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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시 한 잔 + 끝까지 남겨두는 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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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시 한 잔 + 끝까지 남겨두는 그 마음

[ 전2권 ]
권정생, 안도현, 기형도, 정호승, 이성복 저 외 52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북로그컴퍼니 | 2019년 03월 26일 리뷰 총점9.6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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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시 한 잔 + 끝까지 남겨두는 그 마음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3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440쪽 | 588g | 127*188*30mm

관련분류

이 상품의 이벤트 (8개)

이 상품의 구성 소개

이 상품은 세트 상품으로 아래의 낱개 상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매일, 시 한 잔

    매일, 시 한 잔 오늘도 시를 읽고, 쓰고, 가슴에 새기다

    윤동주 등저/배정애 캘리그라피 | 북로그컴퍼니 | 2019년 03월 26일

    11,700(10% 할인)

  • 끝까지 남겨두는 그 마음

    끝까지 남겨두는 그 마음 나태주 필사시집

    나태주 저 | 북로그컴퍼니 | 2019년 09월 19일

    12,420(10% 할인)

책소개

목차

저자 소개 (57명)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경북 안동 일직면에서 마을 교회 종지기로 일했고, 빌뱅이 언덕 작은 흙집에 살면서 『몽실 언니』를 썼다. 가난 때문에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세를 어린이들에게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200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굴곡 많은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보듬는 진솔한 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69년 단...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경북 안동 일직면에서 마을 교회 종지기로 일했고, 빌뱅이 언덕 작은 흙집에 살면서 『몽실 언니』를 썼다. 가난 때문에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세를 어린이들에게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200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굴곡 많은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보듬는 진솔한 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똥」으로 기독교아동문학상을 받았고, 1973년 「무명 저고리와 엄마」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사과나무 밭 달님』, 『바닷가 아이들』, 『점득이네』, 『하느님의 눈물』, 『밥데기 죽데기』,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몽실 언니』, 『먹구렁이 기차』, 『깜둥 바가지 아줌마』 등 많은 어린이책과, 소설 『한티재 하늘』, 시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등을 펴냈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홈페이지(http://www.kcfc.or.kr)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196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비롯해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196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비롯해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까지 11권의 시집을 냈다.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냠냠』, 『기러기는 차갑다』 등의 동시집과 『물고기 똥을 눈 아이』, 『고양이의 복수』, 『눈썰매 타는 임금님』 등 여러 권의 동화를 썼다.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국내에서 100만 부를 넘긴 베스트셀러로 15개국의 언어로 해외에 번역 출간되었다. 『백석평전』, 『그런 일』 등의 산문을 냈다.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주로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나 도시인들의 삶을 담은 독창적이면서 개성이 강한 시들을 발표한 시인 기형도. 1960년 경기도 연평 출생.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법계열에 입학하여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을 앞둔 1984년에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여 정치부 · 문화부 · 편집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 주로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나 도시인들의 삶을 담은 독창적이면서 개성이 강한 시들을 발표한 시인 기형도. 1960년 경기도 연평 출생.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법계열에 입학하여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을 앞둔 1984년에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여 정치부 · 문화부 · 편집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일보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주로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나 도시인들의 삶을 담은 독창적이면서 개성이 강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시집 『입 속은 검은 입』을 상자했으나, 출간을 준비 중이던 1989년 3월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그러나 살아생전 시집 한 권 묶지못하고, 첫시집이 유고시집이 되어버린 이 시인은 20년이 넘은 지금에서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시를 꿈꾸는 모든 문학청년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사고 있으며, 문학 대중의 압도적인 열광 속에, 한국 문학의 뜨거운 신화로 그리고 꺼지지 않는 생명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20년이 되는 2009년 3월을 기준으로, 1989년 5월에 출간된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초판 24쇄, 재판 41쇄, 총 65쇄를 찍었으며 24만 부가 판매되었다.

1999년 3월에 그의 10주기를 기리며 출간된 『기형도 전집』은 초판 15쇄를 찍었으며 4만 7천 부가 판매되었다. 또한 그의 20주기에는 그를 아끼고 추억하는 지인과 문우들의 산문, 그리고 그의 사후 그의 시를 분석하고 의미 지은 여러 비평가들의 밀도 높은 평문들을 한데 모은 『정거장에서의 충고―기형도의 삶과 문학』가 출간되기도 하였다.

어둡고 축축한 현실에서 길어올린, 불길하고 처연한 상상력의 시어들은 90년대의 어떤 시인도 넘어서지 못한 울림을 낳았다. 평론가 남진우씨가 기형도 시의 양대 질료로 요약했던 '환멸과 환상' 이야말로 지난 천년의 끝무렵을 지배하는 심상이기 때문일까. 기형도 시의 처절한 아름다움에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이란 이름을 붙였던 김현은 '그의 시는 현실적인 것을 변형시키고 초월시키는 아름다움, 추함과 대립되는 의미의 아름다움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앎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목표한다'고 읽어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일상 속에 내재하는 폭압과 공포의 심리 구조를 추억의 형식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한 시 60편을 담고 있는데, 그의 시 세계는 우울한 유년 시절과 부조리한 체험의 기억들을 기이하면서도 따뜻하며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시공간 속에 펼쳐 보인다.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반시(反詩)’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반시(反詩)’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 짧은 시간 동안,』 『포옹』, 『밥값』, 『여행』,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 『흔들리지 않는 갈대』, 『수선화에게』 등이, 동시집 『참새』, 영한시집 『부치지 않은 편지』,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어른을 위한 동화집 『항아리』, 『연인』, 『울지 말고 꽃을 보라』, 『모닥불』, 『기차 이야기』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가톨릭문학상, 상화시인상, 공초문학상, 김우종문학상, 하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언제나 부드러운 언어의 무늬와 심미적인 상상력 속에서 생성되고 펼쳐지는 그의 언어는 슬픔을 노래할 때도 탁하거나 컬컬하지 않다. 오히려 체온으로 그 슬픔을 감싸 안는다. 오랜 시간동안 바래지 않은 온기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그의 따스한 언어에는 사랑, 외로움, 그리움, 슬픔의 감정이 가득 차 있다. 언뜻 감상적인 대중 시집과 차별성이 없어 보이지만, 정호승 시인은 ‘슬픔’을 인간 존재의 실존적 조건으로 승인하고, 그 운명을 ‘사랑’으로 위안하고 견디며 그 안에서 ‘희망’을 일구어내는 시편 속에서 자신만의 색을 구축하였다. ‘슬픔’ 속에서 ‘희망’의 원리를 일구려던 시인의 시학이 마침내 다다른 ‘희생을 통한 사랑의 완성’은, 윤리적인 완성으로서의 ‘사랑’의 시학이다. 이 속에서 꺼지지 않는 ‘순연한 아름다움’이 있는 한 그의 언어들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경북 상주 출생으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여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경기고교에 입학하여 당시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원호를 통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때 「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수영의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71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진형준 등과 친분을 쌓았고 1976... 경북 상주 출생으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여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경기고교에 입학하여 당시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원호를 통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때 「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수영의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71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진형준 등과 친분을 쌓았고 1976년 복학하여 황지우 등과 교내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1977년 「정든 유곽에서」 등을 『문학과 지성』에 발표, 등단했다. 대구 계명대학 강의 조교로 있으면서 무크지 『우리세대의 문학1』에 동인으로 참가했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평가하는 말로 “철저히 카프카적이고 철저히 니체적이며 철저히 보들레르적”이었던 시인은 1984년 프랑스에 다녀온 후 사상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그리고 논어와 주역에 심취했다. 그리고 낸 시집이 동양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남해금산』이다. 이 시에는 개인적, 사회적 상처의 원인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정제된 언어로 표현되었다.

시인은 보다 깊고 따뜻하며, 더욱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뛰어난 시 세계를 새로이 보여준다. 서정적 시편들로써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그는 우리의 조각난 삶과 서러운 일상의 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바라보면서 비극적 서정을 결정적으로 고양시켜 드러낸다. 이 심오한 바라봄-드러냄의 변증은 80년대 우리 시단의 가장 탁월한 성취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환상소설의 한 장면처럼 납득하기 힘든 상황의 묘사, 이유가 선명하지 않은 절규 등을 담아냈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언어 파괴에 능란하다. 의식의 해체를 통해 역동적 상상력을 발휘, 영상 효과로 처리하는 데도 뛰어나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에 대해 냉소적이라거나 『그 여름의 끝』 이후의 관념성을 비판받기도 했다. 그는 초기 시의 모더니즘 경향에서 벗어나 동양의 형이상의 세계에 심취하였다.

1989년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1991년 프랑스 파리에 다시 갔다. 다른 삶의 방법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시인은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와 함께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테니스. 시인에게 마치 애인과도 같은 테니스는 그에게 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삶을 보다 즐겁게 만들었다. 2007년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나무인간 강판권」등으로 제5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1954년 9월 27일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을 거쳐,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 마을에서」 외 5편의 시를, 1985년 『실천문학』에 「마늘밭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박하고 순수한 시어를 사용하여 사랑과 슬픔 등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면서도, 역사적 상상력에 기반한 결백(潔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평단의 주목을... 1954년 9월 27일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을 거쳐,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 마을에서」 외 5편의 시를, 1985년 『실천문학』에 「마늘밭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박하고 순수한 시어를 사용하여 사랑과 슬픔 등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면서도, 역사적 상상력에 기반한 결백(潔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첫 시집인 『고두미 마을에서』(1985)는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등, 리얼리즘적인 역사적 상상력을 보여주었으나, 이후 『접시꽃 당신』(1986)에서 사별한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 시집은 독자의 큰 호응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1993)와 같은 시집에는 교사로 재직하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 · 투옥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교육시, 옥중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슬픔의 뿌리』(2002), 『해인으로 가는 길』(2006) 등을 통하여 자연에 대한 관조를 통한 인간의 존재론적 성찰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화해와 조화의 세계를 모색하고 있다.

시집으로 『고두미 마을에서』(창작과비평사, 1985), 『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 1986),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 『몸은 비록 떠나지만』(실천문학사, 1989),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제삼문학사, 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창작과비평사, 1993),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1994), 『부드러운 직선』(창작과비평사, 1998), 『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2005), 『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2006),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 2011)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푸른나무, 1990),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한양출판, 1994),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사계절, 1998), 『모과』(샘터사, 2000),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사계절, 2000),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좋은생각, 2004) 등이 있다. 그 외 『바다유리』(현대문학북스, 2002), 『나무야 안녕』(나무생각, 2007)과 같은 동화를 쓰기도 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조 활동으로 해직 · 투옥되었다가, 1998년 복직되어 2004년까지 충북 진천 덕산중학교에 재직했다. 1990년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상, 2009년 제22회 정지용 문학상, 2010년 제5회 윤동주상 문학 대상, 2011년 제13회 백석문학상, 2012년 제20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17년 6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등이 있고,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예술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등이 있다. 동화집으로는 『아기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동서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받았다. 『공부 못했지?...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등이 있고,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예술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등이 있다. 동화집으로는 『아기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동서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받았다. 『공부 못했지?』는 등단 이후 처음으로 펴내는 동시집이다.
김소월, 서정주로 이어지는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 불리는 박재삼 시인은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잘 표현해냈다.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고혈압으로 쓰러진 이후 끊임없이 병마에 시달렸으나 술과 담배를 멀리하지 않았고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독하게 따라다녔던 가난 속에서도 시작활동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특한 구어체의 어조와 잘 조율된 율격으로 새로운 전통시의 ... 김소월, 서정주로 이어지는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 불리는 박재삼 시인은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잘 표현해냈다.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고혈압으로 쓰러진 이후 끊임없이 병마에 시달렸으나 술과 담배를 멀리하지 않았고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독하게 따라다녔던 가난 속에서도 시작활동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특한 구어체의 어조와 잘 조율된 율격으로 새로운 전통시의 영역을 개척했다.
물질화된 사회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인간의 순수한 영혼에 대해 노래하며,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시인.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사 가서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발레/철학 등에 심취하였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시절... 물질화된 사회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인간의 순수한 영혼에 대해 노래하며,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시인.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사 가서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발레/철학 등에 심취하였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하였다.

1966년에는 황동규·박이도·김화영·김주연·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하였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해서 시 창작 강의를 하였다.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2005년에 정년퇴임하였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오르고,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을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쉬임없는 창작열과 언제나 자신의 시세계를 갱신하는 열정으로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초기의 시는 관념적인 특징을 지니면서 사물의 존재 의의를 그려내는 데 치중한 반면, 1980년대 이후로는 구체적인 생명 현상에 대한 공감을 다룬 시를 발표하였다. 2008년 내놓은 아홉 번째 시집 『광휘의 속삭임』 역시 사물의 바깥에서 사물을 해석하고 그에 대한 복잡한 의미의 얼개를 부여하는 대신, 사물들과 한 몸으로 움직이는 시를 갈망하게 된 시인의 태도에, 사물의 있음 그 자체, 움직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시적 화자의 자세에 저절로 주목하게 되는 작품집이다.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또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그는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일명 '국민 연애시'라고 할수 있는 '즐거운 편지'의 작가. 등단작인 '즐거운 편지'로 주목을 받았지만 안주하지 않고, 쉼 없고 경계 없는 사유로 발전을 거듭해온 시인이다. 본관은 제안(濟安)이다. 193...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일명 '국민 연애시'라고 할수 있는 '즐거운 편지'의 작가. 등단작인 '즐거운 편지'로 주목을 받았지만 안주하지 않고, 쉼 없고 경계 없는 사유로 발전을 거듭해온 시인이다.

본관은 제안(濟安)이다. 1938년 평안남도 숙천(肅川)에서 소설가 황순원(黃順元)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46년 가족과 함께 월남해 서울에서 성장했다. 1957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영어영문학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6∼1967년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1968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1970∼1971년 미국 아이오와대학교 연구원을 지냈으며, 1987∼1988년 미국 뉴욕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했다.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와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58년 서정주(徐廷柱)에 의해 시 「시월」 「동백나무」「즐거운 편지」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초기에는 사랑에 관한 서정시가 주로 썼지만 두번째 시집 『비가(悲歌)』(1965)부터는 숙명적 비극성을 받아들여 구체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6년에는 정현종(鄭玄宗) 등과 함께 동인잡지 『사계』를 발행했다. 1968년 마종기(馬鍾基), 김영태(金榮泰)와의 3명의 공동시집 『평균율 1』을 출간하고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열하일기』『전봉준』『허균』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변화를 시도했고 이러한 변화는 1970년대로 이어져 모더니즘으로 자리잡았다.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1975)에 대한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초기의 고뇌에서 자기 삶의 내부로 비극의 비전을 비쳤던 그는 차츰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수행하면서 민족의 약소함과 황량한 우리 삶의 풍경을 묘사했고 이 참담한 상황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드는 힘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무력감을 표명했다. ... 그의 사랑은 이웃으로 번지고 드디어는 삼남 - 이 가냘픈 한국과 그곳에서 괴로이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로 확산되었다.”라는 평을 하고 있다.

시집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는 실험정신이 돋보이는데 이 시집에서는 지적 시선에 의한 상상력의 조형이라는 단계를 뛰어넘어, 시인이 이 세계의 존재성과 거기에 얹혀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적 구조를 투시하면서 그것들과 친화와 역설의 이중적 얽힘을 그의 언어로써 새로이 구성해내고 있다. 1995년 『현대문학』에 연작시 「풍장 70」을 발표하면서, 1982년에 시작한 연작시가 마감되었다. 황동규 시인의 죽음관에 대해서 대면할 수 있는 이 시집은 독일어판으로도 번역되었다.
저 : 김소월 (金素月, 김정식)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만났다. 1915년 평안북도 곽산의 4년제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고 한시, 민요시,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후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 후 귀국했을 시점에 시인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별과 그리움을 주제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김소월은 자신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의 격려를 받아 그의 지도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 5편을 소월(素月)이라는 필명으로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봄밤」, 「풀 따기」 등을 발표했다. 1922년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를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1925년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하고, 같은 해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이는 시인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으로 기록된다. 그 밖에 1923년 『깊고 깊은 언약』 『접동새』 1924년 『밭고랑 위에서』 『생과 사』 1926년 『봄』 『저녁』 『첫눈』 1934년 『제이, 엠, 에스』 『고향』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926년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서 이도 실패하자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김소월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류머티즘을 앓으며 친척들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등 고생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만 32세의 나이로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9년 스승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발간된다. 1977년 [문학사상] 11월호에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 40여 편이 발굴, 게재된다.
저 : 김춘수 (KIM,CHUN-SOO,金春洙)
경상남도 통영시 동호동에서 출생하였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과 3학년에 재학중 중퇴하였다.경북대 교수와 영남대 문리대 학장, 제11대 국회의원,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고,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화훈장(은관) 등을 수상하였다. 1945년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1... 경상남도 통영시 동호동에서 출생하였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과 3학년에 재학중 중퇴하였다.경북대 교수와 영남대 문리대 학장, 제11대 국회의원,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고,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화훈장(은관) 등을 수상하였다.

1945년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발행된 동인지 『죽순』에 시 「온실」 외 1편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내며 문단에 등단한 이후, 「산악」·「사」·「기(旗)」·「모나리자에게」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주로 『문학예술』·『현대문학』·『사상계』·『현대시학』 등의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였고, 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릴케의 영향을 받아 삶의 비극적 상황과 존재론적 고독을 탐구하였으며,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 성격의 시를 써왔다. 그는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시를 써 '인식의 시인'으로도 일컬어진다.

시집으로 첫 시집 외에 『늪』·『기』·『인인(隣人)』·『꽃의 소묘』·『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김춘수시선』·『김춘수전집』·『처용』·『남천(南天)』·『꽃을 위한 서시』·『너를 향하여 나는』 등이 있으며, 시론집으로 『세계현대시감상』·『한국현대시형태론』·『시론』 등이 있다. 이 외에도 『한국의 문제시 명시 해설과 감상』(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저 : 백석 (BAEK SEOK,白石,白奭,백기행)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경성문화 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할 수 없어 노트에 시를 필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방 전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오산소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오산고보 졸업 후,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1934년에 귀국하여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여성사], [왕문사] 등에서 근무하며 시작 활동을 했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작 활동 외에도 많은 외서들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39년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42년 만주의 안둥 세관에서 일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된 후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1949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간행하였으나 1958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백석은 일제 강점기에도 모국어를 지키고자 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수록된 시 「통영」, 「적막강산」, 「북방」 등 백석의 대표작들은 실향 의식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한국의 대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저 : 오규원 (OH,KYU-WON,吳圭原, 본명 : 오규옥)
등단 이래 '시의 언어와 구조'에 대하여 부단히 탐구하였으며, 초기와 중기의 시에서는 타락한 시장경제와 현대의 물신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참된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인간 주체에 대한 반성적 시각이, 1990년대 이후에는 시를 쓸 때 '주체중심, 인간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서 그 관념을 생사하는 수사법도 배제한, 살아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들을 구현'해야 한다는 '날(生) 이미지'론을 역설한 시인이다. 1941... 등단 이래 '시의 언어와 구조'에 대하여 부단히 탐구하였으며, 초기와 중기의 시에서는 타락한 시장경제와 현대의 물신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참된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인간 주체에 대한 반성적 시각이, 1990년대 이후에는 시를 쓸 때 '주체중심, 인간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서 그 관념을 생사하는 수사법도 배제한, 살아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들을 구현'해야 한다는 '날(生) 이미지'론을 역설한 시인이다.

1941년 경남 밀양 삼랑진에서 출생하였고,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1981)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1987) 『사랑의 감옥』(1991)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 『오규원 시 전집』(전2권, 2002) 등이 있으며 시선집 『한 잎의 여자』(1998), 시론집 『현실과 극기』(1976) 『언어와 삶』(1983) 『날이미지와 시』(2005) 등과 시 창작 이론집 『현대시작법』(1990)을 상자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2007년 2월에 작고하며 유고 시집으로 『두두』를 남겼다.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윤동주는 청춘 시인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에 의하면 아직 새파란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글을 구사하면서 작품을 발표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용정과 경성 신촌 일대에서 문학청년들과 몸을 부대끼며 시를 썼기에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했다. 1931년(15세)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16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썼고 이는 오늘 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1937년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를 발표했다.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9년 조선일보에 「유언」, 「아우의 인상화」, [소년(少年)]지에 「산울림」을 발표하였다. 처음 윤동주 시들은 노트에 봉인된 채, 인쇄되지도 않았고 신문 지면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지고 난 후 동문들이 그의 노트에 있던 시를 모아 정음사에서 출판한다. 유해가 안치된 지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어 혼란한 시기에 청춘 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저 : 한용운 (韓龍雲, 만해, 한유천)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
한국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이화여전 재학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다. 그후 「눈 오는 밤」, 「망향」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해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 한국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이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이화여전 재학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을 발표하였다. 그후 「눈 오는 밤」, 「망향」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해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시에는 주로 개인적인 고독과 슬픔의 정서가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전통 문화와 농촌의 정서가 어우러진 소박한 서정성, 현실에 초연한 비정치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중에 쓴 작품 중에는 「군신송」 등 전쟁을 찬양하고 전사자들을 칭송하는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957년 12월 10일 유명을 달리 하였다.
아일랜드의 시인 W.B. Yeats는 더블린의 샌디마운트가에서 탄생했다.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더블린 및 런던에서 화가가 되려고 수업하였으나 전향하여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최초의 주목할 만한 시집 《오이진의 방랑기 The Wandering of Oisin and other Poems》(1889)는 켈트 문학 특유의 유현(幽玄)하고 표묘(渺)한 정서를 풍겨, 당시의 세기말 시인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그들과의 ... 아일랜드의 시인 W.B. Yeats는 더블린의 샌디마운트가에서 탄생했다.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더블린 및 런던에서 화가가 되려고 수업하였으나 전향하여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최초의 주목할 만한 시집 《오이진의 방랑기 The Wandering of Oisin and other Poems》(1889)는 켈트 문학 특유의 유현(幽玄)하고 표묘(渺)한 정서를 풍겨, 당시의 세기말 시인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그들과의 교우로 ‘시인 클럽’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이 시기의 그는 라파엘 전파(前派)의 영향 아래, 낭만적인 주제와 몽환적(夢幻的)인 심상(心象)을 즐겨 묘사하였다.

1891년 동지들과 더불어 아일랜드 문예협회를 창립, 당시 팽배하던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이어 그레고리 부인 등과 협력하여 1899년에 아일랜드 국민극장(후의 애비극장)을 더블린에 창립하였다. 이 동안 그는 환상적이며 시적인 《캐서린 백작부인》(1899년 초연)을 비롯하여 몇 편의 뛰어난 극작품을 발표, J.M.싱 등과 협력하여 아일랜드 극(劇) 발전을 위하여 힘쓰는 한편, 미모의 민족주의자 M.곤 등을 통해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아일랜드 자유국 성립 후에는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192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극장 경영, 배우 훈련, 정치 참여 등 그의 시인으로서의 생의 중기는 대체로 실천에 중점을 두었다. 낭만적이고 신화적인 그의 시상은 이 실천으로 하여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여전히 심령론(心靈論) 연구를 계속하였고, 1917년에는 무녀(巫女)와 결혼까지 하였다. 예이츠의 복잡한 후기의 시적 정신이 가장 분명하게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시집 《마이켈 로버츠와 무희(舞姬)》(1921) 《탑(塔)》(1928) 등에서 비롯된다 하겠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보여주던 여성적이고 우미하던 스타일은 딱딱하고 건조한 남성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환상적이던 심상(心象)은 금속적(金屬的)이라 할 만큼 구체성을 지닌 심상으로 전화(轉化)하였다. 그와 동시에 주의의 초점은 그 근저에 깔린 세계관(그것은 그의 경우, 동시에 예술관이기도 하지만)의 심화이다.

그는 시초부터 라파엘 전파, 이어서 상징주의의 영향에서 자연과 대립하여, 자연보다 우월한 것으로서의 예술의 세계를 믿어 왔다. 그의 후기의 고투는 이 자연(자아)의 세계와 자연 부정(예술)의 세계의 상극을 극복하는 고뇌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고뇌를 그는 W.블레이크의 《예언의 서(書)》를 생각하게 하는, 독자적 신화로써 극복하려고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난해한 산문집 《환상 (A Vision)》(1925) 을 지었다.
저 : 김영랑 (영랑令郞, 윤식)
시인, 본명은 김윤식이며 아호는 영랑(令郞)이다.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보통고등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 후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을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여러 시인과 더불어 아호인 영랑(令郞)으로 활동했다. 19... 시인, 본명은 김윤식이며 아호는 영랑(令郞)이다.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보통고등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그 후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을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여러 시인과 더불어 아호인 영랑(令郞)으로 활동했다.

1935년에 첫 번째 시집인 『영랑시집』을 시문학사에서 간행했다. 『영랑시집』에는 총 53편의 시가 실려 있으며, 각각의 시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제목을 쓰지 않고 일련번호를 붙여 시집에 실었다. 이후 김영랑은 1949년에 중앙문화사에서 『영랑시집』을 출간했다.

김영랑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했으며, 광복 후 신생 정부에 참여해 당시 중앙행정부인 공보처의 출판국장으로 일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유탄을 맞아 부상을 당해 9월 서울에 위치한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현재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등 한국적 정서가 담긴 서정시를 많이 발표했다. 대표 시집으로 『영랑 시집』, 『영랑 시선』 등이 있다.
1970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났다. 1996년 『창작과비평』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녹턴』,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캔들 플라워』, 『물의 연인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청소년소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청소년시집... 1970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났다. 1996년 『창작과비평』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녹턴』,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캔들 플라워』, 『물의 연인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청소년소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청소년시집 『댄스, 푸른푸른』, 『아무것도 안 하는 날』, 산문집 『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부상당한 천사에게』, 『사랑, 어쩌면 그게 전부』 등을 펴냈고, 그외 다수의 시해설서가 있다. 현대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고정희상, 발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아름답고 섬세한 감성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신서정파 시인. 1965년 인천 덕적에서 출생하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거쳐 방송대, 인하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91년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9년 「마당에 배를 매다」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아름답고 섬세한 감성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신서정파 시인. 1965년 인천 덕적에서 출생하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거쳐 방송대, 인하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91년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9년 「마당에 배를 매다」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등의 시집과『물의 정거장』, 『물 긷는 소리』등의 산문집이 있다. 장석남 시인의 시에는 그리움이 있다. 시간과 내력을 꿰뚫는 그의 시선 앞에서 사물들은 그 내면에 숨긴 고독을 드러내고 돌아갈 고향을 반추한다.
20세기의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작가. 『두이노의 비가』, 『말테의 수기』 등 문학사에 남을 걸작을 내놓았다. 10대 초반이던 발튀스의 재능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화가의 길을 권했으며, 이후로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75년 프라하에서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다. 부친은 군인이었으나 병으로 퇴역하여 철도회사에 근무하였다. 릴케의 어머니는 ... 20세기의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작가. 『두이노의 비가』, 『말테의 수기』 등 문학사에 남을 걸작을 내놓았다. 10대 초반이던 발튀스의 재능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화가의 길을 권했으며, 이후로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875년 프라하에서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다. 부친은 군인이었으나 병으로 퇴역하여 철도회사에 근무하였다. 릴케의 어머니는 릴케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르네Rene라 짓고, 여섯 살까지 딸처럼 키웠다. 양친은 성격의 차이로 해서 릴케가 9세 때 헤어지고 말았다. 열한 살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만 적응하지 못한다. 이후 로베르트 무질의 첫 장편『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의 배경이 되는 육군고등사관학교로 옮기나 결국 자퇴한다. 1895년 프라하대학에 입학하고서 1896년 뮌헨으로 대학을 옮기는데, 뮌헨에서 릴케는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 시인으로 살겠다고 결심한다.

살로메의 권유로 르네를 독일식 이름인 라이너로 바꿔 필명으로 사용한다. 1901년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만나 결혼한다. 그녀가 로댕의 제자였으므로 그 자신도 로댕을 만나게 되어 예술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02년 파리에서 로댕을 만나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는다. 클라라와 헤어진 릴케는 로마에 머무르며『말테의 수기』를 완성하였으며, 이후 1911년에 마리 폰 투른 운트 탁시스-호엔로에 후작 부인의 호의로 두이노 성에서 겨울을 보낸다. 이곳에서 바로 전 세계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될 릴케 만년의 대작이며 10년이 걸려 완성할『두이노 비가』의 집필을 시작한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릴케는 스위스의 뮈조트 성에 머무는데, 이곳에서 그는 폴 발레리 등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낸다. 발레리의 작품을 독어로 번역하고 또 직접 프랑스어로 시를 쓰던 시인은 1926년 백혈병으로 스위스의 발몽 요양소에서 죽는다.
시인이자 철학자이자 화가였던 칼릴 지브란은 수많은 예언자들을 배출한 땅 레바논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5세가 되던 해, 다시 고향을 돌아와 대학까지 학업을 마치고, 190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예술을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림 공부를 하며 뉴욕, 보스턴에서 여러 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작품 활동 초기에 그는 주로 아랍어로... 시인이자 철학자이자 화가였던 칼릴 지브란은 수많은 예언자들을 배출한 땅 레바논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5세가 되던 해, 다시 고향을 돌아와 대학까지 학업을 마치고, 190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예술을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림 공부를 하며 뉴욕, 보스턴에서 여러 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작품 활동 초기에 그는 주로 아랍어로 된 글을 썼다.

아랍어 작품으로는『반항하는 영혼』(1908), 단편 『부러진 날개』(1912) 등이 있다. 그가 아랍어로 쓴 작품들은, 그를 아랍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당대의 문학적인 천재이자 영웅으로 추앙 받게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아랍어 세계를 뛰어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의 시는 20개 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조각가 로댕이 시인이자 화가였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과 비교하기도 했던 그의 그림은 세계의 여러 대도시들에서 전시되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20년을 미국에서 살면서 영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예언자』는 1923년 40세의 칼릴 지브란이 쓴 대표작이다. 아랍어가 아닌 영어로 쓰였으며, 발표 당시에는 비평적으로 냉담한 평가를 받았지만 1957년 미국에서 100만 부, 1965년에는 250만 부, 1998년에는 900만 부가 팔리는 등 대중적으로는 널리 사랑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으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삶의 본질을 다룸으로써 지금까지도 읽는 이에게 인생에 대한 통찰과 따뜻함을 안겨준다.

『예언자』를 비롯해서 영어로 쓴 다른 여러 시집들 그리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그림들은 수많은 미국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깊은 영감을 고무시켰다. 『예언자』는 20세기에 영어로 출간된 책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되었으며, 사람들은 이 책을 ‘20세기의 성서’라고까지 불렀다. 그의 저서에는 『눈물과 미소(A Tear and Smile)』, 『부러진 날개(Broken Wings)』, 『광인(The Madman』, 『선구자(The Forerunner)』, 『사람의 아들 예수(Jusus the Son of Man)』 등이 있다.

칼릴 지브란은 1931년 4월 10일 결핵과 간경화 증세의 악화로 인해 4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고향 레바논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1932년 그의 시신은 레바논에 있는 마르 사르키스 수도원에 옮겨져 현재는 레바논에 안치되어 있다. 죽기 전에 그는 레바논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 소원은 1932년에 메리 하스켈과 그의 언니 마리아나가 레바논에 있는 마르 사르키스 수도원을 구입하여 그 곳에 지브란을 묻고, 지브란 박물관을 세우면서 이루어졌다.
1945년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초현리 111번지 그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공주사범학교와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2007년 공주 장기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43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친 뒤, 공주문화원장을 거쳐 현재는 공주풀꽃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1971년 [서울신문(현, 대한매일)] 신춘문예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등단 이후 끊임없는 왕성한 ... 1945년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초현리 111번지 그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공주사범학교와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2007년 공주 장기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43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친 뒤, 공주문화원장을 거쳐 현재는 공주풀꽃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1971년 [서울신문(현, 대한매일)] 신춘문예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등단 이후 끊임없는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수천 편에 이르는 시 작품을 발표해왔으며, 쉽고 간결한 시어로 소박하고 따뜻한 자연의 감성을 담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풀꽃」이 선정될 만큼 사랑받는 대표적인 국민 시인이다. 흙의문학상, 충남문화상, 현대불교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향토문학상, 편운문학상, 황조근정훈장, 한국시인협회상,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작품상, 김삿갓문학상 등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1973년에는 첫 시집 『대숲 아래서』 펴냈고, 이후 1981년 산문집 『대숲에 어리는 별빛』, 1988년 선시집 『빈손의 노래』, 1999년 시화집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2001년 이성선, 송수권과의 3인 시집 『별 아래 잠든 시인』, 2004년 동화집 『외톨이』, 2006년 『나태주 시선집』, 『울지 마라 아내여』, 『지상에서의 며칠』를 비롯하여 『누님의 가을』, 『막동리 소묘』, 『산촌엽서』, 『눈부신 속살』, 『그 길에 네가 먼저 있었다』,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마음이 살짝 기운다』, 『어리신 어머니』, 『풀꽃과 놀다』, 『혼자서도 꽃인 너에게』,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 등 다양한 분야의 많은 문학작품을 출간하였다.

1972년 「새여울시동인회」 동인, 1995년엔 「금강시마을」 회원,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충남문인협회 회장, 2002년부터 2003년까지 공주문인협회 회장,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공주녹색연합 대표 등을 역임하였으며, 공주문화원 원장, 계간 「불교문예」 편집주간, 격월간 시잡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공동주간, 지역문학인회 공동좌장,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부회장)을 지냈다.
주로 집에서 글을 쓰고 초청해 주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문학 강연을 하고 있다. 청소년기의 꿈은 첫째가 시인이 되는 것, 둘째가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사는 것, 셋째가 공주에서 사는 것이었는데 오늘에 이르러 그 꿈을 모두 이루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공주에서 살면서 공주풀꽃문학관을 건립, 운영하고 있으며 풀꽃문학상과 해외풀꽃문학상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고, 현재 공주문화원장과 충남문화원연합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풀꽃문학관에서, 서점에서, 도서관에서, 전국 방방곡곡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게 요즘의 일상이다. 가깝고 조그마한, 손 뻗으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지독히 다행한』, 육필시집으로 『벌새가 사는 법』, 산문집으로 『시의 숲을 거닐다』, 『직소포에 들다』, 『내일을 사는 마음에...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지독히 다행한』, 육필시집으로 『벌새가 사는 법』, 산문집으로 『시의 숲을 거닐다』, 『직소포에 들다』, 『내일을 사는 마음에게』,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공초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시 종로구 야주개(현 당주동)에서 미곡상과 어물전을 경영하던 방경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식민치하 사람 대접을 못 받던 불쌍하고 학대받던 조선 어린이를 위해 그는 수많은 선구적 사업을 몸소 개척하며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사에 잊을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1921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1922년 처음 어린이날을 선포한 데 이어, 이듬 해 1923년 제1회 어린이날을 전국 규모로 개최... 서울시 종로구 야주개(현 당주동)에서 미곡상과 어물전을 경영하던 방경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식민치하 사람 대접을 못 받던 불쌍하고 학대받던 조선 어린이를 위해 그는 수많은 선구적 사업을 몸소 개척하며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사에 잊을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1921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1922년 처음 어린이날을 선포한 데 이어, 이듬 해 1923년 제1회 어린이날을 전국 규모로 개최함으로써 ‘어린이날’을 확대 정착시켰다. 1923년 3월 순문예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같은 해 5월 1일 일본 동경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문제 연구 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어린이 문제의 연구와 사명을 진지하게 각성하고 동요, 동화, 동화극, 아동자유화, 세계아동예술전람회 등 우리나라 어린이 문학과 예술 방면의 성장과 부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방정환의 어린이운동은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공훈으로 방정환은 2017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국가 보훈처)로 선정되었다. 생전에 남긴 유일한 책은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1922, 개벽사)이며, 그밖에 동요 「귀뚜라미 소리」, 「눈」, 동화 「호랑이 형님」, 「사월 그믐날밤」, 소년소설 「만년샤쓰」, 소년탐정소설 「칠칠단의 비밀」 등 어린이를 위해 뛰어난 문학을 많이 남겼다.
1992년 「조선일보」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오랜밤 이야기』(창비)를 펴냈다. 현재 북한 강변에서 동화쓰는 남편,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한때 한겨레 신문사에서 월급쟁이로 몇 년 버티다 프리랜서로 책 만들기를 시작, 13년 동안 100권 가까운 책을 만들었다. 일 중독 컴퓨터 중독으로 노트북을 안경처럼 끼고 살면서 늘 무슨 책을 만들까만 생각하고 있다.... 1992년 「조선일보」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오랜밤 이야기』(창비)를 펴냈다. 현재 북한 강변에서 동화쓰는 남편,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한때 한겨레 신문사에서 월급쟁이로 몇 년 버티다 프리랜서로 책 만들기를 시작, 13년 동안 100권 가까운 책을 만들었다. 일 중독 컴퓨터 중독으로 노트북을 안경처럼 끼고 살면서 늘 무슨 책을 만들까만 생각하고 있다. 5년 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를 외치며 남편과 두 딸과 함께 북한강변으로 이사를 했지만, 끝내 컴퓨터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지난해 안식월을 가진 이후부터 조금 헐렁헐렁하게 사는 듯한 냄새를 풍긴다. 여전히 노트북을 끼고 살지만 남의 글을 쓰지 않고, 자신만의 여행기나 기획서를 집필하면서 가끔은 여행을 하는 여유도 누린다. 최근 산문집『안식월』, 『문호리 지똥3리네』를 펴냈다.
저 : 이상화 (상화尙火, 무량無量, 상화想華, 백아白啞)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바로 꿰뚫어보는 가운데 치열한 시대 정신과 따뜻한 휴머니즘 정신을 아름다운 예술 혼으로 승화시킨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 1901년 4월 5일(음력)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한문 수학 후 상경하여 중앙학교에 입학, 1918년 3월 25일에 수료하고, 그 해 7월 서문로 집을 나서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다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 ...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바로 꿰뚫어보는 가운데 치열한 시대 정신과 따뜻한 휴머니즘 정신을 아름다운 예술 혼으로 승화시킨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

1901년 4월 5일(음력)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한문 수학 후 상경하여 중앙학교에 입학, 1918년 3월 25일에 수료하고, 그 해 7월 서문로 집을 나서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다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 거사 모임에 참석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 냉동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하였다.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월탄 박종화와 만나 [백조(白潮)] 동인으로 문단에 참여하기 시작, 창간호에 시「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도일하여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 1923년 3월 아테네 프랑세를 수료하였으나,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본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에 분노하여 귀국했다. 가회동 이른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 「나의 침실로」를 [백조] 3호에 발표, 1925년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다음해인 1926년, [개벽] 70호에 그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지만 이 시의 게재로 [개벽]지는 판매 금치 처분을 당했다. 작품활동 초기에는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이 시기를 고비로 식민치하의 민족 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 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이후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다가,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에서 부인과 세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운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지 5년째 되는 1948년에, 해방 후 최초의 시비가 달성공원에 건립되었다.
1770년 4월 7일 영국의 코커머스에서 아버지 존 워즈워스와 어머니 앤 쿡선 워즈워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과 이웃의 보살핌 속에 유년 시절을 보냈다. 178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문에는 뜻이 없었다. 잠시 프랑스혁명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을 겪은 후 자신의 시적 재능과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여동생 도러시 그리고 벗 콜리지와의 문학적 교류로 유명하... 1770년 4월 7일 영국의 코커머스에서 아버지 존 워즈워스와 어머니 앤 쿡선 워즈워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과 이웃의 보살핌 속에 유년 시절을 보냈다. 178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문에는 뜻이 없었다. 잠시 프랑스혁명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을 겪은 후 자신의 시적 재능과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여동생 도러시 그리고 벗 콜리지와의 문학적 교류로 유명하며, 그 결실이 바로 낭만주의 영시의 기폭제가 된 『서정담시집』이다. 1843년 계관시인이 되었고, 1850년 4월 23일에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저녁 산책」, 『서술적 소묘들』, 『변방 사람들』, 『폐허가 된 오두막』, 「틴턴 사원」, 『루시 시편들』, 「솔즈베리 평원 기행」, 『그래스미어 고향집』, 『서곡』, 「마이클」, 「결심과 독립」, 「의무에 부치는 송가」, 『영혼불멸의 송가』, 『소요』, 『라일스톤의 하얀 암사슴』, 『마부』, 『피터 벨』 등이 있다.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임화예술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임화예술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등이 있다.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로 문단과 독자 모두의 사랑을 받아 온 문정희 시인은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 진명여고 재학 중 백일장을 석권하며 주목을 받았고, 여고생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첫 시집 『꽃숨』을 발간했다.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였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문학 ...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로 문단과 독자 모두의 사랑을 받아 온 문정희 시인은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 진명여고 재학 중 백일장을 석권하며 주목을 받았고, 여고생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첫 시집 『꽃숨』을 발간했다.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였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문학 포럼에서 작품 「분수」로 '올해의 시인상'(2004), 2008년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문학 부문 등을 수상했다. 스웨덴 하뤼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시카다(Cikada)상도 수상하였다.

어린 시절 시를 쓰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50여 년 동안 시를 쓰고 있다. 젊은 날부터 뉴욕 등 세계를 살며 부딪치며 많은 저서를 냈다. 15종의 시집과 다수의 장시집, 시극집, 산문집, 논문, 편저 등이 있으며 영어를 비롯한 11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14종의 저서가 있다. 프랑스 ‘시인들의 봄’ 등 국제 도서전 및 문학 행사에 수차례 초청되었다.

1996년 미국 Iowa대학(IWP) 국제 창작프로그램에 참가했다. 버클리 대학, 이탈리아 베니스 대학,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 프랑스 시인들의 봄 및 세계도서전, 쿠바 아바나 북페어 등 다양한 국제행사에 초청되었다. 영어 번역시집 『Windflower』, 『Woman on the Terrace』, 독어 번역시집 『Die Mohnblume im Haar』, 스페인어 번역시집 『Yo soy Moon』, 알바니아어 번역시집 『kenga e shigjetave』, 『Mln ditet e naimit』외 다수의 시가 프랑스어, 히부르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문정희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 『하늘보다 먼곳에 매인 그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 『지금 장미를 따라』, 『사랑의 기쁨』, 『다산의 처녀』, 『카르마의 바다』, 『응』, 『작가의 사랑』 외에 장시집 『아우내의 새』, 시극집 『구운몽』 등 다수의 산문집을 포함하여 5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저 : 조지훈 (趙芝薰, 본명 동탁(東卓))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생으로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마쳤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의 외전강사를 역임하였고 조선어학회〈큰사전〉편찬에도 참여했다.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생으로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중학과정을 마쳤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의 외전강사를 역임하였고 조선어학회〈큰사전〉편찬에도 참여했다.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1946년《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렸다. 1948년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4·19와 5·16을 계기로 현실에도 적극 참여하여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와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을 썼다. 1963년에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한국학 연구》,《채근담》등의 논저를 남겼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밖집 열두 식구」 등 7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 『꽃의 권력』, 『고요를 시청하다』와 육필시선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이 있고, 산문집으로 『쌀밥의 힘』, 『사...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밖집 열두 식구」 등 7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새벽 들』, 『사람의 등불』,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쪽빛 문장』, 『꽃의 권력』, 『고요를 시청하다』와 육필시선집 『방죽가에서 느릿느릿』이 있고, 산문집으로 『쌀밥의 힘』,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와 시론집 『주옥시편』, 『시간의 말』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시인 신석정(辛夕汀)은 1907년 7월 7일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필명은 소적(蘇笛)·서촌(曙村)이다. 시인이자 한학자였던 조부 신제하(辛濟夏)와 부친 신기온(辛基溫) 슬하에서 당시(唐詩)와 한학을 공부하며 엄격한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첫 작품 <기우는 해>를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1924년 11월 24일자 ≪조선일보≫에 발표한 후, 1930년에 상경해 동국... 시인 신석정(辛夕汀)은 1907년 7월 7일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필명은 소적(蘇笛)·서촌(曙村)이다. 시인이자 한학자였던 조부 신제하(辛濟夏)와 부친 신기온(辛基溫) 슬하에서 당시(唐詩)와 한학을 공부하며 엄격한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첫 작품 <기우는 해>를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1924년 11월 24일자 ≪조선일보≫에 발표한 후, 1930년에 상경해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 국어국문학과에서 불전(佛典) 공부를 했다. 서울에 있는 동안 ≪시문학≫ 제3호에 <선물>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 데뷔,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김기림 등과 함께 순수시를 전개한다. 1931년에는 1년 남짓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청구원(靑丘園)’에서 도연명의 시와 매창 시집 등을 애독하며 시작(詩作)에 전념한다. 1939년 첫 시집 ≪촛불≫(인문사)을 간행한 이후, ≪슬픈 목가≫(낭주문화사, 1947), ≪빙하≫(정음사, 1956), ≪산의 서곡≫(가림출판사, 1967), ≪대바람 소리≫(문원사, 1970) 등 생전에 도합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신석정은 시인이면서 동시에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해방이 되던 해 잠시 서울에 머무르던 그는 1946년 낙향한 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1946년 40세 때부터 1950년 5월까지 부안 중학교와 죽산 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1952년 ≪태백신문≫ 편집 고문으로 위촉되어 <토요시단>을 주재한다. 1954년부터 7년간 전주고등학교에서 근무, 이듬해 1955년부터 전북대학교와 영생대학에서 시론(詩論)을 강의했다. 1961년 5월, 5·16 직후 당시 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정부에 연행되어 수일 만에 석방된다. 그해 전주고교를 떠나 김제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며, 19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1964년에 전주상업고등학교로 부임해 1972년 8월 정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수필 <병상의 이 여름>(서울신문, 1974. 7. 4)을 마지막으로 집필, 7월 6일 영면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5권과 이병기와 공저한 ≪명시조 감상≫(박영사, 1958), ≪한국 시인 전집≫(신구문화사, 1959), 번역서 ≪중국 시집≫(정양사, 1954) 등이 있다. 이외에 유고 수필집으로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지식산업사, 1974), 유고 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창작과비평사, 2007)이 있다. 1958년 전라북도문화상, 1968년 한국문학상, 1973년 제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독일의 시인이자 에세이 작가, 비평가이다. 그의 시대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그는 유럽에서 정치적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년 시절 프랑스의 진보적 혁명 정신에 영향을 받은 하이네는 자유와 평등의 원리에 헌신했고, 모든 억압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경향들을 혐오했다. 하이네는 권력을 가지고 손쉬운 방법으로 착취를 하며 이를 진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문제들을 외면하려는 유혹에 예술가들이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 독일의 시인이자 에세이 작가, 비평가이다. 그의 시대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그는 유럽에서 정치적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년 시절 프랑스의 진보적 혁명 정신에 영향을 받은 하이네는 자유와 평등의 원리에 헌신했고, 모든 억압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경향들을 혐오했다. 하이네는 권력을 가지고 손쉬운 방법으로 착취를 하며 이를 진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문제들을 외면하려는 유혹에 예술가들이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이네는 자신의 삶과 저작 속에서 자유와 평등, 연대라는 자유주의적 이상과 모든 인민이 존엄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사회 질서를 요구했던, 억압받는 인민들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1831년 하이네는 파리로 이주했지만, 1835년 프러시아 정부와 독일 연방의회가 그를 비롯한 ‘청년독일파’의 저작에 대해 출판 금지 명령을 공표하자 독일로 돌아가지 못하고 1856년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이네는 언제나 논쟁적인 인물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독일 대중들을 매료시켰던 독일의 위대한 작가이자 지성이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노래의 책』, 『신시집』, 『로만체로』와 서사시 『독일, 어느 겨울 동화』, 『아타 트롤, 한여름 밤의 꿈』, 산문집 『여행 화첩』, 『프랑스의 상황』, 『낭만파』,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정령』, 『루테치아』 등이 있다.
호는 우두(雨杜). 1913년 경기 개성에서 출생했다. 1926년 [중외일보]에 「가신 누님」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뒤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식민지 시대에 제1시집 『와사등(瓦斯燈)』(1939)을, 해방기에 제2시집 『기항지(寄港地)』(1947)를 펴냈다. 6·25전쟁 이후에는 건설실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제3시집 『황혼가(黃昏歌)』(1957)를 펴냈다. 김기림에 의해 도입되고 ... 호는 우두(雨杜). 1913년 경기 개성에서 출생했다. 1926년 [중외일보]에 「가신 누님」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뒤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식민지 시대에 제1시집 『와사등(瓦斯燈)』(1939)을, 해방기에 제2시집 『기항지(寄港地)』(1947)를 펴냈다. 6·25전쟁 이후에는 건설실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제3시집 『황혼가(黃昏歌)』(1957)를 펴냈다. 김기림에 의해 도입되고 이론화한 시론을 바탕으로 193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김기림이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조”를 가졌다고 상찬하였듯이, 그는 사물의 외관과 속성을 정교한 회화적 이미지로 담아내는 데 집중한 모더니스트였다. 그는 정서적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이미지를 독특하게 그려내면서, 도시 문명과 현대성에 부합하는 시어를 개성적으로 사용하였다. 현대 문명이 시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았으며, 대상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감각어를 자주 썼다. 또한 그는 비애의 정서를 자주 발화함으로써, 객관적이고 차가운 이미지즘이 아니라, 낭만적이고 따듯한 이미지즘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속성은 과거 및 고향에 대한 상실감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근대사에 대한 비판의식이나 소외의식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그는 다수의 산문과 비평을 통해 ‘시인 김광균’ 못지않게 ‘논객 김광균’의 면모도 적지 않게 남겼다. 특별히 해방기에는 날카롭고 시의적인 평문을 다수 남겨 이 시기의 중요한 논자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을 만하다. 말년에 시집 『추풍귀우(秋風鬼雨)』(1986)와 『임진화(壬辰花)』(1989)를 간행하였다.
저 : 아르튀르 랭보 (Jean-Nicolas-Arthur Rimbaud)
1854년 10월 프랑스 북부의 작은 도시 샤를르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집에 머무는 때가 드물었고, 랭보가 여섯 살 되던 해 완전히 가족을 떠났다. 어머니는 극도로 독실하고 엄격했다. 불우한 가정, 정치적 혼란, 그리고 전쟁은 어린 시인의 마음에 종교와 사회 제도에 대한 반항을 심었고, 좌절과 분노는 잦은 가출과 방랑으로 표출되었다. 반항심은 “절대적 자유”를 향한 폭발적인 글쓰기로도 나타났다. ... 1854년 10월 프랑스 북부의 작은 도시 샤를르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집에 머무는 때가 드물었고, 랭보가 여섯 살 되던 해 완전히 가족을 떠났다. 어머니는 극도로 독실하고 엄격했다. 불우한 가정, 정치적 혼란, 그리고 전쟁은 어린 시인의 마음에 종교와 사회 제도에 대한 반항을 심었고, 좌절과 분노는 잦은 가출과 방랑으로 표출되었다. 반항심은 “절대적 자유”를 향한 폭발적인 글쓰기로도 나타났다. 베를렌과의 교류와 방황은 랭보의 시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10대 후반 약 5년 동안 그가 쓴 시의 진화는 시의 역사 전체를 요약한다. 예리한 감각과 거침없는 상상력이 나타나는 『초기 운문시』,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후기 운문시』, 전복적이고 극단적인 가치관을 불같은 문체로 노래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그리고 헤아리기 어려운 초월적 세계를 보여주는 『일류미네이션』 등 그의 작품은 세계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특히 “불가해한 시집”인 『일류미네이션』은 “모든 문학을 넘어선” 궁극의 시로 평가된다.

『일류미네이션』의 원고를 베를렌에게 넘긴 뒤 랭보는 문학과 문명을 버리고 유럽을 벗어나 세상을 떠돌다 아랍 아프리카 사막으로 사라진다. 아라비아반도와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무역상을 하던 그는 병으로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프랑스 마르세유로 송환된다. 1891년 37세가 되던 해, 다리 절단 수술을 받고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며 쓴 그의 편지에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반항과 자유의 갈구가 담겨 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불행, 끝없는 불행이다! 도대체 왜 살아가는 것일까?”
1942년 전남 광주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되었으며, 시집으로는『이성부 시집』『우리들의 양식』『백제행』『전야』『빈산 뒤에 두고』『야간 산행』등이 있다. 1969년 제15회 현대문학상 수상,1977년 제4회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하였다. 1942년 전남 광주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되었으며, 시집으로는『이성부 시집』『우리들의 양식』『백제행』『전야』『빈산 뒤에 두고』『야간 산행』등이 있다. 1969년 제15회 현대문학상 수상,1977년 제4회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하였다.
손글씨로 용기와 위로, 사랑과 마음을 나누는 작가. 우리나라 최고의 감성 캘리그라퍼로 베스트셀러 작가는 물론, 온·오프라인 인기 만점 강사다. 캘리그라피와 관련한 여러 협업을 진행하던 중 우연히 손글씨 작업을 맡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캘리그라피와는 또 다른 담백한 손글씨의 매력에 푹 빠졌다. 평생 취미인 ‘덕질’을 한껏 발휘해 여러 펜으로 끝없이 연구하고 연습한 끝에 ‘누구나 따라 쓰고 싶은’ 캘... 손글씨로 용기와 위로, 사랑과 마음을 나누는 작가.

우리나라 최고의 감성 캘리그라퍼로 베스트셀러 작가는 물론, 온·오프라인 인기 만점 강사다. 캘리그라피와 관련한 여러 협업을 진행하던 중 우연히 손글씨 작업을 맡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캘리그라피와는 또 다른 담백한 손글씨의 매력에 푹 빠졌다. 평생 취미인 ‘덕질’을 한껏 발휘해 여러 펜으로 끝없이 연구하고 연습한 끝에 ‘누구나 따라 쓰고 싶은’ 캘리애만의 예쁜 손글씨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손글씨에는 주로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다. 드라마 명대사, 좋은 노랫말, 울림을 주는 누군가의 한마디, 그리고 배정애 그녀가 직접 써내려간 짧은 에세이까지. 그 밑바탕에는 오늘 하루 힘이 되는 응원의 글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그녀의 사랑스런 진심이 담겨 있기에 ‘캘리애 손글씨’는 더 특별하고 더 아름답다.

캘리그라피를 다양하게 써서 활용해볼 수 있는 『캘리愛 빠지다』 『캘리愛처럼 쓰다』 『수채 캘리愛 빠지다』를 펴냈으며, 나태주 필사시집 『끝까지 남겨두는 그 마음』 원태연 필사시집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에 캘리그라퍼로 참여했다.
저 : 김억 (金億, 희권熙權, 안서岸曙)
1896년 본관 경주, 음력 10월 30일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섭리 1798번지에서 아버지 김기범金基範과 어머니 김준金俊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서는 이곳에서 10대의 중반까지 살다가 오산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주지를 옮겼다고 전한다. 본명은 희권熙權인데 후에 ‘억億’으로 개명, 아호는 안서岸曙. 1910년대 후반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창조(創造)], [폐허(廢墟)], ... 1896년 본관 경주, 음력 10월 30일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섭리 1798번지에서 아버지 김기범金基範과 어머니 김준金俊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서는 이곳에서 10대의 중반까지 살다가 오산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주지를 옮겼다고 전한다. 본명은 희권熙權인데 후에 ‘억億’으로 개명, 아호는 안서岸曙.

1910년대 후반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창조(創造)], [폐허(廢墟)], [영대(靈臺)], [개벽(開闢)], [조선문단(朝鮮文壇)],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시·역시(譯詩)·평론·수필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한편, 에스페란토의 연구에서도 선편(先鞭)을 잡고 그 보급을 위하여 강습소를 열기도 하였으며, 『개벽』에 「에스페란토 자습실」을 연재하여, 뒤에 간행된 『에스페란토 단기강좌(Esperanto Kurso Ramida)』라는 한국어로 된 최초의 에스페란토 입문서가 되었다.

또한, 김소월(金素月)의 스승으로서 김소월을 민요시인으로 길러냈고, 자신도 뒤에 민요조의 시를 주로 많이 썼다. 김억은 1924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의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

1930년대 말에는 김포몽(金浦夢)이라는 예명으로 대중가요 작사 활동도 벌였다. 작사가가 된 것은 생활고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생소한 예명을 사용한 이유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문단에서의 지위가 남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작사한 노래 가운데 선우일선의 「꽃을 잡고」는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아아 야마모토 원수」(1943) 등 친일 시를 발표했다. 친일 저작물 수는 시 4편을 포함하여 총 6편이 밝혀져 있다.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북한으로 간 유력 인사들이 1956년 평양에서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을 지낸 뒤로 행적이 불분명하다. 1958년 평북 철산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설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북 작가들과 함께 언급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다시 조명을 받았다.

저서로는 『기탄자리』, 『해파리의 노래』, 『오뇌의 무도』(개정판), 『신월』, 『잃어진 진주』, 『원정』, 『금모래』, 『봄의 노래』, 『안서시집』, 『사상만필』, 『모범서한문』, 『망우초』, 『소월시초』, 『안서시초』, 『동심초』, 『꽃다발』, 『지나명시선 백낙천집』, 『애국백인일수』, (일본단가 번역), 『야광주』, 『먼동이 틀 제』, 『금잔디』, 『민요시집』, 『옥잠화』 등이 있다.
1924년생. 록펠러, 카네기와 어깨를 나란히 한 미국의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의 5대손으로, 막강한 사교계의 여왕이자 대부호다. 글로리아는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 작가 와이어트 쿠퍼 등과 총 네 번 결혼했다. 배우 말론 브란도,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 등과도 염문을 뿌렸다. 작가, 모델, 디자이너, 미술가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그녀의 삶을 다룬 텔레비... 1924년생. 록펠러, 카네기와 어깨를 나란히 한 미국의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의 5대손으로, 막강한 사교계의 여왕이자 대부호다. 글로리아는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 작가 와이어트 쿠퍼 등과 총 네 번 결혼했다. 배우 말론 브란도,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 등과도 염문을 뿌렸다. 작가, 모델, 디자이너, 미술가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그녀의 삶을 다룬 텔레비전 시리즈 「글로리아 밴더빌트 이야기(Little Gloria… Happy at Last)」는 에미상을 타기도 했다. 비망록, 소설, 시 등 여러 분야에서 여덟 권의 책을 썼고,<뉴욕타임스>,<배너티 페어>,<엘르> 등에 기고를 했다.
1914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및 조치대학 전문부 신문학과에서 수학했으며, 1935년 [신인문학]에 「패배자의 소원」으로 등단하였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조선문화단체총연맹 핵심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세칭 ‘남로당 서울시 문화예술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전쟁으로 출옥해 북한군에 합류, 월북하였다. 월북 후 조선문학동맹 시분과위원장, 조선작가동맹출판사 단행본 부주필 등... 1914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및 조치대학 전문부 신문학과에서 수학했으며, 1935년 [신인문학]에 「패배자의 소원」으로 등단하였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조선문화단체총연맹 핵심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세칭 ‘남로당 서울시 문화예술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전쟁으로 출옥해 북한군에 합류, 월북하였다. 월북 후 조선문학동맹 시분과위원장, 조선작가동맹출판사 단행본 부주필 등을 역임했으며, 1971년 폐병으로 타계했다. 시집으로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 『이용악집』 『리용악 시선집』 등이 있다.
박용철은 1930년대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3권(1930), 『문예월간』 4권(1931), 『문학』 3권(1934)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문학활동에 전념하면서도 그가 주재하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을 간행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였다.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비내리는 날」 등을 발표하면서... 박용철은 1930년대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3권(1930), 『문예월간』 4권(1931), 『문학』 3권(1934)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문학활동에 전념하면서도 그가 주재하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을 간행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였다.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비내리는 날」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시문학』·『문예월간』·『문학』 및 기타 잡지에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발표되지 않고 유고로 전하여진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자신이 주축이 된 시문학 동인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연극공연을 위한 몇 편의 희곡(입센 원작 『인형의 집』, 그리고 「바보」, 「베니스 상인」, 「말 안 하는 시악시」, 「사랑의 기적」… 등)을 번역 및 창작하였으며 직접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방대한 번역시 등을 통해 해외문학을 국내에 소개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큰 의의라 하겠다. 또한 『삼천리문학』에 실린 박용철의 대표적인 평론인 「시적 변용에 대해서」(1938)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시작(詩作) 이론이다. 이 시론을 통하여 1930년대 초반 『시문학』이 기틀을 잡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부터는 모더니즘과 기교주의 논쟁에서도 순수파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및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벽 속의 편지』, 『어느 별 위에서의 하루』,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초록 거미의 사랑』, 『네가 떠난 후 너를 얻었다』, 『바리연가집』이 있다. 그 밖...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및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벽 속의 편지』, 『어느 별 위에서의 하루』,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초록 거미의 사랑』, 『네가 떠난 후 너를 얻었다』, 『바리연가집』이 있다. 그 밖에 산문집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추억제』, 『그물 사이로』, 『잠들면서 잠들지 않으면서』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박두진문학상, 구상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현재 동아대학교 명예교수이다.
194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1966년 [문학춘추] 신인작품상, 1967년 문공부 신인예술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비슷한 무렵에 등단한 강은교·윤후명·정희성 시인 등과 1969년 ‘칠십년대’ 시 동인을 결성해 1973년 제6집까지 동인지를 발행, 2012년에 이름을 ‘고래’로 바꾸어 동인 활동을 재개했다. 1970년부터 30여 년 간 월간 [샘터]에 근무했고, 현대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한국가... 194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으며 1966년 [문학춘추] 신인작품상, 1967년 문공부 신인예술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비슷한 무렵에 등단한 강은교·윤후명·정희성 시인 등과 1969년 ‘칠십년대’ 시 동인을 결성해 1973년 제6집까지 동인지를 발행, 2012년에 이름을 ‘고래’로 바꾸어 동인 활동을 재개했다. 1970년부터 30여 년 간 월간 [샘터]에 근무했고, 현대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육사시문학상, 구상문학상, 박두진문학상, 신석초문학상을 수상했다. 2021년 2월,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침묵의 무늬』,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다른 하늘이 열릴 때』, 『홀로 울게 하소서』, 『화살시편』,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 등이 있다.
저 : 권태응 (權泰應, 동천(洞泉))
호는 동천(洞泉). 191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1939년 ‘독서회 사건’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1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폐결핵 3기의 몸으로 귀국하여 요양생활을 하며 1944년 초부터 시조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동시 쓰기에 몰두하여 작고하기 전까지 『송아지』 『하늘과 바다』 『우리 시골』 『어린 나무꾼』 『물동우... 호는 동천(洞泉). 191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1939년 ‘독서회 사건’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1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폐결핵 3기의 몸으로 귀국하여 요양생활을 하며 1944년 초부터 시조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동시 쓰기에 몰두하여 작고하기 전까지 『송아지』 『하늘과 바다』 『우리 시골』 『어린 나무꾼』 『물동우』 『우리 동무』 『작품』 『동요와 또』 『산골 마을』 등 아홉 권의 육필 동시집을 손수 엮었다. 1947년 잡지 『주간 소학생』 45호에 동요 「어린 고기들」을 발표했고, 이듬해 동요집 『감자꽃』(글벗집)을 출간했다. 1951년 전쟁 통에 병세가 악화되어 34세 나이로 별세했다. 1968년 충주 탄금대 공원에 「감자꽃」 노래비가 세워졌고, 1995년 동시선집 『감자꽃』(창작과비평사)이 간행되었다. 1997년부터 충주에서 시인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리고 있으며, 2005년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로서의 공훈을 인정하여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서울 출생. 1995년 [민족예술]에 신경림 시인의 추천으로 시 가구를 옮기다가 외 4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2004년 『이 환장할 봄비에(창비)』가 있으며, 2010년 ‘제비꽃서민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로, 저서로 『경허 선시 연구』가 있으며, 「법정 무소유에서 드러나는 선적 사유」,「달라이라마의 행복론에서 설하는 지혜와 자비와 인문학적 고찰」,「조주 십이시가의 선시학적 특성 연구」등 ... 서울 출생. 1995년 [민족예술]에 신경림 시인의 추천으로 시 가구를 옮기다가 외 4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2004년 『이 환장할 봄비에(창비)』가 있으며, 2010년 ‘제비꽃서민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로, 저서로 『경허 선시 연구』가 있으며, 「법정 무소유에서 드러나는 선적 사유」,「달라이라마의 행복론에서 설하는 지혜와 자비와 인문학적 고찰」,「조주 십이시가의 선시학적 특성 연구」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저 : 김기림 (김인손金仁孫, 편석촌片石村)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인손(金仁孫), 편석촌(片石村)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니혼 대학을 거쳐, 도호쿠 제국대학 영어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0년대 초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문학활동은 구인회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시작했다.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에 근거한 모더니즘 문학 이론을 자신의 시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문...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인손(金仁孫), 편석촌(片石村)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니혼 대학을 거쳐, 도호쿠 제국대학 영어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0년대 초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문학활동은 구인회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시작했다.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에 근거한 모더니즘 문학 이론을 자신의 시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문학사적 공적으로 꼽힌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대학교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하다가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시집 『기상도』, 『태양의 풍속』, 『바다와 나비』, 『새노래』 등과 수필집 『바다와 육체』 등이 있다.
1757년 11월 28일 런던의 브로드가(Broad Street) 28번지에서 아버지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와 어머니 캐서린 블레이크(Catherine Blake)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세가 되는 1769년부터 짧은 시들을 습작했고, 이때의 작품들은 『시적 소묘(Poetical Sketches)』(1783)에 실려 있다. 15세 때부터 7년 동안 당시 꽤 알려져 있던 판화가 제임스 ... 1757년 11월 28일 런던의 브로드가(Broad Street) 28번지에서 아버지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와 어머니 캐서린 블레이크(Catherine Blake)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세가 되는 1769년부터 짧은 시들을 습작했고, 이때의 작품들은 『시적 소묘(Poetical Sketches)』(1783)에 실려 있다. 15세 때부터 7년 동안 당시 꽤 알려져 있던 판화가 제임스 버자이어(James Basire) 밑에서 도제 생활을 했다. 그의 이른바 완성작이라고 불리는 동판화 시화집 제작에 필요한 밑그림, 수채화, 유화 등의 기술들은 이때 연마한 것이다.

청년 블레이크는 남의 책에 삽화를 그려 넣거나, 판화를 제작해 돈을 벌었고, 간간이 시를 쓰기도 했다. 그는 25세가 되던 1782년에 채소 농장을 경영하던 윌리엄 바우처(William Boucher)의 딸 캐서린 소피아 바우처(Catherine Sophia Boucher)와 결혼한다. 결혼한 이듬해에 인쇄된 『시적 소묘』 이후 블레이크는 더 많은 자신의 글과 그림을 동판화로 제작하는데, ‘채색 인쇄법(illuminated printing)’이라는 자기 고유의 동판화 제작법을 고안해 내기도 한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를 위시한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모두 이 방법에 의해 동판화로 제작되었다.

1790년 템스 강의 반대편 지역인 램버스(Lambeth)로 이사하고 이곳에서 ‘램버스 예언시’라고 불리는 일련의 예언시들을 쓴다. 이때의 블레이크는 출판업자 조지프 존슨(Joseph Johnson)의 출판물에 삽화를 그려 넣기도 하며, 그의 집에서 당시의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인 조지프 프리슬리(Joseph Priestley),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등과 회동하게 된 것도 이 어름이다.블레이크가는 1800년에 남부 해안의 시골 마을 펠펌(Felpham)의 조그만 오두막으로 이사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의 장시 3부작을 구상하거나 일부 창작했다.

1803년 8월에 있었던 펠펌에서의 술 취한 국왕 직속 기병대 소속의 사병 ‘스코필드(John Schofield) 사건’은 그의 시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는 스코필드와 그 동료를 『예루살렘』에서 악당의 한 무리로 형상화해 심판한다. 나아가 그는 후기의 장시들을 두꺼운 개인적 신화 체계로 둘러싸 시의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화했다.

만년의 블레이크는 시 창작보다는 동판화 작업에 더 경주했다. 이 시기 초서(Geoffrey 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 그리고 [욥기] 및 단테의 작품, 밀턴의 『복낙원』 등의 삽화를 제작했다. 블레이크는 1827년 8월 12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세기 중엽 스윈번(Algernon Charles Swinburne)을 위시한 라파엘 전파의 시인들이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20세기 초엽을 지나며 그의 시 세계가 지닌 독창성과 문학적 가치는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성취로 인정받게 되었다.
제6대 바이런 남작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Byron, FRS)은 영국의 시인이다. 존 키츠, 퍼시 비시 셸리와 함께 낭만주의 문학을 선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글재주로 주위의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2살 때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으로 집을 옮겼으나 1798년에 제5대 바이런 남작이 죽었으므로 제6대 바이런경이 되어 조상... 제6대 바이런 남작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Byron, FRS)은 영국의 시인이다. 존 키츠, 퍼시 비시 셸리와 함께 낭만주의 문학을 선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글재주로 주위의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2살 때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으로 집을 옮겼으나 1798년에 제5대 바이런 남작이 죽었으므로 제6대 바이런경이 되어 조상의 땅 노팅검으로 옮기게 된다. 이듬해, 런던에서 나와 해로우 스쿨에 들어간 뒤 1805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여 역사와 문학을 전공하지만 학업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나날을 보냈다. 1808년에 케임브리지를 떠나, 1811년까지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 등을 여행하고 귀국한 뒤 런던에 살다가 1812년에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를 출판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 후 『돈 주앙』(Don Juan) 등 유명한 작품을 계속 발표하여 19세기 낭만파 시인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1815년에 아나운서 안네 이자벨라 밀 뱅크와 결혼하였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인 에이다 러브레이스이다. 그러나 이듬해 별거하여 흐트러진 생활로 비판을 받아오다가 영국을 떠나 스위스에서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를 만나 스위스 각지를 떠돌면서 퇴폐한 생활을 계속한다.

그리스 문화를 사랑했던 그는 1823년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여하여 독립군에게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오늘 나는 34세가 되었다」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그는 사망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노래하고 생각하는 시를 쓴 시인으로서 자유롭게 살다 죽은 낭만주의자였다. 그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가운데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가진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복누나 어거스터 리(Augusta Leigh)와의 근친상간 루머가 있다.
칼 윌슨 베이커는 미국의 문학가로 시카고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남부감리교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티븐 F. 오스틴 주립대학교 교수직을 역임했고, 다양한 대학 및 문학 단체에서 강의했다. 텍사스에서 가장 재능 있는 작가이자 여성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마지막 시집 『말을 탄 몽상가들(Dreamers on Horseback)』로 퓰리처상 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칼 윌슨 베이커는 미국의 문학가로 시카고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남부감리교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티븐 F. 오스틴 주립대학교 교수직을 역임했고, 다양한 대학 및 문학 단체에서 강의했다. 텍사스에서 가장 재능 있는 작가이자 여성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마지막 시집 『말을 탄 몽상가들(Dreamers on Horseback)』로 퓰리처상 시 부문 후보에 올랐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시인. 세련된 시어와 운율, 신비로운 분위기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같은 해 태어난 미국의 에밀리 디킨슨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거장이다. 이탈리아 망명 작가이자 단테 연구자인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사랑받는 막내로 자라났다. 화가이자 시인인 오빠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함께 ‘라파엘전파’의 일원이다. 동생의 천재성을 알아본 오빠의 권고로 어릴 때부터 시를 썼다. 이야기시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시인. 세련된 시어와 운율, 신비로운 분위기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같은 해 태어난 미국의 에밀리 디킨슨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거장이다. 이탈리아 망명 작가이자 단테 연구자인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사랑받는 막내로 자라났다. 화가이자 시인인 오빠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함께 ‘라파엘전파’의 일원이다. 동생의 천재성을 알아본 오빠의 권고로 어릴 때부터 시를 썼다. 이야기시의 전통 위에서 감각적인 시를 쓴 로세티의 시들은 에로틱하면서 종교적이고, 도발적이면서도 고전적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작품에는 알레고리와 서정성, 천진무구한 시선과 영적인 갈망이 절묘하게 녹아 있다.

첫 시집 『고블린 도깨비 시장』(1862년)이 출간되자, 한 해 전에 작고한 당대 최고의 여성 시인이었던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자리를 대체하는 걸출한 작가가 나왔다는 찬사를 받았다. 나중에 앨프리드 테니슨의 뒤를 이을 계관시인의 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 암 투병을 하게 되어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이외에도 『고양이』, 『매일, 시 한 잔』 등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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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에는 시가 딱!
a*****4 | 20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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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10점 | 이달의 사락 s******8 | 2020-11-11 | 신고

[ 나무 ]

        - 이성선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구나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 젖지 않는 마음 ]

             -  나희덕

 

여기에 내리고

거기에는 내리지 않는 비

당신은 그렇게 먼 곳에 있습니다

지게도 없이

자기가 자기를 버리러 가는 길

길가의 풀들이나 스치며 걷다 보면

발끝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멩이 몇 개

그것마저 내려놓고 가는 길

오로지 젖지 않는 마음 하나

어느 나무 그늘 아래 부려두고 계신가요

여기에 밤새 비 내려

마음 시린 줄로 모르고 비에 젖어습니다

젖지 마음과 젖지 않는 마음의 거리

그렇게 먼 곳에서

다만 두 손 비비며 중얼거리는 말

그 무엇으로도 돌아오지 말기를

거기에 별빛으로나 그대 총총 뜨기를

 

잠든 사이..

비가 내렸습니다..

그 빗소리가 좋아서

커피 한잔이 더 좋았지요..

빗소리를 한달만에 들어서

좋았지만..

 

이 비덕에 와일드카드 1차전은

취소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  그집 앞 ]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네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너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기형도

 

눈오는 날.. 막걸리 한잔..

늘.. 맑고, 밝아보였던 그녀는 왜 세상을 떠났을까요..

그곳에선 아프지 말아요..아픔잊고 웃어요..

 

[ 낙화 ]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오니

 

꽃이 피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조지훈

[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외로운 여름과

거짓 꽃이 시들고도

기다긴 세월이 흐를 때

사랑은 천천히 오는 것

얼어붙은 물속으로 파고드는

밤하늘의 총총한 별처럼

조용히 내려앉는 눈과 같이

조용히 천천히

땅속에 뿌리박는

풀처럼 사랑은

더디고 조용한 것

내리다가 흩날리는 눈처럼

 

사랑은 살며시 뿌리로 스며드는 것

씨앗이 싹트듯달이

커지듯 천천히

- 글로리아 밴더빌트

  

[ 첫눈 오는 날 ]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 들고

허공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 곽재구

  

[ 정거장에서의 충고 ]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뻑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무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기형도

 

[ 가을편지 ]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 이성선

 

[ 귀뚜라미 소리 ]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님도 추워서 파랗습니다

 

울 밑에 과꽃이 네 밤만 자면

눈 오는 겨울이 찾아온다고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밤에 오동잎 떨어집니다

- 방정환

 

[ 이름 없는 여인 되어 ]

어느 조그마한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게소

- 노천명

 

[씨앗]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 허영자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수많은 멋진 것들이 그러하듯이.

레이스와 상아와 황금, 그리고 비단도

새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래된 나무에 치유력이 있고

오래된 거리에 영화가 깃들듯

저도 나이 들수록

더욱 아름다워지게 하소서.

- 칼 윌슨 베이커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 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를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우리.. 매일, 시한잔 해요..

 

...  소/라/향/기  ...

28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28 댓글 24 접어보기
종이책 구매 주간우수작 끝까지 남겨두는 말은 사랑...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사랑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j*****3 | 2020-11-09 | 신고

 

  선물로 받았고, 좋아서 친구에게 선물도 했던 시집을 다시 꺼냈다. 시를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를 떠나서 어려워하는 사람인지라 시집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심코 꺼내 들었던 시집에서 마음을 툭 건드리는 시를 만날 때면 이래서 사람들이 시를 좋아하는구나싶다.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이웃님들의 블로그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왠지 따뜻함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어렵게 쓰여지지 않았으면서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감정을 끄집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마음 먹고 읽은 이 시집에서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태주 시인 하면 바로 생각나는 시가 이 시다. 짧으면서도 강렬한 시다. 이름이 알려져있거나 화려한 꽃이 아니면 쉽게 시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많은 풀꽃들의 아름다움을 이제는 안다.

" 내 곁에 있는 당신,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니 쌓인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 모습이 더 편하게 다가옵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 길에 예쁘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리움 ······

 

 

 11월에 만난 시라 더 마음에 와 닿는 시였다. 아파트 울타리에는 아직도 장미 송이가 맺혀있었다. 화려한 장미도 11월에 피어있는 모습은 왠지 애잔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쌀쌀한데, 참 고생이 많구나 싶어서. 남은 달력을 보면서 올  한 해를 열심히 살아왔나 생각해보게 되는데, 시인의 말처럼 돌아가서 새 마음 새 뜻으로 뭔가를 해야지보다는 남아 있는 시간들을 더 알차게 채워나가야지 마음 먹었다.

시인은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한다는데, 11월의 쌀쌀함을 감싸는 온기가 가득 느껴져 정말 따뜻했다.

 

 

  아주 오랜만에 연애 시절 감정이 그대로 살아나는 시를 만났다. 만나고 있을 때는 정말 시간도 빨리 가서 아쉬웠다. 그 아쉬움으로 서로의 집 앞까지 갔다가 또 돌아오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며칠 못 보면 보고싶어 전화통을 잡고 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시인 덕분에 오래 전으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이 시는 연인 사이를 노래하고 있지만, 난 이 시를 읽으면서 딸을 생각했다. 멀리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전화선을 타고 오는 아이의 목소리에 예민해졌다. 밝은 톤이면 오늘은 잘 보내고 있구나, 조금이라도 낮으면 무슨 일이 있는걸까 걱정이 된다. 그런 표현을 하면 혹 우울해질까 애써 모른척할 때도 있다. 오늘을 밝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

 

 

 

  시인은 참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보석들을 건져서 이렇게 아름다운 시들을 쓰고 있으니. 그냥 줍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시인이 주워 주면 보는 것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이 쌓여서 미래가 되는 것, 오늘을 즐기지 못하면 과거도 미래도 밝을 수는 없다. 이 단순한 진리를 알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이 시를 자주 자주 읽어야겠다. 주문처럼, 매일 매일. 최고의 인생을 만드는 방법 참 간단하네. 난 지금 아주 즐겁게 리뷰를 쓰고 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못 믿는 사람은 내가 아닐까? 다른 사람이 '아무리 넌 잘 하고 있어, 멋져,난 널 믿어'라고 이야기 해도 내 자신이 나를 믿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을 것같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자신을 믿고, 나에게 웃어 주고,나를 사랑해주고. 다만 그뿐이라는데 한 번 해보자. (주먹 불끈)

 

 

그래, 오늘도 나를 믿고 열심히 살자, 아자아자 !!!

 

 

  산책 길에 만난 꽃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무리지어 있는 꽃은 정말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전부이지만 혼자 피어 있는 꽃에게는 다가가게 되었다. 괜히 말을 붙여보기도 하고, 살짝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사람들과 함게 하는 시간도 좋지만 혼자 있는 시간도 꼭 필요함을 안다. 혹시라도 혼자 있어서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허공에 어여쁜 피멍 하나 걸렸을 뿐이다"

앞으로 동백꽃을 보면 이 구절을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더욱 열심히 살고 더욱 열심히 사랑할 밖에는 달리 길은 없다는데 어떡하나? 그렇게 살아야지. 어제 밥을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죽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다 피식 웃었다. 지구가 터지겠군. 자연의 섭리를 바꿀 수 없으니 지상의 시간을 원없이 사랑하고, 열심히 살아갈 수 밖에.

 

 

 지금까지 '여보'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이걸 어쩜 좋아?" 이런 애교스러우 말투도 남편에게 해 본적이 없어서 필사를 하면서 오골거렸다. 하지만, 마주보면 같은 의미의 말을 너무나 자주하고 있어서 공감가는 시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숫자에 맞춰서 반응해 나가는 부분이 늘어가고, 시간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으니······

 

오늘은 한 번 해볼까?

"여보,여보,여보 이걸 어쩜 좋아? 가을이 왔나 싶더니 이제는 겨울이야"

우엥, 닭살이 돋았다. 혼자 닭살 돋는 것이 낫겠다. 바로 포기다.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서 시를 필사할 때 시를 세 번 읽는 효과가 있습니다. 눈으로 한 번 읽고, 쓰면서 한 번 읽고, 내가 읽는 소리를 내 귀가 들어서 다시 한 번 읽습니다.-p4

 

 소리 내어, 눈으로 , 쓰면서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많이 떠올렸던 말은 연인, 추억, 사랑, 다정함, 그리움등이었다. 그 말들은 과거와 많이 닿아있는 듯하지만, 결국 현재를 살게하는 힘이라 생각되었다. 삶은 언제나 ···ing. 좋은 시들과 함께한 오늘도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 지상의 시간의 일부분이다. 과거의 좋은 추억들을 떠올리고, 밝은 미래를 희망하며, 오늘을 열심히 살고싶다.

 

 

 

 

34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34 댓글 24 접어보기
종이책 주간우수작 끝까지 남겨두는 그 마음
평점10점 | YES마니아 : 로얄 j*******7 | 2019-10-12 | 신고

감히, 지금 내가 올리는 이 글들을, 문장들을.. 서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책을 펼치며, 시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과 감정들, ... 그 어떤 것들을.. 서평인 것마냥 이렇게 적어본다. 


필사의 시작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부터.. 기왕이면 멋들어지게 써질 만년필있다면 더 좋을 터~!


기왕이면 그림과 글씨가 어우리는 색상의 잉크로..


때로는 시인의 말투 담긴 필사에 토달기도 하면서..


필사집의 마음이 담긴 시를 한 글자, 한 글자 소리내어 써보았다.


"

흔히 어른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 중 하나가.. "지금이 제일 좋은 때다!" 였는다.. 그 말을 귀로 들었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시로 읽으니, 또 시로 적어보니.. 훅~ 와닿는다. 비록 내 앞에 웃고 있는 사람 하나 '네'가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좋은 시를 접하고 있는 지금이 좋은 날이 아니면 언제가 좋은 날일까..


평소 사용하는 펜과 달리 만년필은.. 힘을 주어 꾹꾹 눌러쓰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다음 장에 베겨나오고 만다. 잉크가 더 진한 탓인가? 아니면 종이가 얇은 탓인가.. 그럼에도 필사를 할 때는 만년필을 또 들고 만다. 만년필만이 줄 수 있는 그 필기감,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쓰면 쓸수록 더 좋은 그 느낌 때문이다.


세로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불편하다. 줄 맞추기도 힘들고, 띄어쓰기도 힘들고(띄어쓰기는 원래 힘들긴 하다..ㅡㅡ;), 그럼에도 어떤 문장들은, 시들은.. 이렇게 세로쓰기를 해야만 한다. 시가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렇게 적어달라고.. 필사하는 밤, 필사하는 내내 창문에 붙어 제가 요구하는 대로 내가 끄적이고 있는지 지켜보다 날이 밝아오매 제 갈 길로 그렇게 떠났다.


희한하다. 지금은 가을인데, 바람마저 제법 차가워졌는데.. 시를 읽으면 어느새 봄이다. 마음 속에 봄의 따스함이 퍼진다. 봄꽃들의 화사함과 겨울을 뚫고 나온 새싹들의 단단함이 잔뜩 움츠려있던 마음까지 펴지게 한다. 넓고 판판하게.. 나도 분명 꽃인데.. 그걸 또 깜빡하고 있었나 보다. 지금 비록 가을이지만 또 나는 봄인 척 꽃을 피워볼까 한다.


한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이들이 절로 떠올랐다. 이런 안부 인사 전하는 것마저도 어색할 만큼 아주 오래 연락 못하였는데.. 어느 은행사의 이벤트성 송금으로 나는 반은 장난, 반은 진심으로 안부를 전했다. 스팸 같은 문자 사이에서 나를 발견한 이들은 이게 뭐냐며, 깔깔 거리면서 연락을 해온다. 나의 숨어있는 반쯤 진심이 통하였다. 잘 있구나, 나를 잊지는 않았구나.. 참으로 고마웠다.


가을이라 그러한가, 노란 은행나무라는 단어에, 기다리고 있다는 단어에, 괜히 아련하다. 마냥 그립기만 하다. 추억의 어느 한 지점에서 나는 노란 은행나무들이 가득 있던 그 거리를, 그 거리에 있던 너를 그리워했나 보다.. 가만히 웃던 '너'가 그리웠나 보다. 그러나 끝내 거기 없던 너를 많이 그리워했었나 보다.. 괜히 아련하게.. 괜히 더 아리게..


동글동글한 글씨체를 읽는데 괜히 날카로운 바람이 가슴을 뚫는 듯 시렸다. 시리고 시려서 그 차가움을 파란색으로, 뾰족한 만년필로, 흘리듯이 쓰면서도 선은 날카롭게 적어보았다. 내 시린 마음, 누군가는 따스하게 봐주기를 바라며..


별이라는 단어도 참 좋은데, 거기에 빛을 더하니 마음까지 환해진다. 괜히 외롭지도 않았다. 빛을 비추는 어느 별 하나가 내 머리 위에 조용히 있어주는 느낌이 들어 실은 조금 든든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짧은 시인데, 참으로 긴 먹먹함이 남았다.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이런 묘비명을 쓴 이는 진정으로 사랑이 많은 이일터.. 그 사랑을 남겨주고 싶었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적에 쓴 시인지는 모르겠으나.. 괜히 심술난다. 이 시인은.. 정말 나이를 알 수가 없다. 이 시만 보면.. 20대 청년 같으니.. 마흔을 코앞에 둔 나는 괜히 샘이 났다. 아, 나 벌써 마흔이라니..ㅠ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건 '초코파이'이고,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인 줄 아는 요즘 세상에서.. 그럼에도.. 아무래도 이렇게 서 있을 수밖엔 없는 저 마음을 알 것도 같은 이 기분은 무언지.. 이 마음이 무언지.. 나는 말을 해주고 변한다 해도 모를 것 같다.


세상의 전부였던 그 사람 하나 지금은 어디에 있나.. 슬쩍 궁금해지다가도, 그런 때가 있었지.. 슬쩍 눈물이 핑~ 돌고, 이제는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마음과 책임감에 어깨가 슬쩍 또 무거워졌다. 비록 기억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함께 가자.. 함께 가자..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마지막 때가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그럼에도 이따금씩 함께 가고 싶단 마음이 불쑥 든다. 참으로 난감하다. 오늘 바로 그랬다.


내가 이 시를 품은 마음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지 않아서.. 슬프다. 안그래도 참 추운 이 가을에..


그냥 문득, 아주 생뚱맞게 "그린다는 것은 그리움을 나타낸 것이 아닐런지요."하던 드라마 <바람의 화원>문근영이 연기하던 신윤복이 떠올랐다. 거..참..;;


한번도 서평을 소홀히 한 적이 없지만.. 더, 최선보다 더.. 열심히 서평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했던 출판의 편지. 요근래 참으로 싫었던 내 이름이, 이 책을 받으면서 이 편지를 받으면서 다시 좋아지고 있다. 감사합니다.^ㅎ

 

 

** 이 리뷰는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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