트를 통해 발표하는 동안, 1993년 애시드 재즈그룹 US3가 커버해 유명해진 ‘Cantaloupe island’가 수록된 < Empyrean Isle >(1964)를 비롯하여 < Maiden Voyage >(1965), < Speak Like A Child >(1968)과 같은 명반을 통해 빌 에반스 풍의 서정성과 호레이스 실버의 펑키한 감각을 합쳐놓은 듯한 개성 어린 피아노 연주를 들려줌은 물론, 그의 탁월한 곡 쓰기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재즈 솔리스트로서 1960년대 내내 왕성한 활동을 보였지만, 재즈의 대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의 활동은 그가 보다 진취적인 재즈뮤지션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토니 윌리암스(Tony Williams), 론 카터(Ron Carter), 웨인 쇼터(Wayne Shorter),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그리고 허비 핸콕(Herbie Hancock)으로 이루어진 제2기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은 < E. S. P >, < Miles In The Sky >, < Socerrer >, < Nefertiti >, < Filles De Killimanjaro >와 같은 명반을 잇달아 발표한다. 당시 “Miles In The Sky”(1968)를 작업하던 중 마일스 데이비스의 권유로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허비 핸콕은 칙 코리아(Chick Corea)와 함께 키보드 사운드를 바탕으로 70년대 재즈-록 퓨전의 선두주자로 군림하는 초석을 다진다. 마일스와의 활동이 그가 ‘음악에 다양한 시도를 할 줄 아는 뮤지션’으로 비상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퓨전’으로의 음악성을 표방했던 1969년 허비 핸콕은 마일스를 벗어나 독립, 므완디시(Mwandish)라는 이름의 7인조 밴드를 결성한다. < Mwandish >(1970), < Crossing >(1971), < Sextant >(1973)에서 실험적인 ‘일렉트로닉-펑키’ 뮤직을 선보인 허비 핸콕은 다양한 종류의 키보드 사운드를 재료로 한 진보적인 재즈-록 퓨전을 선보이며 비평적 찬사를 얻는다. 이런 므완디시 밴드에서 보여준 허비 핸콕의 새로운 시도는 주목할 만했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실험적 사운드에 천착한 음악이 대중들이 수용하기엔 어려웠던 것이다. 허비 핸콕은 자신의 밴드에 쏟은 열정만큼 대중적 성과가 나오지 않자, 당시 유행하던 R&B의 문법을 자신의 음악에 대거 도입한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을 통해 경험한 ‘펑키 사운드’에 자신의 지향을 정했고 그 결과 나온 < Headhunters >(1973)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다. 빌보드 앨범 차트 13위까지 오른 이 앨범은 명료한 백 비트를 바탕으로 펑키 사운드가 전면에 부각된 ‘파티용 댄스뮤직’이었다. 200만장 판매라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자신감을 회복한 그는 연이어 발표한 < Thrust >(1974), < Man-Child >(1975), < Secret >(1976)를 계속 히트시키며 재즈 펑크(Jazz- Funk)의 전도사로서 1970년대 내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재즈 퓨전을 이 시기에 표방하면서도 그는 1977년 V.S.O.P.라는 팀을 결성, 1960년대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연주를 같이 했던 멤버들과 같이 ‘정통 재즈로의 외도(?)’를 즐기기도 한다. 재즈-퓨전에 이어 1980년대 윈턴 마샬리스(Wynton Marshallis)등에 의해 꽃 피운 포스트 밥(Post-bop) 혹은 신(新)전통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경향을 그는 이미 V.S.O.P.를 통해 그 도화선을 제시했던 것이다. 1980년대 들어 허비 핸콕은 또 한번의 변신을 감행한다. 1983년 발표한 < Future Shock >에 수록된 ‘Rockit’은 힙합 뮤직에 퍼져있던 스크래치(scratch) 사운드를 도입, 독특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른바 디스코-텍(Disco-Teque) 뮤직을 선보인다. < Head Hunters >에 이어 이번에는 컴퓨터로 찍어 낸 듯한 테크노 음악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음악 관계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 Future Shock >에 이은 1984년 작 < Sound System >으로 연속 그래미상을 거머쥔 허비 핸콕은 재즈 뮤지션의 한계를 뛰어 넘는 폭넓은 활동을 전개한다. 덱스터 고든이 주연했던 1986년 영화 < Round Midnight >에 참여, 이번엔 그래미상이 아닌 아카데미에서 오리지날 스코어 상을 수상한다. 1988년 테크노 팝 앨범 < Perfect Machine >을 끝으로 콜롬비아 레코드사를 떠난 허비 핸콕은 마일스의 추모앨범, TV 쇼 프로그램 진행자, 윈튼 마샬리스와의 협연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1994년 버브 레코드를 통해 < Dis Is Da Drum >을 발표하여 비평적 찬사를 받는 동시에 < Future Shock >에 이은 테크노 팝 열풍을 재현한다. 1995년엔 커트 코베인, 프린스, 토킹 헤즈, 비틀즈, 사이먼 & 가펑클 등의 록과 팝을 그만의 재즈 연주로 리메이크한 < The New Standard >를 발표했고 1998년엔 조지 거슈인(George Gershwin)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한 < Gershwin’s World >를 통해 그의 명성을 공고히 했다. 21세기를 맡아 예순을 넘기면서도 그 특유의 변신은 멈추지 않아 올 9월에 발표한 신작앨범 < Future 2 Future >를 통해서는 일렉트로닉과 다양한 장르의 혼합을 꾀하기도 했다.
연주 : Chris Botti (크리스 보티 )
재즈 트럼펫 연주자 재즈 트럼펫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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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 Rock Special Cha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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