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살림하면 ‘남편 돈이나 쓰는 밥충이’
회사로 출근하면 ‘어차피 떠날 애 엄마’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여기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 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토끼 같이 귀여운 아이들에 아주 듬직해 보이는 남편까지 ‘스마일’ 미소를 짓고 있다. 게다가 그 여자에겐 번듯한 직장도 있다. 유명하진 않지만 밥벌이치고는 꽤 괜찮다 쳐주는 곳이다. 아직 싱글이거나, 자녀가 없거나, 전업주부를 하고 있는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넌 정말 다 가졌어. 인생의 숙제를 모두 해결했으니 얼마나 행복하겠어?”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어떤 스릴러물은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웃음’이 전주가 된다는 사실을! (프롤로그 중에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그랬던가. 『나 하나만 참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를 쓴 이승주 작가의 삶도 그러했다. 평탄한 학창시절을 거쳐 남들이 이름 알만한 기업에 들어가 성실한 남편과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아무런 갈등도 없는 생활이란 결국 누군가의 인내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참는 사람은 ‘나’였다. 아내이자 엄마, 그리고 며느리라는 이유로.
어릴 때는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참았다.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 들어가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나의 꿈은 뒤로 미뤄두었다. 결혼해서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참았다. 출산 휴가 중, 아이를 낳느라 지친 몸을 눕히고 있으면 남편에게 “거, 집도 치우고 아침밥 좀 챙기지?”라는 말을 들었다. 남편은 배울 만큼 배운 교양 있는 사람으로 주위에서는 ‘자상한 남자’라는 칭찬을 듣곤 했다. 하지만 이런 평가를 들을 때면 어쩐지 심술이 났다.
한번은 친정아버지가 시부모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고 오셨다. “아리 아빠를 부를 때, 이름 말고 김 서방이라고 불러달라더라.” 그 이후로 아버지는 남편을 꼬박꼬박 “김 서방”이라고 호칭하셨는데, 이는 정말이지 약 오르는 일이었다. 시댁에서는 “새아가”라거나 “○○아”라는 말 대신 “너”로 통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인데 어째서 당신은 ‘김 서방’인 거지?”
그러나 집에서 새는 ‘호구’는 밖에서도 ‘호구’였다. 회사에서는 “어차피 곧 떠날 애 엄마잖아”라며 승진 목록의 가장 뒷줄로 밀려났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밖에라도 나가는 날이면 “팔자 좋은 아줌마가 애들 데리고 커피 마신다”며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어야 했다.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고 했고,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도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묵혀놓은 감정은 언젠가 반드시 터질 시한폭탄이 될 뿐이었다.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워킹맘으로서 겪어야 했던 모든 ‘불편한 순간’들을 그저 지나치지 않기 위해 이승주 작가는 스스로 ‘불편러(불평하는 사람)’가 되기로 했다. 『나 하나만 참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에서 때로는 시원한 욕설로 세상을 고발하고, 때로는 가족에게도 꺼내지 못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솔직하다 못해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벌이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고 말하는 작가는 “착한 척하지 않고 꺼내는 이 이야기가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당신의 삶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한다. 꼴 보기 싫은 사람 떼어놓는 법, 시댁의 언어폭력에 대처하는 법, 아이들만 챙기느라 뒷전인 내 자신을 돌보는 법 등 작가가 생활 속에서 실천해온 방법들을 통해 이제는 참지 않고 살아갈 용기와 지혜를 얻게 된다.
#1. 노키즈존 vs 예스키즈존
아동과의 동반 입장을 거절한다는 뜻의 ‘노키즈존’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노키즈존이 ‘아동 차별’이라며 시정을 권고했고 노키즈존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예스키즈존’을 외치는 매장도 늘고 있다.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키즈존에 찬성하는 측(66.1%)이 반대하는 측(20.0%)보다 세 배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조사 결과). 아동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늘어나며 불편을 겪는 것은 결국 보호자, 즉 엄마들이다.
#2. 2019년에도 여성의 직장 내 역할은 ‘꽃’?
대표적 전문직으로 꼽히는 변호사 업계에서도 여성은 직장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흔히 ‘결혼 적령기’라고 부르는 나이에 들어선 여성 변호사는 출산과 육아가 예고되어 있다는 이유로 취업과 승진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황당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치마를 입어라’는 규제를 당하거나 ‘형사사건은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차별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성 변호사는 로펌의 ‘꽃’으로 취급되며 고객과의 술자리에서 분위기 띄우는 역할을 맡는 경우도 있다. (2019년 8월 12일자 기사)
노키즈존이란 팻말 앞에서 작아지는 이들…
‘엄마’는 왜 ‘맘충’으로 불리는가
지난 수십 년 사이,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위치는 매우 달라졌다. ‘남아 선호’는 옛말이고 젊은 부모들은 ‘딸바보’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이 남학생의 진학률을 앞선 지는 10년도 훌쩍 넘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요즘도 남녀차별이 있다고?” 그러나 이러한 차별은 주로 결혼과 함께 찾아온다. 돈벌이는 반반 부담하고 있지만 남편은 가사를 ‘돕는다’고 말한다. 여성의 본가는 ‘처가’지만 남성의 본가는 ‘시댁’이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이 느낌은 육아를 시작하며 두 배로 커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맘충’이다. 성별에 대한 대부분의 단어는 ‘남성과 여성’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짝을 이룬다. 그런데 맘충은 있지만 ‘파파충’은 없다. 이런 차이는 전국의 ‘맘’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여성이 무례한 일을 저지르면 사람들은 “역시 맘충”이라고 중얼거리며 ‘아이 기르는 여성은 몰상식하다’는 편견을 굳건히 한다. 하지만 같은 일을 남성이 벌이면, 그건 그냥 어느 남성의 일탈이나 잘못으로 끝난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한 사건을 떠올려보자. 사건 속 아버지는 어린 아이에게 ‘노래방 실내 바닥에 소변을 누어도 된다’고 지도했고, 황급히 따라와 말리는 주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만약 이 일이 ‘엄마’에 의해 일어났다면 기사 제목과 댓글창의 반응이 지금과는 어떻게 달랐을지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 하나만 참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의 이승주 작가는 실제로 자신이 아이와 함께 외출했을 때와 남편을 포함해 외출했을 때 주변의 반응이 달라지는 현상을 경험하며 고정관념의 위력을 몸소 체험했다.
집에서는 ‘애 하나 못 길러서’ 죄인이 되고
직장에서는 ‘일 똑바로 안 한다’며 죄인이 된다
직장을 다니는 워킹맘이라면 또 다른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 아이 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체력이 달린다는 친정 부모님에게 사정해서 아이를 맡겨놓았지만, 내 아이인데 주말에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내가 과연 이 아이의 부모가 맞는가” 하는 회의감을 느낀다. 어찌어찌 몇 년 키워서 보육시설이라도 보내면 끝일 줄 알았는데,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갑자기 아프거나 사고가 났다며 걸려오는 전화에 회사 일을 내팽개치고 ‘응급 출동’해야 하는 것 역시 아빠가 아닌 엄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직장 상사는 대놓고 “넌 열외야”라는 시선을 보낸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고, 퇴근 후 술자리에서 친해져보려고 해도 잘 끼워주지 않는다. 승진 심사 시즌이 되면 “아무래도 가장을 먼저 챙겨줘야 맞지”라며 이름을 뺀다. 물론 여기서 가장이란 ‘결혼한 남자’ 혹은 ‘결혼할 남자’를 뜻한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가계에 대한 부담 없이 출근하는 여자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호주제는 사라졌는데, 왜 아직도 직장에서는 남성만이 가장으로 인정받는가.
이 책을 읽다보면 너무 익숙해서 지나쳤던 일상 속 순간들에 대한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왜 ‘립스틱 좀 바르고 다니라’던 직장 상사의 막말 앞에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스스로에게 ‘슈퍼우먼이 되어야 한다’고 주문을 걸고 있었을까. 나는 왜 시댁의 채워지지 않을 기대에 부응하는 며느리가 되려고 발버둥쳤을까. 나는 왜, 나는 왜 나 자신을 내 삶의 중심에 두지 못했을까.
평범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 의문들은 누군가에 의해 입 밖으로 내어질 때 비로소 나 혼자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사실은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며 우리는 위안과 용기를 얻게 된다. 『나 하나만 참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의 이승주 작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어요. 당신은요?” 이 질문에 이번에는 우리가 답변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