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과 처음 만난 게 언제였을까?
수학 때문에 힘들어했던 기억의 시작은 언제쯤일까? 구구단을 지나 분수라는 개념을 마주치며 수학이 어렵다고 느꼈을 사람도 있을 테고, 중학교에 올라가 인수분해와 근의 공식을 외우면서 좌절한 사람도 있을 테고, 인문계생이라면 머리를 내저을 미적분부터 수학을 포기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에서 시작된다. 46점짜리 산수(지금은 수학이다) 시험지도 기가 막힌데, “기영이와 영희가 100미터 달리기를 했다. 기영이는 16초 걸렸고 영희는 20초 걸렸다. 기영이는 영희보다 몇 초 더 빨리 들어왔을까?”라는 기초적인 문제를 틀렸던 것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기대하던 아들이 이런 쉬운 문제를 틀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몰라서 틀렸을 리 없다고 생각해서 답을 채근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문제를 ‘몰라서’ 틀렸다. 어린 시절, 저자는 ‘크거나 많은 것이 좋다’라고만 생각했기에 영희의 20초가 ‘좋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누가 더 빨리 들어왔느냐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저자의 설명처럼, 아이들의 사고력은 결국 어른들의 세계, 객관적인 체계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저자에게 그 단계는 남들보다 좀 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수에 0을 곱하면 0이 된다”는 명제로 저자의 기억은 이어진다. 왜 0이 되는가? 예를 들어 ‘5?0’은 5을 ‘0’번 더했다는 것인데, 그게 어떤 의미일까? 하지만 반 아이 모두는 “어떤 수에 0을 곱하면 0이 된다”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너무 당연하듯이 선언하는 선생님의 말씀은 질문을 필요치 않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절대 당위에 대한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저자의 머릿속에서 고민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성찰을 위한 여정, 수학으로 길을 놓다!
수학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 첫 번째 장벽은 x나 y 같은 문자 기호를 사용하면서부터일 것이다. x나 y로 만들어진 수식은 개별성을 넘어서 일반성을 향한 세계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하므로, 매력적인 만큼 두렵고도 낯설게 다가온다. 기호와 수식으로 담아낼 수 있는 엄밀하고 객관적인 세계가 있다면, 일상은 언제나 고민하며 애를 쓰지만 정답은 없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정체 모를 삶의 고민 속에도 한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는 없을까?
대학에 입학 후 첫 시간, 수학과 만난 저자의 기억은 ‘등식 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분모인 n이 커질수록 은 점점 0으로 다가간다. 직관적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등식이었고, 고등학교에서 이미 배운 내용이었다. 하지만 대학 미적분 교과서에 실린 증명은 암호와 같았다. ‘임의의 양수 가 주어졌을 때, 이상의 값을 가지는 모든 에 대하여 을 만족하는 양의 정수 이 항상 존재한다.’ (증명 끝)
직관적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을 굳이 증명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대학 교과서의 증명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자가 이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무한이라는 부정확한 언어가 가질 수 있는 논리적 모순(예를 들어 ‘무한대+1=무한대’에서 양변에서 무한대를 빼면 1=0이 되어 모순)을 피하기 위해 ‘무한’이라는 용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고 등식과 부등식만을 써서 극한을 정의하려는 노력에서 등장한 증명은 미적분학이라는, ‘무한’이 곳곳에 들어가 있는 거대한 사유의 틀이 정당화되는 과정에서 생긴 증명법이었다.
대학에서 만난 수학의 세계를 통해 저자에게는 다른 차원의 사유의 세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삶의 고민과 함께 ‘무엇을’에서 ‘왜’로, 더불어 ‘존재 자체에 대한 탐색’으로 나아가게 했다.
저자가 복학생이었던 어느 날 서점에서 만난 특이한 제목의 책에서 만난 문장은 ‘수학은 완전하지 않다. 수학에 모순이 없음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책은 중남부 유럽 출신의 어느 수학자가 수학이라는 추상 세계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는 야심 찬 의도에서 증명에 착수한 결과,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한 아이러니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수학은 완전하지 않다(incomplete). 즉, 증명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영원히 알 수 없는 명제가 수학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어떤 학문이 자신이 완전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할까? 모순 없음을 증명할 수 없다니, 수학이 모순투성이라는 말인가? 병원균을 품에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래야 생명이 유지되는 인간이라는 존재처럼, 수학은 불완전하다는 말인가? 어쩌면 지금까지의 근본적인 고민 역시 완전하게는 해결할 수 없는, 영원히 열려 있는 세계가 아닐까? 수학의 불완전성은 오히려 그것이 닫혀 있는 죽은 세계가 아니라, 나처럼 세속적이고 편협한 생명체같이 경계 밖과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확장되어가는 자유로운 세계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저자의 생각은 다시 열려 있는 삶으로 끝을 맺는다.
“삶은 언제나 완전했다. 다만 완전함의 규모가 그때그때 달랐을 뿐이다. 내가 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니, 다른 존재들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어쩌면 초등학교 2학년 어느 가을날, 쓸쓸하고 어두운 운동장 끄트머리에서 ‘구도’라는 언어를 나에게 선물해준 진 선생님의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