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곱 명의 젊은 개성들에 대해서 한국문학은 마땅히 경의와 기대를 표해야 한다는 데 나는 동의했다.”
손보미 「폭우」_ 이 기이하고 매혹적인 작품은 말과 침묵 사이의 틈새로 흐린 욕망의 풍경을 언뜻언뜻 드러낸다. 언어가 말을 더듬을 때까지 벼랑으로 몰고 가며 태연하게 연출하는 이 잔잔하고 불안한 한 편의 연극은 그 어떤 단정적인 해석도 거부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그 잔상이 길게 남는다. _김화영(불문학자, 문학평론가)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간간이 천둥 번개가 치고 있었다. 미스터 장은 자신과 상관없는 이 세상의 불행들, 이를테면 갑자기 불어난 물 때문에 떠내려가는 사람들과 부서진 간판의 파편이나 나무 때문에 다친 사람들, 혹은 들이친 물 때문에 집을 잃거나, 자동차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했다. 또한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 범죄와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 병으로 쓸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원치 않은 아이를 낳고 있는 여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리고 폭우 속에서 슬픔과 분노 때문에 멈춰버린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문학동네』 2011년 가을)
김미월, 「프라자 호텔」_ 무심한 듯 이야기를 이끄는 은근한 힘이 빛난다. 젊음을 막 상실한 사람이 돌아보는 젊음의 한때와 현재가, 시청 앞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프라자 호텔, 시위대에 쫓기던 젊은 날과 개혁적이던 대통령의 죽음 등으로 노련하게 중첩된다. _이혜경(소설가)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조금 전에 우리가 최루탄 연기 가득한 명동 거리를 뛰어다녔던 것이 아주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하늘에는 별도 없고 땅에는 꽃도 없었지만 나는 그녀와 함께 걷는 이 밤길이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무살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고국을 찾았어. 친부모를 만나러 온 거지. 그래서 프라자 호텔에 묵어. 서울 한복판에 있으니까 상징적이잖아. 시청 바로 앞이기도 하고 포인트제로도 가깝고. 아무튼 그래서 부모님을 만나기로 한 전날 밤, 호텔에서 고국의 수도 야경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기는 거야.”
윤서는 말끝에 하늘을 쳐다보았다.(『서울, 밤의 산책자들』, 강, 2011)
황정은, 「양산 펴기」_ 일당을 받고 양산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의 하루가 담백하게 그려져 있다. 우리 시대의 여러 정치사회적 상황과 풍속이 이 짧은 단편 안에 군더더기 없이 담겨 있다. 우리 시대의 ‘겨우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을 엿보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_남진우(시인, 문학평론가)
양산 속에서 멍하니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 쪽엔 오전보다도 사람이 늘어서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로로 내려와 있었다. 나오라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데 불러내려는 사람은 늘고 깃발도 늘고 함성은 높아서 금방이라도 무슨 일인가 벌어질 듯했다. 어느 틈엔가 녹색 버스도 늘어서 더 많은 경찰들이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밀짚모자를 쓴 남자가 팻말을 목에 걸고 이쪽을 향해 서 있었다. 팻말에 적힌 글자가 너무 조밀하고 두꺼워서 유달리 크고 네모지게 적힌 생존이라는 단어 말고는 이쪽에서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상당한 시간 목에 걸고 다닌 듯 그의 생존이 너덜너덜했다.(『서울, 밤의 산책자들』, 강, 2011)
김이설, 「부고」_ 각자가 지닌 상처는 때로 교집합을 이루기도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짐승들처럼 때로 온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결국 혼자 감당해야하는 것임을 다시금 환기시킨다. _이혜경(소설가)
“너는 늘 혼자 방에서 책만 읽는 애였다. 밥 먹으라고 불러도 도통 단번에 나오질 않았지. 그래서 네가 책을 만들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줄 알았어. 그런데 거짓말을 하면서 살 줄은 몰랐다. 나는 그게 속상해. 그뢷게 살지 마. 비밀을 만드는 사람은 결국 외롭게 되어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가 다시 냉이를 찾아 자리를 옮겼다. 엄마의 등은 동그랗고 작았다.
“너는 강한 아이야. 속은 문드러졌겠지만, 적어도 허투루 사는 애는 아니지. 그게 늘 고마웠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미안했고. 그걸 꼭 말하고 싶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연신 냉이 이야기를 했다. 차 안에는 흙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흙냄새 때문이었는지, 멀미를 하지 않았다.(『창작과비평』, 2011년 여름)
정소현, 「너를 닮은 사람」_ 인간이 얼마나 자기기만으로 얼룩져 있는 존재인지를 이 작품은 독특한 화자 설정과 반전의 묘미를 통해 보여준다. 한 인간 속에 숨어 있는 죄의식을 끈질기게 파고드는 이런 집중력은 우리 문학에선 흔치 않은 것이다. _남진우(시인, 문학평론가)
난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배우려는 당신이 젊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나이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앞으로도 절대 철들지 않을 거라고 말했죠? 내가 그때의 당신보다 나이를 더 먹고 보니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요. 철드는 게 나쁘거나 대단한 게 아니에요. 자신이 살아 온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당신은 그냥 자기 연민에 빠진 철부지였고 당신 뜻대로 쉰이 넘은 지금까지 여전히 철이 안 든 것 같네요. 나는 당신을 경멸합니다.
너무 정중한 말투라 얼핏 들으면 당신을 존경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고도 화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그녀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현대문학』, 2011년 1월)
김성중, 「국경시장」_ 그는 고백과 잠언에 기대어 그럴듯한 대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매력적인 알레고리를 창조해 물음 자체를 달리 묻는 길을 택했다. 이것이 더 세련된 방식이라는 점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이 작가는 올해로 3회를 맞는 젊은작가상을 세 번 받았다. 이 작가에게 이야기를 설계하는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빛나는 거리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는 그저 술과 밤에 취한 어리석은 방랑객일까? 지구 한복판을 통과해 반대쪽으로 나온 사람처럼 모든 것이 낯설었다. 간신히 국경시장에서 탈출한 나는 망연히 주저앉아 도리어 지난밤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기억을 너무 많이 팔아버린 내게 그리워 할 것이라고는 그곳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인가?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에 아직 국경시장의 모습이 남아 있으니까. 소경이 자기 어둠 속에서 만들어낸 풍경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나는 눈을 감은 채 풀숲에 누워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어제와 비슷한 달이 내 몸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지러진 달은 나를 국경시장에 데려가주지 않았다.(『30, thirty』, 열림원, 2011)
이영훈,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_ 무거움을 가볍게 만드는 법, 사소함을 구조적 부조리로 연결시키는 법, 이 두 가지 솜씨만으로도 즐거움을 주었다. _은희경(소설가)
복통이 가시자 차츰 생각이 정리됐고, 새삼스레 짜증이 밀려왔다. 생각해보면 대수롭지 않은 날이 될 수도 있었다. 그저 그녀와 데이트하는 날, 그리고 잘하면 교제를 시작하는 날이 됐을 터였다. 그저 우연히 G20 세계정상회의 일정과 장소가 겹쳤다는 것만으로 사람이 이렇게 곤란해질 수 있는 건가? 아케이드가 제대로 영업을 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자. 대체 화장실은 왜 막아놓은 것인가? 테러 방지 대책의 일환으로? 하기야 세상 어딘가에는 테러를 저지르기 전에 대변을 먼저 보는 테러범이 있을 수도 있겠지. 혹은 화장실이 폭탄의 온상이라 미리 폐쇄한 것일 수도. 그렇더라도 사람이 살 수는 있게 해야 할 것 아닌가. 세계 정상들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는 건가?(『문학동네』, 2011년 봄)