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50개 거대도시 선발전, 그리고 ‘철도개발지수’
이 책의 거대한 야심은, 전 세계 거대도시 50개의 철도를 하나하나 분석하고 그에 점수를 매겨 순위를 부여한 1장에서부터 이미 드러난다. 런던, 도쿄, 파리 등 전통적인 철도 강국들의 거대도시 철도는 물론, 자동차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미국 거대도시의 철도, 막대한 투자로 신흥 철도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거대도시 철도, 몰려드는 막대한 인구가 가하는 압력을 묵묵히 지탱하고 있는 인도의 거대도시 철도, 그 밖에 중남미·아프리카·동남아시아를 망라한 지역에서 세계 도시 인구의 분포와 그 중요도를 감안해 대표 도시 50개를 선발하고, 그 도시들의 철도를 분석한다. 한국에서는 서울과 함께, 인구 1000만 명이라는 기준치보다는 인구가 적지만 한국에서 발간되는 책임을 고려해 부산이 포함되었다. 결과부터 밝히면 서울은 총점 41.2점, 전체 순위 22위였으며, 부산은 30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거대도시 가운데 부산이 생각보다 순위가 높다고 여길 독자가 있겠지만 39위(리우) 이후의 도시들은 철도 투자가 극히 미약한 ‘정체 그룹’이며 44위(카라치) 이하는 거대도시의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고 있음에도 그에 걸맞은 철도 투자는 사실상 포기한 도시들이라는 점에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난 수십 년간 철도에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진 서울조차도 철도 ‘추격 그룹’의 중하위에 머무른다는 사실은, 전 세계 인구 1000만 이상의 거대도시들 가운데서도 모든 면에서 수준 높고 정교한 철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도시가 얼마나 희귀한지, 나아가 미래의 철도 투자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밑그림을 제공한다. 이와 함께 1부 ‘교통의 세계와 철도’는 앞으로 이 책을 읽어 나가기 위해, 즉 철도라는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 지식을 다룬다.
표류하는 거대한 병목, 지연과 불만의 철도
3장 「서울 지역 철도망의 오늘과 어제」부터 4장 「전국망, 표류하는 거대한 병목」을 거쳐 5장 「광역망, 지연과 불만의 철도」에 이르는 3개 장은 구체적으로 서울 지역을 둘러싼 철도망을 살펴보는 지점이다. 먼저 현재의 전국망, 광역망, 도시망 철도의 상황을 개괄하고, 이어서 과거 한국 철도가 걸어온 역사를 두 시기로 나누어 살핀다. 즉 경인선이 개통한 1899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는 10년 단위로, 1968년 11월 29일 서울시가 70여 년간 운행해 온 노면전차를 전격 폐선한 때부터 2019년까지는 5년 단위로 촘촘히 쪼개 현재의 철도망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서술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철도 형성사를 살피며 저자는 정설로 받아들여져 온 제국주의 철도 논제, 즉 현재 한국 철도망의 구조는 일본 제국주의의 의도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논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다음처럼 말한다. “경부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현 한국 철도 전국망과 수도권 광역망의 구조는 설사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지 못했더라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본다. (...) 당시 한국 철도가 일제 침략의 도구로 작동하는 모습은, 철도망 건설 과정의 폭압성, 구체적인 철도 운용에서의 한인 차별, 당시 수송의 흐름 등에서 찾아야 하며, 철도망으로 인해 발생한 지리적 구조에서 찾기는 어렵다.”
해방 이후 형성된 철도망은 잘 알려졌듯 한국의 경제 개발과 그에 따른 서울 권역 재편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강남과 신도시 개발을 따라 당시의 정책 입안자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 유형화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탐색은 실제 대지를 달리는 철도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 제안하기에 앞서, 그 현실적 조건을 살피기 위함이다. “서울 거대도시 철도망의 여러 특징이 대체 어떤 변천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또 이들의 모습을 결정한 역사적 변수는 무엇이었는지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제안이라면, 지리적·공학적으로 충분히 설득력이 있더라도 도시의 역사적 미로, 대지의 완강한 저항을 뚫지 못하고 좌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4장과 5장에서는 전국망과 광역망의 모습을 노선별, 권역별로 나누어 아주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살핀다. 지난 수십 년간 해결되지 못한 채 지속되어온 경부1선의 병목, 중앙선의 빈약한 용량, 청량리역의 미약한 규모, 광역망의 빈틈과 불만들, 2010년 지방선거 당시 경기도 도지사 핵심 공약으로 제기된 이래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2020년 현재 개별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GTX를 둘러싼 논의까지, 서울과 수도권 철도망의 핵심 쟁점을 파헤친다.
거대도시 서울 철도,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6장이다. 1장에서 전 세계 거대도시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방대한 분석은, 그저 준비 운동에 불과하다. 거대도시 서울을 둘러싸고 저자가 제안하는 총 946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도망 계획은, 한국 철도망의 모습을 뒤바꿔놓기에 충분하다. 전국망 처리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선, 광역망의 유기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선, 수도권을 우회하거나 충청권과의 연결성을 높이기 위한 노선 등, 저자는 속도와 거리에 따라 각 철도망이 행해야 할 역할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촘촘히 엮어, 서울이라는 심장에서 출발한 열차들이 각자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달릴 튼튼한 혈관을 그려낸다.
이들 철도망 계획은 철도를 주축으로 대중교통의 역할이 확대되고 있는 거대도시 중심부와 자동차가 중심이 된 수도권으로 이분화된, 소위 ‘이중 교통 환경’을 자동차 이후의 시대에 맞춰 재편하는 한편, 향후 북한 철도, 나아가 동북아시아 철도망과의 연결에 대비하는 폭넓은 시야를 제시한다. 너무 먼 미래까지 섣불리 재단한다고 보는 이들에게는, 건설과 변형이 비교적 용이한 도로와 달리 철도에는 수십 년 뒤를 내다보는 시야가 필수적이며, 뚜렷한 대책 없이 “현존하는 단 한 개의 복선만으로 서울역을 ‘유라시아 철도 시발역’으로 만들겠다는 정치권의 전망은 현 서울역과 경의선의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무시한 채 내뱉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는 점을 밝혀 둔다.
철도라는 사회계약
물론 저자가 제안하는 철도망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높은 산이 있다. 바로 2040년까지 계획한 철도망 건설에 소요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다. 저자는 6장 마지막 부분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다루는 한편, 7장 전체에 걸쳐 재정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사실 “오늘날, 전 세계 상당수 지역에서 철도망에 대한 투자는 돈을 버리는 일에 가깝다. 다시 말해, 세계 각국의 정부는 철도망에 누구도 갚을 의무가 없는 거액의 돈을 투자하고 있다. 철도 투자의 대부분은 열차의 운행과 함께 마모되어 사라진다. 민간 여객 사업자들이 다수 존재하는 일본조차도 국철 민영화 당시의 막대한 부채 탕감, 최근의 건설 보조금을 감안하면 이런 경향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철도에 대한 ‘돈을 버리는 일에 가까운’ 투자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저자는 우선 120년에 걸친 한국 철도의 역사를 재무적 국면에서 네 개로 나누어 살펴봄으로써 역사적인 시야를 갖추고 현재 철도 투자가 가진 사회적 성격을 분석한다. 특히 1984년부터 2019년까지, 즉 한국 철도가 재무적으로 파국을 맞았다가 부흥하기까지 정부의 역할을 세밀히 살핀다. 교통시설특별회계를 비롯한 세입세출 법령의 변화, 각 시기별 교통세 투자 내역, 예비타당성 조사 등을 분석함으로써 과연 철도에 귀중한 정부 재정을 투자하는 것이 정당한지 여러 각도에서 냉철히 바라보고, 미래의 철도 재정을 위해 제언한다. “유류세에 기반하여 이뤄져 왔던 지난 30년간의 투자 제도는 이제 30년 내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개편될 것이고(전기차 기술의 압력 덕에) 또한 개편되어야만 한다는 것(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이 돌이키기 어려운 현실임을 감안하면, 철도를 하나의 사회계약으로 바라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현실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이 책은 일반 대중을 넘어 정책 입안자들에게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 미래의 교통
인류와 함께한 지 200년이 지난 교통수단인 철도는, 종종 한물 간 교통수단으로 취급받곤 한다. 실제로 20세기 중반 이후 자동차화의 물결과 함께 철도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문 앞까지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자동차와, 먼 거리를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항공기 앞에서 철도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자율 주행’이라는 장밋빛 예언은 철도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든다. 그러나 저자의 논의에 따르면, 기술 발전 및 자율 주행이 던지는 미래의 전망 속에는 따져봐야 할 중대한 문제들이 여럿 숨어 있다. 특히 이것이 몰고 올 소위 ‘두 번째 자동차화’는 “기후위기로 인한 인류의 파멸을 가속하는 페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의미에서 자율 주행이라는 장밋빛 예언과 동반하는, 기후위기라는 경고는 철도의 미래를 정반대로 예견한다. 전 지구 평균 기온의 상승을 ‘섭씨 2도’, 혹은 그 미만으로 억제하기 위한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시나리오를 현실화하는 데 철도는 다른 모든 육상 교통수단을 압도하는 힘을 보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효율과 탄소 배출량 면에서 철도를 대체할 수단은 없으며, “단순히 이동의 능력이 가져다주는 해방과 인간 개발에만 주목하지 않고,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훨씬 더 효율적이고 형평성 있는 방식으로 제공하는 과제에 주목하는 사람들에게 철도는 사실상 유일한 답이다.”
나아가 저자는 재정 마련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국제에너지기구의 ‘섭씨 2도’ 시나리오의 교통 부분 목표가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가능할지, 즉 전 세계에 걸쳐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건설되어야 할 철도망의 규모는 물론 그것을 어떻게 각 국가별로 담당해야 할지 세부적인 문제까지 과감하게 파고든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자문한다. “왜 철도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가.” 거대도시 서울을 둘러싼 철도를 집중해 다루며, “과거·현재·미래는 물론이고, 서울·한국·세계, 기술·경영·정책 등을 종횡으로 누비며”(정재정) 단순히 철도가 중요다고 역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데이터에 입각해 실제로 그러한지 세심하게 따지는 이 책은 분야를 막론하고 연구자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