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의 시대, 다시 진보를 묻는다!
위기에 빠진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10개의 이정표
진보 혹은 좌파는 위기인가· 세계적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다. 2007년 이후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 위기에 호응하듯, 남미에서 시작된 좌파의 부상은 유럽까지 번지고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자본주의의 심장부라 할 월스트리트를 뒤흔들었던 점거 운동도 위기의 징후이자 진보·좌파적 대안의 요청이라는 점에서는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불행히도 한국의 진보 혹은 좌파는 위기의 상황처럼 ‘보인다’. 어느 나라보다도 급속도로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도 진보가 뚜렷한 대안 혹은 운동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으며, 자유주의적 세력과 기존 진보정당의 분파들이 모여 새로운 진보를 표방했던 한 정당의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태와 뒤이은 내분은 많은 이들에게 ‘진보’에 대한 실망과 염증을 느끼게 했다.
『지금 여기의 진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보’의 필요성이 요청되는 시점이지만, 정작 진보의 움직임 자체는 지지부진해 보이는 상황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자 대안의 제시이다. 각기 다른 입장에 서서 사회에 대해 발언해온 10명의 저자들(심보선, 장석준, 박상훈, 홍기빈, 이택광, 하종강, 서동진, 엄기호, 박경신, 홍세화)은 정당 정치, 저항 운동, 경제, 환경, 노동, 교육, 문화, 예술, 표현의 자유 등등 다양한 주제와 연관하여 진보에 관한 비판과 자기 반성을, 그리고 새로운 대안에 대한 사유를 펼친다.
또 다른 주목점은 글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시점의 차이이다. 저자들은 각자 맡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를 통해 진보라는 기획 전반에 대한 각자의 관점을 드러낸다. 진보의 중심이 정책적 개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그 바깥에서 새로운 좌파의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주장이 부딪치며, 더 많은 자유주의에 대한 요청은 자유주의와 진보의 공존이 실패한 프로젝트였다는 반성과 부딪친다. 이런 어긋나고 충돌하는 관점은 독자들이 기존에 지니고 있던 진보에 대한 생각, 그리고 나아가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생각을 되돌아보게 한다. 즉 진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논쟁적 시각을 통해 진보는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진보적 정책의 길, 혹은 그 너머에 대해
박상훈은 진보 세력이 저항 운동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에 큰 기여를 했지만, 의회에 들어와 다른 정당과의 경쟁을 통해 정책을 만들어나가는 데는 무능력했다고 지적한다. 즉 정치는 진보보다 넓은 세계이며, 민주주의가 일정한 성과를 이룬 지금은 운동이 아닌 정책 경쟁을 통해 진보적 가치를 실현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홍기빈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진보의 정책적 무능에 대해 비판한다. 진보 담론이 철학과 문화 비판 등의 인문학으로 이동해버리면서, 진보가 경제 문제에 대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할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는 다시 경제적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 대안으로서 화폐가 지배하는 ‘돈벌이 경제학’을 넘어서 행복과 좋은 삶을 목적으로 하는 ‘살림살이 경제학’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제도권 정치에만 지나치게 천착하는 시각이라는 비판 역시 제시된다. 심보선은 희망버스와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비롯한 새로운 연대·저항 운동의 ‘거리 정치의 에너지’ 속에서 ‘신신좌파의 정치’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불행하고 불안한 이들이 광범한 정서적 연대에 기초하여 삶의 기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에서 대안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홍세화의 비판은 좀 더 직접적이다. 그는 진보가 정당 정치의 주체로서 정책을 통해 노동 부문의 이해를 대변해야 한다는 의회주의자들의 주문이 자본주의의 모든 단계에 적용될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복지 사회의 기반이 붕괴되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가 의회 정치에만 매달리는 것이 억압받는 자들의 요구들을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는다.
자유주의는 진보의 약인가, 독인가·
또 하나의 쟁점은 ‘자유주의’에 대한 접근이다. 박경신은 진보가 진보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권리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는 전혀 다르며,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만큼이나 더 많은 자유주의에 대한 요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평등’을 통한 자유를 추구하는 진정한 자유주의의 확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홍세화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 구도가 자유화 개혁과 사회적 진보를 혼돈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한다.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이 구도에 들어서게 되면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과 긴장은 시야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유주의 세력이 집권 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본의 자유’를 확대해나갔으며, 나아가 자본과 함께 노동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에 나서는 길을 선택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리고 진보 세력 역시 이 틀에 매몰되어왔다고 말하며, 이를 넘어 ‘배제된 자들의 민주주의’를 재구성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이택광이 말하는 “더 많고 더 시끄러운 민주주의”, “소비자 민주주의에서 벗어나서 자본을 소외시키는 삶의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길, 하종강이 꿈꾸는 노동자 권리와 노동 운동에 대한 인식이 올바로 자리잡는 사회와도 공명한다.
진보는 어떻게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진보적 논의의 중심에 서온 사회적 쟁점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 역시 주목할 만하다.
장석준은 우리에게 닥친 에너지 문제와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오늘날 우리가 지닌 생산력을 노동과 사회, 생명과 지구의 관점에서 철저히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를 통해 대안으로서 '녹색사회주의'를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녹색사회주의는 단순히 사회주의와 환경 운동의 결합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이 아니라 문화가 삶의 지배적 영역이 되고,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 그 중심 가치가 되는 사회의 비전이다.
엄기호는 오늘날 한국의 학교가 ‘수용소’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의 몸에 폭력을 가하고 집단적으로 훈육한다는 의미(수용소1)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비생명을 구분하는 생명권력의 공간(수용소2)으로서, 그리고 나아가 이런 구분마저 넘어 그저 학생들을 아무 목적 없이 가둬놓고 죽지만 않으면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공간(수용소3)으로서의 수용소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 교육이 ‘수용소1’에 대해서는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지만, ‘수용소 2와 3’에 대해서는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능하다고 비판한다.
서동진은 니콜라 부리오의 ‘관계미학’과 그에 대한 비판을 매개로 정치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문화와 경제의 관계와 ‘미적인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논하며, 이것이 어떻게 급진적인 정치에 대한 사유와 맞닿아 있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나아가 “예술에서 새로운 정치를 발굴할 수 없다면 잠시 예술을 잊어도 좋을 것”이라는 도발적인 제안을 제시한다.
왜 지금 여기의 진보인가·
심보선이나 홍세화의 말처럼 어느새 우리는 ‘진보’, ‘좌파’ 같은 말을 일상적으로 두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면서 그 말은 급진성을 잃고 심지어 "그 실체가 공허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이는 위기의 시대에 답하지 못하는 진보의 무능을 드러내는 한 징후일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의 진보』에 담긴 논쟁적이고 때로 격렬히 대립하는 10편의 글들은 오늘날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기 위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진보 혹은 좌파의 기획을 재구성하기 위한 다양한 ‘질문’을 위한 글들에 가깝다. 그리고 진보는 본디 기존의 세계와 가치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질문’으로 시작하기에, 이 글들은 그 자체로 진정 ‘새로운 진보’를 구성하기 위한 기획의 한 주춧돌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