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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9년 06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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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520쪽 | 1,125g | 153*200*38mm |
ISBN13 | 9788971999615 |
ISBN10 | 8971999616 |
얼리리더를 위한 3월의 책 : 태극기 & 무궁화 체인 배지 증정
이달의 주목 신간 & 추천 도서 포함 국내도서 3만원 이상 구매 시 '태극기 & 무궁화 체인 배지' 선착순 증정 (포인트 차감)
2024년 03월 01일 ~ 2024년 03월 31일
18명의 예스24 회원이 평가한 평균별점
이 책은 건축가 승효상 선생이 2014년에 만든 건축학교 동숭학당이 떠난 다섯 번째 여행기를 엮은 것이다. 동숭학당(줄여서 동학)은 1년 단위의 강좌로 운영되는 조직이다. 지난해 ‘공간’을 주제로 5년차 동학이 열렸다. 수도원을 탐방하여 수도사들이 일상의 공간을 떠나 굳이 광야나 산속으로 들어가 밀폐된 공간을 찾는 까닭을 살피고 그들의 영성으로 충만한 공간을 탐문하는 기행이었다.
공간 탐방 기행은 공식적으로 2018년 6월 26일부터 시작이지만, 저자는 수도 규칙을 만든 베네딕토에 관한 흔적을 찾기 위해 사흘 먼저 로마에 도착해 움직였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고 먼저 출발한 다섯 회원과 동행했다.
도착 다음 날 수비아코로 이동해 계곡 속 산벼랑에 절박하게 붙어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을 방문했다. 여기서 수도원의 창립자 성 베네딕토에 관한 이야기가 시선을 끈다. 영성이 충만했던 베네딕토는 청년 시절 로마에 유학을 왔지만, 이교도와 퇴폐적 풍경에 휩싸인 도시를 보고 실망하여 깊은 산속을 찾아 홀로 수도를 하게 된다.
세상의 끝인 이곳까지 그의 영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열두 개의 수도 공동체를 세우게 된다. 성 베네딕토는 수도적 삶의 본연을 찾아 새로운 수도원을 세워 이주하면서 수도사와 수도회를 위한 ‘베네딕토 수도 규칙서’ 73장을 만들었다.
▲계곡 속 산벼랑에 절박하게 붙어 있는 수비아코의 베네딕토 수도원
저자는 규칙서 중 제40장 6항이 자못 흥미롭다고 말한다. “술이 수도승에게 결코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우리는 읽고 있지만, 우리 시대의 수도승들에게는 이를 설득할 수 없으므로 적어도 과음하지 않고 약간씩 마시는 것으로 합의하도록 하자.” 난 이 대목에서 성 베넥디토의 인간적인 고뇌가 느껴져 작은 웃음이 나왔다. 그래, 수도사도 사람이었구나 싶다.
수도원 탐방기는 14일간 이어진다. 8일까지는 이탈리아의 로마, 티볼리, 아시시, 제노바, 피렌체를 둘러본 뒤, 프랑스의 르 토로네, 아비뇽, 생피에르, 클뤼니, 롱샹, 바르비종과 파리로 이어진다. 이렇듯 30여 도시의 유서 깊은 수도원 50여 곳의 이야기가 저자의 예리한 통찰과 깊은 안목으로 생생하게 우리 곁을 맴돈다.
제1일 · 서울-로마;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동숭학당·여행의 기술·로마 입성
제2일 · 수비아코-티볼리; 청빈과 순결 그리고 순종 - 베네딕토와 수도 규칙·빌라 아드리아나
제3일 · 로마; 명료함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다 - 불면·판테온
제4일 · 로마-바사노 로마노; 인연 - 로마 국립현대미술관·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산 빈첸초 수도원
제5일 · 아시시-시에나-산 지미냐노; 이미타티오 크리스티 - 수도원의 발생·생 갈렌 수도원의 도면·성 프란체스코·아시시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시에나 대성당·바벨의 탑
제6일 · 산 지미냐노-갈루초-피렌체; 클로이스터와 모나스터리 - 체르토사 델 갈루초·피렌체·투시도의 세계·도나텔로의 마리아
제7일 · 루카-제노바;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 - 산 조반니 바티스타 교회·루카의 지문·산 마르티노 성당의 미로·혼자 사랑·산 펠레그리노 산투아리오 수도원
제8일 · 제노바-로크브륀 카프 마르탱-생 폴 드 방스-빌뇌브 루베; 그렇다, 전해지는 것은 사유뿐이다 - 르 코르뷔지에·카바농·헤테로토피아·지중해
제9일 · 르 토로네-고르드-생 레미 드 프로방스; 진실에 대한 증언 - 르 토로네 수도원·키리에 엘레이손·세낭크 수도원·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루쌍 호텔
제10일 · 아비뇽-그르노블;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 아비뇽 교황청·고해·그르노블
제11일 · 생 피에르 드 샤르트뢰즈-리옹-에브; 완전한 침묵 속에서만 듣는 것이 시작되며, 언어가 사라질 때에만 보는 것이 시작된다 -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불안·쿠튀리에 신부·라 투레트 수도원·마산 성당의 기억
제12일 · 클뤼니-아르케스낭-벨포르; 나는 저승을 믿지 않는다 - 빈 나자로 수도원의 기억·클뤼니 수도원의 폐허·르두의 이상 도시·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산다·명례성지
제13일 · 롱샹-베즐레; 건축은 빛 속에 빚어진 매스의 장엄한 유희 - 프로테스탄트·롱샹 성당·퐁트네 수도원·베즐레 성 마들렌 성당·십자가
제14일 · 바르비종-파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 추방당한 순교자 기념관·빌라도의 물음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125년 로마에 건립한 신전 판테온이 인상적이었다. 황제는 팍스 로마나를 실천하고자 영지 곳곳을 다니며 보편성과 포용성의 가치를 익혔다. 신전 이름 또한 모든 신을 모시도록 ‘판테온’이라고 지었다. 저자는 판테온을 둘러보고 그 구조에 반해 “완벽함, 그 자체”라고 칭송했다.
▲판테온을 지은 건축가가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중용된 다마스쿠스 출신의 아폴로도루스라는 주장도 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기 여러 건축가의 작업이라는 설도 있지만, 누구든지 그는 필경 건축에 관한 모든 것에 능통했음이 틀림없다. 이 건축은 완벽함, 그 자체다.
이 날 저녁 지인과 함께 스페인 계단 부근에서 식사를 했다. 토스카나 와인 중 하나인 피냐넬로 와인을 시켰다. 이때 저자가 남긴 감상이 읽는 맛을 더한다.
그 와인을 시키자 아니나 다를까, 이 식당의 웨이터들도 더욱 친절하게 서비스하는 듯했다. 그런데 식사 후 나온 디저트에 이물질이 들어 있는 것을 손승희 씨(로마에서 유학하며 스테인드글라스 공예를 공부한)가 발견했다. 그녀는 즉시 웨이터를 불러 항의하고 정중한 사과를 받았는데, 활달하여 괄괄하던 마산 여자가 이탈리아 말로 노회한 웨이터를 꼼짝 못 하게 하는 게 너무도 재미있어 속으로 희열까지 느꼈다. 맛있는 와인과 유쾌한 분위기로 기분이 한껏 달았다. 여행에서만 가질 수 있는 재미다. 밤공기 냄새에서 초콜릿 향이 났다. (71쪽)
저자는 여행이라는 것은 스스로 추방당한 자들의 순례라고 말한다. 일상에서 스스로 추방당한 자의 감성이 이처럼 위트 있고 재미지다.
한편 동숭학당은 2017년 그리스 수도원들을 순례했었다. 이중 그리스 북부 칼람바카 지역의 메테오라에 있는 발람 수도원은 세상의 경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14세기 무렵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패퇴를 거듭하자 위협을 느낀 수도사들이 절대 고도의 이곳에 수도원을 짓고 세상과 결별했다. 스스로 추방당한 자들의 성지가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그 정성과 절박함이 놀랍기만 하다.
▲1541년에 지은 메테오라의 발람 수도원. 메테오라에서 두 번째로 큰 이 수도원은 성인들의 수도원으로 불리는데, 접근 수단은 오로지 도르래였다.
책 중간쯤 르 토로네 수도원에서 공지영 작가가 등장한다. 마치 영화의 카메오 한 장면 같다. 공 작가는 마침 『해리』를 탈고하고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작가는 저자에게 『수도원 기행』이란 제목으로 이미 두 권의 책을 낸 바 있지만, 이런 수도원은 처음 온다고 했다. 슈베르트의 〈리타나이〉가 울려 퍼지는 본당 안에서 공지영 작가가 머리를 떨구어 울기 시작했다. 나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련해진다.
▲공지영 작가가 르 토로네 수도원에서 기도하고 있다. 저자는 수도원에서 작가와 우연히 마주쳤다.
여기서 르 토로네 수도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스위스 출신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다. 저자에 따르면 그는 단연코 20세기 최고의 건축가였다. 2016년 그의 작품 중 무려 열일곱 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니 말 다했다. 그는 르 토로네 수도원에서 영감을 얻어 "모든 것을 통틀어 최고의 건축"인 라 투레트 수도원을 설계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르 토로네 수도원을 보고 감동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전업 사진가에 사진을 찍게 하고 그 사진을 모아 『진실의 건축』이란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저자는 책에서 『진실의 건축』과 마주한 감동어린 사연을 소개한다.
저자는 대학 시절 유독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에 매료되었다. 그에게 르 코르뷔지에는 멘토요, 롤 모델이었으리라. 코르뷔지에는 1965년 8월 27일 지중해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그는 마지막 삶을 살았던 로크브륀 마을의 묘지에 묻혔다. 그 묘지는 자신이 설계한 것이었다. 코르뷔지에가 죽기 8년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 묘지를 만들어 아내를 묻었다. 이제 그는 아내 곁에 나란히 묻혀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다.
▲2014년 르 코르뷔지에의 묘역에 참배하고 있는 저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코 끝이 찡해졌다.
예전에 어떤 이가 내게 당신의 건축은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다. 같은 대답을 했다. 절박함. 돌이켜보면 나는 늘 절박했다. (287~288쪽)
10일째 되는 날 찾은 아비뇽 교황청. 1303년 프랑스 필리프 4세가 군대를 동원해 로마 교황을 폐위시키고 프랑스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세웠다. 신성로마제국의 로마 침공이 계속 되면서 일곱 명의 교황들은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1377년까지 아비뇽에 눌러앉았다. 저자는 이곳이 사랑과 평화를 말하는 종교의 산실이라 말하기에는 민망하다고 전한다. 권력과 암투의 밀실 같은 미로, 옥상에는 총포를 쏠 수 있는 장치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아비뇽에 슬픈 사연이 전해져 왔다. 과천 교회에 다니던 어느 청년이 아비뇽을 찾았다가 론강에서 익사했다는 것이다. 동행했던 이들 몇몇은 론강을 찾아 추모 예배를 올렸지만, 저자는 차마 심란함에 나서지 않았다.
▲론 강가에서 추모 예배를 드리는 일행(왼쪽 아래). 멀리 끊어진 생 베네제 다리가 보인다.
일행은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던 생 레미 드 프로방스에서 일박을 하기도 했다. 마을 진입로에는 수 킬로미터에 걸쳐 수령이 몇 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플라타너스가 울창하게 우거져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이때 순례에 동행했던 임옥상 화가가 스케치를 그렸다. 내가 언젠가 보르도에서 샤토 마고를 방문했을 때 이와 비슷한 풍경을 마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임옥상 화가의 스케치
한편 임옥상 화가는 이틀 뒤 라 투레트 수도원에서 잊을 수 없는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저자가 이번 여행 길에서 미뤄온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화가의 소망을 듣고 미리 준비한 것이다. 아, 우리의 삶은 슬픔도, 기쁨도, 모두 하나의 길에서 마주하는 것이런가.
1984년 독일 영화감독 필립 그로닝은 프랑스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장에게 편지 1통을 보냈다. 수도원을 다큐멘타리 영화로 만들고 싶으니 촬영을 허락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감독은 원장의 답장을 16년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아직도 수도원을 찍을 의사가 있다면 와도 좋다는 것이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혼자 오라는 것이다.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전경
2002년 3월 감독은 홀로 촬영 도구를 챙겨 수도원에 갔고 두 번에 걸쳐 6개월을 머물며 다큐를 찍었다. 필름을 편집하는 데 다시 2년 5개월이 걸려서 2005년에야 비로소 영화는 〈위대한 침묵〉이라는 타이틀로 개봉됐고,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 상영되었다.
▲독일 감독 필립 그로닝이 수 년에 걸쳐 찍은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이야기, 〈위대한 침묵〉
“완전한 침묵 속에서만 듣는 것이 시작되며, 언어가 사라질 때에만 보는 것이 시작된다.” (338쪽)
어쩌면 저자와 함께 떠난 장장 14일의 여정이 “묵상(默想)”인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가 아닐까. 폴 발레리가 “명료함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듯이 수도원이 깊은 계곡과 산속에 깃든 이유도 세속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으리라. 수도사들의 생활도 검박하기 그지없었다.
신수정 문학평론가는 이 책을 두고 “자신의 직업에 깃든 숙명, 그 불가항력에 대한 순종과 회의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의 맨얼굴을 대면할 때 누가 전율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극찬했다.
여담 하나. 지난 14일은 고 이태석 신부님이 선종하신 지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 날을 맞아 부산 남부민동 생가 근처에 ‘이태석신부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나는 16일 부산 출장길에 기념관을 잠시 찾았다. 3층에 오르니 환하게 맞는 신부님의 모습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태석신부기념관 3층에서 방문객을 맞는 신부님의 모습
이번 기념관 개관으로 2014년에 복원된 생가와 2017년 들어선 기념품 판매점에 이어 톤즈 문화공원 조성 사업이 마무리에 들어섰다. 올해 7월 이곳에 녹지 공원이 마련되면 톤즈 문화공원은 완성된다고 한다. 기념관은 ‘섬김’ ‘기쁨’ ‘나눔’으로 정의되는 신부님의 3대 정신을 받들어 해외선교지원, 청소년 교육과 지역 문화사업에 나설 계획이다.
나는 기념관 한 켠에 마련된 CD와 이어폰으로 신부님이 작사 작곡했다는 ‘묵상’을 들을 수 있었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나는 지상(紙上)으로 떠난 수도원 순례를 마치며 깊은 울림에 빠져들었다. 삶의 의미와 내가 찾는 진리의 뜻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명료함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다〃
(p.60)
지난 두 세달 동안 ‘사진’ ‘건축’ ‘여행’에 대한 책들을 몇 권 읽었다.
나로선 자주 접하지 않는 분야였는데 좋은 책들을 읽어서 신선한 자극을 받았었다.
그 책들이 워밍 업이었을까.
승효상의 〈묵상〉 에세이집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았던 건 앞서 읽은 독서 덕분이었다.
2주간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수도원을 순례한 기행집.
<묵상>에는 전문적인 기술로 찍은 사진들, 이탈리아와 프랑스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
여행 체험이 담겨있다.
어느 하나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 있는 분야들이고 이에 걸맞게 책의 두께도 두터웠다.
주제가 주는 묵직함, 물리적인 부피에도 불구하고 책이 술술 읽혔다.
그건 전적으로 승효상 저자의 편안한 글 덕분이었다.
사색과 묵상을 바탕으로 한 글이지만 동시에 신변잡기적인 소소함도 놓치지 않는 문장들이다.
중세시대에 지어진 12곳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묵상>은 대성당들, 기독교 유적지, 박물관을 답사하였다.
저자를 포함해 총 26명의 知音과 친구들이 이 순례 여행에 함께 했다.
이름 정도만 들어본 수도원들,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접해본 사적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기독교 성지들이 등장한다.
승효상은 여행에 대해서 확고한 자신만의 소신을 갖고 있었다. 여행은 진리를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것. 지식과 배움을 통해 알고 있던 것을 현장을 직접 가봄으로써 재정립하는 것이 여행이다. 여기에는 ‘환상’을 깨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승효상은 알랭 드 보통의 여행에 대한 정의를 반박하면서, 여행의 목적은 현실과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것이라고 거침없이 피력한다.
여행으로써 진리를 획득하고 이를 통해서 현실에서 살아갈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승효상은 수도원 순례 기행을 이미 여러 차례 한 바 있었다. 동료들과 하는 이번 여행을 시작하면서 그래서 그의 우선 목표는 ‘뻔하고 진부하고 똑같은’ 경험을 피하자는 것.
어느날 불현듯 떠나는 여행도 장점이 있지만, 작가 생각에 여행 특히 순례는 사전 준비와 학습을 충분히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독자는 로마에서 시작하여 프랑스를 횡단하고, 파리 시내에서 끝마치는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파리에서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바로 뒤에 있는 「추방당한 순교자 기념관」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이탈리아·프랑스의 전역에 있는 수도원을 방문하고, 그리스도교와 연관된 장소들을 방문한 14일의 여정.
책은 무겁지만 눈을 반짝이며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14일인데 책이 두꺼워서 의아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사진으로 지면을 메꾸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내 곧 알게 된다.
기한에 상관없이 저자와 일행들이 얼마나 준비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는지를.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절실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떠난 여정이기에 묵상을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한 생각과 감정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 것 같다.
예전에 떠났던 여행에서 그렇게 영성을 체험하진 못했다.
성당, 종교 유적지는 많았지만 거룩함이나 경건함을 별반 느끼지 못했었다.
이번 책으로 얻은 영감들을 갖고 향한다면 전과는 다른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이번 읽기에서 제일 감명깊은 교회, 예배당을 두 개 꼽으라면
하나는 성 조반니 바티스타 교회, 나머지는 경북 경산시의 무학로 교회였다.
두곳 모두 ‘교회’하면 떠올리는 ‘종교성’과는 거리가 있는 건축물이어서 였다.
성 조반니 바티스타 교회는 얼핏 보면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재료가 절반이 투박한 벽돌이고 디자인은 전위적이고 파격적이다.
헌데 들여다볼수록 절실함이 느껴져 신기하고 신비로왔다.
신을 향한 영성에는, 전투와 같은 격렬함도 있는데 이를 표현하는 듯해서 충격적이었다.
무학로교회는 그 소박함으로 마음이 뭉클했다. 흔한 첨탑도 있지 않으며 십자가가 벽에 작은 형태로 걸려 있다. 높은 곳, 도드라지는 모양으로 자리한 기존의 십자가들과 차별화된다.
작고 평화로운 예배당 내부는 세련된 교회에 익숙한 나에게 부끄러움을 던져 주었다.
적어도 두서너번은 더 읽고 싶은 책이다.
아무런 제약 없는 곳에서, 기회가 된다면 수도원에서 천천히 마주해보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책 중에서》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에 내걸린 푯말,
‘오라 에 라보라 Ora Et Labora’
즉 찬양하고 노동하라.
수도사적 삶의 형태였다. (50쪽)
진리라는 말은 100번, 지혜는 200번이나 성경에 등장한다.
진리를 믿으면 얻는 것이 자유이니 성경의 요한복음 중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와 같은 말이다. 진리가 무엇일까.
(36쪽)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가파르고 좁았다. 지금에 와서 잘 정비한 길이 이 정도인데 그 옛날 6세기 초엽에 이 길은 그냥 벼랑이었을 게다. 세상의 끝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신을 찾아 끝까지 간 흔적이다.
세상과 완전히 결별한 삶을 살고자 한 절박함 아니면 도무지 이 벼랑에 발을 디딜 수 없다.
험하고도 험한 이곳을 굳이 찾은 베네딕토의 절박함은 무엇 때문일까
(47쪽)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
죽은 자가 머무는 곳이 아니라 그들을 기억하는 우리의 기억이 머무는 곳.
세상 모든 인연을 끊어 얻은 평화. 그래서 그런가, 어둠 속 미로의 길을 안내받아 걷는 내내 긴장보다는 고요와 평화가 흘렀다.
(84쪽)
성경은 원래 이스라엘 고유어인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썼는데 히브리어로 된 성경에는 요셉의 직업이 텍톤 tekton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바로 건축을 뜻하는 아키텍처의 ‘텍트 tect’
와 같은 어원입니다.
이게 영어로 번역이 되면서 카펜터 carpenter가 되었는데 우리말로 목수로 변했습니다.
(99쪽)
라파엘로가 그린 수도사.
체념과 고독, 그리고 그리움을 그리면 이 표정 아닐까.
(104쪽)
새로움에 반응하고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는 건축가가 경계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 소임을 파기하는 일이니, 외로움과 두려움은 건축가에게 어쩔 수 없는 친구일 수밖에 없다.
(215쪽)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인 석재. 여기서 석재는 언제나 새로우며 늘 다르다.
빛과 그림자는 이 건축이 지닌 진실, 고요, 강인함을 크게 외친다. 어떤 것도 더할 수 없다.
조잡한 이 콘크리트의 시대에, 이 엄청난 만남을 반기고 축복하며 인사하자.
(265쪽)
한 가지 당부가 있습니다. 침묵입니다. 이곳을 떠날 때까지 주어진 시간을 침묵 속에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347쪽)
채플을 이탈리아어로는 카펠라 cappella 라고 하지요. 그래서 아카펠라라고 하면 영어로
‘앳 채플 at chapel’이니까 ‘채플에서’라는 뜻입니다. 이게 남성 수도사들이 성소에서 부르는 성가라는 형식으로 이해되면서 무반주 남성 중창을 뜻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채플의 어원은 캡 cap입니다. 캡틴 captain의 어원이며 우두머리를 뜻합니다.
(435쪽)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개신교인이 열여섯명이라는 것은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민족종교라는 천도교인 열다섯명, 불교계 두명이 나머지를 채웠다. 그렇게 부정과 불의와 억압에 맞서 저항한 게 한국 프로테스탄트 초기 모습이었고 바로 개신교의 본질적 자세였다.
오늘날 ‘개독교’라고 놀림과 비난, 질책을 당하며 마치 ‘수구꼴통’ 보수의 대명사처럼 되거나
종교사업장같이 된 한국의 개신교는 돌이켜보아야 한다. 다시 대참회를 해야 하지 않을까
(440쪽)
공간은 건축의 본질이며 건축은 우리 삶을 구축하고 지속시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463쪽)
순례자들은 야고보의 유해가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6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걷고자 떠난다. 오늘날에도 산티아고로 떠나는 이들의 숫자가 보통이 아니다. 파울로 코엘료가 쓴 「순례자」(1987)의 영향이 크다고 하지만 이제는 그의 영향을 넘어 삶의 한 방법이 되었다.
전례없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현대인이 떠나는 순례길. 지나온 삶을 성찰하고자, 그래서 새로운 삶을 찾고자 떠난다고 하는 그들이 그 끝에서 공통적으로 얻는 건, 아마도 평화일 게다.
(484쪽)
아름답다. 무수히 많은 이의 발자국을 견뎌냈을 길 표면은 빛났고 발걸음 소리를 내는 게 미안해서 나는 몸을 띄워 걸었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비올레르뒤크의 성당 정면은 조명에 의해 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주위는 사위어 고요가 내려앉았는데, 밤바람은 비단결처럼 흘러나간다. 계단 끝에 엎드렸다.
“저의 헛된 욕망과 질투, 오만과 분노와 나태를 당신의 십자가 위에 못 박아 죽게 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리베라 메 Libera me, 리베라 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4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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