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 가는 나라, 분연히 일어서다
대한제국 광무 8년(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한반도를 군사기지화한 데 이어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에 강제로 조인케 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었다. 무정(武亭)은 이렇게 나라가 급속히 기울어 가던 그해 5월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병희(金炳禧)이나, 중국에서 군관학교에 다니던 때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상관이 군인을 뜻하는 ‘무(武)’ 자를 넣어 지어 준 이름이 무정이라 전한다.
경성에서 나남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불과 15살의 나이로 참가했다. 다음 해 이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중앙고보로 진학했으나 1922년 3월에 퇴학했다. 일제 총독부 자료는 그 이유를 ‘병’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병’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3·1운동 이후 학생운동이 활성화되고 있어 1921년 7월 중앙고보를 비롯한 7개 학교의 교장들이 회의를 열고 전문학교 학생 이상만 학생운동을 허용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고보 학생들은 운동 조직에서 탈퇴해야 했으므로 무정이 학교와의 갈등 때문에 퇴학한 것으로 보인다. 퇴학한 그다음 달에 바로 경성기독청년회관에 입학한 것으로 미루어 추정해 볼 수 있다. 1923년 4월 경성기독청년회관을 졸업하고 경성여자강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사회주의 활동에 뛰어들다
무정은 경성기독청년회관 졸업 전인 1923년 2월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1월에 출범한 서울청년회는 초기에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이 모두 참여했으나 1922년 4월 민족주의 계열을 축출하고 사회주의 단체로 개편되었는데, 무정이 가입한 시기는 사회주의화된 이후였다.
1923년 3월 서울청년회가 주도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무정도 참여했는데 사회주의 성격이 강해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20여 명이 구속되었다. 또한 무정은 현칠종 등과 함께 자산층 옹호에만 주력한다는 이유로 ‘조선청년연합회’를 성토하는 강연을 하고 ‘동아일보’ 불매 운동도 전개했는데, 양측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여 관련자들이 일제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강택진, 최창익 등과는 노동자와 농민의 단결을 도모하고 계급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조선노농대회’를 준비했으나, 대회가 열리기 전 10월 5일 체포되었다. 대회가 열리기 전이었기 때문에 큰 처벌 없이 그달 말 풀려났다. 무정은 나중에(1937년) 중국 중앙당안관에 보관된 팔로군의 ‘간부이력표’에 “조선에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참가하여 세 번 옥살이를 했다“고 썼는데, 위의 세 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여 약 8개월 동안 누구보다 정열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무정은 조선노농대회 준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중국공산당원으로 독립운동에 전력을 쏟다
만주를 거쳐 베이징에 들어간 무정은 바오딩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는 제1차 국공합작 시기여서 국민당군으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군벌 간의 다툼에 회의를 느끼고 우한으로 가 본격적으로 공산당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장제스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상하이로 옮겨 갔다.
상하이로 이동한 무정은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 지부’와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파난지부 소속 조선인 지부’에 소속되어 활약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무정은 한인 세력을 규합해 나가는 한편, 중국과 한국, 대만 등의 연대를 통한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중국관내 독립운동단체들의 좌우파 연합을 위한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가 구성되어 있었는데, 1928년 내분을 겪으며 무너지기 시작하여, 1929년에는 ‘한국독립유일당 상해 촉성회’도 해체되었다. 이후 좌파 세력은 ‘유호(상하이) 한국독립운동자 동맹’을 결성했는데 무정도 이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그러던 중 중국공산당원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무정도 동지들과 함께 ‘한인규찰대’를 조직하여 폭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2개월의 옥살이를 한 후 장제스 세력의 테러를 피해 홍콩으로 몸을 숨겼다.
중공군 장교로 대장정에 참여하다
잠시 홍콩으로 도피했던 무정은 장시성(江西省)의 중공소비에트 지역으로 들어가 활발하게 활동하며 토지혁명 투쟁에 참가하고 상하이에서 열린 소비에트 지역대표대회에도 참가했다. 대회 행사 중에 홍군 제5군 군장이던 펑더화이(彭德懷)를 만나게 되고, 홍군에 입대했다. 무정은 홍군이 영·미·일 연합함대와 싸운 웨저우 전투에서 맹활약하여 포병 지휘관으로 승승장구하며 포병 연대장에 오르고, 포병과 공병의 실전교육을 위한 홍군특과학교 교장까지 지내게 되었다.
1934년 장시소비에트의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되는데 무정도 참여하여 2만 5천 리 행군을 함께했다. 1년이 걸린 대장정의 와중에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무정은 포병단을 이끌고 참전해 전과를 올리며 중국공산당 수뇌부의 신임을 쌓아 갔다. 험난한 대장정을 끝내고 옌안(延安)에 도착한 후 무정은 모처럼의 휴식기를 가지며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을 다녔는데 이때 공산주의 이론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사상을 깊이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전과 이론을 두루 학습한 무정은 홍군의 개편으로 신설된 팔로군의 작전과장을 거쳐 포병단장에 오르는 등 중국공산당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며 주더(朱德), 펑더화이,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공산당 고위층의 신임을 얻고 친교를 맺게 되었다. 특히 펑더화이는 중매에 나서 중국인 텅치(藤綺)와 무정을 결혼시킬 정도로 매우 가까웠다.
조선의용군 총사령으로 항일투쟁을 지휘하다
중국공산당에서 활약하면서도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활동을 쉬지 않던 무정은 중국공산당과 긴밀히 협의하여 펑더화이의 동의를 얻어내 1941년 산시성(山西省) 타이항산(太行山)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구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그다음 해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선독립동맹’, 충칭(重慶)과 뤄양(洛陽) 등지에서 이동해 온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했다. 독립동맹은 반일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의 참여를 꾀했으며, 독립동맹의 군사 조직 격인 조선의용군의 총사령직은 무정이 맡았다.
조선의용군은 일본군 진지에 접근해 일본군의 전투 의욕을 떨어뜨리는 선전 활동과 적구 조직 공작 활동을 주로 하고,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하기도 했다. 일제에 대한 무력투쟁을 하면서도 청년독립군 양성을 위해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세워 조선혁명사와 사회발전사, 군사학 등을 중점적으로 교육했다. 무정이 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처럼 무정은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으로서 무력투쟁을 지휘하고 조선 청년들의 교육을 실시하며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숙청되다
해방 후 북한에 들어온 무정은 초기에 주민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고 북한군 창설 과정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런 만큼 김일성 세력의 견제는 심했다. 소련 군정도 김일성을 적극 지원하면서 무정을 홀대하여 무정은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연안파도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약했는데, 이러한 틈은 김일성에 의해 더욱 조장되기도 했다. 즉 김일성은 무정의 부하였던 인물로 하여금 무정을 비판하도록 시키기도 하고, 무정보다 높은 자리에 기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무정은 점차 지지 기반을 잃어가면서 당내에서의 권력도 상실해 갔다.
1950년 6·25전쟁의 남침 준비 단계에서는 포병 준비 작업을 진행했으나 이전의 계획 작성 단계나 실제로 공격이 이뤄진 때에는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울 함락 작전에 실패한 제2군단장의 후임으로 전선에 등장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10월 13일 김일성은 무정을 평양방어사령부의 사령관에 앉혔으나, 무정은 평양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2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 일명 별오리회의에서 숙청되었다. 숙청 이유는 평양 방어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후퇴했다는 것과 후퇴 과정에서 법적 절차 없이 사람을 총살하며 무법천지의 군벌주의적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황은 평양을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고, 해당자에 대한 즉결처분의 명령이 하달되어 있었다. 결국 무정은 김일성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며 대중적 인기가 높은 연안파의 고위 지도자였다는 것이 숙청의 실제 이유였다. 무정은 뛰어난 무인(武人)이었지만 정치가로서의 수완이나 지도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정의 생각, 그리고 노선은…
무정은 청년기에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하여 중국공산당 간부로 활동했으나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공산주의 실현보다 민족의 독립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이를 위해 모든 세력, 모든 계급이 하나로 뭉치고 국제사회와의 연대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정서적으로는 민중 지향적이었으며, 절대적 평등주의를 주장했다. 해방 후의 남북 분단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세력이 연대해 조속히 남과 북이 민족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남북의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전쟁을 피하면서 대화와 평화의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무정 연구에서 배우다
무정의 활동을 따라가다 보면 일제의 침략에 대응한 다양한 국내 세력의 동향과 중국에서의 독립 운동 정황을 파악할 수 있으며, 당시의 국제정세도 엿보인다. 특히 해방 후부터 6·25전쟁기까지 북한에서 펼쳐진 복잡한 정치 세력의 부침을 통해 북한 체제 형성 과정을 파악하고, 지금의 북한 체제와 정치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무정의 활동은 중국공산당과의 긴밀한 관계를 떼어놓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중국과 깊은 유대를 맺은 사실, 소련의 북한 정치인에 대한 분석 및 평가와 김일성에 대한 지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외부 세력이 북한 체제 형성 과정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고, 중국·소련과의 숙연(宿緣)이 오늘까지 어떻게 이어져 오고 있는지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나아가 향후를 전망하는 데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